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1.

“나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설교할 수 없을 것이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서는 설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문장이다. 나치 치하에서 교수형을 받고 이 감옥 저 감옥 이송된 끝에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삼십구 세의 나이에 처형당한 독일의 이 젊은 신학자는 이십사 세에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베를린대학교에서 강의했다. 인용한 문장은 그의 사후에 출판된 『그리스도론』에 나온다. 이 책은 학생들의 강의 노트를 기초로 편집한 것인데, 이 강의를 할 때 그의 나이는 이십칠 세였다. 


본회퍼는 신의 말을 전하는 자의 딜레마에 대해 말한다. 설교자는 ‘신의 말’을 말한다는 확신 없이 설교할 수 없다. 그가 하는 말은 그의 말이 아니라 ‘신의 말’이고, 그는 그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의 권위는 그가 자신, 즉 인간의 말이 아니라 신의 말을 말한다는 전제에서 나온다. 이 전제가 무너지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권위를 잃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간이고, 인간이므로 ‘신의 말’을 말할 수 없다. 그는 그 사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할 수 없다. 

자기가 ‘신의 말’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은 자의 말은 ‘신의 말’이 아니다. 자기가 ‘신의 말’을 말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은 자의 말 역시 ‘신의 말’이 아니다. 설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신의 말을 인간인 설교자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경전의 문장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그 안에 ‘신의 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로 말해질 수 없는 ‘신의 말’이 인간의 말로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이 유한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원이 시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를 입는 순간 신조차 시공의 조건에 제한된다. 완전한 신의 말조차 인간의 언어에 담기면 불완전해진다. 유한 속으로 들어온 무한은 유한에 의해 이해되고, 시간 속으로 들어온 영원은 시간에 의해 해석된다. 이해와 해석은 오해와 왜곡의 과정을 포함한다. 의문과 모호함은 불가피하다. 

경전의 독자는 이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경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이 오해와 왜곡, 의문과 모호함의 안개를 피하지 못한다. 가령 백 살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는 신과 그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에 응하는 아브라함이나 광기에 사로잡힌 동네 사람들로부터 자기 집에 들어온 나그네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집가지 않은 자기 딸들을 내주겠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는 소돔성의 롯, 또는 후손이 없는 주인집에 아들을 낳아주고, 그 때문에 쫓겨나는 시녀 하갈에 대한 『창세기』의 문장을 읽을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가끔 어처구니없어하고 때로는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이런 텍스트를 읽는 걸음이 민첩할 수 없다. 묵상과 사색 없이 읽을 수 없다. 심지어 기도가 요청된다. 예컨대 이런 기도. 

“당신의 무한하신 말씀을 유한한 것으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의 유한한 세계 안으로 들어오되, 내가 살고 있는 유한성의 비좁은 집을 무수지 않고 그 안에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칼 라너, 『칼 라너의 기도』). 


독자인 나는 종종 성경의 텍스트들이 불친절하다고 느낀다. 이 텍스트들의 불친절함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이 전달되기 어려운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의 말로 옮겨질 수 없는 ‘신의 말’이 인간의 말로 옮겨질 때 생기는 문제이다. 불친절은 말하는 이의 성정이나 의도가 아니라 결과적 현상이다. 누군가의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잘못 말하거나 듣는 사람이 잘못 들어서일 때도 있지만,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일 경우가 더 많다. 같은 발음의 한 단어는 그 단어에 대해 발화자와 청취자가 가지고 있는 이해에 따라 다르게 전달된다. 특정 단어에 대한 이해는 삶의 경험에 의해 주로 형성된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는 악몽이고, 사랑은 끔찍한 것이다. 

누군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신이 파악되지 않는 존재인 것은 인간이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한한 신의 말이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손실 때문이다. 본회퍼는 다른 책(『창조와 타락』)에서 이 사실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혔다. “성서 저자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라는 점에서, 그가 자신의 시대, 자신의 인식, 자신의 한계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언어(자신의 시대, 인식, 한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성서는 많은 인간 저자들에 의해 쓰였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쓴 것이다. 어떤 책은 누가 썼는지 분명하고 어떤 책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자신의 시대와 인식의 한계 아래서’ 썼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이 쓰려고 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쓸 수 없는 ‘신의 말’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쓸 수 없는 신의 말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말해지지 않으면 인간에게 들려질 수 없다. 두 차원에는 절대적 차이, 철저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아무리 잘 옮겨도 축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로 쓰인 ‘신의 말’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번역이 필요한 이유이다. 아브라함, 롯, 하갈, 이삭이 주인공인 창세기의 저 불친절한 문제적 장면들을 소설화한 『사랑이 한 일』을 쓸 때 나는 언어의 이 두 차원에 집중했다. 소설가인 나는 그 난해한 장면들을 인간의 수준/차원에서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 번역, 즉 인간적 패러프레이즈, 혹은 소설적 가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적’이라는 말과 ‘소설적’이라는 말은, 적어도 이 맥락에서는 동의어이다. 인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소설은 없다. 인간 이상을 말하는 소설도 없고 인간 이하를 말하는 소설도 없다, 신이나 천사가 등장하는 소설도 신이나 천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인간에 대해 말한다. 나무나 동물이 주인공인 소설도 나무나 동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한다. 소설 안의 신이 인간적이고, 경전 안의 인간이 신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신의 텍스트인 성경을 인간의 텍스트인 소설로 바꾸는 작업은, 그러니까 인간화 작업이다. 이 작업에는 패러프레이즈, 즉 풀어쓰기와 가필이 동원된다. 나는 여백으로 침투해 들어가려고 했다. 여백은 신의 말과 인간의 말이 맞부딪친 자리이다.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소란이다. 어떤 말로도 옮겨지지 못해 유보된 말들이 발굴되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공간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이지 훼손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이 한 일』의 ‘작가의 말’에서 나는 소설쓰기가 일종의 패러프레이즈라고 썼다. 이미 쓰인 것을 다시, 풀어 쓰는 것이 ‘패러프레이즈’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이 일은 번역하는 것과 같다. “내 번역의 방법은 인간의 마음으로, 즉 소설을 통해 신의 마음, 즉 믿음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2.

임종의 자리에서 황제가 한 개인(‘그대’)에게 전갈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하는 카프카의 짧은 소설 「황제의 전갈」은 귓속말을 통해 황제의 메시지를 받은 한 사신이 분투하는 이야기이다. 황제는 죽기 직전에 누군가에게 전할 말을 사신에게 귓속말로 남기고 사신은 그 말을 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황제의 귓속말을 들은 자가 사신이 된다. 사신은 황제, 혹은 말을 선택할 수 없다. 황제, 혹은 말이 그를 선택한다.


“귓속말은 듣는 자를 말하는 자에게 예속시킨다. 귓속말을 들은 자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귓속말을 들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비밀 준수의 의무를 떠안는다. 듣는 것이 비밀 준수 서약의 방식이다. (……) 황제는 자기 메시지를 전할 사람을 자의적으로 선택한다. 그가 황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그를 선택한다. 더 정확하게는 메시지가 그를 선택한다.”(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114쪽)


구약 성경에서 예언자, 혹은 선지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nabi의 어원은 nabu이고, 그 뜻은 ‘부르다’이다. nabi는 ‘부름을 받은 자’가 된다. 구약 종교의 전통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자’라는 의미는 ‘예언자’에 들어 있지 않다. 물론 예언자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미리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예언자(nabi)라는 칭호가 붙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예언자의 조건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핵심은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들은 말, 신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용이 아니라 출처가 중요했다. 무슨 말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말인가가 중요했다.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예언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예언자가 되기로 결정할 수 없다. 신의 말을 받은 사람(만)이 예언자가 된다. “이 까닭을 말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입에서 직접 말씀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예레미야 9:12) ‘주님의 입에서 직접 말씀을 받은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예언자가 된다. 신이 그에게 말을 맡겼기 때문이다. 맡긴 것은 옮겨져야 한다. 보관하라고, 땅속에 묻어두라고 맡긴 것이 아니라 옮기라고, 전하라고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의 예언자는 미리 앞일을 말하는 예언자豫言者가 아니라 맡겨진 말을 말하는 예언자預言者이다. 맡겨진 말은 앞일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예언은 앞일이나 일어난 일이나 항상 현재의 청중을 향해 한다. 예언은 현재에 대한 것이다. 


“황제는 사자를 침대 곁에 꿇어앉히고 전갈을 그의 귓속에 속삭여주었는데……” 이 장면은 임명식과 같다. 메신저를 메신저 되게 하는 것은 황제와 황제의 귓속말이다. 둘이면 충분하고,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귓속말을 들어야 하고, 그 말은 황제의 말이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을 할 때는 거의 항상 이 문장이 앞에 놓인다. 예언자를 예언자 되게 하는 것은 ‘여호와’와 ‘말씀’이다. 둘이면 충분하고,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말’을 가져야 하고, 그 말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이어야 한다.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경고가 성경에는 빈번하게 나온다. 거짓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귓속말’을 듣지 못한 자이다.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는 말한다.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예레미야 23:18) 귀를 기울여 들은 말이 없는데도 이들은 무슨 말인가를 한다. 이들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는 그들을 예언자로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그들의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다.”(예레미야 14:14). 

자기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을 하는 자가 거짓 예언자라는 걸 예레미야의 독자는 안다. 그들이 자기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가 귀기울여 들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귓속말을 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맡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들은/맡은 말이 없는데도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달려나갔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예언을 하였다.”(예레미야 23:21). 

들은/맡은 말이 없는데도 사신 노릇을 하는 이들에 대해 카프카는 신랄하다. 세상에는 파발꾼들이 넘쳐나는데, 그들에게는 귓속말을 해줄 왕이 없다. 그들에게 말을 맡긴 왕이 없다면, 없는데도 말을 전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카프카는 그들이 의미 없는 말들을 서로에게 외쳐댈 뿐이라고 말한다(「파발꾼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비참하다고 느낀다. 이들이 비참한 것은 메시지 없이 메신저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3.

사신은 황제의 귓속말을 듣자마자 길을 떠난다. 황제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군중들이 워낙 많고 궁궐은 무한히 넓어서 사신은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 궁궐의 방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 방들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프카는, 그가 그 궁궐의 무수히 많은 방들을 벗어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설령 그 방들을 벗어난다 해도 아무런 득이 없을 것이니,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그는 또 싸워야 할 것이고, 설령 싸움에 이긴다 해도 아무런 득이 없을지니, 뜰을 지나야 할 것이고, 뜰을 지나면 그것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제2의 궁전이 있고, 다시금 계단들, 궁전들이 있고, 또다시 궁전이 있고, 등등 계속 수천 년을 지나 드디어 가장 바깥쪽 문을 뛰쳐나온다면─그러나 결코,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비로소 세계의 중심, 그 침전물이 높다랗게 퇴적된 왕도(王都)가 그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 어떤 자(者)도 이곳을 통과하지는 못한다.” 


세상에! 수천 년이라니! 사신이 아무리 부지런히 달리고 애쓰고 최선을 다해도 황제가 사는 궁궐을 빠져나오려면 수천 년이 걸린다고 하지 않는가! 수천 년이 걸려 궁궐의 마지막 문을 빠져나오면 그제야 겨우 왕의 도시에 이르게 될 테지만, 이는 가정일 뿐, 어떤 자도 그곳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하지 않는가! 

수천 년은 영원의 다른 말이다. ‘천년의 사랑’은 천년 동안의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다. 무한은 한계나 제한이 부정되는 영역이고 영원은 시간이 초월된 시간이다. 시간 위의 존재인 인간은 시간 너머를 견딜 수 없다. 


황제의 메시지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신이 받은 이 언어는 영원과 무한에 속하는 궁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황제의 태양 앞에서 가장 머나먼 곳’에 있는 ‘보잘것없는 그림자’인 ‘그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셋째 하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아마 공간적 개념은 아닐 것이다. 카프카의 「황제의 전갈」을 우화로 읽는다면,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이 바울의 셋째 하늘과 맞먹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이는 결국 ‘영원’에 대한 비유라고 할 것이다. 바울은 그때 자기가 몸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어떤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또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이었다. 그는 끝내 그때 들은 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 

계시하는 신은 감추어져 있는 신이다. 우리는 신이 자신을 계시하는 경우에만 신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때 계시된 신은 감추어진 신이다. 신의 계시에 의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은 알 수 없다’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말/황제의 말을 옮긴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말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깃들어 있는 주제는 난처함이 아니라 소명, 즉 맡은 자의 임무 수행에 대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울은 그 말,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그 말을 전하려고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 카프카의 황제의 사신이 그런 것처럼, 그는 들었으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말이었다. 그는 그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평생 동안 그가 한 모든 말들이 실은 그 말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그 말을 말하는 방식이었다. 


황제의 말은 궁궐 밖의 언어로 바꾸기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황제로부터 귓속말을 들은 사신은 그 메시지를 궁궐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물론 그는 원하지 않았다. 황제는 자기 말이 들려질 귀를 스스로 선택한다. 그리고 귓속말을 들은 자는 그 말에 예속된다. 귓속말을 들은 것은 그 메시지를 전하겠다고 서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황제의 말은 옮겨져야 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말임에도 그렇다. 그러니까 이 말은 황제로부터 들은 말 그대로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옮기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는 본회퍼처럼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말을 말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하며, 동시에 자신이 결코 황제의 말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는 바울처럼 말해야 한다. 그는 그때 들은 그 “말할 수 없는‘” 말을 끝까지 말하지 않은 채 그 말에 대해 최선을 다해서, 끈기 있게, 계속 말해야 한다.

 

거기까지만 생각해야 하고 더 나가지 말아야 한다. 그는 말을 전하는 자이지 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이 자기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지 염려하는 순간, 그는 말을 옮기고 전하는 자가 아니라 말하는 자가 된다. 말하는 자가 되려는 유혹을 이겨야 한다. 

그의 말은 뿌려진 씨앗과 같을 것이다. 어떤 씨앗은 싹이 났다가 물기가 없어 말라버릴 것이다. 어떤 씨앗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새의 먹이가 될 것이다. 어떤 씨앗은 결실할 것이다. 그러나 결실은 사신의 일이 아니고 사신의 몫도 아니다. 그의 일은 씨를 뿌리는 것이지 결실하는 것이 아니다. 결실의 많고 적음에 그의 영광이나 수치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광과 수치는 씨/말을 뿌리기/옮기기에 대한 그의 성실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결실은 우연한 행운이거나 어쩔 수 없는 불운이다. 우연한 행운이나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영광과 수치를 가늠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4.

그러니까, 어쩌면, 필요한 것은 기도.

“내가 당신의 무한하심을 두려워하여 물러서는 일이 없도록 당신의 무한하신 말씀을 유한한 것으로 만들어주셔야 합니다. (……) 당신은 인간의 말을 당신의 말씀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 말로 내게 말 건네셔야 합니다. 그런 말이라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칼 라너, 『칼 라너의 기도』, 63~64쪽)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