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말과 번역

1.

1932년생인 노모는 아홉시가 되기 전에 전화를 걸어 왜 아직 안 오느냐고 묻는다. 당황한 아들이 시계를 보고 이제 아홉신데요? 하자 노모는 그러니까 말이야, 한다. 아들은 조금 전에 잠에서 깼고, 이제 막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일찍 온다고 하지 않았냐?” 어머니가 묻는다. 전날 아들은 내일 일찍 찾아가겠다고 전화로 말했었다. 그 말을 할 때 아들은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일찍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는 다른 날보다 늦게 일어나지 않았다. 노모가 살고 있는 곳까지 가는 데는 한 시간 삼십 분이 걸린다. 그러니까 아무리 빨리 가도 열한시다. 열한시면 점심을 먹기에 충분하다. ‘일찍’이라고 할 때 아들의 생각 속에 있었던 시간은 열한시였다. 그에게 열한시는 ‘일찍’, 이른 시간이다. 어머니에게 열한시는 ‘일찍’이 아니다. 일찍 온다더니 왜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으니 아홉시도 ‘일찍’이 아니다. 


말들은 그 뜻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전적으로 정의가 분명한 단어라고 다르지 않다. 사전은 단어를 고정하지 못한다. 말은 갇히지 않는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단어에 대해 어떻게 규정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 말을 사용할 때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밀란 쿤데라가 자신만의 소설 사전을 따로 만들어 키워드들을 정의하고 있는 것은 그가 친절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말이 옳게 받아들여지(지지 않)는 데 매우 예민하다는 증거이다. 그가 개인적 사전을 만들게 된 계기는 자기 소설의 번역을 감시한 결과였다. 그는 초기작인 『농담』이 서구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화를 소개하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번역자가 내 스타일을 윤색하여 소설을 새로 썼다. 영국에서는 편집자가 사유적인 구절들을 모두 잘라버리고 음악 이론에 대한 장을 없애버렸으며 각 부 순서를 바꿔 소설을 재구성해버렸다.”(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어떤 번역자는 프랑스어 번역본을 중역했고, 어떤 번역본에서는 하나의 문단이었던 긴 문장이 짧은 문장으로 조각조각 나뉘어 있기도 했다. 충격을 받은 그는 자기 소설이 잘 번역되었는지 감시하는 수고를 하게 되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그럴 거면 차라리 그의 소설에 나오는 문제어, 열쇠어들에 대한 사전을 만들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번역에 대한 견해에 따라 이 작가의 이런 태도는 좀 별나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만의 말이 따로 있다는 것, 같은 말로도 다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출발어, 발화자의 말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발화의 순간 단어는 재정의된다. 발화자의 조건과 발화의 상황에 의해 단어의 뜻이 새로 부여된다.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 없이 나타날 수 있는 말은 없다. 말은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에 의해 출현하는데,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상황이 말의 뜻을 재부여하기 때문에, 기존의 사전, 사전 속의 정의가 무색해지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말은 누군가에 의한 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말하는 순간 단어들은 다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의 말이 곧 하나의 국어다. 한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의 외국어이다. 세상에는 말을 하는 사람 수만큼의, 어쩌면 말해지는 상황만큼의 국어/외국어가 존재한다. 


노모의 ‘일찍’과 아들의 ‘일찍’은 같은 단어가 아니다. 단어는 정의되기 어렵다. 그래서 번역이 필요하다. 번역 없이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의 말은 없다. 여기서 번역은 헤아림을 뜻한다. 말하는 사람의 언어가 놓여 있는 상황에 대한 주의깊은 배려. 잘된 번역은 말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을 잘 옮긴 것이다. 경청은 단순히 말에 귀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발생한 사람을 주의깊게 살피는 것이다. 이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섣부르게 단정하는 습관 때문에 빈번히 오역이 일어난다. 집중과 인내, 그리고 어쩌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분이라고 해도, 그것이 아홉시를 ‘일찍’이라고(아홉시도 ‘일찍’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2.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의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 사람이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 그는 십일 개월의 지옥 같은 수용소 체험의 기록인 『이것이 인간인가』를 펴냈다.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온순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분노와 슬픔 없이 읽어나가는 건 쉽지 않다. 굶주림과 추위와 노동과 인간성의 박탈, 모욕,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시체 소각실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데에는 화학자로서의 그의 직업이 큰 역할을 했다. 수용소 내 화학실험실에서 일하게 된 세 명의 포로 중 한 명이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는 다른 요소에 대해서도 말한다. “저는 생존하려고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어를 배웠어요.” 이 말은 『파리 리뷰』에 실린 게이브리얼 모톨라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살기 위해서는 지시하고 명령하는 독일어를 알아들어야 했고, 그래서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고 그는 말한다. 『작가란 무엇인가 3』에 수록된 인터뷰에 의하면, 그의 많은 ‘동료들’은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해 죽었다. 그는 화학 공부를 하느라 독일어를 조금 익힌 상태였지만 개가 짖듯 고함치는 독일인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중언어를 쓰는 알자스로렌 지방의 포로들에게 대체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도록’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살기 위해 말을 배워야 했다.


말이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할 때 핵심은 ‘알아듣다’에 있다. 말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알아듣지 못하면 죽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 것은 부차적이었다. 레비가 독일어를 배운 것은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아듣기 위해서였다. 사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어 있던 이들에게 말을 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런 정도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특정 현상이나 사안에 대한 판단과 의견이 전제되어야 한다. 판단과 의견은 생각의 영역이고, 말은 생각의 구현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인간성이 압류당하고 철저한 수동성이 강요된 아우슈비츠 사람들에게 그런 것이 허용되었을 리 없다.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말을 하기 위해 독일어를 배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독일어를 하는 것이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곳에는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통역하는 포로가 있었다. 그의 책에는 전하기 싫은 말을 ‘마지못해’ 통역하는 이의 곤혹스러움에 대해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의 것이 아닌 나쁜 말들을 입 밖으로 내놓느라, 마치 구역질나는 것을 뱉듯이 그의 입이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 프리모 레비는 이 독일 유대인 통역자에 대해 본능적인 존경심을 느끼는데, ‘그가 우리들보다 먼저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 통찰은 놀랍다.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듣기 때문에 생존하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보다 먼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느낀다. 그 사람은 독일어를 통역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생존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그가 독일어를 ‘말할’ 수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독일어를 말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생존의 이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 것은 이쪽 말을 저쪽 말로, 그리고 저쪽 말을 이쪽 말로 전한 거지,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생존한 것은 독일어를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통역자인 그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듣는’ 것이었다. 


말하는 것이 금지되거나 제한되고, 혹은 무의미하게 되고, 오로지 알아듣는 것만 강조될 때, 알아듣는 것이 생존의 조건으로 강요될 때 그곳에 인간은 없다. 그곳이 아우슈비츠다.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한 사람의 의중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가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죽었다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말은 독일어가 아니다. 물론 독일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레비는 살기 위해 독일어를 배웠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 있는 사람들의 생존을 결정한 것은 독일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말을 한 어떤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의 뜻을 아는 것이지만, 그러나 말의 뜻을 아는데도 말하는 사람의 의중을 파악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외국 여행중에 그 나라 말을 제법 할 줄 아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 말을 그 나라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알아듣는 경우를 보았다. 말을 알아도 못 알아들을 수 있다. 말이 아니라 의중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도 이런 일은 발생한다. 단어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헤아리지 못해서 종종 우리는 대화에 실패한다. 


그러니까 알아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적어도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의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말을 알아듣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듣는 것이다. 말은 사람을 통해 나오고 사람은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말은 그 사람이다. 지금 한 그 말은 지금 그 사람이다. 살기 위해서는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때때로 생존의 문제가 여기에 걸쳐 있기도 한다. 가령 이청준의 「소문의 벽」의 소설가 박준이 어릴 때 경험한 것처럼.

한국전쟁 중 남해안의 한 시골 마을에는 남쪽의 경찰과 북쪽의 빨치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들은 무기와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무섭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무서움 때문에 무기와 이념으로 무장하고, 이들이 무장한 무기와 이념이 이들을 무서운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나 가장 무서울 때는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을 때다. 사람은 누구인지 모를 때가 가장 무섭다. 누구인지 알면 대처할 수 있지만, 누구인지 모를 때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쳐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에 전짓불을 비추며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물을 때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짓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어느 쪽 사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절망적 상황이고, 지독한 시험이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한마디 말에 달려 있다. 실제로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소설가 박준은 전한다. 전짓불 뒤에 숨은 사람의 정체를 점치려다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서, 누구인지 모른 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인간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3.

식민 지배는 말을 옮긴다. 말을 옮겨 심는 이식의 과정이 식민주의의 실천에 포함된다. 정복자의 언어가 식민지에 옮겨온다. 식민지의 언어는 정복자의 언어로 대체된다. 땅을 정복한 자는 그 땅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복자의 정신을 이식한다. 언어는 정신을 실어나르는 수레와 같다. 땅만 차지할 뿐 자기 말을 이식하지 못한 자의 지배는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땅의 지배가 끝남과 동시에 그 지배도 끝난다. 그러나 언어를 옮겨 심는 데 성공한 지배는 땅의 지배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언어와 함께 지배가 계속된다. 식민 지배가 끝난 뒤에도 남는다. 말을 바꾸는 것은 어렵고 중요하다. 중요한데 어렵다. 

어렸을 때 나는 벤또, 다마네기, 스메끼리, 요지 같은 단어들을 들으며 자랐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어른들은 입에 밴 그 말들을 자연스럽게 발음했고, 자녀들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도시락, 양파, 손톱깎이, 이쑤시개라는 단어는 너무나 낯설어서 그렇게 말하려면 매우 의식적이어야 했다. 예컨대 국어를 외국어처럼 발음해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그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만 그런 경험을 한 건 아니다. 프랑스 지배를 받은 바 있는 베트남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어를 적어도 백 개 이상 사용하고 있다고 베트남의 한 작가는 말한다. 까페(커피), 가또(케이크), 붑베(인형), 노엔(성탄절) 같은 단어들을 베트남인들은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식민지에 온 베트남 사람들 역시 베트남어를 익혔다는 것이다. 그들의 익힘에는 생존이나 강요의 요소가 없다. 그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이 새로운 낯선 언어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없는 말에 대한 자유가 그들에게는 있다. 프랑스어는 베트남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만, 베트남에 온 프랑스 사람들은 베트남어 위에 군림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어의 규칙에 복종해야 하지만 베트남에 온 프랑스 사람들은 베트남어의 규칙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언어 습관대로 베트남어를 발음했고, 베트남 단어들에 다른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킴 투이, 『앰』) 그들이 말을 바꾼다. 소녀, 딸을 뜻하는 베트남어 ‘꽁가이’가 ‘매춘부’를 의미하게 된 것이 한 예이다. 이들에 의해 이 단어는 매춘부의 뜻으로 더 많이 쓰이다가 나중에 매춘부라는 뜻으로 굳어졌다. 

말의 변질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한 시기에 존중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던 단어가 다른 시기에는 무시하기 위해 쓰인다. 한 곳에서 존중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 다른 곳에서는 조롱하기 위해 사용된다. 말은 자율적이지 않다. 말의 운명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니까 말의 타락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말은 타락할 줄 모른다. 스스로 숭고해질 줄 모르는 것처럼 타락할 줄도 모른다. 타락한 사람들이 말을 더럽힐 뿐이다. 이렇게 쓰이던 말을 저렇게 쓰면 그 말은 더이상 이런 말이 아니게 된다. 적어도 그런 뜻으로는 쓰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앰』의 작가 킴 투이는 전한다. 프랑스는 인도차니이나와 베트남을 본토 주민의 이주보다는 경제적 착취를 위한 영토로 간주했다. 많은 프랑스인 사업가들이 이런 목적으로 식민지에 들어왔다. 고무농장의 농장주인 알렉상드르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데 그의 돈벌이를 방해하고 그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그의 농장에 잠입한 마이라는 베트남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발생한다. 둘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의 이름은 떰이다. 


떰이 태어난 뒤, 알렉상드르는 떰이 딸이었음에도 ‘꽁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자기 딸이었기 때문이다.


장소와 관심이 말의 발생에 관여한다. 테니스장에서 하는 거의 모든 대화는 테니스에 대한 것이다. 테니스 선수의 이름과 활약에 대한 정보, 테니스 라켓에 대한 평가, 스트로크와 발리, 서비스할 때의 자세 등. 그들이 주로 테니스를 화제에 올리는 것은 그들이 테니스를 치기 때문이고, 테니스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말의 발생에 관여하는 장소와 관심은 말을 제한하는데도 관여한다. 어떤 장소에서 유익하거나 즐거운 대화가 다른 장소에서는 유익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례식장. 종교나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는 말도 있다. 이런 식으로 장소와 관심은 화제를 제한한다. ‘관여한다’는 것은 그런 뜻을 포함한다. 

말은 옮겨가고 변질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라지기도 한다. 알렉상드르의 경우 그 계기는 사랑이었다. 사랑이 무의식적으로, 일상적으로, 무신경하게 내뱉던 어떤 말, ‘꽁가이’, 혐오와 조롱의 단어를 삼키게 했다. 나는 이런 예를 많이 알고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많은 것을 바꾼다. 무엇보다 말을 바꾼다. 성향이나 출신, 인종이나 이념이 만든 혐오와 조롱의 말들을 하지 못하게 된다. 사랑이 그런 단어들을 그의 사전에서 사라지게 한다. 알렉상드르는 꽁가이라는 단어를 잃었다. 단어들이 이런 식으로 폐기된다. 사랑이 성향이나 출신, 인종이나 이념의 벽에 갇히지 않는다는 예시이기도 할 것이다. 

사랑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무엇으로도 사랑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사랑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점령국의 악덕 농장주를 죽이려던 마이가 오히려 사랑에 빠지게 된 사연을 전하면서 킴 투이는 “십대의 마이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에는 투철했지만 사랑을, 사랑의 부조리함을 경계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라고 쓴다. 

불합리한 충동의 에너지가 항상 더 크다. 사랑은 오랫동안 쌓아온 견고한 합리의 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혐오와 차별은 나름의 합리적 논리를 그 안에, 주로 궤변의 방식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깨뜨리기가 어렵다.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에게 적에 대한 혐오나 조롱의 말은 그와 그의 동료들의 사기를 북돋울지언정 과오로 지적되지 않는다. 장려될지언정 제어되지 않는다. 반성과 성찰은 그 논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데, 합리적 설득을 통해 그 튼튼한 논리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불합리한 충동이며 부조리한 일격인 사랑밖에 없다. 


노모는 “전화했니?” 하고 묻는다. 전화하지 않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전화했니? 하고 묻는다. 어떤 질문은 명령이어서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행동이다. 대답으로서의 행동이다. 무심함을 지적하고 깨우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심함이다. 이 번역은 옳을까. 아들은 대체로 완전한 번역에 실패한다. 실은 완전한 번역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발화자의 말에 여러 뜻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발화자조차 자신이 하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은 도착어에 의해 출발어의 뜻이 밝혀지기도 한다. 불완전한 문장이 번역을 거치면서 완전해지는 경험은 그리 이례적이지 않다.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내놓은 말이 듣는 사람(의 반응)에 의해 분명해진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어떤 뜻은 발화의 순간이 아니라 번역의 순간에 출현한다. 그러니까 번역되기까지는 누구도 아직 말한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반응)이 말하는 사람의 말을 규정/결정한다. 번역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4.


차(茶)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차(茶)의 체(體)라 하였는데,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이 나타나지 않으며 진차(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볼 수 없다 하였다.


이청준의 소설 「다시 태어나는 말」에는 초의선사의 다도에 대한 글이 나온다. 이 소설은 선생이 쓴 두 편의 연작소설집(『언어사회학 서설』과 『남도사람들』)의 마지막 작품으로 동시에 실려 있다. 말에 대한 탐구와 소리(판소리)에 담긴 한이 수렴하는 한 지점이 이 작품이다. 말다운 말, ‘사람의 동네에서 떠나버린 말, 죽어 냄새로 떠돌아다니는 말, 그런 말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아직도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말, 믿음을 지니고 살아 있는 말’을 찾아다니는 지욱은 우연히 『초의선집』을 읽고 그 책을 엮어 펴낸 김석호씨를 찾아간다. 『초의선집』이라는 시문집에는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이 포함되어 있는데, 「동다송」은 한국차를 예찬한 글이고, 「다신전」은 차를 마시는 법에 대해 쓴 글이다. 

이청준은 다도의 이치에 대한 초의선사의 글에서 말과 정신의 규범을 이끌어낸다. 우리가 마시는 차는 찻잎과 물로 이루어진다. 찻잎이 뜨거운 물에 우려지면 차가 된다. 찻잎은 물에 스며 차를 만든다. 물은 찻잎을 받아 차를 만든다. 그러니 찻잎은 물의 영혼(神)이고 물은 찻잎의 몸(體)이다. 물이 없으면 찻잎은 몸을 갖지 못하고, 찻잎이 없으면 물은 영혼을 얻지 못한다. 물이 없으면 찻잎은 차에 이르지 못하고, 찻잎이 없으면 물은 차가 되지 못한다. 차가 맛을 내려면 찻잎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차(찻잎)가 많으면 향기가 써서 맛이 떨어지며, 물이 많으면 색이 나지 않고 맛이 떨어진다.” 너무 빨리 마시면 맛이 나타나지 않고, 너무 늦으면 향을 잃는다. 

말에는 정신(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나치면 찻잎이 너무 많은 차가 쓴 맛을 내는 것처럼 부담스러워진다. 반대로 미치지 못하면 색이 나지 않고 향도 나지 않는 차처럼 무미건조해진다.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겠다. 말 속에 생각이 잘 풀어져야 하지만 아예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아도 곤란하다. 그렇지 않으면 알아듣기 어렵거나 하나 마나 한 말이 된다. 두 경우 모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찻잎을 너무 많이 넣거나 아예 넣지 않거나 차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잘 말한다는 것은 알아듣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이 나타나지 않으며 진차(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볼 수 없다.”는 앞의 문장이 강조하는 것이 내용과 형식의 조화만은 아닐 것이다. 진수(眞水)여야 하고 진차(眞茶)여야 한다는 주장이 우뚝하지 않은가. 생각이 바르고 말이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바르지 않은 생각으로 바른 말을 할 수 없고, 어긋난 말로 바른 생각을 전할 수 없다는 것.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