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기다림

 

1.

5일이 되면 그녀는 어김없이 기차역으로 간다. 5일은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의 광기가 몰아치던 시기에 반동으로 몰려 붙잡혀간 남편이 복권되면서 돌아온다는 날이 5일이다. 장이머우 감독의 2014년 개봉 영화 <5일의 마중> 이야기다. 공리가 연기한 펑완위는 그러나 집에 돌아온 남편 루옌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그녀의 기억장애 원인으로 암시된다. 그녀는 수용소를 탈출해서 집을 찾아온 남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감시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딸의 장래를 위해서였다. 남편은 그녀의 눈앞에서 잡혀 끌려가고, 그날 이후 그녀는 문을 닫지 않고 지낸다. 
이미 왔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펑완위에게 루옌스는 오지 않은 것과 같다. 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남편이 5일에 온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달 5일에 기차역에 도착한다는 루옌스의 편지를 받았고, 그러므로 남편을 맞기 위해 그날이 되면 기차역으로 간다, 가야 한다. 5일은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고,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씩 어김없이 기차역으로 간다. 평생을 그렇게 하며 늙어간다. 이미 와서 그녀 곁에,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 있는 남편이 그 마중에 동행한다. 

 

펑완위의 마중은 끝나지 않는다. 5일이, 한 달에 한 번씩, 계속해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5일이 끝없기 때문이다. 끝없는 반복이 시간의 운동 방식이다. 물론 지나간 5일(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다가오는 5일은 새로운 5일이다. 지나간 5일은 지난달 5일이고, 새로 오는 5일은 이번 달 5일이다. 그러나 지난달 5일도 그날이 오기까지는 이번 달 5일이었다. 지나간 5일도 새로운 5일이었다. 
‘새롭다’는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는 것이 출현할 때 쓴다. ‘돌아오다’는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새롭다’와 ‘돌아오다’는 같이 쓸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아침이 돌아왔다, 라고 하고, 봄이 돌아왔다, 라고 쓴다. 더 직접적으로, 새아침이 돌아왔다, 새봄이 돌아왔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순이다. 오늘 맞이하는 아침은 어제 아침과 같은 아침이 아니다. 올해 맞는 봄은 지난해 봄과 같은 봄이 아니다.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던 것이 다시 올 수 없다. 이전에 있었던 어떤 것만 다시 올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이 인지하는 시간은 이렇게 흐른다. 우리의 시간 인식은 이 문장에서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있어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시간이 다시 돌아온다. 오늘 아침은 지금까지 있어본 적 없는 새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번 달 5일은 처음 나타난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우주의 시간은 직선으로 곧장 흐르지만, 그래서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그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끝없이 반복하고 되풀이하며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시간에 수없이 자주 발을 담근다. 추억이 영원하고, 놓친, 잃어버린 기회를 다시 잡는 것이 가능한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니 기다림을 멈출 수 없다. 새로운 5일이 늘 다시 돌아오니 마중을 가지 않을 수 없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에게 소년은 고도가 내일 온다고 전한다. 

 

블라디미르: 고도 씨의 말을 전하러 왔느냐?

소년: 예.

블라디미르: 그이는 오늘 저녁에 안 오지.

소년: 안 오십니다.

블라디미르: 그러나 내일은 오지. 

소년: 예.

블라디미르: 틀림없이.

소년: 예.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홍복유 옮김, 문예출판사)

 

고도가 오늘 오지 않을 거라는 소년의 전갈은 1막 끝 부분과 2막 끝 부분에 반복해서 나온다. 아마 3막이 있다면 거기서도 여지없이 등장할 것이다. 고도는 내일 온다. 내일은 오지 않는 시간이다. 내일에 이르렀다고 깨닫는 순간, 그 시간은 오늘이 된다. 내일은 정복되지 않는다. 사람이 ‘앞’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내일에 이를 수 없다. ‘앞’은 항상 앞에 있고,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여전히 앞에 있다. 앞에 이른 순간 그곳은 여기가 되고, 여기 앞에는 다시 앞이 있다. ‘앞’은 항상 앞에 놓인다. ‘앞’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내일’은 도착할 수 없는 시간이다. 내일 오는 고도는 만날 수 없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의 기다림이 한없이 연기되고 그 기다림이 일생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5일의 마중>의 펑완위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은 일생이 기다림인 사람들이다. 고도가 오지 않을 거라면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고도는 올 것이다. 고도는 내일 올 것이고, 그러니 그들은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에스트라곤이 묻는다. “우린 이제 무엇을 할까?” 블라디미르가 대답한다. “고도를 기다리지.” 이 문답이 수없이 반복된다. “우리는 무엇을 할까?” “고도를 기다리지.”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 말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연극을 하고 노래를 하고 목을 매달고 생각하고 실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은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면서 하는 일이다. 기다림의 수단으로 하는 일이다. 기다림이 그들의 일이다. 그 모든 것들이 기다리는 일의 일부이다. 기다리는 것 말고 그들이 정말로 하는 일은 없다.
루옌스가 오지 않을 거라면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올 것이다. 온다고 했으니 올 것이다. 그는 5일에 올 것이고, 그러니 펑완위는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한다. 남편은 이미 왔다. 저이가 루옌스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남편은 5일에 온다. 5일에 오는 이가 그이다. 루옌스가 5일 온다는 것 말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 역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면서 하는 일이다. 기다림의 수단으로 하는 일이다. 기다림이 그녀의 일이다. 기다리는 것 말고 그녀가 정말로 하는 일은 없다. 

 

펑완위는 남편을 기다리고 사무엘 베케트의 주인공들은 고도를 기다리지만, 디노 부차티의 병사들은 타타르인들을 기다린다. 국경을 마주한 요새에 머물며 사막 너머 북쪽에서 쳐들어올 이민족들을 기다리는 병사들은 이탈리아의 작가 디노 부차티의 소설 『타타르인의 사막』에 나온다. 이들은 오래전에 전투에서 패한 타타르인들이 사라지지 않고 사막 너머 북쪽 땅 어딘가에 진을 치고 있으며 언젠가 침략해올 거라고 믿는다. 타타르인이라니! 전설이나 신화, 까마득한 과거를 상기시키는 이 과거의 종족들이 왜 시간을 거슬러 다시 온단 말인가. 타타르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타타르인들이 올 거라는 믿음은 철회되지 않는다. 이 믿음은 세대를 거쳐 유전되고 시간과 함께 두꺼워졌다. 오지 않는 미지의 적을 기다리며 어떤 사람들은 이 오지의 요새에서 평생을 보낸다. 
올 타타르인들은 그들이 요새를 지키는 이유이고, 오지 않는 타타르인들은 그들이 계속 요새를 지키는 이유이다. 타타르인들은 와야 하고, 오지 않아야 한다. 타타르인들은 요새의 병사들이 그곳에 있기 위해 (언젠가) 와야 하고, 요새의 병사들이 그곳에 계속 있기 위해 (언제까지) 오지 않아야 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고도가 와야 하고, 오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타타르인들 역시 요새의 병사들에게 와야 하고 오지 않아야 한다. 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기다리지 않을 것이고, 온다면 그들은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다. 기다림을 위해 그들은 와야 하고 또 오지 않아야 한다. 
기다림이 삶의 일부가 아니라, 기다림이 곧 삶이다. 그들은 어떤 삶(타타르인들과의 전투)을 기다리지만, 실은 삶을 기다리는, 그것이 곧 삶이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일생을 산다.

 

카프카는 훨씬 분명하고 간결하다. 한 사람이 법(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하지만 법 앞의 문지기는 허락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럴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안 된다고 대답한다. 이 사람은 문지기를 뚫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내 문지기의 위세에 눌려 허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을 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타타르인 같은 턱수염”을 가진 문지기가 워낙 “막강하”기 때문이다. 이 막강한 문지기의 말에 의하면, 방마다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데, 갈수록 힘센 문지기를 만나야 하고, 세번째 문지기만 해도 자기조차 쳐다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다림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카프카의 우화 「법 앞에서」 이야기다. 
그의 기다림은 죽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죽음을 앞둔 시점이 되어서야 그는 묻는다. 나 말고는 이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지요? 그 사람이 곧 임종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문지기는 말한다. “이 문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문이 닫힌다. 그의 기다림은 죽음에 이르러 끝난다. 삶이 곧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 사람은 자기에게 허락된 기다림을 산다.

 

2.

기다림은 그냥,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무위와 관계없다. 오히려 기다림은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말하자면, 노동.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일을 하느라고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그러나 그가 하지 않은 일들 가운데는 큰 일도 있고 작은 일도 있다. 예민한 일도 있고 대범한 일도 있다. 사소한 일도 있고 대단한 일도 있다. 
롤랑 바르트는 연인의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묘사함으로써 기다림의 ‘일’을 강조한다. “나는 방에서 나갈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전화를 걸 수도(통화중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 전화를 해오면 괴로워하고(똑같은 이유로 해서), 외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기다리는 사람은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에 비유된다.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이 부동은 그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다른 많은 움직임들과 그 질량이 같다. 그가 할 수 있는, 하지 않은 일들을 할 때 필요한 에너지가 그의 기다림에 쓰인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일은 기다리느라고 그가 하지 않은/못한 모든 일들과 등가이다. 기다리는 데는 힘이 많이 든다. 기다리는 데는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기다리는 사람은 그냥 있지 못하고 기차역으로 마중 나간다. 맞으러 가는 사람은 기다리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황지우는 “너를” 기다리는 것이 “너에게” 가는 것임을 벌써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모든 발자국에 가슴이 쿵쿵거리고,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인 것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고 시인은 고백한다(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맞으러 가는 사람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기다리는 동안’에 기다리는 사람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평생 동안 문지기가 내준 의자에 앉아 있었던, 카프카의 저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허락받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문지기에게 부탁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문지기를 지치게 했다고 카프카는 알려준다. 문지기는 이 사람 때문에, 이 사람이 한 일들 때문에 지칠 정도가 되었다. 그가 한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 하나로 카프카는 이 사람이 자기가 가진 값나가는 것을 다 주면서 문지기를 매수하려 했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남의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자기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복음서의 우화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 사람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문지기는 그가 주는 값나가는 것을 다 받으면서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문지기는 이렇게 말한다. “받아두기는 하지만, 그건 다 당신이 뭔가 해볼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받아주는 거요.” 문지기의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법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이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는 문지기가 제공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문이 열리기를 막연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이 열리도록 무언가를 했다. 삶을 살았다. 그것이 그가 기다리는 방법이었다. 기다림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의 들러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결혼식이 시작되면 신부를 에스코트하여 신랑 집까지 행진하도록 선택되었다. 들러리들은 각자 등불을 마련하고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을 기다린다. 그런데 신랑의 도착이 늦어진다. 기다리다 지친 열 명의 들러리들은 모두 잠이 든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예수는 들러리들이 지쳐 잠이 든 것을 문제삼지 않는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다른 데 있다. 그는 열 명의 들러리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소개한다. 한 그룹은 등불과 함께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고, 다른 그룹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 신랑이 예정대로 도착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도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신랑은 올 거라고 기대하는 시간에 오지 않았고, 기다림은 연기되었다. 기다림은 언제나 연기된다.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보다 늦게 온다. 카프카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와야 할 날보다 하루 늦게 올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날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날 올 거라고. 오지 않는다가 아니다. “메시아는 올 것이다.” 언제나 예정하고 기대하는 날보다 늦게 온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와야 할 날’ 이후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와야 할’ 시간까지만 기다린 다섯 명의 들러리들은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었다. 

 

제때에 도착하는 기다림은 없다. 아무리 빨리 와도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항상 늦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한다. 그것은 내가 항상, 어쩔 수 없이 일찍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사람에게 ‘제때’는 정해져 있지 않다. ‘와야 할’ 시간은 없다.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가 기다리는 사람이 제때에 오지 않으리라는 것, 예정된 일이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기다림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들은 기다림의 이 속성, 기다림에 ‘제때’란 없고,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다.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이 한없이 지연될 것을 알고 대비해야 한다. 기다림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3.

기다리는 이가 오지 않은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기다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오지 않았고 여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온다는 약속, 일어날 것이라는 예정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올 때까지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일어날 때까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5월의 마중>을 참고해서 말하면, ‘아직’ 오지 않은 그 사람은 실은 ‘이미’와 있다. 펑완위는 ‘아직’ 오지 않은 루옌스를 기다린다. 그러나 루옌스는, 우리는 안다, ‘이미’ 왔다. ‘이미’ 와서 그녀 곁에 그녀와 함께 있다. ‘이미’ 온 그가 ‘아직’ 오지 않은 그를 기다리는 그녀와 함께 기차역에 마중 가고, 마중 가서 같이 기다린다. 그를 기다리는 그녀의 기다림에 그가 함께한다. 

 

종말론적 사유에 의하면, 메시아는 ‘이미’ 왔고, ‘아직’ 오지 않았다. 이미 온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기다린다. 카프카의 그 이상한 문장, ‘메시아는 마지막날에 오지 않고, 가장 마지막날에 올 것이다’는 이것을 정확히 가리킨다. 유대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마지막은 메시아의 시간이다. 세상이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건 메시아가 ‘이미’ 왔음을 전제한다. 마지막(종말)은 메시아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온 메시아와 함께 시작된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은 메시아의 도래에 의해 완성될 것이다. 마지막이 마지막을 맞을 것이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 

 

에세네파는 유대 광야 쿰란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이들은 세속의 번잡함을 피해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들어갔다. 종말론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접고 곧 임할 다른 나라를 기다리며 살았다. 규율은 엄격했고 노동과 독서와 예배가 일상이었다. 
이 세상에 대한 절망이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한다.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마지막을 먼저 선언해야 한다. 그 광야의 동굴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은 이미 마지막 시간을 살기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와야 할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지막을 기다리며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필사였다. 그들은 양피지에 성경을 필사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의 표현이었고, 기다림의 방법이었다.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헤매던 한 베두인 목동에 의해 1947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거주지에서 원본 그대로 보존된 성경 사본 두루마리가 다수 발견되었다. 물론 다른 것도 있었다. 여러 개의 물 저장소와 수로, 창고, 작업장, 그리고 무덤 등이 나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살았다’. 삶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살았다. 물을 끌어들이고, 농사를 짓고, 성경을 필사하고, 무엇보다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살았다. 기다림에는 ‘제때’가 따로 없으니까, 언제든 지연되고 연기될 수 있으니까, 그것이 기다림의 속성이니까, 여분의 충분한 기름이 필요하다는 걸 그들은 알았다. 그들은 그것으로 그들이 이미 온 마지막을 살면서 아직 오지 않은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들임을 증명했다. 기다림은 삶이었고, 삶은 기다림이었다. 기다림과 삶은 구분되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기다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다. 내일에 미리 도착한 사람들이다. 내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의 시간이다. 일어나면 현재가 되는 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에 붙은 이름이 내일이다. 기다림이 완성되면 내일은 현재가 된다. 내일을 현재로 만든 사람들, 내일을 현재로 만들어 내일을 없앤 사람들,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현재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메시아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 만끽한다. 

 

카프카는 인간이 조급함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게으름 때문에 낙원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가, 곧 자기 문장을 수정한다. 그는 중요한 죄는 단 하나라고 고쳐 말한다. “조급함 때문에 그들은 추방됐고, 조급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조급함 때문에 추방된 인간은 조급함 때문에 다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기다리지 못해서 낙원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어쩌면 기다리지 못해서, 저기/내일이 아니라 여기/현재에 낙원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신의 시간에 익숙하지 않아서 인간은 대개 기다리는 데 실패한다. 

 

4.

“바로 그 순간,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생각이, 분명하고 무서운 한 생각이 떠올랐다. 죽음이었다.”
오로지 오지 않는 적들을 기다리며 삼십 년의 세월을 요새에서 보낸 『타타르인의 사막』의 주인공 드로고는 정작 타타르인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요새를 떠난다. 그는 병에 걸렸고 몸을 가누기 어려워졌고, 요새는 떠나라고 명령한다. 평생을 기다려온 적들을 마주하기 직전에 쫓아버리겠다고? 평생의 기다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 조치에 따를 수 없어 분노하지만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병에 걸렸고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기다릴 때 적들은 오지 않았고, 적들이 왔을 때 그는 요새를 떠나야 했다. 타타르인들이 정말로 요새를 쳐들어온 걸까?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드로고는 요새를 떠났으므로 모르고, 우리도 요새를 떠난 그를 따라왔으므로 모른다. 디노 부차티는, 모른 채 두려고 그를 떠나게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어느 작은 여관 침대에 홀로 남은 드로고는 어느 순간 문득, 죽음이 그를 향해 오리라는 걸 예감한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떠오른 무섭고 새로운 생각, 그것은 죽음이었다. 어쩌면 그는 비로소, 자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타타르인의 진짜 얼굴을 본 것이리라. 이제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죽음만큼 오리라는 사실이 확실한 것은 없다. 죽음만큼 오리라는 사실이 확실하면서도 언제 올지 확실하지 않은 것도 없다. 죽음이 오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고, 죽음이 언제 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 죽음만큼 지연되고 연기되는 것은 없다. 죽음만큼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도 없다. 대개 죽음은 지연되고 연기되지만, 그러나 죽음이 닥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죽음은 온다.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예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져도 언젠가는 온다. 늦어질 뿐 철회되지는 않는다. 죽음은 신실해서 온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오는 시간을 모를 뿐이다. 신랑은 올 것이다. 늦더라도 오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언제 올지 모를 뿐이다. 고도는 올 것이다. 그러나 오기 전까지는 오지 않는다.
 
고도는, 신랑은, 메시아는, 루옌스는, 죽음은, 아마 내일 올 것이다. 내일은 기다릴 수 없다. 내일은 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일 올 고도, 신랑, 메시아, 루옌스, 죽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이들이 오면 내일은 현재가 될 것이다. 내일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확정되어 있지도 않다. 내일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느닷없이 닥치기도 한다. 우리는 그 멀기와 가깝기를 가늠할 수 없다. 우리는 내일의 주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기다린 것이 실은 죽음이었음을, 죽음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 채로 고도를 기다린다. 요새의 군인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타타르인들에 대해 모른다. 모른 채 타타르인들을 기다린다. 고도가, 타타르인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처럼, 모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모른 채로, 기다린다. 모른 채로 그들을 기다린 줄 안다. 그들이 기다린 고도가, 타타르인이 실은 죽음이라는 걸 모른다. 몰랐다는 걸 죽음 앞에서야 깨닫는다.
 
법의 문 앞에서 기다린 사람이 정말로 기다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늙고 쇠약해져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된 이 사람의 마지막에 대한 카프카의 서술은 이러하다. 
“그런데 이제 어둠 속에서 그는 분명하게 알아본다. 법의 문들로부터 꺼지지 않고 비쳐 나오는 사라지지 않는 한 줄기 찬란한 빛을.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때까지의 모든 경험이, 그가 지금껏 문지기에게 던져보지 못한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된다.” 
시력이 약해져 잘 볼 수 없게 된 그의 눈에, ‘어둠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법의 문들로부터 비쳐나오는 한줄기 찬란한 빛이 보인다. 그 빛은 직전까지 보이지 않았다. 없던 빛이 갑자기 나타났는지 전부터 있었는데 보지 못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볼 수 없었던 빛을 보게 되는 어떤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구리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완전하게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고 바울은 말했다. 깨달음이 그렇게 갑자기, 비로소 온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모호하고 불분명했던, 그 사람의 평생에 걸친 기다림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삶의 모든 경험이 하나의 큰 질문으로 압축된다. 삶의 시간에 경험한 숱하게 많은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하나의 큰 질문을 위한 것이었다. 
죽음은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큰 질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오는 깨달음은 질문의 형식으로 온다. 죽음은, 유일한 질문이다. 삶의 모든 경험들이 바쳐져서 만들어낸 단 하나의 질문이다. “나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지요?” 문지기는,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대답한다. ‘당신만을 위한’ 삶은 없다. 오직 ‘당신만을’ 위한 죽음이 있을 뿐이다. 

 

5일마다 되풀이되는 마중의 어느 순간에, 그녀 역시, 법의 문 앞의 그 사람이 그런 것처럼, 문득 ‘꺼지지 않고 비쳐나오는 사라지지 않는 한줄기 찬란한 빛을’ 볼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요새를 떠나 허름한 시골 여관에 누운 드로고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생각이, 분명하고 무서운 생각이’ 불쑥 떠오르는 경험을 할 것이다, 라고 우리는 예언할 수 있다.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 기다린 것이 죽음이었음을 모를 수 없을 것이라고.

 

5.

그런데, 그 빛 가운데 드러난 분명한 얼굴인 죽음은 커다란 질문, 삶의 온 경험이 뭉쳐 이루어진 하나의 큰 의문부호여서, ‘환한 어둠’ 가운데 자리한다. 죽음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눈앞이 캄캄해도 볼 수 없지만, 눈앞이 하얘도 볼 수 없다. 불가지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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