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꿈과 해석

1.

 

가이사가 랍비 여호수아 벤 하나니아에게 와서 말했다. “당신의 백성들은 당신이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니 내가 꿈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 내게 말하라.” 랍비가 대답했다. “당신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당신을 왕의 군대에 소집하고, 사로잡아 황금 지팡이로 돼지를 돌보게 하는 것을 볼 것이다.” 가이사는 온종일 이에 대해 생각했고, 밤에 자기 꿈에서 그것을 보았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같은 책에는 페르시아 왕 샤푸르도 등장한다. 그 역시 랍비(슈무엘)에게 자기가 꿈에서 무엇을 볼지 말하라고 요구한다. 랍비는, 로마 사람들이 왕을 사로잡아 금으로 된 방아로 건축용 돌을 부수게 하는 것을 꿈에 볼 거라고 말한다. 왕은 온종일 이에 대해 생각했고, 밤에 자기 꿈에서 그것을 보았다고, 탈무드는 보고한다.

 

자기가 꿀 꿈을 알아맞히라는 로마와 페르시아 권력자의 요구는 말이 안 된다. 자기가 꿈에서 무엇을 볼지 말하라니! 누구도 아직 꾸지 않은 꿈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을 말하라고 요구한 권력자는 있었다. 이 역시 황당한 요구지만, 그래도 일어날 일을 맞추라는 것보다는 덜하다. 이 권력자의 이름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이다. 『다니엘서』에 보면, 왕은 잠에서 깨어난 후 간밤에 꾼 꿈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서 제국의 모든 마술사와 주술가, 점쟁이와 점성가들을 부른다. 자기가 꿈을 꾸었는데 내용은 생각나지 않고 불안하기만 하니 자기가 대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아내라는 것이 절대군주의 명령이다. ‘내가 꾼 꿈을 내게 말하라.’ 이 요구가 합당하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 시절의 마술사와 주술가와 점쟁이와 점성가들도 알았다. 그들은 왕에게 말했다. “임금님이 꾼 꿈의 내용을 말씀해주시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이들은 해몽이 자기들의 일임을 밝힌다. 해몽은 꿈이라는 재료를 전제한다. 꿈 없이 해몽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이 현자로 통한 것은 꿈을 해석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남이 꾼 꿈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꿈의 언어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차 있는 텍스트이다. 현명함은 은유와 상징을 해석하는 과정에 나타난다. 꿈/텍스트를 제시할 때 현자는 해몽/해석을 통해 현명함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니 왕은 꿈을 내놓고 해석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꾼 꿈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 꿈의 내용과 해몽을 함께 요구한다. 왕은 완고하고 단호하다. 너희들이 현자라면 왕인 자기가 꾸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꿈의 내용까지 알아내야 하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위협한다.

이 터무니없는 권력자 느부갓네살도 자기가 꾼, 꾸었지만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꿈이 무엇인지 물었지, 자기가 아직 꾸지 않은, 앞으로 꿀 꿈의 내용을 묻지는 않았다. ‘내가 꿀 꿈을 내게 말하라.’ 이 요구는 ‘내가 꾼 꿈을 내게 말하라’는 것보다 훨씬 더 황당하다. 꾼 꿈은 사실과 기억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꿀 꿈은 예언에 대한 것이다. 누가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어떻게 알아맞힌단 말인가. 꿈을 신이 보낸 연애편지라고도 한다. 그러나 신이 편지를 쓰기 전에 어떤 내용이 적힐지, 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미래로 가서 보고 돌아와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탈무드의 이 랍비들은 왕들이 꿈에 볼 내용을 알려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적국의 군대에 소집되어 돼지를 돌보거나 적군에 사로잡혀 건축용 돌을 부수는 노역을 하는 꿈을 꾸게 될 거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랍비들의 영험함, 혹은 신비스러운 능력에 대해 말하는 예화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현명함이라면 몰라도 영험함은 아니다.

가이사와 샤푸르왕이 랍비가 이야기해 준 대로 꿈을 꾼 것은 랍비들에게 신의 뜻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문서에 그런 언급은 없다. 강조점이 거기 있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탈무드는 다른 점을 강조한다. 왕은 랍비의 이야기를 듣고 온종일 그것에 대해 생각했고, 밤에 자기 꿈 속에서 그것을 보았다. 랍비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랍비들의 이야기를 ‘온종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랍비는 일어날 일을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왕은 ‘온종일’ 생각했다. 그러자 그대로 되었다.

 

“가이사는 온종일 이에 대해 생각했고, 밤에 자기 꿈에서 그것을 보았다.”

“샤프르는 온종일 이에 대해 생각했고 밤에 자기 꿈에서 그것을 보았다.”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온종일 생각했기 때문에 들은 것이 꿈에 나타났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염려와 걱정이 꿈이 된다. 욕망과 그리움이 꿈이 된다. 되풀이 생각함으로써 사람은 붙잡힌다. 왕들은 되풀이 생각함으로써 랍비들이 해준 이야기에 붙잡혔다. 온종일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려주면 당신이 무슨 꿈을 꿀지 알려줄 수 있다. 무엇을 염려하는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려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생각은 꿈으로 나타나고, 꿈은 생각으로 이어진다. 꿈은 현실과 이런 식으로 연결된다. 현실은 꿈에 작용하고, 꿈은 현실에 작용한다. 파스칼은 매일 밤 열두 시간 동안 왕이 된 꿈을 꾸는 직공과 매일 밤 열두 시간 동안 직공이 된 꿈을 꾸는 왕을 대비하며 누가 행복할지 생각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밤마다 똑같은 꿈을 꾼다면 이 꿈은 우리가 날마다 보는 사물만큼이나 우리에게 작용할 것이다.”(『팡세』) 

 

“자네는 너무나 군사정권을 미워하고, 그들과 너무 오랫동안 싸움을 하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이 해왔기 때문에 결국 자네도 그들 못지않게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어. 그토록 비참한 타락을 겪으면서까지 추구할 만큼 고귀한 이상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지.”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문장이다. 몬카타 장군이 처형당하기 전에 한때 친구였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에게 한 말이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내전 상태의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자유파의 영웅이다. 그는 고향인 마콘도에 돌아오자마자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때 친구였던 반대파의 장군 몬카타를 처형한다. 몬카타는 부엔디아 대령에게 마콘도의 역사상 가장 폭군적이고 악질적인 독재자가 될 거라고 경고하며 이 말을 했다.

부엔디아 대령은 적들을 너무 미워하고, 그들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이 해왔기 때문에 그들 못지않게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몬카타 장군의 진단이다. 이 말은 부엔디아가 본래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 그가 자유파의 투사가 된 것은 보수파가 선거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쁜 짓이었고, 그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반대편에 서기로 작정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나쁜 짓을 하는 나쁜 사람이 되었을까? ‘적들을 너무 미워하고 그들과 오래 싸우고 그들을 너무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의 엄청난 힘에 대한 암시가 이 말에 들어 있다. 그가 그런 사람이 된 것은 그런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적들을 미워했다. 미워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미워할 수는 없다. 사랑하기 위해서도 생각해야 하지만 미워하기 위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듯이 미워하는 사람도 닮아간다. 미워해서가 아니라, 미워하느라 생각해서이다. 상대방을 닮아가게 하는 것은 사랑의 기능이 아니고 생각의 기능이다. 사랑하느라 생각하든 미워하느라 생각하든 마찬가지다. 생각은 그 대상과의 일치를 지향한다. 사람은 생각한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2.

 

꿈은 지극히 사적이고, 고유하고, 전적으로 한 개인에게 속한 것이다. 내 꿈은 내가 꾼다. 내가 꾼 꿈을 나 말고는 모르고, 내가 꾼 꿈은 나에 대한 것이다. 내 꿈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도, 특정 사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나의 상태에 대한 은유이거나 상징이다. 누군가의 꿈을 해몽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위해 대신 꾸어줄 수는 없다. 더구나 꿈은 비자발적이기 때문에 꿈꾸는 이가 원할 때마다 어떤 종류의 꿈을 꿀 수도 없다. 직업적으로 다른 사람의 꿈을 대신 꾸어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꿈꾸는 것이 직업인 사람, 누군가를 위해 대신 꿈 꾸어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이름은 프라우 프리다이다. 그녀는 콜롬비아의 칼다스 지역에서 부유한 상인의 열한 자녀 중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말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녀는 아침밥을 먹기 전에 꿈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일곱 살 때 그녀는 자기 동생 중 한 명이 급류에 휩쓸려가는 꿈을 꾸었다. 약간 미신적인 성향이 있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동생이 계곡에서 헤엄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프라우 프리다는 자기가 꾼 꿈을 다르게 해석했다. 그녀는 자기 꿈이 의미하는 바가 동생이 급류에 휩쓸려갈 것이라는 게 아니라 동생이 사탕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다섯 살 아이에게 사탕 금지는 매우 가혹한 것이었음에도 딸의 예언력을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매우 엄하게 다섯 살 아이가 사탕 먹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녀가 한눈파는 사이에 그 아이는 몰래 카라멜을 삼켰고, 목이 막혀 죽었다.

이 재능은 나중에 그녀의 직업이 된다. 비엔나에서 일자리를 구할 때 그녀는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꿈을 꾸어줄 수 있다고 말했고, 그것으로 취직이 되었다. 아침마다 집주인 가족을 위해 꾼 꿈을 통해 그들의 운세를 해석해주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원하는 사람을 위해 어떻게 선택적으로 꿈을 꾸는지 그 방법에 대해 작가는 언급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집주인 가족들이 그녀를 신뢰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그 집에서 가족들이 그날그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결정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집안의 유일한 권위가 되었다. “가족에 관한 그녀의 지배는 절대적이었다. 심지어 가냘픈 한숨 소리조차도 그녀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꿈을 빌려드립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집주인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을 독차지해버렸다고 마르케스는 전한다.

그녀는 꿈을 꾸어주는 사람이다. 그녀에게는 꿈을 꾸(어주)는 것 말고 아무 능력도 없었고, 꿈을 꾸는 것 말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나에 대해 꾼 꿈을 나에게 말하라.’ 이 역시 ‘내가 꿀 꿈을 내게 말하라’라는 요구만큼 불가능한 주문이다. 꿈은 꿈을 꾸는 사람의 것이고, 꿈을 꾸는 사람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누군가에 대한 꿈을 꾸긴 하겠지만, 직업적으로 정기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경우에도 실은 꿈꾼 사람 자신의 상태와 기분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마 이치에 맞을 것이다.

고용 관계는 역전되었다. 프라우 프리다는 처음에는 꿈을 꾸어주는 자로 고용되었지만, 이내 고용한 이들을 지시하고 지배하는 자가 된다. 더 위험한 것은, 나를 위해 대신 꿈을 꾸어주는 사람이 꾼 꿈, 꾸었다고 말한 꿈의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꿈을 꾼 사람 말고 그 꿈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꾸지 않았으면서 꾸었다고 말한다고 해도 알 길이 없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꿈을 조작하고 이용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마르케스는 소설 속 화자로 하여금 “나는 항상 그녀의 꿈은 살아가기 위한 계략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함으로써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대신 꾼 꿈이 그 가족의 현실을 지배한다. 프라우 프리다가 하는 말이 집안의 유일한 권위가 되었다. 가족들은 한숨 쉬는 것조차 그녀의 지시에 따라서 하게 되었다. 꿈을 대신 꾸어주는 것은 봉사나 헌신이 아니다. 꿈은 예언과 연결되고, 예언은 권력으로 작동한다. 누군가에 대해 꿈을 꾼 자는 누군가를 지배한다. 이 지배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탈무드의 지혜에 따르면, 꿈의 기능이라기보다 암시의 효과이다. 너무 깊이 온종일 집중해서 생각하다 보면 꿈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혹은, 꿈의 이야기를 현실 속에, 스스로 재연한다. 꿈의 서사에 암시를 받아 삶을 꾸린다. 삶은 꿈의 복사판이 된다. 파스칼은 인생이 약간 덜 변덕스러운 꿈이라고 했다.

 

내 꿈을 누군가에게 대신 꾸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주권을 내주는 것과 같다. 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내 꿈은 내가 꾸어야 한다. 꿈을 맡기는 순간, 꿈이 아니라 삶이 지배당한다. 내 꿈을 대신 꾼 자가 내 꿈만 아니라 내 인생도 통제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꿈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 꿈이 아니라 삶을 살아야 한다.

 

 

3.

 

꿈에 대해 이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이스마일 카다레이다. 프랑스로 망명한 이 알바니아 작가는 제국의 모든 사람이 꾸는 꿈을 수집하고 선별하고 해석하는 거대한 국가 기관에 대한 소설을 썼다. 모든 사람들의 수면과 꿈을 관장하는 타비르 사라일이라는 정부 부처가 있다. 꿈을 꾼 사람은, 사소하든 중요하든, 이 기관에 자기가 꾼 꿈을 보고해야 한다. 사소한 꿈인지 중요한 꿈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꿈을 꾼 사람의 몫이 아니고 카비르 사라일의 일이다. 이 관청의 직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꿈들을 분류하고, 그 가운데 의미 있는 것들을 선별해서 해석한다. 그리고 술탄의 안위와 국가의 안보에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핵심몽을 추려 보고한다.

국가가 국민들의 사생활만 아니라 꿈까지 검열한다는 악몽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권력이 행동만 아니라 생각, 생각만 아니라 무의식까지 지배한다. 사람들의 가장 은밀한 영역인 꿈까지 뒤져 통제한다. 권력은 탐욕스럽거나 초조하다. 카다레의 소설에서, 이제 꿈에 대한 해석은 점성가와 주술사 같은 현자들에게 맡겨지지 않고 국가에 의해 관리된다. ‘제국의 기관들 가운데 백성들의 잠재된 의식의 일부가 제국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타비르 사라일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잠을 자면서 꾼 꿈이 모이고 분류되고 해석된다. 꿈은 정보처럼 다루어지고 기밀문서처럼 취급되고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 기관의 문헌보관소에는 세상의 모든 꿈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만큼 ‘이 세계의 진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누가 꾸었는지 모르는 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꿈은 일종의 신탁이 된다. 사람의 무의식에서 건져올린 정보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경고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꿈에 따라 죽는 사람이 생기고 몰락하는 가문이 나온다. 꿈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길몽이 되기도 하고 흉몽이 되기도 한다. 국가 기관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에 의해 해석된 꿈은 알바니아 지도자들에 대한 대학살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고 제국의 대외정책을 수정하게 하기도 한다. 프라우 프리다는 한 가정을 지배했지만, 타비르 사라일은 국가에 속한 모든 사람의 운명을 움켜쥐고 흔든다. 내가 꾼 꿈이 아니라 누가 꿨는지 모르는 어떤 꿈의 해석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된다. 내가 한 어떤 행위가 아니고, 심지어 내가 꾼 꿈도 아닌데, 파렴치범이 되거나 반역자가 되거나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된다. 꿈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꿈을 꾼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고발자가 된다. 그런데 이 고발자는 자기가 누구를 왜 고발하는지 모른다. 모른 채로 누군가의 삶을 치명적으로 망가뜨리는 일에 관여한다.

 

문제는 더 있다. 그렇게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꿈의 해석에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기관의 고급 관리는 막 입사한 주인공 마르크 알렘에게, 해석이란 것이 창의적인 작업이라고 알려줄 뿐 어떤 지침도 주지 않는다. 신입 직원을 위한 교육도, 심지어 매뉴얼도 없다. 담당 직원의 자의성에 온전히 맡겨진다. 상황에 대한 세심한 배려 없이 어떤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어떤 기준도 없이 창의성에만 내맡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 실제로 마르크 알렘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교육도 받지 않은 채 그처럼 중요한 꿈의 해석관이 된다. 당연히 비합리적인 처신들이 일어난다. 하나의 꿈이 ‘창의적으로’ 해석되는 과정에서 상반된 의미들이 부딪친다. 해석관은 그 가운데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순전히 자의적으로, 즉 ‘창의적으로’. 그리하여 그야말로 우연히, 해석관이 다른 해석을 선택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난다. 우연히 반역자가 생겨나고 억울하게 한 가문이 몰락한다. 그리고 예측할 수 있는 대로, 악의적인 동기에 의한 왜곡과 날조 역시 피할 수 없다. 꾸지 않은 꿈이 수집되거나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한 ‘창의적인’ 해석이 행해진다. 꿈의 수집과 해석은, 고도의 정치적인 수단이 된다. 꿈은 이용당한다.

 

『탈무드』에는, 똑같은 꿈을 꾼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바예와 라바는 꿈 해몽가 바 혜다를 찾아가 자기들이 꾼 똑같은 꿈의 해몽을 부탁했다. “우리가 포도주 나무통 위에 있는 고기를 보았다.” 해몽가 바 혜다는 아바예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포도주는 맛이 좋으며,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고기와 포도주를 사러 올 것이다.”그러나 같은 꿈을 꾼 라바에게는 다르게 말했다. “당신의 포도주는 강하여 모든 사람이 포도주와 함께 먹으려고 고기를 사야 할 것이다.” ‘포도주’와 ‘고기’라는 낱말을 이용한 작문 연습과도 같은 상이한 해몽이다.

그후 또 그들은 같은 꿈을 꾸었다. 이번에 그들은 꿈에 포도주 통 위에 있는 석류를 보았다. 해몽가 바 혜다는 아바예에게 “당신의 상품은 석류와 같이 비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인 라바에게는 “당신의 상품은 석류와 같이 시큼하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같은 꿈에 대해 한 사람은 좋은 해석을 받고 다른 사람은 나쁜 해석을 받는다. 그리고 곧 이유가 밝혀진다. 좋은 해석을 받은 사람인 아바예는 해몽가에게 돈을 지불했고, 나쁜 해석을 받은 사람인 라바는 돈을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라바도 나중에 돈을 지불했다. 그러자 해몽이 달라졌다고 탈무드는 전한다. 예컨대 그는 꿈에 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은 이 꿈에 대해 해몽가는 그가 무한히 많은 재산을 얻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또 자기 집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와서 벽돌 쌓는 것을 돕는 꿈을 꾸었는데, 당신의 가르침이 세상에 퍼질 꿈이라는 해몽을 듣는다. 해몽의 자의성이 고발된다. 악몽으로 해석되던 꿈이 이제는 길몽으로 해석된다. “모든 꿈은 해몽가의 입에 달렸다.”

 

다른 사람의 꿈이 나를 취조하는 근거로 작용할 때, 다른 사람이 꾼 꿈에 대한 해석이 나의 삶을 휘저으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은 그 현장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해석자의 입’이 내 삶의 영역으로 파동치며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4.

 

꿈은 텍스트이다.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텍스트의 운명이다. 모든 텍스트는 그 처지가 꿈과 같다. 해석가의 입장이나 시각, 심지어 이해관계에 따라 텍스트가 요동친다.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해몽가의 입이다. 해몽이 있기 전까지 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해석이 나올 때까지 텍스트는 그저 기다린다. 그가 좋게 말하면 좋은 꿈이 되고, 그가 나쁘게 말하면 나쁜 꿈이 된다. 그가 위대하다고 하면 위대한 텍스트가 되고, 그가 형편없다고 하면 형편없는 텍스트가 된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핵심몽이 되는 것은 핵심몽을 꾸었기 때문이 아니라 핵심몽이라고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우연히 위대해지거나 이유도 모른 채 형편없어진다. 어떤 작가가 걸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걸작이라고 말하는 ‘해석자의 입’에 의해 걸작이 탄생한다.

 

그러니 꿈에 붙들리지 말 것. 꿈으로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말 것. 꿈의 해석에 연연하지 말 것. 꿈은 내가 꾸어도 그 꿈의 실현이 나의 뜻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 삶의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할 것.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에는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죽는 사람도 나온다. 꿈을 꾸어 다른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죽기도 한다. 내 의지가 작동했다고 할 수 없는 꿈을 꾼 것도 내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내가 잠을 자는 동안 나에게 들이닥친 것일 뿐인 꿈 때문에 죽기도 한다. 우리는 꿈에 대해 속수무책이고, 속수무책인 그 꿈에게 지배당한다. 인생이 약간 덜 변덕스러운 꿈이라고 했던 파스칼의 문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인생은 더 변덕스러운 꿈이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그의 다른 소설 『부서진 4월』에서 ‘살아 있는 자들이란 이승에서 살도록 허락받은 죽은 자들’이라고 했다. 알바니아 산악지대의 피의 복수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그 지역의 관습법에 따라 가문을 대표하여 살인한 사람(그자크스)은 똑같은 의무를 지닌 희생자 가문의 누군가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 언젠가 죽을 것이 정해진 우리도 이 땅에서 살도록 허락받은 죽은 자들이 아닌가. 그러니 꿈이 들이닥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해도, 그 꿈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야 한다. 꿈을 이용해서 삶을 지배하려는 힘에는 필사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무용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몸부림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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