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대기만성

1.

어떤 작가의 신작 소설을 소개하면서, 그 작가에 대해 ‘대기만성형 작가’라고 한 표현을 읽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평가받기 마련이고, 그 평가는 대개 그 사람이 해온 일에 근거한다. 창작자에게 평가는 불가피하고, 평가의 기준은 평가하는 이의 내부에 있을 터이니 창작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어떠어떠한 작가다’라고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 선언이 곧바로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언은 내부에서 나오고, 그러니 할 일에 대한 다짐에 가깝지만, 평가는 외부에서 나오고, 그러니 한 일에 대한 규정에 다름 아니다. 선언이 평가와 어긋날 때 그 선언은 방치되거나 폐기된다. 
평가는 주목의 결과이므로 창작자, 혹은 창작물에 어떤 수식어가 붙었다면, 그것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그 주목의 배경이나 요인은 평가자의 것이다. 그런데도 그 ‘대기만성형’이라는 수식어를 읽을 때 내 마음이 조금 갸우뚱했던 것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알려진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성어 때문이었다. 소설가로 산 지 삼십 년이 넘은 작가에게 붙은 그 수식어가 어딘지 어긋나 보였던 것 같다. 그 작가는 그다지 게으르지 않아서 발표한 작품이 꽤 많았고, 문학상도 여럿 받은 터였다.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해온 삼십 년 경력의 작가에게 대기만성이라니!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기만성’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하나이고, ‘크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가 다른 하나이다. 아직 미완이다, 그러나 이루어진다면 큰 그릇이 될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부정은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는 긍정에 의해 판단이 미뤄진다. 했거나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평가가 할 일에 대한 기대에 의해 유보된다. 미래를 담보로 잡고 만기에 이른 과거를 연장해주는 꼴이다. 그런데 이 유보와 연장에 대해 이의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와 ‘가능성이 있다’라는 평가가 한 분야에서 오래 경력을 쌓은 사람을 향한 것이라면? 가능성을 인정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더구나 큰 그릇이 될 가능성이라지 않는가. 그렇지만 이미 충분히 오랜 시간 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에게 이 기대가 가당한가? 그런 의아함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가능성은 잠재력. 기대하게 하는 요소. 이룬 것이 미미하여 아직 평가하기 이른 신인에게 기대를 섞어 우리는 이 말을 한다. 잠재력이 있다. 가능성이 보인다.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기다림은 큰 그릇에 대한 기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기다린단 말인가. 삼십 년을 일한 사람에게 아직 가능성이 있으니 기다려보자고 말하는 게 설득력이 있는가. 대기만성은 이루지 못한 채, 이루지 못했으면서도 여전히 하던 일을 계속하는, 어찌 보면 미욱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수사가 아닐까.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빨리 내놓아야 한다. 속도 경쟁과 함께 기대의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그런데 ‘만성’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 시대와 맞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단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도 같은 일을 계속하는 이에게, 의아하다는 듯, 혹은 용하다는 듯 그 동력이 무엇인지 묻는다. 큰 그릇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는가? 라는 질문이 아마 숨어 있을 것이다. 벌써 만들었어야 하지 않아? 라는 질책처럼 들릴 수도 있고, 할 만큼 했다는 위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람들은 ‘큰 그릇’이 목표라면 마지못해 이해해주겠다는 식의 포즈를 취한다. 그게 아니면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사람은 큰 그릇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용납된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큰 그릇을 이루겠다는 목표가 꾸준히, 계속 일하게 하는 동력일까? 
  
그렇지 않다. 큰 욕망은 사람을 치열하게 하지만 꾸준하게 하지는 못한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은 화난 사람과 같아서 뜨겁지만 오래 유지하지는 못한다. 열심히 하게는 하지만 한결같이 하게는 하지 못한다. 큰 욕망은 사람을 화급하게 하고 성마르게 한다. 큰 욕망의 사람은 노력한 만큼의 결실이 나타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성과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진득하게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큰 욕망의 사람이 아니다. 목적의 사람이 아니라 다만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일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는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룰 무엇에 연연하지 않고 일한다. 하는 일을 주어진 일로 받아들인다. 아마 이런 사람이 대단한 업적을 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무엇에 대한 욕망이 없는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이루려는 욕망이 있는 사람은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그만둔다. 그러나 무엇을 이루려는 욕망이 없는 사람은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만둘 이유가 없다. 언젠가 무엇인가 이룰지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그가 그것을 목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꾸준히, 진득하게, 반복해서 자기 일을 했기 때문이다. 혹시 큰 그릇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200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사무원처럼’ 일한다고 말한 바 있다. 소설가를 시인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 말을 했다. 그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이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신이 자기에게는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대신 그는 신이 자기를 통해서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을 할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아주 꼼꼼히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이 바로 산문(소설) 쓰기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시인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이고, 소설가는 신이 자기를 통해 할말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애쓰는 자이다. 시인은 영감의 사람이고, 소설가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어도 될 것이다. 나는 이 작가에게 동의한다. 일하듯 쓰는 사람이 소설가다. 아니,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소설가다. 사르트르는 시인을 언어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소설가를 언어를 이용하는 자로 구분했다. 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문제 삼은 것은 소설(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시는 문학이 아니라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여 일하는 자이다. 
사무원에게 주어진 ‘일’의 특징은 의무와 규칙과 반복이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맡겨졌기 때문에, 맡겨진 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 그는 맡지 않을 수 있었다. 맡지 않았다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맡았고, 맡기로 선택했고, 그렇게 해서 자기 일로 받아들였다. 선택은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선택 후에는 자유가 사라진다. 권리 행사 후에는 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사무원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오늘 하고,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내일도 한다. 규칙적으로, 어쩌면 기계적으로 한다. 사무원의 일터에 사람을 흥분시키는 극적 요소는 거의 없다. 따분하고 싫증이 나고 타성에 젖기 쉽다. 일하는 사람은 그것을 견디는 사람이다.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맡겨졌기 때문에 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자유가 없다. 일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꾸준함이다. 사랑으로는 꾸준히 일할 수 없다. 꾸준히 하려면 의무로 해야 한다. 사랑이 의무가 되어야 한다. 잘하기 때문에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이기 때문에 계속하는 것이다. 


2.

그리고 만회하려는 의지가 있다. 자기가 한 일이 충분하지 못할 때 사람은 그 일을 다시, 더 한다. 하려고 한다. 다시, 더 하려는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다. 일찍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낸 사람은 일찍 그만둘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벌충하고 만회할 이유가 없으므로 다시, 더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늦게까지 그만두지 못한 사람은 아직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다시, 더 해서 벌충하고 만회해야 하므로 다시, 더 하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벌충하려는 마음이 다시, 더 하게 한다. 부족은 메꾸기가 쉽지 않고, 그러므로 메꾸려는 시도도 거듭된다. 그렇게 하여 그는 꾸준한 사람이 된다. 꾸준함의 비밀은 어제 한 일에 대한 불만족이다. 꾸준함은 성향이 아니라 행위의 반복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성향이라면, 행위의 반복에 의해 사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만회하려는 마음이 동기다. 물론 다시 한다고 더 좋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 좋아졌다고 해서 만족하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보장이 다시, 더, 계속하기의 동력이 아니라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불만족이 동력이다.

새로 쓴 글로 전에 쓴 글을 만회하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새로 쓰는 것이다. 다시 써서 만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래 꾸준히 쓰는 사람은 아직, 여전히 만회하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는 문장으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만, 그것들은 어떤 문장으로도 잘 표현되지 않는다. 세상은 요란하고 빠르고 오묘해서 납작하고 느리고 순진한 문자로 붙잡기가 어렵다. 글을 쓰는 사람은 가장 정확한 한 단어, 딱 들어맞는 하나의 표현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 표현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플로베르가 심어주었다. 그는 어떤 사물과 개념을 가리키는 데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하나밖에 없는 그 단어를 찾는 것이 글쓰는 이의 일인데, 그 일은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반복과 되풀이, 심지어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문장을 붙여 쓰고 이어 쓰는 사람은 그 하나의 단어, 하나밖에 없는 표현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이다. 자기가 쓴 한 문장이 드러내려고 하는 생각이나 느낌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다고 판단될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덧붙여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언제나 같이 동원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쓴 글을 지우고 다시 쓰고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거기에 다른 문장을 추가한다. 덧붙이고 이어 쓴다. 이 사람의 문장은 두 걸음 앞으로 갔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거나 궤도를 약간 바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문장이 된다. 자기가 쓴 문장에 만족하는 사람은 덧붙이고 이어 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물러나거나 같은 자리를 맴돌 이유가 없다. 그런 사람의 문장은, 그래서 산만하지 않고 단정하다. 단호하다. 단호한 문장은 명료하고 지시적이고, 플로베르의 일물일어(一物一語), 그 유일한 단어를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문장을 덧붙이고 덧대는 사람은 그 유일한 그 단어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쓴 불완전한 문장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는 오해와 왜곡을 우려한다. 이 사람은 염려가 많고 소심해서 상처를 받고 싶지도 않고 주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추가한다. 그래도 흡족하지 않아 다시 덧댄다. 하나밖에 없는 그 표현을 찾지 못해서 덧붙이기와 덧대기가 이어진다. 만회하려는 의지가 작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회는 쉽지 않고, 그래서 이 작업은 거듭된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의 문장은 산만하고 단정하지 않고 불명료하고, 모호하거나 포괄적이 된다. 단호하지 않고 지시적이지 않다. 앞으로 나가지 않고 주춤거리며 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나사와 같이 한자리를 맴돌며 깊어지지만 그 깊어지는 정도가 대단치 않아서 성근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운동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는 모든 예술가들을 위협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 위험이 원한과 자기만족이라고 말한다. (『안과 겉』, 재판 서문) 원한은 삶의 조건에 대한 불만에서 생겨난다.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을 때 시기심이 생기고 원한을 품게 된다. 불화와 불행이 원한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다고 모두 도둑질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빈곤이 반드시 시기심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카뮈는 자기 경험을 통해 증언한다. 극심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나의 어린 시절 위로 내리쬐던 그 아름답고 후끈한 햇볕 덕분에 나는 원한이란 감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빈곤 속에 살고 있었으나 또한 일종의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한 적은 있지만 원망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겪었던 빈곤은 그에게 ‘원한이 아니라 어떤 변함없는 충직함, 그리고 말없는 끈기를 가르쳐주었다’고. 
원한을 가진 사람은, 불만족의 원인이 자기가 아니라 밖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만회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만족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을 때만 만회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만회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자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의 족함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더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지 않는다. 외부가, 다른 사람이, 누군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바깥 세계가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모자라는 부분을 벌충하기 위해 다시, 더 시도할 리 없다. 다만 투덜거릴 것이다. 만회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꾸준할 수 없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일꾼들을 고용했다. 일꾼들은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합의하고 포도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홉시쯤에 장터에서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도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데려다 일을 시켰다. 주인은 열두시와 오후세 시, 그리고 다섯시쯤에도 나가서 일꾼들을 데려왔다. 
저녁이 되었다. 일을 마친 사람들에게 임금을 치르는데 먼저 오후 다섯시쯤에 와서 일한 이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일꾼들, 특히 맨 처음에 와서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더 많이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다섯시에 온 일꾼들보다 훨씬 더 오래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 그러자 일꾼들이 주인에게 항의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소. 우리는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했는데 저들과 우리를 똑같이 대우한단 말이요?” 이에 대한 주인의 대답은 이렇다. “이보시오, 나는 당신들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들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이 기울인 노력과 얻은 성과를 저울질해서 자기와 비교할 때 불만과 원한이 생긴다. 일꾼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협의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는 주인과 약속한 자기 몫을 받았다.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니 불만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보다 일을 덜 한 사람이 자기와 같은 임금을 받는 걸 보는 순간 불만과 원망이 생겼다.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리라. 시기와 불만은 내가 얻은 결실이 내가 기울인 노력에 비해 충분하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얻은 결실과 자기 것을 비교할 때 생긴다. 자기보다 덜 일한 사람이 자기와 같은 대접을 받거나 자기와 똑같이 일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많은 대접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될 때 생긴다. 다른 사람이 어떤 결실을 얻었는지,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 모를 때는 생기지 않던 불만이 다른 사람이 얻은 결실, 받은 혜택을 알게 되는 순간 생긴다. 비교하는 순간 생긴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불만이 없다. 다만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불만일 뿐이다. 이 사람에게 만회하려는 마음이 생길 리 없다. 


3.

원한과 자기만족은 손바닥의 안과 밖처럼 붙어 있다. 붙어 있되 반대쪽에 있다.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원한이라면, 세상으로부터 받는 과도한 평가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자기만족이다. 원한은 밖을 향하고 자기만족은 안을 향한다. 불만족의 원인을 밖에서 찾을 때 원한이 생기고, 족함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을 때 자기만족에 빠진다. 원한이 다시, 더 시도하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자기만족 역시 다시, 더 시도하려는 마음을 빼앗는다.  

카뮈는 스물두 살에 쓴 『안과 겉』의 재판을 이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냈다. 그 책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로 있었다. 그는 젊을 때 쓴 그 책이 ‘서툴고 미숙하기 때문에’ 다시 출판하지 않으려 했다고 서문에서 고백했다. 그가 쓴 것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글이 거기에 실려 있다는 한 철학자의 주장을 카뮈는 반박한다.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천재가 아닌 한, 스물두 살에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겨우 알까 말까 하는 법이니 말이다.” 이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스물두 살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나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진실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터져나오기도 하는 법이다. 때로는 기교가, ‘어떻게’에 대한 앎이 진실을 가리기도 하는 법이다. 
이어서 카뮈는 자기가 쓴 글을 읽으면서 자기만족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자기가 쓴 책이 호평을 받을 때마다 뜻밖이어서 놀란다는 말도 한다. 자기가 받는 평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치하와 찬양은 그를 불편하게 한다. 그에게 명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누가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하면, ‘멍청하고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곤 하는데, 그것은 ‘그게 아닌데……’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의적인 외부의 평가를 우연이거나 일시적이거나, 어떤 운명의 변덕 같은 것으로 여기면, 즉 당연한 보상이 아니라 과분한 행운으로 여기면 자기만족에 빠질 수 없다. 그는 다시, 더 할 수밖에 없다. 사십대 초반에 노벨상을 받은 이 대단한 작가는 겨우 사십칠 년 동안 이 세상에 있었다. 그 짧은 기간 그는 끊임없이 많이 썼다. 아마 더 좋은 작품을 써서 만회하려는 마음, 혹은 자기에게 찾아온 우연한 행운을 계속 붙잡아두려는 마음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을 거라고. 그러기 위해 계속, 다시, 더 썼던 거라고. 

자기만족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다. 마르케스는 명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원한과 마찬가지로 명성도 독이다. 원한이 독인 것은 불만족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함으로써 자기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명성이 독인 것은 자기에게,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외부의 인정에 도취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족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는 만회하려는 마음이 만족한 사람에게 있을 리 없다. 만족한 사람은 쓰기를 멈추거나 더 큰 만족, 명예, 즉 보상을 바라며 쓴다. 쓰던 대로 쓰거나 함부로 쓴다. 그래서 위험하다.

카뮈가 원한과 자기만족이라고 말한 위험을 시몬 베유는 칭송과 동정이라고 불렀다. “칭송과 동정(특히 이 두 가지 섞인 것)은 실제의 에너지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것들을 피해야 한다.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보상이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보상을 바라는 사람은 항상 실망한다. 보상은 어떤 일을 하도록 충동하고 일정한 성과를 이루게 하지만, 그러나 어떤 보상을 받아도 만족하지 못하고(그것이 보상의 특성이다), 그래서 무리하고, 다른 사람이 받은 보상과 비교하고, 그래서 불행해지고, 원한에 빠지거나 명성에 유혹된다. 칭송과 동정을 에너지로 하여 일하지 말아야 한다. 칭송도 기대하지 말고, 동정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도자기는 여러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 도예가는 흙을 고르고 모양을 만들고 물레를 돌리고 무늬를 새기고 안료나 유약을 바른다. 그리고 두 번의 소성 과정이 이어진다. 도예가의 면밀한 손길에 의해 모양을 갖춘 도자기는 가마 속에 들어가 불속에서 완성된다. 대개 800도 정도의 초벌 소성 후 1250도의 고온에서 다시 구워진다. 하나의 도자기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도예가의 꼼꼼하고 인내심 있는 수고 위에 이십 시간 이상의 불의 시간이 더해져야 한다. 도예가들은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불의 세기나 방향에 따라 도자기의 색과 무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을 한 후에 불에게 맡긴다. 도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은 불이다. 수고는 사람이 하지만 완성은 사람의 몫이 아니다. 가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예가들은 모른다. 고온에서 녹아 흘러내리는 유약이 어떤 빛과 모양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그곳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 예상한 색과 모양이 나오지 않아 실망하기도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신비스러운 색과 무늬를 얻어 흥분하기도 한다. 
도예가는 흙을 고르고 모양을 만들고 물레를 돌리고 무늬를 넣고 시유를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기물들을 가마 안에 재어넣고 나면 더이상 그가 할 일은 없다. 그는 가마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제 가마 안에서 일을 하는 것은 도자기를 만든 도예가가 아니라 불이다. 불은 기물들을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회오리치고 스며들며 미완의 작품을 완성시킨다. 기물이 도자기가 된다. 
그릇을 완성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불이라고 해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거나 건성으로 대충대충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의 최선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지 사람의 수고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보상은 대부분 뜻밖이다. 뜻 안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큰 보상이라도 마땅하거나 미흡하다. 뜻 밖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작은 보상이라도 과분하거나 놀랍다. 


4.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된다는 뜻으로 널리 알려진 대기만성(大器晩成)은 노자의 도덕경 41편에 등장한다. 노자가 옛글을 인용하며 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표현이 나온다. 인용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서는 것 같다. 평평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고, 가장 높은 덕은 낮은 것 같다. 몹시 흰 빛은 검은 것 같고, 넓은 덕은 한쪽이 이지러진 것 같다. 건실한 도는 빈약한 것 같고, 진실한 도는 어리석은 것 같다.” 도의 역설적 성격을 여러 차원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어지는 문장의 한 부분에 ‘대기만성’이 나온다.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도은무명)’. 
대기만성 앞에 대방무우(大方無隅)가 있고, 그 뒤에 대음희성(大音希聲) 대상무형(大象無形) 도은무명(道隱無名)이 이어진다. 우리 말로 옮기면,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고 (……) 큰 음은 소리가 없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 도는 이름 붙일 수 없다”가 된다. 이 문장들은 시적 대구를 이루는 반복적 표현들로 같은 뜻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큰 무엇은 무엇이 없다’라는 패턴의 되풀이다. 크다는 뜻의 대(大)는 노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언어 환경에서는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至大無外는)’는 뜻으로 쓰였다(이강수, 『노자와 장자』). 도는 밖이 없이 큰 것이다. 제한되지 않는 것이다. 어두운 밝음, 울퉁불퉁한 평평함, 낮은 높음 같은 형용모순이 도의 역설적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된다. 이름은 형태가 있는 것을 규정하는데, 도는 형체가 없으므로 이름 붙일 수 없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것이 노자의 첫머리에 있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큰 무엇은 ~이 없다’는 문장의 반복을 통해 말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고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 도(道)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라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큰 사각형은 모서리(隅)가 없고, 큰 음은 소리(聲)가 없고, 큰 형상은 모양(形)이 없다. 그렇다면 ‘큰 그릇은 이루어짐(成)이 없다’고 읽어야 할 것이다. ‘대기만성’에만 이 규칙을 무너뜨려‘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실제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늦을 만(晩)이 면할 면(免)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 노장사상을 정립한 왕필이 옮겨 적는 과정에서 免을 晩으로 잘못 써 뜻이 달라졌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이 교훈적이어서 사자성어로 널리 통용되었을 거라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대기만성은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라고 해석해야 ‘도는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결구와 부합한다. 모서리가 없는 사각형은 사각형이 아니고 소리가 없으면 음이 아니다. 모양이 없으면 형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주 큰 사각형, 아주 큰 음, 아주 큰 형상은 그 조건들을 뛰어넘는다.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 그것이 도다. 조건에 갇히지 않는 것이 도다. 모서리가 없는 큰 사각형, 이루어짐의 상태가 없는 큰 그릇, 소리가 없는 큰 음, 모양이 없는 큰 형태와 같이 규정할 수 없는 것, 뛰어넘는 것이 도다, 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기만성형’으로 평가받은 사람은 결국 큰 그릇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 무언가가 이루어졌다면, 그 무언가는 큰 그릇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어떤 그릇인지는 몰라도 큰 그릇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에게 ‘대기만성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이 수식어에 어울리는 사람은 이루려는 것이 없거나, 이루려는 것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풀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큰 그릇을 이루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큰 그릇은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실망할 것이고, 일할 의욕을 잃을 것이다. 목적에 이끌려 일하는 사람은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대개 일을 멈춘다. 그렇지만 큰 그릇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닌 사람은,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던 일을 그냥 묵묵히 할 것이다. 뭔가 이루어지면 뜻밖의 행운에 놀라거나 우연에 감사할 것이다. 보상은, 보상에 연연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보상이 된다.


5.

해질 무렵이면 산책을 나간다. 언제부턴가 습관이 되었다. 이 시간을 위해 하루를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걷는 것이 하루 일을 정리하는 것처럼 되었다. 걸으면 다리에 근육이 만들어지고, 근육이 만들어지면 걷는 데 유리하다. 다리를 움직여 걷는 것이 근육을 만드는 방법인 셈이다. 걷기와 근육 생성은 서로에게 원인이고 결과다. 그러나 근육을 만들기 위해 걷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 현상을 목적과 혼동할 필요가 없다.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걸으면 된다. 언제까지 쓸 거라고 미리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