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통한 자아 탐구/자아 놀이
―대니얼 버그너, 『욕망의 유령들』(최호영 옮김, 미래인, 2012)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듯
예술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사랑이든 커피든 어떤 것에 대해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이런 작업으로 이해된다. 자신이 접하고 즐긴 책, 영화, 음악,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목록을 노출하는 일. 이때 얼마나 고상한 멋진 특이한 지적인 천박한 취향을 제시하느냐가 관건이다.
범위를 좁혀 예술 중에서도 문학을 하는 이가 에세이에서 휘두르고 그럼으로써 평가받는 무기는 인용이다. ‘어떤 책에서 어떤 문장을 끄잡아내었는가’로 에세이를 쓴 사람의 지성, 이력, 미감, 전략을 심판대에 올린다. 적어도 독자인 나는 남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런다.
에세이스트가 나는 제목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책을 읽은 것에 질투하고, 빤하지만 언제나 나에게는 먹히는 전략, 예컨대 남들 다 하는 대로 요즘 유행하는 이론으로 글을 바르지 않고 특이한 괴작만을 다룸으로써 오타쿠이자 지식인으로서 긱시크를 뽐내는 전략에 홀린다. 작가가 되기 전에도 나는 훌륭한 인용으로 가득한 에세이에서 몰래 독서 목록을 훔치면서도 그 앞에서 존재가 작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나의 목록이 심판을 받을 차례다. 자업자득의 시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두 달 전에 다음의 책들을 구입했다―『사랑을 재발명하라』(모나 숄레, 백선희 옮김, 책세상, 2023), 『게임, 사랑, 정치―게임화된 애정, 관계, 감정, 일상 그리고 기술사회 욕망혁명의 미래』(앨피 본, 박종주 옮김, 시대의창, 2023),『감정의 문화정치』(사라 아메드,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나르시시즘의 고통』(이졸데 카림, 신동화 옮김, 민음사, 2024). 한마디로, 사기까지는 아니지만 독자를 향한 취향의 전시를 앞두고 취향을 다소 급조하려고 했다고나 할까. 노골적으로 말해 ‘있어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부족한 문해력 탓인지, 주의 산만함 탓인지, 책표지를 핑크, 하트, 큐피드와 그의 화살, 홀로그램으로 꾸몄음에도 인문서 특유의 난해함 탓인지, 아니면 우리의 정신머리와 도파민을 실시간으로 모셔가는 계엄‧내란 사태 탓인지, 나는 책 읽기에 실패했다. 그리고 에세이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들 하는) 진실성을 이런 식으로 저버리면 안 된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솔직해지자. 양손에 안테나 같은 엘 로드를 들고 수맥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처럼, 눈을 감고 집 곳곳에 쌓인 책 기둥에 손을 뻗어 기운을 느끼자. 내가 정말 읽은 책들. 내가 진실로 감동했던 책들. 나에게 사랑에 대해 가르쳐주고 영혼에 전류가 흐르게 했던 책들을 찾자. 솔직히 나는 책 자체를 별로 읽지 않기에 집에 쌓인 책들 태반이 앞 페이지만 손때를 탔지만 그래도, 그래도…… 『욕망의 유령들』. 이것이 내가 강시처럼 팔을 뻗어 찾은 책이었다.
가끔 어떤 책에 손을 얹으면 마음이 찌르르 떨린다. 성경에 손을 얹는 순간 주변의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가죽 커버 너머로 신과 직접 연결되는 것처럼, 표지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활자가 가슴으로 바로 뚫고 들어오는 듯하다. 『욕망의 유령들』도 그렇다. 『뉴욕타임스 매거진』 객원 칼럼니스트인 대니얼 버그너가 쓴 이 책은 불편하고 문제적이고 통상적이지 않은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고 성에 대해 연구하는 정신과 의사, 과학자 등을 인터뷰하여 재구성한 책이다.
자신을 분열시킬 정도로 거대하고 두려운 사랑, 페티시
한국에는 십 년도 더 전에 출간되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 예컨대 발 페티시를 가진 판매업에 종사하고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중년 남성인 제이콥이 건장한 발을 가진 여성 운동선수들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설문조사를 빙자한 음란전화를 한 일(“안녕하세요? 나이키에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새 운동화 출시에 맞춰 간단한 설문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 만약 두 소녀가 서로 상대방의 발가락을 빨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당신은 그것이 역겨운가요, 아니면 재미있다고 생각될까요?”, 34쪽)을 부족한 문제의식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래도 발에 대한 사랑과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는 제이콥의 모습은 여전히 마음을 스산하게 만든다.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그는 취향을 개조하기 위하여 전기충격 치료를 받고, 마치 지병을 치료하듯 성욕을 줄이기 위해 남성호르몬 억제 주사를 자발적으로 맞는다. 그는 발 외에는 어떤 것에서도 성적 흥분을 느끼지 못하는 독특성을 지녔지만, 다양한 성적 경험에 열려 있는 세련된 사람들과 달리 고루하고 촌스러운 사람이다. (나의 편견과 판타지로는) 베를린이나 뉴욕의 어떤 집단에서는 죄악시되지 않을 그의 욕망은 스스로에게 전혀 용서받지 못한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문제’를 절대 고백하지 못한다. 그는 수치심에 짓눌려 있다.
차라리 아내에게 페티시를 털어놓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저자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한다. 어떤 이에게 페티시 성향은 재능이고 개성이다. 파트너와 상호 동의가 이루어진다면 애무의 한 범주가 되고, 더 나아가 성기 삽입이라는 성교의 일극 체제를 탈피하고 확장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면 예컨대 사랑을 나눌 때, 발 애무의 비중과 형태를 어떻게 설정하고, 또한 페티시즘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대도 가지고 있을 성적 욕구와 취향을 어떻게 탐색하고 반영할 것인가 하는, 그 자체로 에로티시즘을 자극할 토론을 통하여 부부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이콥은 아내에게 왜 자신이 아내와의 성교를 피하는지,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는 괴물이고, 아내를 “괴물의 세계에 끌어”(77쪽)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사랑한다. 아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아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내가 자신의 페티시를 이미 알고 있지만 절대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기에 고백을 스스로에게 금한 것일지 모른다. 또는 아내를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두 개로 쪼개 하나는 자신의 성욕과 함께 어둡고 절망적이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괴물의 세계에 두고, 또다른 하나는 자신의 성욕에 물들지 않은 아내와 함께 순수하고 깨끗하지만 죽어 있는 일상의 세계에 두는 일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그의 적응 수단일지도. 그때 아내는 수치스러운 성욕의 반대급부로 존재한다. 스스로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그의 절망과 고통을.
다시, 나에게 왜 이 책이 찌르르 전기를 흘려보내는지, 왜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이 책을 떠올렸는지 생각해본다. 사랑에 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분명 욕망이 사랑의 영역 중 너른 땅을 차지할 것이다. 발을 사랑하는 이 남자는 자신의 욕망에 온 존재가 잡아먹혔다. 그는 직업적으로 성공했고 우직하고 다정다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격을 가졌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괴물로 여긴다. 왜냐하면 페티시즘이 그것을 뺀 그의 전부를 집어삼켰으므로.
그는 성적 취향을 자신의 일부로,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축소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에게는 착하고 마음이 약한 면이 있다. 그는 우울과 조울 증상을 가진 이들을 위한 자조 모임을 운영하는데, 심한 폭설이 내려 아무도 모임에 나오지 못할 상황에서도 혹시 누군가 홀로 약속 장소에 도착해 쓸쓸해할까봐 위험을 무릅쓰고 눈보라를 헤치며 차를 모는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선량한 면모와 발을 향한 욕망을 솥에 공평히 부어 부글부글 끓여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하지 못한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할 때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지만 그는 더욱 쪼개져 있다. 그는 스스로 추악하다고 믿는 자신의 일부를 그 외의 것들로부터 완강히 떼어놓는다. 그러나 바로 그 격리 조치 때문에, 그가 자신의 발에 대한 사랑을 부인하고 미워할수록 그것이 그를 다 잡아먹어 그를 오로지 ‘페티시를 가진 괴물’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사랑과 자아의 관계에 대한 극단적이고 슬픈 예이다. 자아가 욕망에 잡아먹혀 울부짖은 자의 이야기다.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닐지라도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자아와 관련되어 있다. 사랑은 우리의 자아에 무엇을 남기거나 앗아간다.
바통을 넘기며
사랑=자아에 남긴 흔적
사랑=자아에 대한 방해
사랑은 최소한 두 얼굴을 가진다. 사랑은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관성으로 올곧게 흐르는 우리의 삶을 방해해 구부린다.
처음 편집부로부터 작가 이희주와의 교환 리뷰를 청탁받고 주제를 사랑으로 좁히고 싶었던 까닭은 물론 이희주가 사랑을 다루는 데 능한 작가여서다. 그는 서로 하는 사랑뿐 아니라 최애를 향한 일방의 사랑을 잘 그리고, 그 사랑이 그것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을 어떻게 바꾸고 박살내고 재조직하는지 그리는 데 정통하다. 그리하여 합동 집필 소식을 들은 지인으로부터 이희주가 사랑의 작가인 것은 알겠는데 이미상 너는 사랑과 대체 뭔 관계인지…… 하는 의심어린 갸웃거림을 받기도 하였으나.
핑계를 대자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작가인지가 아니다. 앞으로 이어질 교환 리뷰 연재의 제목은 ‘두 심장 꿰매기’로, 담당 편집자 정은진이 지었는데, 아마도 그는 편집자 특유의 겸손함으로 자신의 기여를 감추려 할지 모르지만 멋진 제목을 지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크레딧에 올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세 심장을 꿰매 만든 기획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사랑에 어울리는 것은 두 개의 심장, 즉 두 명의 작가가 아니라 우리의 심장을 꿰매는 행위다. 누구를 불러다가 글을 쓰게 했느냐가 아니라 누군들 불러서 얽히게 만든 것 자체가 사랑에 가깝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쓰는 ‘교환’이라는 방식, 혼잣말에 가까운 소설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을 중심에 두고 그에 대해 열렬히 고백할 ‘리뷰’라는 형식이 사랑에 대해 더 많이 말한다.
어린 시절에 친구와 나란히 방바닥에 등을 대고 벽에 엉덩이를 붙여 다리를 천장으로 길게 뻗은 채 입으로 교환 소설을 쓰곤 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벽에 기댄 무릎을 보며 이야기를 덧붙여나갔다. 한 사람이 창작을 마치면 다음 사람이 이전 창작을 망가뜨렸다. 주인공을 기껏 살리면 굳이 죽였고 보란 듯 부활시켰다. 벽에 넝쿨처럼 뻗은 우리의 다리와 쭈글쭈글한 무릎 주름과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뒤섞이는 이야기. 어린 날의 행복한 기억이 교환 리뷰의 첫 글을 쓰며 떠올랐다. 그간 경험한 다양한 사랑이 내게 남긴 흔적과 내 삶의 경로를 틀어버린 순간들이 지금 이 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꿰맴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를 귀히 여겨 상상력을 발동하면 실을 꿴 바늘은 함께 글을 쓸 우리 두 사람을 거쳐 글을 읽는 독자에게까지 닿는다. 우리의 실이 지나가고 있다. 심장에 정말 바늘구멍만한 구멍을 남기며 아프고 즐겁게 우리를 한데 몰아넣고 있다.
이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