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파파야도 아니지만 사랑 만들기를 해보렵니다……

파파야도 아니지만 사랑 만들기를 해보렵니다……

―미시마 유키오 외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김항 옮김, 새물결, 2006), 히라노 게이치로 『한 남자』(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20)

 

 

 

(  )를 사랑한 인간

 

가슴속의 촛불, 하늘의 별……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심 아버지로 모시는 남자 둘이 있다. 하나는 이수만 선생님 아버지이고 (에스엠에서 새 보이그룹이 데뷔하면 아버지가 남소 시켜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미시마 유키오다. 
좋아하는 작품은 『금각사』 『가면의 고백』 『열대수』. 『문장독본』과 『소설독본』은 여러 번 읽었으니 뇌는 몰라도 마음에 남아 도움을 주고 있다고 믿고 있고, 최근에는 『나쓰코의 모험』을 신문 연재를 따라가는 마음으로 재미나게 읽었다. (나쓰코 정말 귀엽다. 게이 소년이 동경할 만한 사랑스러운 여자다.) 막 번역되어 나오는 중인 ‘풍요의 바다’ 4부작은 아직 손대지 못했고, 『목숨을 팝니다』 『부도덕 교육 강좌』 『비틀거리는 여인』은 읽었다는 것 외엔 하나도 기억 안 난다. 그렇다고 다른 책의 내용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도 아니고, 매년 의례처럼 1회독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를 물으면 미시마 유키오요, 라고 대답을 하는 건 뭐랄까, 그가 압도적으로 외로운 인간이라는 사실이 나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일테면 블로그에서 발견한 이런 구절을 보면 허공에 마구 주먹질을 하다가 바닥에 엎어져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을 참을 수 없다.

 

미시마가 죽기 전에 미와의 공연 대기실에 장미꽃 300송이를 가지고 왔다고 함.. 그러면서 미와에게 [만날 때마다 아름답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지쳐서 이제 널 만나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객석에서 미와가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었고 미와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미시마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고 하더라(https://m.blog.naver.com/kimganu/222473324654)

 

사실관계는 불분명하지만 이런 루머 아닌 루머를 믿는 게 미시마 유키오를 제대로 읽는 독법 같다(광대는 소문과 오해의 힘으로 연극할 힘을 얻으니까).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좋아하고 떠올릴 때면 어째서 우리의 영혼이 공명하는지, 외로운 인간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자주 생각하는데,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마는 일단 ‘다른 사람으로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음’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사람을 방어적으로 만든다. 비밀을 품고 살다보면 어느 순간 곪아 썩은 내를 풍기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람들과 더 멀어진다. 하지만 비밀을 가진 사람이 가장 외로워지는 건 비밀을 비밀로 간직하라는 요구를 받을 때다. 지난 회 이미상 작가가 추천한 『욕망의 유령들』을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장면은 발 페티시를 지닌 제이콥이 자신을 완전히 부숴버릴 것 같은 욕망을 아내에게 고백하는 순간, 아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부분이었다. 둘 사이의 소통이 실패한 건 제이콥이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서도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돌려 말한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 아내가 제이콥으로부터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한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무척 섬뜩하고 그래서 제이콥은 이 무서운 아내를 괴물인 자신과 정반대에 놓인 ‘아름다운’ 존재로 만든다. 그래야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 납득되니까. 당신과 내가 인간 대 인간이라면 고작 발을 어떻게 하고 싶어하는 것쯤으로 이렇게 울며 나를 끔찍하게 여긴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테니까. (여담이지만 오래전 모 아이돌이 자기는 발이 예쁜 여자가 이상형이라며 방송에 나와 상당히 구체적인 묘사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연하게도 그가 제이콥과 같은 부류라는 루머가 떠돌았고, 그는 사고로 팀을 탈퇴했다.)
이 정도까지 절절하지는 않더라도, 내게도 비밀과 수치가 있다. 작가가 된다는 건 이걸 바깥으로 얼만큼 공개할 것인지, 어떻게 포장할지와 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인플루언서로서 요구받는 에고 트립도 있고(옷은 뭘 입지? 구호 원피스? 젊은 척하며 코이세이오를 입어야 하나? 슈슈통을 입고 귀여운 괴짜로 가는 건?), 글로 보여주는 일관적인 태도 같은 것도 필요한데(독자들이 삼십대 여자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떤 걸까? 롤모델로 삼을 만한 멋진 모습을 보이는 거? 너무 미치진 않은 ‘적당한’ 페미니스트인 거? 우아하고 정갈한 라이프스타일을 뽐내는 거?) 나는 고민만 하다 지쳐서 다 꺼져라…… 하는 마음으로 사는 거 같다. 어느 정도로 수치를 드러낼지, 호감 살 정도로 조절해 보이기보단 그냥 들키면서 살고 있다.
아무튼 미시마 유키오도 글에만 몰두하던 이십대를 지나,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문호가 된 시점부터는 고도로 에고 트립에 몰입한다. 당대 대스타답게 미디어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하며 자신의 고릴라처럼 부풀린 몸집을 뽐내는데 대중들은 뭐랄까, 이 괴짜를 놀렸다. 누가 봐도 슬픈 게이인 미시마에게 ‘여성 육체의 어디에서 섹스를 느끼나요?’나 ‘어떤 여자 수영복을 좋아하나요?’ 따위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아무튼 우스운 사람인 걸 감안하더라도 좀 짓궂게 굴었다. 어쨌든 미시마는 이런 질문에 얼굴이라느니, 원피스 수영복이라느니 어찌저찌 대답하고 심지어는 이상형의 여자로 꼽은 얼굴이 둥근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자와 결혼도 하는데, 레즈비언 친구들이 이상형이 누구냐는 질문에 차은우요, 라고 답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애수가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그가 이따금 진심을 누수하는 순간이 있어, 나는 그런 장면 앞에서 머뭇거린다. 요컨대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에서 그가 학생들과 토론한 녹취록을 풀어쓴 1부는 종종 읽는다. 다른 것보다 그가 전공투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 흥미롭다. 표지의 이미지도 그렇고, 그야말로 스타 지성인과 변화를 갈망하는 뜨거운 피의 젊은이들이 전심전력으로 맞선 순간을 포착한 기록이어야 하는데, 읽다보면 둘 다 부딪치기만 할 뿐 도무지 뒤섞이는 순간은 없어 어쩐지 씁쓸하다. (지금 이 글을 쓰다가 내가 읽고 싶었던 게 토론이 아닌 대화였다는 걸 알았다.) 그런 씁쓸함은 어떤 때는 미시마가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공투 학생들이 만들기도 한다. 요컨대

 

자기와 타자가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거기에 대립이 있고 싸움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 타자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나도 타자라는 것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 어떻게 해서든 하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졌습니다.(30~31쪽)

 

이런 타자론은 미시마가 스스로의 한계를 고백하는 대목으로, 어쩐지 읽고 나면 가슴이 저릿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고독하고 병든 인간이라는 걸 얘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전공투 학생들은 뭐랄까, 이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단상 위의 남자는 이미 자기 스피커가 있는 유명인이다.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인 전공투 학생들이 그의 고충을 이해해줘야 할 필요는 없고, 이런 식의 자기 고백은 좀 무섭기도 해서 이십대 초반인 학생들이 들으면 뭐야, 싶고 당황스러울 수 있다. 이해해도 어쩐지 마음이 무겁다. 
이 책에서 미시마의 병든 마음, 그의 수치와 비밀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부분은 천황에 대해 논하는 대목인데, 이 부분은 한 줄 한 줄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가 이미 죽었음에도 무척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상담 선생님도 아닌데 염려의 눈으로 보게 된다. 
당연한 얘기랄까, 미시마는 천황을 위해 배를 갈랐지만 그에게 천황은 단지 기호에 불과했고, 미시마도 그 부분을 확실히 밝힌 바 있다.

 

일본 민중의 저변에 있는 것, 그것을 천황이라고 불러도 될지 잘 모르겠어. 우연히 나는 천황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지.(58쪽)

 

그리고 그는 그 기호 아래로 일본 국민을 하나로 모으고 싶어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겐 “신과 같은 천황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다시 한번 재현시키고”(78쪽) 싶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황당하기 그지없어, 계속해서 천황의 신성함, 고결함을 주장하는 미시마에게 짜증이 난 한 학생은 노골적으로 쏴붙이기도 한다.

 

나는 미시마 씨가 천황이라 할 때 어쩔 수 없이 현실의 천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런데 그 천황은 추한 영감탱이입니다. 미시마 씨가 작품 속에서 천황을 미화하면서 미를 구현하려고 해도, 천황이란 말을 사용할 때 이미 추한 것이 되어버리잖아요.(88쪽)

 

거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치는 급인데…… 여기서 미시마는 어린 시절 단상 위의 천황이 세 시간 동안 전혀 미동도 않고 앉아 있던 모습을 보았다고, 개인적인 역사에서 그러한 은고를 입었다며 얼버무린다. 논리 따위는 건너뛰고 자기의 개인사에서 비롯한 에피소드를 전시함으로써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뭐랄까, 당대의 지성이 써먹기에는 좀 치사한 전략인데…… 거꾸로 말하면 ‘고릴라’라는 모독적 표현에도 느물느물 넘어가던 미시마가, 천황의 육체의 빈곤함을 묘사하는 이야기에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는 뜻도 되어 기분이 이상하다. (천황은 기호에 불과하다고 밀어붙일 거면 남들이 추한 영감탱이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끝까지 고귀하다고 주장했어야 한다.) 아무튼 이때의 패배가 썼는지, 미시마는 토론으로부터 일 년 뒤,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서 자기 배를 가른다. 저 나름대로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유를 열심히 떠들어댔지만, 건물 근처로 모인 사람들의 뭐라는 거야?라는 비웃음을 사며 칼이 잘 들지 않아 엄청 힘겹고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 행동은 초반에는 엽기로 해석되었고, 그래서 나는 이 죽음이 명작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훌륭한 광대라도 자기 죽음까지 불사하긴 어려우니까. 그런데 몇 년 전인가, 일본의 호텔방에선가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스가와라 고하루가 내비게이터로 출연한 미시마 유키오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고하루는 국내엔 태민의 <MOVE>를 작업한 것으로 알려진 걸출한 안무가인데, 그 대단히 기발하고 또 힘 있는 육체를 가진 존재가 존경의 자세로 미시마의 뒤를 쫓는 모습은 뭐랄까, 미시마가 (말 그대로) 생명을 바쳐 만든 죽음이라는 연극을 자기들 좋을 대로 위엄 있는 것으로 수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호 안에서 자아를 잃고 싶어하는 병자를 우경화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다니. 내가 본 그라면 NHK에 등장하기보다는 차라리 ‘미시마? 그 금각사 불태운 녀석 말이지?’라고 젊은 애들에게 비웃음 사는 걸 훨씬 짜릿하게 여겼을 텐데…… 아무튼 내 식으로 그를 옹호(?)하자면 그는 외로운 인간이었습니다, 라는 거다. 굳이 일본 민족이나 고서기 등의 개념을 꺼내 천황 아래 집합하기를 호소하는 건 그가 원하는 게 모두가 하나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의 LCL용액이나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단편 「생명도시」에서 모든 인간이 죽사발이 되어 서로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그 소망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종류의 것은 아니기에 슬프다. 인간이 이런 달콤한 디스토피아를 좇는 근원에는 손쓸 수 없는 외로움이 있다는 걸 아니까. 너무너무 외로운 탓에 모든 이의 영혼을 끌어당기고서야 채워지는 구멍이. 
참으로 숙연해지는 한편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떤 이의 영혼은 무수한 영혼과도 교환 불가능하지 않나? 그러니까, 아주 개인적이고,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특수한 영혼이 우리의 삶을 구하기도, 망치기도 하지 않나?

 


인간을 사랑할 인간

 

종종 나는 나 자신을 미시마의 딸 희시마 주키오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다. 앞서 말했듯 이렇게 징그럽고 외로운 미시마의 영혼이, 나의 영혼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율도 멋지고.
그런데 얼마 전 나는 아버지를 찌르게 되었다. 어설픈 살해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내가 가톨릭으로 말하면 신이고, 미시마식으로 말하면 천황이고, 내 식으로 말하면 나의 천사인 아이돌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골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시마가 천황이라는 기호 아래 어떤 인간이 와도 상관없다고 했듯, 나 또한 아이돌이라는 기호 아래 많은 남자애들을 만났다. 썼다가 휴지 조각처럼 버리고 뒤돌아 잊기도 했다. 끔찍한 경험도 있고, 좋은 추억도 있다. 뭐가 되었든 오래가진 않았는데, 많은 빠순이들이 토로하듯 오빠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나의 문제가 컸다. 미시마가 ‘추한 영감탱이’라는 말에 좌절해서 폭주했듯, 나도 최애가 변해가는 모습을 견디지 못했다. 기대와 희망에 찬 눈빛이 지친 노동자로 변질해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지금의 최애가 스스로 생각하는 베스트 가사로 하얀 운동화를 신고 출발한다는 뜻의 문장을 꼽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운동화지만 앞으로 지저분해질 거다! 이런 뜻인 게 멋있잖아.

 

나는 이 말에 까무러쳤다. 지저분한 게 멋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고, 놀랍게도 그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나도 이렇게 근사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변하는 것을 사랑하는 힘을 갖고 싶었다. 
이때까지 내가 사랑한 건 절대적인 거였다. 절대적인 순수. 절대적인 아름다움. 망가지지 않는 것. 영원한 것. 한번은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흥분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저는요, 그냥 너무너무 하얀 구슬을 갖고 싶은 거예요. 오염 없는 걸요. 일 파운드의 살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어내는 불가능한 일이, 어느 순간엔 가능하지 않을까 호시탐탐 칼을 대보는 과정이 제가 사랑하는 방법이었던 거죠. 그런데 최애는 그럴 순 없다고 했다. 일 파운드의 살을 얻으려면 반드시 피를 봐야 한다고, 그게 인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연약한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어쩌면 꽤 재밌는 일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또 이런 문장도 만났다. 

 

“(…)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과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요. 처음 만나서 현재의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그다음에는 과거까지 포함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죠. 근데 그 과거가 생판 타인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미스즈는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알게 된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사랑하는 거 아닐까요? 한 번 사랑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몇 번이고 다시 사랑하잖아요.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으니까.”
“그렇죠. 사랑이야말로, 계속 변화해도 똑같은 하나의 사랑인지도 모르겠군요. 변화하기 때문에 더더욱 지속 가능한 건가.”(327~328쪽)

 

히라노 게이치로의 장편 『한 남자』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작품은 자기 정체를 숨긴 한 남자의 죽음을 파헤치는 내용인데, 재일조선인과 우경화 문제라든지, 호적 구입이라든지, 괜찮은 장편답게 다양한 주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곧고 아름다운 가지를 쳐가지만 작가가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단언하듯 말한 건 이런 장면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데뷔작으로 미시마 유키오상을 수상했고, 한때 그의 재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목받았던 작가다. 그 명칭이 단순히 미문을 잘 쓴다는 의미만은 아닐 테다. 미시마라는 뿌리에서 사람들은 저 나름대로 꽃을 피운다. 히라노는 자기만의 ‘분인사상’을 만들었다. 단상에 선 고립된 괴짜로 남는 게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에서부터 진짜 사랑과 삶이 시작된다는 걸 명시했다. 그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돌파한 건데, 참 좋았다. 미시마를 바보, 혹은 신으로 대하며 정치적 도구로 쓰는 대신 그의 외로움, 죽음과 정직하게 마주하여 자기만의 해답을 내렸다는 게 멋졌다. 
그리고 나 또한 나만의 결론으로 이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끝엔 자기 배를 가르는 수밖에 없고, 그건 이미 미시마가 했다.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고 따라 하는 딸이라는 건 너무 한심하다. 인기를 얻을 만한 ‘적당한’ 페미니스트의 행동도 아니다. 무엇보다 내가 오래 보고 싶은 거, 십 년 뒤에도 여전히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 기호가 아닌 하나의 인간, 삶의 풍파에 깎이고 지저분해져 있을 나의 최애다. 그애를 오래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멋진 운율의 내 이름을 버리기로 했다. 오로지 이희주라는 이름만 갖고, 최선을 다해 나만의 지저분한 답을 찾기로 했다. 이것이 이번 에세이의 목적이다.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으니,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선물을 하기로 했다. 그건 아버지에게도, 내게도 있는 신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다. 나는 세계의 일부를 수정했다. 요컨대 이런 결론이다.
 
미시마는 죽기 전 미와의 공연 대기실에 찾아간다. 장미꽃 삼백 송이를 건네며 말한다. 만날 때마다 아름답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지쳐서 널 만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미와는 웃는다.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위악 부리지 않아도 좋아. 좀더 정직해도 좋아. 미시마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운다. 눈물을 펑펑 쏟는다. 그의 젖은 뺨을 닦아주고 미와는 무대에 선다.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를 부른다. 무대 아래서 미시마는 박수를 친다. 무대가 끝난 뒤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나간다. 빛이 환하다. 

 

이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