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향수(鄕愁)와 추구, 혹은 무지와 미지


1.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을 떠도는 인물, 가령 출장을 가거나 발령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출장이나 발령은 대개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고, 갑작스럽게 닥치고, 거부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은 거부할 수도 없다. 그것이 삶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교훈이다. 


출장지/발령지에서의 삶은 임시적이다. 떠났으나 이르지 못했고, 이르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이들의 처지다. 임시는 정해져 있지 않은 시간. 여기서 기간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임시는 잠시와 동일시될 수 없다. 임시와 잠시는 같은 시간이 아니다. 오래 살아도, 심지어 시민권을 받은 후에도 외부인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정착민의 안정은 한없이 유보되고 여행객의 자유는 압류된다. 임시 거처. 유배지거나 광야거나. 어느 쪽이든 정착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 

어쩐 일인지 내 소설에는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집을 가진 사람도 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자기 집인데도 들어가지 못하거나 타인(가깝거나 먼)에 의해 집이 훼손되는 일을 당한다. 집의 상태는 그 사람의 신분을 비유한다. 다른 사람의 땅에 지어진 집은 임시적이다. 다른 사람의 땅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의 삶은 불안정하다. 집이 흔들리는 것은 땅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집이 자기 땅이 아닌 곳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압도적일 때 개인의 자발성은 최소화되고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 의무가 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몰린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는 부도수표와 같다. 강요된 자유보다 자유에 반하는 것은 없다. 자유의 행사가 차단된 상황에서 허락된 자유보다 기만적인 것은 없다. 가능한 유일한 길은, 아마도 유예일 것이다. 집 짓는 것을, 강요된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을 미루는 것.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정착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은, 정착민의 안정도 여행자의 자유도 없이 살아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사아야 할까. 


향수.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

 

향수는 떠나왔기 때문에 생기고, 떠나왔으나 아직 이르지 않은 사람에게 발생한다. 떠나오지 않았다면 돌아볼 시간도, 귀환할 곳도 없으므로 생기지 않고, 정착했다면 돌아보지 않아도, 귀환하지 않아도 되므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 살던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이집트를 그리워하며 “이집트에 있을 때는 우리가 참 좋았었는데” 하며 울었다(민수기 11장). 그들의 향수를 자극한 것은 음식이었다. 입맛만큼 강렬한 매개체가 있을까. 향수는 떠났으나 아직 이르지 못한 자, 이르지 못해 떠도는 자를 찾아온다. 혹은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떠났으나 아직 이르지 못한 자, 떠도는 자는 그 불완전한 존재의 상태를 견디기 위해 향수를 불러오고 향수에 매달린다. 

향수는 돌아가려는 마음이다.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인 향수는 동시에 떠나온 시간을 향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떠나온 곳(과거)이 돌아갈, 돌아가려는 곳(미래)이 된다. 돌아갈, 돌아가려는 곳은 떠나왔던 곳이다. 그의 미래는 과거에 있다. 떠나왔던 곳, 과거의 시간을 단순히 추억하거나 복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떠나왔던 곳/시간으로 가서 자신의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2.

오디세우스는 향수병에 걸린 사람이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기록한 서사시로 알려진 『오디세이아』에는 전쟁 영웅의 무용담이 아니라 향수병에 걸린 한 남자가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다. 이 남자를 사로잡은 것은 모험이 아니라 향수이다. 고향으로 귀환하려는 이 그리움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만물의 성질, 즉 탄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이것이 모험이라면, 탄성의 사주를 받은 모험, 어쩔 수 없이 내몰려 수용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어 수용하고 만 모험일 것이다. 


용수철을 누르고 있으면 손바닥에 저항이 느껴진다. 있었던 상태로 돌아가려는 탄성 때문이다. 향수를 병으로 진단한 최초의 사람인 요하네스 호퍼는 이때 발생하는 스트레스에 주목했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의 의학도였던 그는 산속에 주둔한 스위스 용병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설명하기 위해 노스탤지어(nostalg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이 단어는 귀환(return)을 뜻하는 그리스어 nostos와 고통(pain)을 뜻하는 algos가 합쳐진 것이다. 이 작명에 향수=질병이라는 인식이 선명하게 들어 있다. ‘향수병에 대한 의학적 논의’라는 논문에서 그는 이 ‘질병’의 증상으로 의기소침, 우울증, 과도한 눈물, 식욕 감퇴 등을 열거했고, 드물게는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고했다. 이 단어에 대한 오늘날의 쓰임새와는 제법 다르지만, 초기에는 의학적 현상(질병)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떠나온 사람이 떠나온 곳(혹은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열망인 향수병에 대한 인상적인 예문을 밀란 쿤데라의 책에서 발견한다. 그는 체코어로 표현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문장이 “나는 너에 대한 ‘향수(stesk)’를 갖고 있다”라고 소개한다. 체코어 stesk는 노스탤지어로 인한 고통을 가리킨다고 이해된다. 그래서 저 예문의 뜻은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가 된다. (밀란 쿤데라, 『향수』, 박성창 옮김, 민음사, 2012.) 


밀란 쿤데라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향수를 뜻하는 스페인어 ‘아뇨란자(anoranza)’는 라틴어 ignonare(무지하다)에서 파생된 카탈로니아어 enyorar에서 유래했다. 즉, 어원상으로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에게 ‘향수’로 소개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원제목이 ‘L’ignorance’라는 사실은 이 점에서 꽤 의미심장하다. 이 프랑스 단어에 ‘향수’라는 의미는 없다. 프랑스인들은 ‘nostalgia’ 외에 향수를 뜻하는 다른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ignorance는 ‘무지’이지 ‘향수’가 아니다. 향수는 ‘nostalgia’이지 ignorance’가 아니다. 그러니까 밀란 쿤데라의 이 책은 향수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무지에 대한 소설이라고 해야 한다. 아니, 향수병의 원인이 무지에 있음을 주장하는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 

누군가의 부재는 왜 고통이 되는가. 부재가 곧 무지의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이 아닌가. 없는 것/사람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한때 있었다가 없어진 것/사람은 지금 어떠한지 알지 못하고, 그래서 고통스럽다. 연인들은 곁에 없는 연인이, 심지어 조금 전에 헤어졌어도, 지금 무얼 하는지, 누구와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이 의심과 불안은 고통을 만들고, 이 고통이 보고 싶다, 그립다, 라는 말로, 기만적인 순화의 과정을 거쳐, 표현된다. 


쿤데라의 소설 『향수』의 중요 인물은 1969년에 공산화된 조국을 떠났다가 이십 년 만에 고향인 체코로 돌아간 이레나이다. 프랑스에 살던 그녀는 1989년의 벨벳혁명으로 그의 조국이 민주화되자 체코를 방문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돌아간 고향은 그녀를 환영하지 않는다. 이레나의 친구들은 프랑스에서의 그녀의 삶에 대해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그저 오래전, 어릴 때 같이 겪은 일들만을 되풀이해서 물으며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할 뿐이다. “그녀가 외국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여자들(친구들)은 그녀에게서 이십 년간의 (체코 밖에서의) 삶을 잘라내었다.” 이 태도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그들이 마치 그녀의 팔뚝을 잘라 손을 막바로 팔꿈치에 갖다붙이려는 듯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꿰매려 한다고 서술한다. 이레나는 친구들이 모르는 자기의 삶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그녀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때’의 일들에 대해 기억할 것만을 강요받는다.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가 그들을 위해 구입한 보르도산 포도주를 거들떠보지 않고 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프랑스 와인과 체코 맥주의 이 우연한 대립은 흥미롭지만, 밀란 쿤데라에게 체코 맥주 맛이 훌륭하다는 말을 하려는 의도가,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맥주를 마시며 왁자지껄 떠듦으로써 그녀의 포도주, 그녀의 이십 년의 삶을 제거해버린다. 이 소설의 또다른 귀환자인 조제프 역시 이레나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 그들이 돌아간 고향은 그들이 알던 고향이 아니었다.


3.

앎은 이해의 조건이고 장악의 수단이다. 우리의 반응은 이해의 정도와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지식은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판단하는 자는 우선 아는 자이다. 알지 않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불가능한 일을 자행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것에 근거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예를 들면 맹목적 신념.) 

장악(把握)은 손안에 움켜쥔 상태를 이른다. 우리는 우리를 파악한 사람, 우리(의 비밀)를 아는 사람에게 장악당한다. 앎을 통해 판단의 근거를 확보했다는 생각이 그 판단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고린도전서 8:1) 이것은 무조건적 환대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데리다의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알지 못할 때 행하던 친절을 알고 난 후에 거둬들이고 함부로 대하는 일은 흔하다. 다말을 사랑해서 열병에 걸렸던 암논은 욕구를 채우자마자 돌변하여 그녀를 쫓아낸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사무엘하 13:15) 장악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야다’는 성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마리아의 질문이나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라는 롯의 말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아는 사람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려고 하는 열망이 사라진다. 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바울의 문장 다음에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아는 사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르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 같다. 모르는 부분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 모르는 부분이 없이 다 알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모른다. 

대상이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 그리움이 사라진다. 교만은 그리움이 사라진 사람의 상태이다. 고향이든 사람이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향수에 시달리지 않는다. 고향에 돌아온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려는 열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향수는 해소된다. 그러니까 노스탤지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향에 다다라야 한다. 


그리워하는 상태가 해소되면 더이상 그리워할 수 없다. 더이상 그리워할 수 없게 되면 그리워할 때의 반응인 설렘은 의심과 불안, 고통과 함께 사라진다. 설렘이 의심과 불안, 고통을 데리고 사라진다. 그 순간 설렘이 의심과 불안과 고통과 다른 것이 아니었음을, 설렘이 의심과 불안과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깨닫고, 잠시 안도한다. 울퉁불퉁한 감정에서 해방된다. 평평해진다. 정착한다. 우리는 멈춘다. 더 알(아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멈춘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걸 모른 채, 모르니까 멈춘다. 멈춘 사람은 더 가지 않기로 한 사람이다. 지식을 손에 쥔 사람이다. 교만은 멈춤의 다른 말이다. 더 가야 하는 사람, 더 가야 해서 멈추지 못한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 

그리워하지 않는, 않아도 되는 상태는 그러나 그리워하는 사람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리움은 배고픔과 같지 않다. 배고픔은 해소되기를 바라고, 해소되는 것으로 그만이다. 배고픔의 해소 이후는 없다. 그리움 역시 해소되기를 바라지만, 해소되는 것이 마지막은 아니다. 그리움의 해소 이후에 그리움이 있다. 그리움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울퉁불퉁한 감정에서 놓여난 안도감이 잠시인 것은 그래서이다. 

알지 못하는 영역이 남아 있어야 한다. 노스탤지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향에 이르지 않아야 한다. 즉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남겨두어야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고향에 이르지 말아야 한다. 알겠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왜 그렇게 험난했는지. 그의 귀향이 왜 모험이라고 불리는지. 


4.

바닷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은 바다와 붙어 있었다. 바다와 집을 나누는 것은 바다에서 주워 쌓은 돌덩이들이었다. 그것을 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돌덩이들은 머리통만한 것부터 주먹만한 것까지 다양했다. 파도가 그 돌덩이들을 만지고 핥고 돌덩이들 틈으로 스몄다. 마당으로 넘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 파도는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선수처럼 날렵하고 경쾌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쌓인 돌들이 허물어졌다. 그러면 다시 바다로 나가 머리통만하거나 주먹만한 돌덩이들을 주워 쌓았다. 그런 일이 잦았다. 

마당을 나가면 곧바로 바다였다. 크고 멀고 아득한 벌판과도 같은 바다. 바다와 마당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이 닿는 곳에 출렁이는 물이 있었다. 물 말고는 없었다. 물은 바람에 따라 크게 꿈틀거리거나 조그맣게 흐느적거렸다. 햇살을 받아 톡톡 튀어오르거나 우울하게 침묵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생물 같았다. 어떨 땐 삼키려고 덤빌 것 같았고, 어떨 땐 등에 태우고 모르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 같았다.

바다 앞에 서서 바다를 오래 응시하며 서 있는 소년에 대한 기억이 있다. 소년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다였을까? 출렁이는 물, 크고 멀고 아득한 눈앞의 바다, 물이었을까? 꼭 그랬던 것 같지 않다. 내 기억은 바다가 허공과 같았다고 떠올린다. 내 기억은 내 눈이 그 허공 너머를 보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바다는 거기 없는 것을 보게 하려고 거기 있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태풍이 오면 파도는 담을 넘고 마당을 건너고 마루를 지나 방문을 두드렸다. 태평양을 건너온 거대한 파도에 의해 그 허술한 돌담은 무너지고 마당은 파이고 문에 바른 창호지는 젖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는 고요하고 스산하고 말끔했다. 공기는 낯선데 하늘은 멀쩡해서 수상했다. 파도에 휩쓸린 모래들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형태의 무늬를 만들어 해안의 지형과 색조를 바꿨다. 가지가지 해초들과 나무판자, 플라스틱 조각, 신발, 그릇, 처음 보는 문자가 적힌 비닐 포장지들이 가득한 해안은 어지럽고 산만했다. 어디에 쓰는지, 어디서 왔는지 추측할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창조 전 세상의 ‘혼돈과 공허’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갑자기 다른 세상이 나타난 것 같았다.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 가운데 박처럼 생긴 크고 단단한 열매도 있었다. 그 신기한 것을 주워서 가지고 놀았다. 발로 차면 발이 아파서 손으로 굴리며 놀았다. 나중에 그것이 바다를 건너온 코코넛 열매라는 걸 알았다. 코코넛 열매가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의 남쪽 바닷가까지 왔다고? 사람들은 그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목도한 증인이 된 사실에 설렜다. 


5.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바다에 머문다. 바다에서 바다가 아니라 다른 것, 바다가 보여주지 않은/못한 것을 보는 사람은 바다를 떠난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바다에 오래 머무는 길이기 때문이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물과 놀고 물속에서 헤엄치고, 그래서 땅 위에서 걷는 것보다 물 위에 떠 있는 것에 더 능숙해진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지 않는 사람은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집 앞이 바다여도 물에 발을 담그지 않는다. 헤엄치지 않는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배를 탄다. 바다에 머물기 위해, 되도록 오래 머물기 배를 탄다. 바다가 삶의 터전이 된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지 않는 사람은 배를 타지 않는다. 바다에 머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의 터전은, 이곳에 없다. 그를 홀리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바다 너머, 뭔지 모르는 이상하게 생긴 처음 보는 물건들이 떠밀려온, 어딘지 모르는 저곳이기 때문이다.


눈앞의 바다를 보면서 바다 너머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바다가 막고 있는, 막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저곳, 다른 세계를 동경한다는 뜻이다. 이때 바다는 풍경이 아니고, 터전도 아니고,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달이 사이에 끼면 해가 가려지는 이치다. ‘너머’는 이쪽의 무언가가 차단하고 있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저쪽의 무언가에 붙은 이름이다. 이 차단막은 차단하면서 저쪽에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암시의 가능성이 ‘너머’라는 단어에 들어 있다. ‘너머’의 아련함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차단의 기능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것. 바다는 바다 저쪽을 가리면서 바다 너머 저쪽에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눈앞의 바다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너머를 보는 사람은 바다 너머 저쪽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곳은 그가 모르는 곳이다. 모르는 세계를 향한 이 그리움은 무엇일까. 모르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고향과 과거, 즉 경험된 것을 향한 그리움이 향수다. 향수는 경험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것이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럴 때 생긴다. 익숙한 것이 익숙하지 않아졌을 때 출현한다. 무지는 지(知)의 부재를 가리킨다. 이 부재는 획득 실패로 인한 것이 아니라 획득한 것의 상실로 인해 생긴다. 알던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되었을 때 생긴다. 떠난 사람은 장소만 아니라 시간에서도 분리된다. 무지는 알던 것으로부터의 소외를 뜻한다. 향수는 고향(근원)과의 거리, 혹은 결여가 만들어내는 열망이다. 이 거리는 그가 떠났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소외를 느끼는 사람은 이 거리가 자기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향수병을 앓는 사람은 자기가 고향을 떠났다고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고향이 자기를 떠났다고 한탄한다.  


경험하지도 않았고, 떠나지도 않은 곳/시간을 향한 그리움은 미지를 향해 촉수를 뻗는다. 미지를 향한 이 그리움을, 무지에 의한 그리움인 향수와 구별하여 추구(追求)라고 명명하면 어떤가. 쫓고 구하는 것이 추구이다. 쫓고 구하는 것은 여기 없는 것이다. 향수는 있었으나 있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지만 추구는 있어본 적이 없는 것을 그리워한다. 무지는 ‘여태’ 모름이고, 미지는 ‘아직’ 모름이다. 두 모름은 같은 모름이 아니다. 무지는 아는 것이 마땅한 어떤 것을 알지 못함이고 미지는 알 리 없는 어떤 것을 알지 못함이다. 무지에는 알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미지에는 알게 될 것에 대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무지는 과거에 대한 것이고, 미지는 미래를 향한 것이다. 무지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미지는 추구를 북돋운다. 


향수가 보았던 바다를 다시 보려는 마음이라면, 추구는 본 적 없는 바다 너머를 새로 보려는 마음이다. 향수가 현실이 불완전하거나 낯설기 때문에 완전한, 완전하다고 간주되는 익숙한 세계로 귀환하려는 열망을 갖게 한다면, 추구는 이 익숙한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부일 리 없다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모르는, 낯선 세계를 쫓게 만든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고 분명한 세계 너머 구체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세계를 지향하게 하는 열망이 인간을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것은 현실 속으로 다른 차원을 초대하는 것과 같다. 초대된 다른 차원이 우리를 끌어올린다. 바깥으로, 위로. 말하자면 초월. 레비나스는 초월을 횡단하는(trans) 운동이자 상승하는(scando) 운동이라고 했다. 


가로질러 올라가는,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