한기연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숨이 찼다. 한기연은 높고, 둘희는 낮아서 두 사람이 같은 눈높이에 있으려면 둘희가 올라서야 했다.
한기연이 추락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 시절 둘희가 올라갈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도 한기연이 원래의 위치에서 추락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해 이른봄부터 답글과 또다른 답글로 이어지던 두 사람의 비밀 대화는 여름이 되어서야 구체적인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친구와 지방을 여행중이던 한기연은 휴가철을 앞두고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이제 산이나 바다가 아닌 도시가 한가로워질 시간이라고 덧붙이면서. 한기연은 괜찮으면 만나서 차를 마시자며 친구의 작업실 주소를 알려줬다. 8월이 시작되는 첫날, 둘희는 한기연이 말한 ‘페피’라는 곳의 이름을 되뇌며 도심의 한 골목에 들어섰다.
이발소 간판이 있을 거예요. 그걸 찾는 게 빨라요.
둘희는 한기연이 말해준 이발소 간판을 떠올리며 무더운 거리를 걸었다. 길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간판에는 ‘빠우, 판금, 정밀’ 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해가 쨍한 맑은 여름날이었지만, 좁은 골목은 붉고 어두침침했으며 매캐한 철 냄새가 풍겼다. 가게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고, 셔터 문에 붙은 메모지에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휴가를 다녀온다는 내용의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몇몇 공업소 안에선 쇠붙이를 때리고 용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희는 좁은 사잇길을 오가며 머뭇거렸다. 한기연이 말해준 주소지까지 찾아오긴 했으나 이발소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웅덩이가 고인 골목으로 짐을 가득 실은 지게차와 오토바이가 간간이 지나갔다. 둘희는 그중 누구에게도 길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가게들과 그 안의 거대한 고철 기계들이 낯설고 거북했다.
전화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할까.
둘희는 한 공업소의 초록색 천막 지붕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연락처도 모르는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여기면서도, 어쩌면 앞으로 그렇게 부탁할 수 있는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웃음이 났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한기연의 초대를 받게 될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미래는 가능성으로 활짝 열려 있었고, 둘희는 무더위 속에서 길을 헤매는 그 순간조차 가슴 한쪽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건물로 8월의 햇빛이 쏟아져 스테인리스 골조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검은 줄무늬고양이 한 마리가 창틀에서 지붕 위로 뛰어오르더니 느릿느릿 걸어갔다.
둘희는 검은 붓글씨로 쓰인 ‘흥남 주물’이란 간판을 기준으로 삼았다. 가게 건물 위에 붉은 벽돌로 세운 굴뚝이 있어 멀리서도 눈에 띌 것 같았다. 그 굴뚝을 기준점으로 둘희는 슈퍼가 있는 왼쪽 길로 갔다. 이발소 간판을 찾아 한동안 골목을 걸으며 두리번거리던 둘희는 철제 사다리가 놓인 담벼락을 도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 출발하면서 본 슈퍼가 길 끝에 서 있었다. 돌아보니 멀어졌다고 생각한 붉은 굴뚝이 강판 지붕들 사이에 떡하니 솟아 있었다. 둘희는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내쉬었다. 한기연을 생각하면 둘희는 언제나 바닷가 풍경이 떠올랐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과 고운 황색 모래,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소금기 어린 바람.
하지만 둘희가 한기연을 만나러 온 곳은 도시 뒷골목의 번잡한 일터였다.
그래, 현실의 한기연은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둘희는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다시 이발소 간판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굴뚝을 기준으로 오른쪽 모퉁이 길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또 걸음을 멈추었다.
망했어.
둘희는 어느 백반집 간유리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배낭을 멘 겨드랑이 부근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공들여 컬을 넣은 앞머리는 웨이브가 푹 꺼져 있었고, 눈화장도 지저분하게 번져 있었다. 둘희는 손거울을 보며 눈 밑을 닦아내다가 휙 하고 뒤를 돌아봤다. 동그란 손거울에 이발소 간판이 얼핏 비친 것 같았다. 둘희는 옆으로 걸어가 빗각으로 쳐진 천막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드디어 빨갛고 파란 나선형 줄무늬로 이루어진 간판을 발견했다. 둘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일었다. 약이 오르는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발소 간판은 둘희가 기준점으로 삼았던 ‘흥남 주물’ 앞에 있었다. 슈퍼 앞 냉장고와 천막 지붕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다시 손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친 둘희는 철공소 문에 끼어 있는 빳빳한 광고지를 집어들었다. 페피를 찾긴 했지만, 그런 몰골로 한기연을 만날 순 없었다. 둘희는 자기의 얼굴과 몸을 향해 광고지로 빠르게 부채질했다.
fe-film
‘페-필름’이라고 쓰인 작업실 현판이 이발소 간판 아래 작게 붙어 있었다. 둘희는 흰색 바탕에 검은 페인트로 쓰인 글자를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었다. 한기연이 말한 친구의 작업실은 한때 이발소였던 곳에 자리잡은 그들만의 아지트였다. 그리고 그 공간의 주인을 부르는 호칭도 페피였다.
“페피의 진짜 이름은 뭐예요?”
언젠가 둘희가 물었을 때 한기연은 평범한 이름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름을 알고 난 뒤에도 둘희는 한기연의 친구를 그저 ‘페피’라고 불렀다.
페피랑 있었어.
페피한테 줄 책.
페피가 오기로 했어.
아, 페피랑 먹었던 거네.
한기연이 내뱉는 그 별칭이 자연스럽게 둘희에게도 이어졌고, 둘희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페피를 ‘언니’나 ‘누구누구 씨’라고 존칭하지 않고 페피라고 편하게 불렀다. 둘희의 그런 호칭을 받아줄 만큼 페피는 느긋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원래 ‘페피’는 공업소 골목에 자리한 소규모 영화 감상실의 이름이었다. 그곳에서 페피는 친구들과 모여 영화를 보고, 서로가 만든 시나리오나 영상을 트집잡으며 술과 담배와 음악에 둘러싸여 지냈다. 페피는 영화가 못 된 영화, 틀이나 질서를 넘어서지 못한 ‘나머지 것들’이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굳이 갖가지 허들을 넘어 완성하지 않아도 되는 미완성 습작들, 완성품에서 편집되어 떨궈진 자투리 장면들. 그 자투리 같은 시간과 자투리 같은 대화들. 하나 마나 한 얘기들과 엉뚱한 공상들. 허송세월들. 언제나 계획과 상상에 그치는 의기투합들. ‘깍새’가 있던 자리에 ‘찍새’가 왔다고 농담을 던지는 골목 철공소 사장님들에게 러시아산 독주를 한 잔씩 돌리며 쇳물 녹이는 작업을 한 번만 직접 해봐도 되냐고 묻는 나사 빠진 친구들. 끝없이 담금질 당하고 조형되는 철물처럼 세상의 망치질에 다듬어지고 싶지 않아 자신들만의 아지트로 숨어든 열외자들. 탈락생이자 병든 친구들. 그 환우들이 모여 웅성거릴 수 있는 기괴한 귀퉁이. 그곳이 바로 페피였다.
페피의 문을 열면 또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오른쪽 벽을 가득 채운 환한 전면 거울이 둘희의 시선을 사로잡고 그와 동시에 바깥의 진한 금속 냄새와 갈고 깎는 소음이 사라진다. 청록색 가죽 소파와 널따란 미용 의자, 타일을 깐 세면대와 선반에 놓인 이발 도구들. 때묻은 물건 사이사이에 놓인 영화 포스터와 낙서 쪼가리들. 아무렇게나 포개어놓은 큰 판형의 양장본 책들. 음악이 흘렀던가? 둘희는 페피와 어울릴 법한 전자음악이나 모던재즈를 떠올려봤지만, 그 시절 페피 안에 어떤 음악이 흘렀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커피 냄새가 났을 것이다. 외부의 철 냄새를 지울 만큼 아주 진하게. 그리고 몇 가지 향이 뒤섞인 초와 실내에 가득한 담배 연기.
둘희가 들어서면 청록색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둘희를 바라본다.
네가 올 줄 알고 있었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로.
그 시절 둘희가 찾아갔던 공업소 골목의 작업실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페피는 더는 영화 감상실을 운영하지 않았고, 둘희 역시 한때 페피라 불리던 사람을 전처럼 자주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둘희는 그날 오아시스의 표지판 같았던 이발소 간판과 그 아래 붙어 있던 납작한 나무 현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페피의 첫 글자가 왜 ‘철(fe)’의 원소기호인지 묻는 둘희에게 한기연이 해주었던 답도.
“얘가 화학과 나왔거든.”
청록색 소파에 앉은 한기연이 턱으로 페피를 가리키며 말했다. 페피는 맞은편 이발소 가죽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한기연을 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등록금 아까우니까 뭐라도 써먹어야지.”
흰색 라운드 티를 입고 샌들을 신은 페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둘희는 그렇게 웃는 페피의 옆얼굴이 연필로 간결하고 유려하게 그린 초상화 같다고 생각했다.
“선배는 하수처리 기술 배운 거 어디에 좀 안 써?”
페피가 한기연에게 말했다.
“그건 못하고, 너 어디 아프면 나한테 말해.”
“왜, 고쳐주게?”
“내가 의사니? 폐기물 처리 자격증은 있어. 너 죽으면 내가 처리해줄게.”
두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둘희는 페피와 한기연 사이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친근감에 관해 생각했다. 두 사람만의 허물없는 말투. 서로의 앞에서만 내어 보이는 짓궂은 표정과 실없는 장난들. 그리고 연약함. 한선배가 왜 그렇게 빠졌는지 궁금했어요. 페피가 그렇게 말했을 때 오히려 둘희는 같은 말을 페피에게 하고 싶었다. 나야말로, 나야말로 감독님이 왜 당신에게 빠졌는지 궁금해요.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게 대체 뭔지.
처음 페피에 갔던 그 여름의 오후, 페피가 둘희에게 다가와 말했다.
“찾기 힘들었죠?”
페피는 그날 저녁 내내 둘희에게 다소 딱딱하게 굴었지만, 처음 말을 걸었을 때만큼은 세심하고 친절했다.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이 누그러질 만큼 둘희가 지쳐 보였을까? 아니면 들뜬 둘희의 마음이 페피의 눈에 보였을까? 둘희는 이따금 한기연이 자신에 관해 페피에게 뭐라고 말했을지 떠올려보곤 했다.
내 팬이야. 어린애야. 만나면 재밌을 것 같아서 이리로 불렀어.
아니, 한기연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페피의 시선에서 둘희는 권위적이거나 멸시하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오히려 페피의 시선에서는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어째서 한기연이 널 이리로 부른 거지? 넌 뭐야?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해?
페피를 마주하면, 페피 안에 들어서면, 둘희는 언제나 자신을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처음 페피에 갔던 날에도 둘희는 자신을 훑어보는 낯선 사람들의 시선들 속에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실내에는 페피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거울 앞에 놓인 갈색 가죽 의자에 금발의 남자가 앉아 둘희를 보며 방긋 웃었고, 타일이 깔린 세면대 위에는 덩치 큰 여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둘희는 푸른빛이 도는 그 여자의 눈동자와 당근처럼 밝게 빛나는 머리카락 색깔에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썼다.
“한기연 감독님이……”
둘희는 자신의 등장을 경계하는 그들에게 출입증을 보여주듯 한기연의 이름을 말했다.
“옥상에 있어요. 건물 밖 계단으로 올라가서.”
페피가 유리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둘희는 공손하게 그 잔을 받아 물을 삼키고는 다시 페피에게 두 손으로 잔을 돌려주었다. 페피는 품이 큰 검은 반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둘희는 페피가 신은 검은색 샌들을 흘깃 건너다봤다.
발가락이 참…… 티 없이 하얗고 깨끗하네.
곧장 시선을 거두면서도 둘희는 그후로 이따금 페피의 발을 떠올렸다. 하얗고 통통한 애벌레처럼 샌들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발가락. 달아요, 당신 발가락. 둘희는 그 발을 핥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8월의 햇빛이 둘희의 이마로 쏟아졌다. 둘희는 건물 외벽에 설치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한기연은 높고, 둘희는 낮아서 두 사람이 만나려면 둘희가 한기연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야 했다. 고철 계단은 층계 하나하나가 가팔랐고, 난간 손잡이는 붉게 녹슬어 있었다. 둘희는 한 번씩 멈춰 선 채 옆 건물을 보며 자신이 올라온 높이가 얼마쯤 되는지 층수를 가늠했다. 사층, 아니면 오층? 옥상의 높이는 보통 건물의 오층쯤 되는 것 같았다. 층계가 끝나는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튀어나온 검은 줄무늬고양이가 퉁 하고 쇠 울리는 소리를 내며 둘희가 있는 곳으로 점프했다. 골목을 헤맬 때 봤던 그 고양이였다. 둘희가 알은척을 하자 고양이는 다시금 위로 뛰어올라 아무런 발소리도 내지 않으며 옥상의 외벽 너머로 사라졌다.
기억할 거야. 이 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멀리서 희미하게 쇠를 담금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옥상 문을 열 때 둘희는 자신의 양팔이 여름 볕에 빨갛게 익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다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커다란 전광판이었다. 파란색과 흰색으로 디자인된 이온음료의 광고판.
그리고 파라솔.
진한 다홍색 파라솔이 테이블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파라솔의 그림자 안에 한기연이 앉아 있었다.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인사를 건넸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둘희는 그날 본 옥상의 정경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흰색 원형 테이블, 그 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 재떨이, 캐슈너트가 담긴 잠긴 작은 유리그릇. 테이블 아래에는 얼음과 맥주가 든 은색 아이스 버킷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둘희가 먼저 인사를 건넸을까?
한기연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둘희와 눈이 마주치자 한기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와요.
한기연이 그런 인사를 건넸을까?
아니, 그때 한기연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옥상에 들어선 둘희를 본 한기연은 짧은 눈짓을 건네고서 곧장 시선을 거두고 먼 곳을 봤다.
부끄러워하는구나.
둘희는 자신과 오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한기연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는 허튼 짐작을 한 자기에게 꿀밤이라도 쥐어박듯 그 생각을 털어내버렸다. 언제나 우러러보고픈 나의 우상이 나처럼 보잘것없는 애 앞에서 부끄럼을 타다니,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하지만 한기연은 그런 사람이었다. 무심하거나 차가워서가 아니라 긴장하고 낯설어서, 인터넷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던 사람과 실제로 마주한 그 순간이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상대를 오래 보지 못한 채 물방울이 맺힌 맥주병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었다. 한기연은 되도록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홀로 숨어 있는 사람이었고, 편안한 곳을 찾아 친구의 작업실에 와서도 더 조용하고 외떨어진 곳에서 혼자 머무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기연 못지않게 긴장해 있던 둘희는 한기연의 그런 면을 미처 다 알지 못했다. 그 개인적인 장소로 둘희를 부른 것이 한기연에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자 모험인지 둘희는 몰랐다. 다만 입술이 바짝 마를 만큼 떨리고 흥분되면서도 레몬색 야구 모자를 쓴 한기연이 너무도 귀여워 속수무책으로 한기연에게 또 한번 반했을 뿐이었다.
“커피 마실래요? 아님 다른 거?”
한기연이 그늘이 있는 쪽으로 빈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원래 의자가 놓여 있던 한기연의 맞은편보다 한기연과 더 가까운 자리였다. 둘희는 그 의자에 앉으며 테이블 아래 놓인 은색 아이스 버킷을 내려다봤다. 맥주병들 사이에 커피와 홍차가 담긴 페트병이 보였다.
“맥주요.”
둘희가 말하자 한기연이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 맥주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둘희는 차가운 갈색 병을 쥐고 뚜껑을 연 다음 단숨에 몇 모금 들이켰다. 한기연이 담배를 피우냐고 물었고 둘희는 고개를 저었다.
“피우셔도 돼요.”
둘희의 말에 한기연이 고맙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기연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놓고서 한동안 담배를 꺼내 물지 않았다.
맥주와 담배, 유리그릇에 담긴 견과류, 여름의 햇빛과 조금 전 고양이가 걸어갔던 옥상의 회색 난간(그 고양이가 나보다 먼저 한기연을 만났겠지?)
아이스 버킷의 얼음은 천천히 녹아갔고, 한기연의 등뒤로 푸른색 이온음료 광고판이 보였다. 광고 모델 없이 파란색과 하얀색 글자로만 디자인되어 깔끔하고 시원해 보였다. 두 사람은 몇 마디 짧은 말을 주고받으며 맥주를 마셨다. 한 병, 또 한 병. 한기연은 둘희에게 섣불리 말을 건네지 않았다. 나이나 학교, 사는 곳 따위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서로에게 중요한 것이라면 서둘러 묻지 않아도 어차피 서서히 알아가게 될 테니까. 하지만 둘희는 그 침묵과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자신에 관한 정보를 나열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둘희가 한기연을 얼마나 선망해왔는지에 관해.
<더없이 오래 사는 따개비>의 무대 인사와 한기연이 참여한 시사회 토크, 젊은 피아노 연주자와 함께했던 한기연의 음악 콘서트, 그해 가을 남쪽 지방에서 열렸던 영화제와 그 영화제 특별 세션에서 상영했던 한기연의 추천 영화, 그 영화를 보기 위해 혼자 기차를 타고 여행했던 자신의 이야기. 한기연이 찍은 단편영화들과 한기연의 사인이 담긴 영화 포스터들. 두서없는 그 얘기들은 이미 ‘투 디렉터 한’에 올라와 있는 내용들이었다.
“담배 연기 싫지 않아요?”
띄엄띄엄 이어지는 둘희의 말을 경청하며 한기연이 물었다. 한기연은 담배 연기가 둘희 쪽으로 가지 않도록 담배를 쥔 자기의 손을 멀리 두었고, 둘희의 반대편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면서도 한기연은 몇 번이나 둘희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싫어요. 담배도, 담배 피우는 사람도. 담배를 피우며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이나 아무데나 꽁초를 버리는 사람은 죄다 감옥에 처넣었으면 좋겠어요.
평소 둘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좋아요.”
진실로 둘희는 한기연이 내뿜는 연기나 냄새가 싫지 않았다. 일부러 한기연이 내뿜는 담배 연기를 티나지 않게 슬쩍 들이마시기도 했다. 한기연에게서 나오는 연기는 다르니까. 그녀의 몸을 거쳐서 나온 특별한 연기니까.
“제 이름 웃기지 않으세요?”
담배 연기를 싫어하고, 우습게 느껴지는 자기 이름을 싫어하던 둘희는 한기연에게 자신이 먼저 이름에 얽힌 얘기를 꺼냈다.
어릴 때부터 제 별명은 둘리였어요. 아기 공룡 둘리, 아시죠? 둘리한테 형이 있는데, 이름이 ‘하나’예요. 혹시 아세요? 둘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엄마한테 갔을 때 둘리 엄마가 ‘하나야, 둘리야’ 그렇게 부르면서 아이들을 찾아요. 저도 누가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저는 둘째가 아니에요. 언니나 누나도 아니에요. (감독님도 외동딸이시죠?)
지금 내가 취한 걸까?
둘희는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매끄럽게 가다듬을 수 없었다. 통제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었다. 지금 하는 말이 한기연에게 어떻게 들릴지 짐작하며 조절하는 것보다 더 빨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둘희는 다 마신 두번째 맥주병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새 맥주를 꺼냈다. 버킷에 담긴 마지막 맥주였다.
“더 가져올게요.”
한기연이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려고 하자 둘희가 한기연의 팔을 붙잡으며 막았다(그게 두 사람의 첫 스킨십이었다). 둘희는 무심결에 튀어나온 자기의 행동에 놀라 의자 다리를 거칠게 끌며 다급히 일어섰다.
“아뇨! 제가 갈게요!”
계단을 따라 내려갈 때 둘희는 녹슨 계단 손잡이를 붙잡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난간의 녹가루가 더럽거나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둘희는 손에 묻은 그 불그스름한 흔적을 내려다보며 다짐했다.
다 기억할 거야. 모조리 다 삼킬 거야.
둘희는 얼음 녹은 물이 찰랑이는 동그란 버킷을 품에 안았다. 팔을 따라 맑은 냉기가 스몄다. 둘희는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서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며 추락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