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포옹의 방법

1.


“그렇고말고. 사람의 몸은 본래 그렇게 생겨 있어서 누군가를 ‘품에 안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그의 등뒤로 두 손을 마주잡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문장은 미셸 투르니에의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가 에두아르 부바가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에 글을 붙인 이 에세이집의 제목은 『뒷모습』이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사람의 뒷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그 가운데 젊은 연인들이 포옹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 남자와 포옹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찍었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흑백사진이고 주변이 어두운데다 여자의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남자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자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손이다. 남자의 두 손은 여자의 등뒤에서 맞붙어 있다. 힘껏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연인들의 몸 사이에 틈이 없어 보인다. 

연인들의 포옹은 틈을 없애는 방법이다. 연인들은 틈이 생기면 불안하기 때문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부여안는다. 연애는 틈을 인정하지 못하는 열정이다. 느슨한 포옹은 연인들의 것이 아니다. 연인들의 포옹에는 ‘으스러지게’라는 관용어가 따라붙는다. ‘덩어리가 깨어져 조각조각 부스러지다’가 ‘으스러지다’의 사전적 정의이다. 언젠가 나는 홍유릉에서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소나무와 때죽나무를 보았다. 두 나무는 틈을 없애려고 끌어안고, 그래도 아쉬워서 서로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이미지에 홀려 한 편의 소설을 썼다. 내가 본 때죽나무와 소나무처럼 연인들은 상대의 몸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틈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틈을 없애는 것에서 시작된 연애는 틈이 생길 여지를 없애려는 의지로 나아간다. 이 틈은 어떻게 해도 메워지지 않는다. 어떤 음식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 자기 몸을 뜯어먹고 죽었다는 신화 속 인물 에리직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위가 꽉 찼어도 빈 것 같다. 틈이 없어도 여전히 틈이 있는 것 같다. 없는 틈을 없애는 방법은 파고드는 것 말고는 없다. 한몸이 되는 것 말고는 없다. 


이 사진이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데에 의도가 없을 리 없다. 여자의 등뒤에서 맞잡고 있는 남자의 두 손이 사진의 중앙에 무슨 매듭처럼 오롯이 배치된 데에 뜻이 없을 리 없다. 얼굴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이 사진은 선언한다. 얼굴은 독자적이고 고유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은 섞이고 파고들고 부서지고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얼굴은 섞이고 파고들고 부서지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피해 달아난다. 마주볼 수 있을 뿐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얼굴이다. 붙잡으려면 고정되어야 하는데, 얼굴은 무수히 많은 기호들이 모여 있는 장소여서, 붙잡았다 하면 달아나고 파악했다 하면 벗어난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단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알렝 핑켈크로트는 프루스트의 『꽃 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사랑에 빠진 사람의 곤경에 대해 설명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을 묘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묘사를 하려면 대상이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은 유동적이고, 파악하기 어렵고, 언제라도 사라지려고 하는 것, 즉 미적 현실이 아니라 잠재적 소멸”이다. 대상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의 특권, 혹은 숙명이라고 그는 재치 있게 말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 그것은 다만 감금할 수 없는 현존일 뿐이다.” 레비나스의 영향 아래서 글을 쓴 것이 분명한 에세이집 『사랑의 지혜』는 사랑에 대한 성찰로 가득차 있다. 나는 틈날 때마다 이 책을 꺼내 읽는다. 

마주보아야 할 뿐 붙잡으면 안 되는 것이 얼굴이다. 포옹이 제목인 작품의 주인공은 손이다. 


주의깊게 바라보면 여자의 등뒤에서 맞잡고 있는 남자의 손은 자전거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는 케이블 자물쇠처럼 보인다. 안에 여러 가닥의 강철 철사가 들어 있는 둥근 모양의 케이블 자물쇠는 자전거의 굴러가는 기능을 정지시킨다. 자물쇠는 잠그는 기능을 한다. 바퀴는 구르지 못한다. 연인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연인의 팔과 손은 성능 좋은 자물쇠이다. 

여자 연인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손에 한 다발의 꽃이 들려 있는 것은 어떤가. 미셸 투르니에는 그 꽃이 카네이션이라고 알려준다. 아무려나! 가두고 잠그기 위해 준비한 것이 꽃이라면 이 꽃은 미끼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미끼는 낚시/사냥을 위해 준비된다. 미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환심을 사기 위해 건네는 꽃은 환심을 살 수 있지만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뭔가를 들여서 샀다면, 꽃이든 무엇이든,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아닌데 사랑인 줄 알거나 사랑이 아닌 줄 알면서 사랑인 체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들린 꽃은 사랑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잠그기 위한 도구이다. 꽃만 아니라 연인에게 전해지는 모든 것이 그렇다. 미셸 투르니에는, ‘한 다발 카네이션 꽃이 그 포옹을 장식하며 고정시킨다’라고 말한다. 

저 사진 속의 소박한 꽃이 어떻게 있는지 보라. 연인의 몸을 잠그는 자물쇠 역할을 하는 손과 손 사이에 빗장이 끼워져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자물쇠를 채우고 빗장까지 지른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가. 투르니에의 말이 옳다. 장식과도 같은 그 한 다발의 꽃에 의해 포옹이 ‘고정’된다.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가 필요한 것은 저들의 사랑이 허약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있고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크다고 생각할수록 잠금장치를 정교하게 한다. 연인은 꼭 지켜야 하는 소중한 존재이고 잃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잠금장치가 정교해야 한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말은 반만 옳다. 꽃은 물론 무엇으로도 이 포옹을 완전히 고정할 수는 없다.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어떤 잠금장치로도 완전히 잠금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용납되는 것은 상호성 때문이다. 뒷모습의 여자는 얼굴만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 눈에는 그녀의 팔과 손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팔과 손은 남자의 등뒤로 돌아가 깍지를 끼고 있을 것이다. 남자 연인이 그런 것처럼 이 여자 연인도 남자의 몸을 두 팔로 껴안고 있을 것이다. 두 손을 맞잡아 자물쇠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남자 연인을 가두고 있을 것이다. 팔과 손이 상대의 등뒤로 가서 맞잡아야 한다. 때죽나무는 소나무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상대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한몸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가두기/잠그기는 갇히기/잠기기가 된다. 연인을 가두고 잠그는 사람은 동시에 연인에게 갇히고 잠긴다. 다른 방식의 사랑의 포옹은 없다. 



2.


“두 사람이 얼굴을 서로 맞대고 그 들어가고 나온 곳이 맞물리도록 꼭 붙게 되면 저 뒤쪽─목덜미, 등, 허리, 엉덩이─은 탐험하고 소유하는 지역으로 변한다.” 


두 사람이 얼굴을 서로 맞대고 그 들어가고 나온 곳이 맞물리도록 꼭 붙게 하는 것이 미셸 투르니에가 정의하는 포옹이다. 그렇게 해야 틈이 없어진다. ‘몸의 들어가고 나온 곳이 맞물리도록 꼭 붙’이려면, 틈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팔과 손을 사용해야 한다. 두 팔로 감싸서 껴안아야 한다. 그리고 이쪽 손과 저쪽 손을 상대의 등뒤에서 맞잡고 꼼짝 못하게 해야 한다. 팔과 손으로 하는 것이 포옹이다. 이때 두 팔과 두 손은 연인을 가두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때 연인의 팔과 손은 수갑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포옹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사랑은 가두고 잠근다. 틈을 없애기 위해서이고, 틈이 생길 여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포옹에는 어루만짐에 대한 예감이 숨어 있다. 연인의 뒤쪽, 목덜미와 등과 허리와 엉덩이가 탐험과 소유의 지역으로 변한다고 투르니에는 말하다. 그러나 그는 이 탐험과 소유, 즉 애무에 대해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두 손이 그 지역에서 획책하는 일을 사진으로 찍는 것은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물러난다. 글로 쓰는 것도 실례가 될지 모른다고 아마 그는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애무의 성격에 대한 암시는 충분하다. ‘두 손이 그 지역에서 획책하는’것이 애무다. 애무 역시 손이/손으로 한다. 그리고 두 손이 그 지역에서 획책하는 것은 탐험과 소유이다. 탐험의 대상은 미지의 세계이다. 연인의 몸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탐험은 ‘아직 알지 못한’ 세계가 ‘이미 아는’ 세계가 될 때까지(만) 지속된다. 이미 아는 세계를 탐험하는 사람은 없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위를 탐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람이 탐험을 하는 목적은 대개 소유에 있다. 


“타인을 애무함으로써, 나는 나의 애무에 의해 내 손가락 아래에서 타인의 육체를 태어나게 한다. 애무란 타인에게 육체를 부여하는 의식의 총체이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문장이다. 『존재와 무』에 나오는 이 문장을 인용하며 『사랑의 지혜』의 저자는 애무가 대상을 무장해제시키고 수동적으로 만들어 소유하려는 의도에 의해 행해진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그러나 우리는 이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이미 아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반복해서 쓰다듬는 연인의 손길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초조하다. 닿을 듯 말 듯 안타깝다. 이 초조와 안타까움은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부정하려는 몸짓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얻으려고 한 것을 얻지 못한다. 얻으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갈망하지만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지 못한다. 애무의 손길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 위에서 끝없이 맴도는, 맴돌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레비나스를 따라 말하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애무는 “언제나 다른 것, 언제나 접근할 수 없는 것, 언제나 미래에서 와야 할 것과 하는 놀이”(『시간과 타자』)이고, “애무에는 (사랑하는 자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고백이 담겨 있으며, 폭력은 실패하고 소유는 거부된다.”(『존재에서 존재자로』)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소유/정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탐험을 멈출 수 없다. 

애무는, 포옹이 그런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고 가두려는 의도에 의해 행해지는 탐험이다. 그러나 아무리 만져도, 쓰다듬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붙잡히지 않고 가둬지지 않는다. 여전히 알 수 없고 초조하고 안타깝고 불안하다. 그러니 탐험은 계속되고, 이 탐험은 모험이 된다. 

 


3.


“다들 영원을 꿈꾸지만 첫 키스 때부터 이미 시작되지. 영원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 말이야.” 


알랭 레네 감독이 90세에 만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2012)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하고 다양한 매체 실험을 시도한 영화다. 

신화는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죽자 아내를 찾아 하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에 대해 전한다. 그의 노래와 연주는 신들을 홀리고 하계의 신인 하데스마저 감동하여 아내를 데리고 가라고 한다. 지상으로 올라갈 때까지 에우리디케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지상의 빛이 보이자 아내가 뒤따라오고 있는지 궁금하여 뒤를 돌아보았고, 그러자 에우리디케는 다시 하계로 끌려가고 말았다는 이야기. 

이 신화를 각색한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는 사랑에 빠진 두 주인공이 서로에 대해 집착하는 장면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이런 대화를 나눈다. 여자 주인공은 자기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요구하고 남자 주인공은 그러겠다고 맹세한다. 그러자 여자는 누구나 하는 그런 말 말고 자기를 떠날 생각조차 품지 말라고 말한다. 이어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쳐다본다고 해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다시 요구한다. 여자는 초조하고 들떠 있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사랑에 빠진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녀는 자기를 행복하게 만든 그 사랑이 사라질까봐 불안해한다. 남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자 여자가 이번에는 이렇게 따진다. “그 여자가 쳐다보는 걸 알려면 당신도 그 여자를 봐야 되잖아요. 날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벌써 딴 여자를 생각하다니. 나는 불행해.” 그러면서 운다. 이 억지는 사랑 때문에 이해되고 사랑 때문에 용납된다. 그 여자를 쳐다보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여자의 요구를 남자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여자는 자기 목숨을 걸고 약속하라고 다그치고 남자는 또 그렇게 한다.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걸 원하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불안할 뿐이다. 사랑은 불안을 만든다. 이 불안의 원천은 불신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불신도 크다. 어떻게 해도 믿을 수 없고 어떻게 해도 불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래서 맹세를 강요하고 약속을 되풀이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불신과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강하게 포옹해도 틈은 메워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러니 더 강하게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다들 영원을 꿈꾸지만 첫 키스 때부터 이미 시작되지. 영원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 말이야.”이 대사는 후반부에 나온다. 저승의 신 하데스일 수도 있고, 하데스의 전령일 수도 있는 신비한 인물 무슈 앙리가 에우리디케를 잃고 고뇌에 빠진 오르페우스에게 이 말을 한다. 첫 키스의 순간에 사랑이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스며든다고.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영원을 꿈꾸기 때문에 생긴다. 사랑이 시작될 때 불안도 시작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영원을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영원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해”라고 말할 때 이 현재형 문장 속에는 미래를 넘어 영원이 담긴다. “사랑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약속이다. ‘영원히’가 생략되어 있다. “영원히 사랑해”가 본래의 문장이다. 지금 사랑하고 있다, 가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것을 약속하는 말이다. 하는 사람도 그렇고 듣는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불안은 거기서 싹튼다. 미래와 영원은 여기 없기 때문이다. 불투명하고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불투명하고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을 약속하기/꿈꾸기 때문에 불안이 지배한다. 영화의 여주인공 에우리디스의 그 집요함과 안절부절, 초조, 혼란, 억지와 집착은 그녀가 꿈꿀 수 없는 영원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고, 약속받을 수 없는 것을 약속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을 꿈꾸지 않는 것(영화에는 그런 인물들이 나온다. 에우리디스의 어머니와 그 연인의 사랑에 미래와 영원의 자리는 없다. 지금 여기의, 현실적이고 쾌락적인 사랑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그들이다)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으니, 사랑 속으로 들어간 이는 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랭 레네의 영화는 죽음만이 이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암시한다. 



4.


“날 볼 수 있나요?”

“그래요. 당신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 없이도.”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연인을 잃은 오르페우스는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을 통해서 그녀를 다시 얻는다. 연인을 죽음에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죽음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영화는 여기서 신화와는 다른 이야기를 찾아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는 마침내 함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다. 민담류 서사에 나오는 전형적인 해피 엔드의 문장(“그리하여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을 닮은 이 문장이 원래의 신화가 가진 비극을 뒤집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은 해피 엔드의 문장일까? 

이들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침내 함께 있게 된 그곳은 삶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 즉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하지 않은 몸을 가지고 살면서 영원을 꿈꾸느라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그들은 거기서 이제 비로소 상실의 두려움 없이 함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영원을 획득했고, 그럼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났다. 초조도 안절부절도 억지도 질투도 망상도 없는 완전한 평온함 속으로 들어갔다. 부동의 고요. 

구십 세의 노장은 사랑에 빠질 때 우리가 그렇게 불안한 것은 사랑의 속성이나 인간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삶의 조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다고 역설하는 것 같다. 왜 그러한가. 살아 있다는 건 시간 위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하고 움직인다. 시간은 시간 위에 있는 것들을 흔들고 요동치게 한다. 삶은 시간의 변덕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시간 위에 있는 한 완전한 평온과 고요는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영원에 속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그러려면 시간 너머로, 시간을 초월한 자리로 건너가야 한다. 죽음의 친구인 신비한 인물 무슈 앙리는 에우리디스를 빼앗아간 것이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고 오르페우스에게 말한다. 그는 속삭인다. “난 자네에게 에우리디스를 온전히 돌려줄 수 있어. 삶은 절대 줄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야.” 삶은 절대로 줄 수 없다. 삶은 흔들리고 요동치니까. 살아 있는 존재는 사랑이 꿈꾸는 영원을 결코 획득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삶이 절대 줄 수 없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죽음 편에서 온 사내는 말한다. 오르페우스는 이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을 뿌리치지 못한다. 연인을 온전히 돌려받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함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부동의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더이상 영원을 꿈꾸지 않게 된(영원 속에 들어와 있으니 영원을 꿈꿀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들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 상대를 향한 초조함도 요동도 불안도 없어진 그들, 부동의 안정감 속에 있는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그런 세계에서 사랑이 필요한가, 혹은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 유한하고 불안한 삶의 조건들이 유한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은 영원의 영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세계가 이 세계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끝에 이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다시 읽으면, 그들이 함께 있다는 것, 더구나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함께 있다는 것이 사랑에 대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사랑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지 않게 된 형편에 대한 표현처럼 내게는 이해된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마태복음 22:30) 영원에 이르게 된 그들에게 영원을 꿈꾸는 것이 본질인 사랑이 아직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천사들과 같이 된 그들에게 사람의 욕망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시간의 변덕을 견디는 것이 삶이라면 천사를 살아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시간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죽음 후의 삶은 삶의 삶과는 다른 삶일 것이다. 사랑은 흔들리고 요동치는 시간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독점된 것이다. 그래서 불안정하지만 그래서 귀하다. 그 ‘제한적’ 성격이 가치를 만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이 아니라, 죽음은 사랑을 알지 못한다. 저승의 신이 오르페우스에게 약속한(약속할 수 있는) 것은 에우리디스와 ‘함께 있는’ 것이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있다’가 ‘사랑하다’의 다른 표현이라는 건 아마 관습적 오해일 것이다. 그가 ‘삶은 절대 줄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삶이 줄 수 있는 것을 절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영원을 약속할 수 있지만 사랑을 약속하지 못한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