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확신과 사실

 

1.

에드거 앨런 포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셰에라자드의 운명에 대한 묘사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셰에라자드의 운명? 우리가 알고 있는 셰에라자드는 이야기꾼이다. 그녀는 악한 왕의 침실에서 천 하루 동안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자기 목숨을 구하고 왕국의 다른 여자들의 목숨도 같이 구한 지혜로운 사람이다. 여자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에 사로잡힌 왕은 자기 왕국의 여자를 취해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처형했다. 자발적으로 왕궁에 들어간 셰에라자드는 왕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를 해주고, 그녀의 이야기를 이어서 듣기 위해 왕은 그녀의 처형을 미룬다. 처형의 유보는 천 하루까지 이어지고, 그녀는 왕비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라비안나이트』의 결말이다.  
이 결말에 대해 의심 많은 작가는 이의를 제기한다. ‘수없이 많은 해피엔딩의 평범한 이야기들처럼 진실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행복한 결말’이라는 것이 에드거 앨런 포의 생각이다. 무엇이 문제라는 것일까. 포는 셰에라자드의 천 이틀째 밤에 대해 궁금해한다. 왜 그녀의 천 이튿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가,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마땅하지 않다. 이야기를 어디서 어떻게 끝낼 것인가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작가)의 권리이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왜 거기서, 그렇게 끝나느냐고 묻는 것은 쓸데없는 참견이다. 독자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작가는 왕이 천 하루째 밤을 지나고 나서 마침내 셰에라자드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결말을 선택했다. 천 두번째 밤에도 그녀는 이야기를 했을까? 이제 그녀는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왕은 천 두번째 밤에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모른다. 책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가 거기서부터는 침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선택이 순수하게 독자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 선택에 관여한 요소들을 언급하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내적, 외적 조건들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선택은 때로 의식적이지만 더 자주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완전무결한 신이 아니고 감정의 진공 상태에 있지도 않다. 개인의 욕망이 투사되거나 시대의 공기가 스며드는 걸 피할 수 없다. 실은 사람과 시대의 욕망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이야기다. 그러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누가 썼는지 모르거나 수없이 많은 사람이 거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책에 관여한, 했을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소득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넘어가는 편이 차라리 현명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독자인 우리는 가끔 결말이 왜 이렇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이게 끝이라고? 라고 항의하고 싶어지는 경험을 한다. 예컨대 에드거 앨런 포처럼. 천 하루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던 이야기를 천 두번째 밤에는 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날 밤에도 이야기를 했다면 그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 이야기에 대한 왕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런 소설이 있다.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 않거나,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은 소설. 그럴 때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다. 이야기는 태어나는 순간 생명이다. 독자적 운명을 산다) 이야기를 다시 짓는 것이다. 잠든 이야기를 깨우고 끝난 이야기를 살리는 것이다. 즉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이미 있는 이야기는 바꿀 수 없지만, 그건 권한 밖이지만, 다르게 다시 하는 건 할 수 있다. 그걸 막을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새로운 이야기는 이미 있는 이야기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이야기는 부모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가 너무 많을지는 몰라도 아예 없지는 않다. 이미 있던 이야기의 속편이나 덧붙임, 혹은 변주 아닌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 앞에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 뒤에도 이야기가 있다. 뒷이야기는 앞 이야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이 고유한 것처럼, 앞 이야기에서 나온 뒷이야기 또한 고유하다. 고유한, 자기 삶을 산다.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새것 아닌 것이 없다. 셰에라자드의 천일야화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2.

에드거 앨런 포는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는 이 오래된, 광대한 책이 멈춘 천 하루째 밤 이후, 천 두번째 밤의 셰에라자드를 상상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 다른 이야기의 줄기가 뻗어 나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그 줄기를 따라 「천일야화의 천 두번째 이야기」를 썼다. 그는 새로운 이야기의 작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천 두번째 밤에 셰에라자드는 이렇게 말한다. “내 귀여운 동생아, 이제 교수형에 대한 그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흉악한 의무도 기쁘게 철회되고 나니 난 너와 왕에게 죄스럽구나. 신드바드 이야기의 대단원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 홍성영 옮김, 15쪽) 동생과 왕은 천 하루 동안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신드바드가 훨씬 더 재미있고 다양한 모험을 겪었는데 그 이야기를 할 때 너무 졸려서 짤막하게 줄여버렸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제 그녀가 너무 졸려서 하지 않았던 이야기, 신드바드의 더 재미있고 다양한 모험을 들려준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 의하면 그렇다.
고향으로 돌아와 여러 해 동안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던 신드바드에게 다시 외국을 여행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고, 셰에라자드가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고, 포는 전한다. 그리고 신드바드가 그 여행중에 겪은 기이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야기하는 셰에라자드는 약간 신이 난 것 같다. 그럴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에서,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기꺼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다마스쿠스나 바그다드의 모든 궁전을 합친 것보다 더 넓고 장대한 궁전들이 수없이 많이 만들어진 동굴 나라에 대해 말한다. 모든 사물이 정반대로 보이는 땅, 공중에서 자라는 식물들, 뼈가 쇠로 되어 있고 피는 끓는 물로 된 거대한 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진 마술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문제는 왕의 반응이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들려주는 셰에라자드의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던 왕은 차츰 지루해하고 재미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고, 나중에는 엉터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불만을 드러낸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만하라고 소리친다. “네 거짓말로 인해 내 머리통이 지끈지끈하도다.”
그리고 셰에라자드의 운명이 『아라비안나이트』의 결말과 다르게 마무리된다. 이야기를 들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고, 거짓말이라고 호통치던 왕은 날이 밝자마자 그녀를 처형한다. 왕은 망설이지 않는다. 천 하루 동안 그녀를 살게 했던 ‘이야기’가 이제 그녀를 죽게 한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살 수 있었던 그녀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죽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물론 왕의 변덕 때문이다. 왕은 천 하루 동안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천 두 번째 밤에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특별하지 않다. 변덕은 이례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어떤 특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변덕스럽다는 건 이의 제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변덕스럽지 않은 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변덕은 왕의 권한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왕에게 허용되지 않는 권한이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변덕은 왕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지 모른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된다는 점에서. 이렇게 하다가 저렇게 해도 된다는 점에서.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속성은 특징적 성격, 타고난 것. 그러니 지적되지 않는다. 속성을 지적하는 것은 존재를 타격하는 것과 같으므로. 왕에게 변덕을 부리는 것과 변덕을 부리지 않는 것은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그런 왕조차도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권리가 아니다. 그에게 주어진 무한한 권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야기를 바꾸는 것만은 할 수 없다.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중단시킬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 이렇게 바꾸라, 저쪽을 택하라, 요구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그는 왕이 아니라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권한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이야기꾼에게 허용된 유일한 권한이 자기 뜻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왕의 지위를 버리지 않은 채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다. 이야기를 바꾸는 대신 그가 가진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만하라고 소리지르고 말도 안 된다고 호통치는 것이다. 기꺼이 듣다가 어느 순간 지루해하고 짜증내는 것이다. 변덕 부리는 것이다. 

 

독자는 변덕이 권한이고 속성인 왕과 같다. 독자는 독자의 자리, 그 권능의 자리를 버리지 않는 한 이야기를 바꿀 수 없다. 바꿀 수는 없지만 그만하라고 소리지르고 말도 안 된다고 호통칠 수는 있다. 기꺼이 듣다가 어느 순간 지루해하고 짜증낼 수는 있다. 설령 그로 인해 그 이야기꾼/작가가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이 권능을 가진 독자/왕의 변덕을 탓할 수는 없다. 변덕을 부리는 것은, 왕에게는, 변덕을 부리지 않는 것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작가에게 보장된 것은 순전히 자의적,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할 권리이고, 왕/독자에게 보장된 것은 이야기를 듣거나 듣지 않을 권리이다. 왕/독자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이야기꾼/작가의 이야기를 바꾸거나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이야기꾼/작가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왕/독자의 변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3.

셰에라자드의 운명은 이야기를 듣는 왕이 쥐고 있다. 그녀의 목숨을 천 하루 동안 이어가게 한 것이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더 듣기를 원하며 귀를 기울였던 왕인 것처럼,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이제는 더 듣기를 원하지 않으며 짜증을 내는 왕이다. 더 듣기를 원하는 왕은 더 듣기를 원하지 않기도 한다. 더 듣기를 원하다가 더 듣기를 원하지 않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왕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왕은 셰에라자드의 이야기가 엉터리라고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고, 거짓말이라고 한다. 왕이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이다. 말도 안 된다는 것. 거짓말이라는 것. 
그런데 에드거 앨런 포는 왕의 의견에 딴지를 걸 작정이라도 한 듯 셰에라자드가 하는 이야기( 속 신드바드의 일화들)가 지어낸 것, 허구, 거짓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 실화임을 아주 친절하고 설득력 있는 각주를 통해 강조하다. 예컨대 ‘다마스쿠스나 바그다드의 모든 궁전을 합친 것보다 더 넓고 장대한 궁전들이 수없이 많이 만들어진 동굴 나라’는 켄터키의 매머드 굴을 가리킨다. ‘모든 사물이 정반대로 보이는 땅’에는 이런 주석이 붙어 있다. “1790년 카라카스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화강암질 토양 덩어리가 침강해서 지름이 700미터, 깊이가 20에서 30미터까지 되는 호수가 생겨났다. 가라앉은 땅덩어리는 아리파오 숲의 한 부분이었고, 나무들은 물속에서 수개월 동안이나 초록색을 유지했다. 『머레이』, p.211-원주”(같은 책, 22쪽) ‘공중에서 자라는 식물’은 영양분을 공기에서 얻는 난초과의 에피덴드론, 플로스 아이리스라고 알려준다. ‘뼈가 쇠로 되어 있고 피는 끓는 물로 된 거대한 말’은 런던과 엑세터 사이를 잇는 대웨스턴 철도를 달리는 기차라고 설명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는 ‘전기전보 인쇄 기구’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이십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짧은 소설에는 정확히 서른여섯 개의 주석이 붙어 있는데, 그중 번역자가 붙인 네 개를 뺀 나머지 서른두 개가 모두 작가의 원주이고, 그것들은 전부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신드바드의 모험에 나오는 기이한 이야기들의 비허구성을 납득시키기 위한 자료와 부연설명이다. 작가가 기울인 자료 수집의 수고에 고개가 숙여질 정도의 성실함이다. 
에드거 앨란 포의 의도는 너무나 분명하고 노골적이어서 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기가 힘들다. 그는 왕의 의견과는 달리,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열심이다. 엉터리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그럴 리가! 이건 사실이야.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 어딘가에 있는 진짜 현실. 여기 자료가 있어. 이게 그 증거야…… 그러니까 포는, 소설가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동원해가며 왕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이 틀렸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에게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법과 환상,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허구(fiction)에 열광하던 왕의 관심이 실제로 어딘가에 있는 현실, 비허구(nonfiction)를 듣자 시들해지고, 지루해하고, 짜증을 내고, 마침내 격노하는 데 이르렀다. 허구로 얻은 셰에라자드의 목숨은 비허구에 의해 사라진다. 그녀는 ‘없는’ 것을 지어낸 이야기로 살았지만, ‘있는’ 것을 말하는 이야기로 죽었다. 독자가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것은 비사실이다, 사실이 아니다, 라고 포는 말하고 싶은 것일까. 사실을 말하면, 작가는 죽는다, 그것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운명이다, 라고 경고하는 것일까. 이 경고가 왜 탄식처럼 들릴까.

 

4.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Überzeugungen)보다는 ‘사실(Fakten)’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는 ‘사실’이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신념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는 이른바 ‘확신’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확신/신념은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다, 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없었다.’─이 말은 인간의 본성을 직격한다. 인간은 사실보다 확신을 선호한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오고 인간 사회를 물들인 수없이 많은 이런저런 확신/신념들 가운데 사실의 뒷받침을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니! 벤야민은 확신(Überzeugung)의 복수형 Überzeugungen을 썼다. 신념은 신념들이다. 여러 개다. 여러 개인 신념들은 다양성이 아니라 대결, 갈등, 혼란을 예정한다. 복수의 신념들은 진리가 아니다.
사실의 토대 없이 신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라고 묻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데(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확신에 따라 살고 있다, 사실에 근거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그들의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을 때만 중요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사실만을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한다. 혹은 자기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하여,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확신에 의해 사실이 비틀어진다. 확신은 사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고 창작하기도 한다. 희망, 혹은 증오, 혹은 두려움에 의해 무언가가 덧붙거나 떨어져나간다. 거대한 초록이 사라지고 눈곱만한 회색 얼룩이 도드라진다. 다른 뉴스가 나온다. 그 뉴스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것 외에 사실을 알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그것 외에 다른 사실이 있을 리 없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므로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뉴스는 확신이 만든 것인데, 확신을 공유한 사람들에 의해, 예컨대 한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끼리 한 목소리로 떠드는 것과 같은 과정을 통해 한층 공고해지고 확실해지고, 불변의 진실이 된다. 
방에서 나오는 순간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어떤 사람은 두려워서 그 방을 나오지 않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 폴 틸리히는 불편함 때문에 우리가 진실을 회피한다고 폭로한다. “당신이 진리를 회피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 심오해서가 아니라 너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터전』) 익숙한 방에서 나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편하다. 익숙한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방의 공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 방안의 공기가 편한 것은 자신이나 자신과 다름없는 사람들의 호흡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방은 하나의 세계다. 그러나 극복되어야 할 세계이다. 

 

고속도로를 무려 13킬로미터나 역주행하다가 잡힌 운전자가 있었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면허 취소 수준이었던 이 사람은, 자기는 똑바로 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거꾸로 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이 쫓아오며 차를 세울 때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 의아했을 것이다. 
십여 년 전에 영국에서 일 년을 지냈는데, 우리나라와 주행 방향과 운전석의 위치가 다른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 따로 주행 연수를 받았는데도 운전대를 잡으면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앞에 차가 있으면 뒤따라가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만 내 앞에 차가 없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했다. 나는 내 운전에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사거리에 멈춰 있다가 신호등이 바뀌어 출발할 때 반대 차선으로 들어간 것이다. 곧 실수한 걸 깨닫고 후진해서 나왔지만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뒤따라오는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보다 다행인 것은 진입하자마자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역주행을 했을지, 그러다 무슨 사고를 냈을지 누가 알겠는가.

 

역주행은 위험하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한 것은 자기가 역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거꾸로 가면서 바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역주행할 가능성을 아예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깜짝 놀라 후진해서 돌아나오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옳다는 확신에 차서 바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 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못 가는 사람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혹은 자기가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만이 반성한다.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반성이라는 옵션이 없다. 그들은 반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투철할수록 더 심하게 비난한다. 

 

확신이 사람을 당당하게 만든다. 자신감은 주체적 자아의 표상이라고 선전된다. 확신에 찬 사람은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눈치보지 않는다.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거침없고 어디에도 막히지 않는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한 사람은 절대군주 루이 14세였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다.” 자신감이 권장되면서 자만심을 흡수했다. 미국 힙합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플렉스(Flex) 현상이 과도한 자기 과시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현대인의 존재 방식이 되었다. 타인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다. 자신감의 결여, 비굴함으로 치부됨으로 해롭다. 현대에는 해로운 것,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다. 옳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 확신은 일종의 처세의 갑옷 같은 것이 되었다. 확신의 갑옷 없이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 그러니 누구나 어떤 갑옷인가를 착용하려고 한다.

 

너무, 지나치게 사람을, ‘자아’를 부추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주행 운전자의 그처럼 투철한 확신이 면허 취소 수준의 음주에서 비롯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취했고, 분별력을 잃었고, 혹시 자기가 잘못 가고 있는지 돌아볼(의심해볼) 여유를 빼앗겼고, 오직 맹목의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기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만취한 사람과 같다. 제어 불능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데 다반사가 되었다.

 

5.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 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는 문장으로 디트리히 본회퍼는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나를 따르라』).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한 목사로 알려진 이 신학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뜻을 이루기 위한 확신에 찬 행동을 경계한다. 어떤 선한 뜻도, 설령 진리라고 하더라도 강요의 방법으로 이루어선 안 된다고 그는 가르친다. 그럴 때 그 진리는 이념이 되고 만다. 이념은 이념들이고, 결국 진리에서 떨어져나간다. 그에 의하면 광신은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이념, 즉 신념의 행동이다. 광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이념이다. 광신이라는 종교적 열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이념이다, 종교는 아니다. 그것은 신이 광신적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신적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다. 
 
종교는 자기 확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종교는 자기 확신의 부재,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의 믿음이다.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파울 틸리히) 이념은 반대다. 이념은 의심하지 않는,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투철한 믿음의 체계이다. 이념은 투철한 확신을 가진 광신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광신자들에 의해 막강해진다. 

 

본회퍼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예수의) 말씀’과 ‘이념’을 대립시킨다. 이념은 강하지만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이념에는 불가능이 없지만 복음에는 불가능이 있다.” 이 문장은 역설이 아니다. 광신자들에게는 불가능이 없는데, 그것은 광신자들이 저항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항을 염두에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른 힘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이들, 다른 길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이들을 이길 힘은 없다. 이념을 가진 이들의 믿음이 항상 더 강하고 투철하다. 

 

많은 경우 종교는 이념에 이용당한다. 이념이 제 일을 하기 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강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념이 하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을 강요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이념으로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렇게 할 때 종교는 이념이 되고 만다. 자기가 바르게 가는지 반성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데만 열정을 쏟게 된다. 술 취한 사람과 다름없게 된다. 종교의 탈을 쓴 광신자들의 집단을 종교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를 선동꾼이라면 모를까,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니까 광신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지나친 종교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혀 종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설득(Überzeugen)은 비생산적인 것이다”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신념으로는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왜 그런가? 신념이나 설득이 아니라 사실/진실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확신 앞에 사실이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입장과 의견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특히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입장과 의견 없는 사실의 나열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니까. 그러나 그 의견이 사실에 바탕하지 않았거나 진실과 거리가 있을 때, 확신이 제공한 허구일 뿐일 때 그 의견은 단지 확증편향의 다른 이름이므로 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확신은 흉기와 같아서 사람을 해친다. 벤야민은 현재가 확신보다는 ‘사실’에 기반한 사유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는 문장을 한 세기 전에(『일방통행로』는 1928년에 출판되었다) 썼지만, 우리의 현재는 여전히 확신이 사실을 삼키는 시대다. 사실이 어떤 곳에서도 한 번도 확신을 뒷받침한 적 없다는 그의 두 번째 문장이 여전히 유효한 현재다. 
현재가 어느 시대보다 더 확신에 지배되는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시대 못지않은 확신의 시대라는 건 확실하다.
‘사실을 말하는 자는 죽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경고가 탄식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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