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일층으로 내려가 페피의 문을 열었을 때 둘희는 어두침침한 실내조명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

일층으로 내려가 페피의 문을 열었을 때 둘희는 어두침침한 실내조명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 꿈에서 깨고 나서야 꿈이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처럼 둘희는 그제야 자신이 한기연과 환한 야외에 있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페피 안에서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안쪽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흑백영화가 재생되고 있었고, 여기저기 떨어져 앉아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이번에도 일제히 둘희를 돌아봤다. 이발소 의자에 앉아 있던 페피가 느릿하게 일어나 둘희에게 다가왔다. 페피는 둘희의 손에 든 빈 아이스 버킷을 보고서 “아” 하는 짧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거울 뒤쪽에 있는 냉장고로 걸어가 양손 가득 맥주병을 들고 왔다.

청록색 소파에 드러누운 남자가 뭐라고 말하자 페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영어는 아니었고, 독일어나 그 비슷한 쪽의 말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독일인일까? 둘희는 영어 자막이 나오는 스크린을 보며 생각했다.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화면 양쪽에 흰 스크래치들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맥주를 버킷에 담아주며 페피가 물었다. 페피가 얼음 틀을 뒤집어 양쪽으로 비틀자 버킷 안으로 우르르 사각형 얼음들이 쏟아졌다.

“먹을 게 이것밖에 없네요.”

페피가 낮은 나무 탁자에 놓여 있던 비스킷 상자를 들고 와 둘희에게 건넸다. 둘희가 돌아서서 나올 때 그들은 또 이국어로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둘희는 그들이 자신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페피가 챙겨준 술이나 과자도 자신이 아닌 한기연을 위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어수선한 감정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모두 흩어져 사라졌다. 둘희는 그 옥상 계단이 외계나 환상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영원히 저 아래의 세상과 단절될 수 있다면.

단절되어 한기연과 이곳에 단둘이 있을 수 있다면.

옥상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둘희는 무거운 아이스 버킷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둘희가 허리를 펴고 막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한기연이 문 건너편에 서 있었다. 한기연은 둘희가 다가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둘희를 마중나온 것이었다. 둘희는 감격해 입술이 벌어졌지만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고 곧장 입술을 감쳐물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먹을 것을 구해온 어미 새처럼 둘희가 테이블 위에 비스킷 상자를 내려놓았다. 둘희는 일층에서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기연은 그다지 흥미로운 얘기는 아니라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둘희는 그 무덤덤한 반응에 마음이 놓였다. 한기연은 내려가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자신과 있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다시 파라솔 그늘에 앉아 맥주와 함께 과자를 먹었다. 둘희는 한기연 앞에서 비스킷을 와작거릴 수 없어 초콜릿이 묻은 그 동그란 과자를 입안에 넣고서 거의 빨아먹다시피 하며 천천히 녹여 먹었다. 맛을 분간할 수 없었고 허기나 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라솔 밖으로는 강한 볕이 내리쬐었지만, 옆 건물 옥상에 세워진 대형 광고판이 두 사람에게 서늘한 어둠을 드리워주고 있었다.

하늘로 흰 구름이 빠르게 흘러갔다.

<배부른 구름>

둘희는 한기연이 만든 영화를 생각했고, 그러자 한기연이 지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해시계 같아요.”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슬픔을 물리치듯 둘희가 말했다. 테이블 가운데 꽂혀 있는 파라솔 기둥이 옥상 바닥에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새로 가져온 맥주도 빠르게 비워갔다. 화장실에 다녀오기 위해 옥상을 내려가기도 했지만, 그 순간을 제외하곤 한시도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둘희는 화장실에 다녀온 게 창피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장 테이블로 돌아가지 못한 채 괜스레 옥상 화단 앞에 서서 시든 풀과 마른 흙을 내려다봤다. 멀리 고층 빌딩이 솟아 있는 스카이라인으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헬리콥터 한 대가 지나갔다. 방송국 촬영일까. 아니면 누군가 아파서 급히 실려가나. 둘희는 먼 하늘을 보며 생각했고,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을 보고 있던 한기연과 눈이 마주쳤다.

한기연이 나를 보고 있었다. 몰래 나를 보고 있었어.

감당할 수 있는 설렘의 최대치를 넘어서면 심장이 멎어버릴 수도 있을까.

서툴게 시선을 피하는 한기연의 모습이 둘희의 가슴에 스파크를 일으키며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둘희는 거울을 볼 때마다 한기연의 눈에 비친 자기의 얼굴이 어땠을지 생각했다.

왜 그때 나를 훔쳐보고 있었어요? 그때 내가 어떻게 보였어요?

구름이 태양을 가리며 두 사람이 머무는 옥상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옥상 바닥을 달구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갔고, 해가 기울면서 목구멍에 닿는 맥주의 탄산이 전과 다르게 차갑게 느껴졌다. 다시 빈 아이스 버킷을 들고 일 층으로 내려갔을 때 페피는 맥주를 챙겨주며 둘희에게 말했다.

“감독님 지금 술 많이 마시면 안 되는 거 알아요?”

둘희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예상치 못한 페피의 꾸짖음에 둘희는 아무 변명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층에서 나와 다시 철제 계단을 올라가며 둘희는 자신이 섣부르게 대꾸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했더라면 아마 더 수치스러웠으리라. 둘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한기연과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해 페피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옥상 문을 열자 한기연이 화단 난간에 기대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둘희는 문을 닫고 계단으로 물러서며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갑자기 취기가 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마 뒤 테이블로 돌아온 둘희는 이전처럼 맥주를 빠르게 마시지 않았다. 그 느려진 속도에 한기연이 뭔가 짐작하는 표정으로 둘희에게 물었다.

“집이 어디였죠?”

둘희가 사는 곳을 말하자 한기연은 혹시 통금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상관없어요.”

둘희는 단호하게 말한 다음, 한기연에게 어린애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덧붙였다.

“외박도 많이 해서.”

그 말에 한기연이 물었다.

“누구랑?”

아, 무례한 질문은 때론 얼마나 감미로운지. 둘희는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쾌감에 잠시 눈의 초점이 흔들렸다. 더 많이, 더 거칠게, 한기연이 무례한 질문을 계속 던져주었으면 했다.

그때부터 둘희는 다시 처음과 같은 속도로 맥주를 마셨다. 머릿속으로는 가슴에 날아와 박힌 한기연의 ‘선을 넘는 질문’을 만지작거렸다.

이온음료 광고판에 저물녘의 햇빛이 서서히 드리울 때까지.

그 노을빛이 어둠으로 바뀔 때까지.

야외 스크린처럼 큼지막한 광고판은 전열 장치가 고장났는지 해가 져도 조명이 들어오지 않았다. 한기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주변이 캄캄해졌을 때 페피가 유리 갓을 씌운 노란색 초를 들고 왔다. 한기연이 페피를 보며 짧고 큰 감탄사를 내뱉었다. 둘희와 있을 땐 볼 수 없었던 쾌활하고 편안한 표정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페피가 테이블 위에 초를 올려놓고 한 손으로 바람을 막은 채 심지에 불을 붙였다. 페피는 한기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춥지 않으냐고 물었고, 한기연은 페피의 손목을 잡고서 시선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자신이 마신 맥주 좀 보라고 말했다. 둘희는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하는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요?”

감정을 담지 않은 얼굴로 페피가 둘희에게 말했다. 당황한 둘희가 서둘러 일어서려다 바닥에 놓인 빈 맥주병을 쓰러뜨렸고, 둘희는 굴러가는 그 유리병을 주우려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손을 뻗었다. 옥상 밖으로 나갈 때 둘희는 등뒤에서 들려오는 페피의 목소리를 들었다.

“믿을 만한 거야?”

순식간에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둘희는 층계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금 내가 여기에서 뛰어내려 죽는다면, 페피는 내가 믿을 만한 애라고 여길까? 아니면, 역시 믿지 못할 여자애라고 여길까?

얼마 지나지 않아 페피가 옥상 문을 열고 나왔다. 페피는 둘희를 지나쳐가며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어떤 인사도, 당부도 없었다. 둘희는 다시 테이블로 걸어가며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으려 되뇌었다. 영화감독을 따라다니는 하찮은 여자애. 실례인 줄도 모르고 자꾸 맥주를 더 달라고 하는 철부지 어린애.

테이블 위에는 은색 열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둘희가 그걸 보자 한기연이 말했다.

“먼저 가겠대요. 나갈 때 옥상 문 잠그고 가라고.”

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기연이 옥상까지 올라와 화분이나 파라솔을 훔쳐가는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둘희는 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양초를 내려다보며 둘희는 심지 아래 고인 레몬색 촛농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한기연이 페피에 관해 말했다. 유학 갔을 때 만난 친구고, 영화를 찍을 때 조연출로 도와줬다고. 언제나 자기가 도움을 받는다고. 말은 차갑게 해도 의리 있고 따듯한 사람이라고.

한기연은 둘희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둘희가 풀죽어 있는 걸 알아채고서 페피에 관해 말하며 둘희의 다친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었다. 그 마음이 전해지자 둘희는 조금 전 느꼈던 굴욕감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페피는 둘희를 질투한 것이었다. 어린애에 불과한 자신이, 오늘 한기연과 처음 만난 자신이, 이렇게나 오래 한기연과 함께 있는 것에.

“가끔 잠도 자요. 일층에서.”

한기연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보며 말했다.

“혼자서요?”

“거의 혼자. 영화를 보다 밤을 새우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는 걸 잊어버려요. 그러다 새벽이 되면 길에서 수레 끄는 소리가 들리는데……”

한기연이 잠시 말을 멈추고 둘희를 바라보았다. 그 눈맞춤에 둘희는 일순 주변이 고요해지며 한기연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새벽에 혼자 있을 때 꼭 그 소리가 들려요. 뭔가를 싣고 가는 소리.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 문을 열어보면 캄캄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꼭 그 소리가 들려요.”

한기연은 마치 그 음산한 새벽의 어느 하루로 돌아간 듯 한껏 몰입한 표정이었다(그리고 둘희는 그 몰입의 순간을 틈타 한기연의 모습을 마음껏 감상했다).

“페피가 옆에 공업소 아저씨한테 물어보니까 그게 시체 끌고 가는 소리래요.”

“시체요?”

“여기가 조선시대 때 시체가 나갔던 길이래요. 사대문 안에서 죽은 사람을 수레에 싣고 이 길을 따라 성문 밖으로 나갔대요.”

한기연이 둘희 쪽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곧 귀신이 될 사람이라는데.”

둘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도 못하자 한기연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꼭 나한테만 들려요. 페피는 안 들린다는데, 꼭 나한테만. 그래서 한번 녹음해보려고요.”

“오늘이요?”

“오늘?”

슷.

그 순간 누군가 일부러 입바람을 분 것처럼 초의 불꽃이 꺼졌다. 동시에 한기연의 레몬색 야구 모자가 바람에 벗겨져 옥상 난간으로 날아갔다. 놀란 한기연이 난간 끝에 걸쳐진 모자를 돌아봤다. 꺼진 심지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며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한기연은 기억하고 있을까?

거짓말처럼 촛불이 꺼지던 그 순간을.

또 한번 바람이 세게 불어 레몬색 모자가 난간 아래로 떨어졌고, 무대 위에 조명이 켜지듯 이온음료 광고판에 눈부신 백색 빛이 들어왔다.

그때 그 순간을 한기연도 나처럼 기억하고 있을까?

 

*

 

지상으로 내려오자 빌딩의 밝은 조명들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도로 위로 차들이 빠르게 달려갔고, 음식점 간판들도 색색으로 번쩍였다. 한기연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둘희는 자신이 누구와 있는지 잊지 않으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하나하나 머리에 새겨넣었다. 나중에 혼자 그 길을 걸으며 추억할 수 있도록 길의 풍경을 유심히 봐두었다.

한기연은 낮은 수위의 개천이 흐르는 돌다리를 건널 때 물가에 핀 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참매미가 크게 울었고, 귀뚜라미 같은 풀벌레 소리도 들렸다. 옅은 물냄새와 채 식지 않은 보도블록의 열기, 여름밤의 향기가 두 사람이 걷는 거리 곳곳에 짙게 배어 있었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던 한기연이 둘희에게 같이 영화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지금 가면 마지막 영화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극장이 어디인지, 무슨 영화를 보자는 것인지도 모른 채 둘희는 같이 가겠다고 답했다. 한기연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트 시네마로 둘희를 데려갔다. 국밥집이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악기 상가가 있는 건물로 들어간 뒤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어느 폴란드 감독의 영화를 보기 위해 표를 끊었다.

“좋아하는 자리 있어요?”

한기연이 매표소 앞에 서서 물었다. 어디든 괜찮다고, 둘희가 말했다.

“옆자리? 아님, 떨어져서?”

한기연의 질문에 둘희는 “옆자리”라고 답하고는 혹시나 한기연이 혼자 떨어져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불현듯 페피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갔다. 믿을 만한 거야?

상영관으로 들어가 나란히 좌석에 앉았을 때 둘희는 처음으로 한기연의 체취를 자세히 맡을 수 있었다. 담배와 이름 모를 섬유유연제, 머리카락에 밴 샴푸 내음 그리고 손끝에 남은 버들잎의 향기. 그 모든 냄새가 뒤섞여 한기연만의 체취를 만들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둘희는 앞자리에 앉은 사람을 보고서 혼자 작은 소리로 웃었다. 한기연이 무슨 일이냐는 듯 둘희를 보자, 둘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곧 상영관 안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둘희는 영화를 보는 내내 한기연이 영화에 관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떠올리며 화면에 집중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이 졸음이 몰려와 둘희는 꾸벅꾸벅 잠들다 깨기를 반복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거리는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국밥집을 지나 개천이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갔다.

“지금 가면 막차 탈 수 있을 거예요.”

한기연이 도로 맞은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보며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도로를 건너기 위해 건널목으로 가면서 한기연이 말했다. 둘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구급차 한 대가 사이렌소리를 크게 내며 지나갔다. 그 소리에 묻혀 한기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괜찮으면……”

한기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둘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멈추지 말고 계속 말해달라는 뜻이었다. 사이렌소리가 멀어지고 신호가 바뀌자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한기연과 둘희만 건너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해 서 있었다.

“괜찮으면 같이 뭘 먹은 다음, 그다음 택시 타고 가요.”

“좋아요.”

둘희는 자꾸만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걸 참기 힘들었다. 두 사람은 근처를 돌아다니며 갈 만한 식당을 찾았지만, 취객들이 가득찬 술집이나 살코기를 굽는 음식점들만 눈에 띄었다. 그러다 한기연이 걸음을 멈추고서 다시 ‘혹시 괜찮으면’으로 시작하는 말을 꺼냈다. 혹시 괜찮으면 자기가 아는 우동집에 가지 않겠느냐고.

“좋아요, 같이 가요.”

둘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둘희는 한기연과 함께 택시를 탔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한여름 밤의 도시를 바라보며 앞으로 한기연과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한기연과 같이 택시를 타는 건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차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레게 음악이 듣기 좋은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둘희는 택시 안의 방향제에서 풍겨 나오는 모과향 속에서 한기연의 체취를 맡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씩 술이 깨는지 머리가 멍했지만, 그 순간의 기쁨만큼은 선명했다. 한기연이 데려간 우동집의 스탠드 테이블에 앉아 따듯한 수타 우동을 먹을 때, 둘희는 뒷좌석을 흘끗 보며 혼자 웃었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한기연에게 몸을 약간 기울이며 속삭였다.

“벌써 세번째예요.”

한기연이 어깨를 기울이며 ‘으응?’ 하는 표정으로 둘희를 봤다. 둘희는 그날 하루 동안 자신이 경험한 우연에 관해 설명했다. 처음은 옥상에서 본 커다란 광고판, 그다음엔 영화관 앞자리 사람이 마신 음료수, 그리고 지금 세번째 우연.

“저 뒤에 있어요.”

둘희가 어깨 너머로 뒷좌석 테이블을 건너다봤다. 한기연이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 파란색 음료수병을 본 다음 자신의 그릇에 담긴 하얀 면발을 천천히 휘저었다.

“기억하기 쉽겠네요, 오늘을.”

가게를 나올 때 한기연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뒤따르던 둘희도 그 벽시계를 올려봤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있었다. 도로 쪽으로 걸어가며 한기연이 다시금 둘희에게 사는 곳을 물었고, 둘희는 혜화동이요, 라고 답했다. 둘희는 만약 지금이 영화 속 장면이라면, 자신이 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결코 이별 장면은 넣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자신과 한기연을 다시 페피로 데려가 함께 귀신 소리를 듣는 장면을 찍을 거라고.

“먼저 타고 가요. 난 다음 거 타고 갈게요.”

둘희의 상상에서 비켜서듯 한기연이 말했다. 이제 마법에서 풀려날 시간이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길턱 아래에 서서 팔을 흔드는 한기연을 보며 둘희는 한기연에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줘도 될지 고민했다. 한기연에게 번호를 알려달라는 말은 감히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한기연의 연락을 기다리는 건 평생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택시 한 대가 멈춰 서자 한기연이 차문을 열고 둘희를 향해 손짓했다.

“감독님 먼저 타고 가세요.”

둘희가 반쯤 열린 자동차 문 앞에 서서 고집을 부렸다. 처음으로 둘희가 자기 의견을 내세우자 한기연은 당황했다. 결국 같이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은 실랑이하듯 상대의 집 쪽으로 먼저 가달라고 기사에게 말했다.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택시 기사가 한기연의 집에 들렀다가 둘희의 집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중재자의 판결이 내려지자 두 여자는 실랑이를 멈추고 좌석에 등을 기댔다.

오늘 고마웠어요.

한기연이 그렇게 말했었나. 오늘 같이 있어서 즐거웠다고,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까. 둘희는 밤길을 달리는 택시가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둘희는 왈칵 울음이 터질 것처럼 감정이 북받쳤다. 어두운 택시 안에서 한기연의 몸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애썼다. 무릎을 감싼 연한 하늘색 청바지와 그녀의 운동화, 그리고 결국 찾지 못한 레몬색 야구 모자.

그때 라디오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산뜻한 멜로디 끝에 음료의 이름이 나왔다.

포가리스웨트.

한기연과 둘희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택시 기사가 그런 두 사람을 룸미러로 봤다.

“혹시 괜찮으면……”

한기연이 말했다. 둘희는 생각했다. 괜찮아요. 저는 무엇이든 좋아요. 같이 밤거리를 걸어도 좋고, 밤새워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요. 페피로 돌아가 시체를 싣고 가는 수레 소리를 함께 듣는 것도 좋아요.

“괜찮으면 같이 바다 보러 갈래요?”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둘희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한기연을 바라봤다. 그런 둘희에게 한기연이 나직이 설명했다. 실은 지난겨울부터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싶었는데, 갈 수 없었다고. 여행을 가서도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고 호텔에서만 지냈다고. 만약 둘희씨가 괜찮으면 같이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지금 갔다가 아침에 서울로 돌아오자고.

 

둘희씨.

 

그때 처음 당신이 내 이름을 말했어.

만난 지 하루가 지나서야, 헤어질 순간이 되어서야,

바다에 가자고 하면서 내 이름을 말했지.

 

둘희씨.

 

운전대를 붙잡은 기사가 룸미러로 두 여자를 주시했다. 둘희가 대답하자 한기연이 허리를 펴고서 앞좌석으로 다가가 말했다.

“지금……”

한기연은 자신이 내뱉을 단어의 뜻을 헤아리듯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 여기에서 제일 가까운 바다로 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