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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을 앞두고 언론사와 잡지사 몇 곳과 인터뷰를 한 뒤로 다실을 찾는 손님이 늘었다. 승용차가 아니라면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와야 하는 이 외진 마을을, 메뉴에 아메리카노나 치즈케이크도 없는 찻집을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사희는 고맙고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떠름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겨우 손에 쥐게 된 작은 평화가 깨지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평화는 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선생님이 옆에 있었다면 단번에 자신의 표정을 읽어내고 타이르듯 짚어줬을 거라고 사희는 생각했다. 아마 말끝에는 단서를 달았을 것이다. 그게 진정한 평화라면.
내일 수업도 꽉 찼어요, 언니.
행주를 삶다 말고 규영이 말했다.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묻어났다. 사희가 여력이 될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개설하는 일회성 수업인데도 언제부터인가 신청 인원이 꽉 차기 시작했다. 정기적인 수업을 개설할 계획은 없는지, 칸이킨츠기가 아닌 혼킨츠기 수업을 열 의향은 없는지 묻는 메일이나 전화도 종종 받았다. 그러나 사희에게 킨츠기는 어디까지나 사진 작업을 잠시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것이었다. 적은 수지만 수강생들을 만나며 조금씩 세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다실 살림을 도맡고 있는 규영이 수업 횟수를 늘렸으면 하는 바람을 은근히 내비친 적이 있었지만 사희는 내키지 않았다. 작업 숙련도가 아직 선생님에 비해 미흡한 수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메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찍고 싶은 대상이 생기면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상태로 지내고 싶었다.
사희는 물로 헹군 다기를 탁자 위에 펼쳐놓고 하나하나 정성스레 닦았다. 다실에서 사용하는 차호와 숙우, 찻잔, 접시들은 전부 킨츠기 작업을 거친 것들이다. 대부분 선생님 작품이었지만 규영과 사희가 작업한 것들도 여럿 있었다. 사희는 다기의 깨어졌던 틈을 메우고 칠해놓은 옻이나 금분, 은분이 벗겨지지는 않았는지 눈과 손끝으로 꼼꼼하게 확인했다. 한겨울의 마른 나뭇가지 같기도, 가뭄에 말라 갈라진 강바닥 같기도 한 그 얇은 흔적들을 더듬을 때면 사희는 자신이 통과해온 삶의 균열들을 되짚어보곤 했다. 그때마다 그 균열들이 더는 자신을 상처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아프기만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로이 감각했다. 온전함이란 바라보기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선생님은 말하곤 했다. 조금의 흠도 얼룩도 없이 깨끗한 상태가 온전함이라면 삶은 온통 수치와 불안일 수밖에 없다고도. 사희는 스스로에게 안부를 묻듯 찬찬히 다기를 닦고 정리하는 과정을 좋아했다. 하루의 끝에 찾아오는 이 시간을 위해 다실에 나와 일하는지도 모른다고 여길 만큼.
할아버지가 내일 들르라던데, 언니 혹시 시간 돼요?
아침에 가볼게. 벌써 다 완성하셨대? 허리 불편하시다더니.
모르죠, 뭐. 물어볼 새도 없이 먼저 끊어서. 근데 언니한테 바로 전화하면 될 걸 왜 나한테 하는지 몰라, 할아버지는? 진짜 별나다니까요.
근데 규영, 너도 별난 거 알지?
제가요?
규영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고는 행주를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사희는 그런 규영의 모습을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도도록하고 좁은 이마가 선생님과 똑 닮았다.
선생님 앞으로 킨츠기 작업 의뢰가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작업이 끝나면 선생님 댁에서 완성품을 받아와 깨지지 않도록 포장한 뒤 의뢰인에게 발송했다. 택배로 받는 게 걱정스러운 이들은 다실이나 선생님 댁으로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석 달 전쯤 의뢰받은 깨진 청화백자 화병이 이제야 새 모습을 갖추게 된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사희에게 처음으로 킨츠기를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마을에 작은 다실을 하나 갖고 있는데 손녀가 대신 맡아 운영하고 있다면서, 거기 딸린 집에서 지내며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도, 작품 도록에 실을 사진을 촬영해줄 수 있겠느냐고 청한 것도 선생님이었다. 도록을 계기로 사진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게 되었으니 사진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것 역시 어찌 보면 선생님 덕이었다. 육 년 전 여름, 축축한 안개에 싸인 새벽 저수지에서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물속으로 걸어들어가던 사희를 저벅저벅 따라오던 발걸음, 허리까지 물속에 잠긴 채로 망연자실 서 있던 사희 앞에 자꾸만 풍덩, 풍덩 짱돌을 던지던 손짓도 선생님 것이었다. 그 새벽 선생님은 사희의 뒤통수에 대고 몇 번이나 소리쳤다.
깊어, 그만 가.
그것이 선생님이 사희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그 목소리를, 그 외침을 사희는 자주 떠올렸다. 수렁과도 같은 기억이 사희의 발목을 잡아끌 때마다, 벗어나려 애를 써도 잊을 만하면 다시금 그날의 안방 문 앞에 자신을 데려다놓는 고약하고 질긴 꿈을 꿀 때마다 사희는 중얼거렸다. 그만 가. 깊어, 그만 가.
만약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날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사희는 짐작해보곤 했다. 흠뻑 젖은 몸으로 도로 물기슭으로 올라왔을까, 그길로 차를 몰아 또 어딘가를 헤맸을까. 그도 아니면 뒤늦게 애꿎은 누군가에게 발견됐을까. 만약이라는 가정 속에서 사희의 지난 시간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그 끝에서 또다시 수많은 낱낱의 갈래로 뻗어나갔다. 무수하게 엮인 그물의 시작매듭에 그날의 장면이 있었다. 여전히 생생했다. 안방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던 자신이.
저수지에 이르기 전까지 사희는 이 년 넘게 전국을 떠돌며 지냈다.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고 휴대폰 번호도 바꿨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 자신의 과거 따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닿고 싶었다. 기섭과 이혼하며 아파트를 정리한 돈으로 우선 중고 사륜구동차를 장만했다. 예전 같았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투박한 디자인이었다. 간단한 캠핑 장비도 사들여 차에 실었다. 사희는 예전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해보고 싶었다. 평생 자신이라고 알고 여겼던,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으로부터 도주하고 싶었다. 되도록 멀리, 정반대의 어딘가로, 자신의 극단으로. 정반대로 향하려면 먼저 정반대의 반대 방향을 알아야 했다. 본래의 홍사희, 홍사희라고 믿었던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했다.
사희는 차를 몰고 마음 내키는 대로 달리다 멈췄다. 인적 드문 들녘과 습지, 바닷가와 산에서 걷고 주저앉고 기어오르고 다시 걸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마치 이 지상에 숨소리만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면 자신의 위치가 조금은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순간에 마주친 노을이나, 해가 기울며 굴곡이 뚜렷해진 산등성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평선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사희는 머물고 싶은 곳이 나타나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일 년쯤 흘렀을 때, 차 트렁크 구석에 처박혀 있던 필름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대학 졸업 이후로는 손도 대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담고 싶은 대상을 만나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듯, 때로는 수행을 하듯 성실하게 셔터를 눌렀다. 황량하고 덧없는, 무위에 가까운 풍경을, 자신의 내면과 어딘가 닮은 대상들을 포착했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때 사희는 철저히 관찰자가 되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건너다보고 있다는 감각이, 거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고작 찰나를 붙잡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위안을 줬다. 카메라 가방에 현상하지 않은 롤필름들이 쌓여갔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에 기대어 버티다가도 불현듯 밑도 끝도 없는 우울과 무력감에 빠져들 때도 있었다. 결국에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자신에게 회복은 가당치도 않다는 절망이 사희를 물고 늘어졌다. 절망의 이빨은 사납고 날카로웠다. 사정없이 사희의 심신을 물어뜯었다. 술이나 수면제 없이는 버틸 수 없는 나날이 사희를 송두리째 삼켜버리곤 했다. 끝내자, 다 끝내버리자는 각오로 차를 몰아 당도한 곳이 새벽안개가 자욱한 저수지였다.
그로부터 두 계절이 지난 한겨울의 저수지에서 사희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의 정반대, 즉 극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텅 빈 구멍에 대고 지르는 고함 같은, 줄곧 들리기를 바랐던 소리를 듣게 된다. 차갑고 미끄러운 수렁 같던 저수지로 걸어들어갔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미래를 만나게 된다.
수년이 흐른 뒤에 사희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왜 그날 그 이른 시각에 저수지에 계셨던 거냐고, 왜 낯 모르는 이를 구해주셨느냐고. 선생님은 메워놓은 붉은 옻이 적당히 말랐는지 확인한 다음 붓끝에 금분을 묻혀 옻칠했던 자리에 부드럽게 펴 발랐다. 붓질에도 대답에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금분을 바르고 붓을 내려놓고서야 선생님은 고개를 들었다.
구해주긴 뭘 구해줘. 내가 누굴 구할 주제나 되나. 넌 살았어, 나 아니었어도.
사희는 붓과 금분을 정리하는 선생님의 손을, 손등에 도드라진 힘줄의 굴곡과 그림자를 묵묵히 바라봤다. 선생님이 작업대에 내려놓은 백자 찻잔은 단차 없이 매끄러웠다. 여러 조각으로 깨어졌던 찻잔의 시간은 과거로 남았고, 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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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희가 저수지 근처 상수리나무 두 그루 사이에 익숙하게 차를 세운다. 주차 공간처럼 모래가 너르게 다져져 있다. 사희가 트렁크에서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를 꺼내고는 앞장서 걷는다. 서걱서걱 모래 밟는 소리. 사희의 그림자를 밟으며 인애가 뒤따른다. 사희는 물가에서 멀지 않은 판판한 모랫바닥에 삼각대를 박아 세우고 카메라를 세팅한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다.
저수지는 얼어붙어 있다.
저기, 저 아래가 낚시터.
사희의 검지 끝이 가리키는 쪽으로 인애가 고개를 돌린다. 멀찍이 가건물과 천막이 여럿 보이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키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저수지는 숨겨진 요새처럼 어둑하고 고요하다. 사희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뷰파인더를 들여다본다. 사희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특별할 것 없는 회색의 겨울 풍경뿐이다. 사희가 사진을 찍는다. 단 한 번의 셔터 소리. 인애는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사희의 옆얼굴을 엿본다. 세수 후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젖은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처럼 무표정하다.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다. 인애는 괜스레 발끝으로 모래를 허비적거린다.
여기 매일 와.
매일?
응. 같은 시간에 사진을 찍어.
똑같은 풍경을?
똑같은데, 안 똑같아.
사희가 카메라를 동영상 모드로 바꾸고 녹화 버튼을 누른다. 얼어붙은 수면 위로 햇살이 희미하게 비쳐든다. 수백, 수천 가지의 회색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저수지를 바라본다.
날 좋다.
흐리네.
그래서.
흐려서?
너무 화창하면 찡그리게 되잖아.
사희가 차에서 보온병을 가지고 온다. 보온병 뚜껑에 거무스름한 액체를 따라 인애에게 건넨다. 김과 함께 달콤한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직접 만든 대추청을 탄 거라고 사희가 일러준다. 불면증에 좋대, 하고 덧붙인다. 차를 들이켜고 인애가 빈 뚜껑을 사희에게 내민다.
사희야.
사희가 고개를 돌려 인애를 본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
응?
어제도 그렇고. 갑자기 찾아왔잖아, 내가.
갑자기이긴 했어.
인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사희의 얼굴을 보며 예전의 사희라면 이런 순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자신을 웃게 만들어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긴 걸로 하자. 나 한 번, 너 한 번.
사희가 보온병 뚜껑에 대추차를 따라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긴다.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거짓말.
고개를 푹 떨구며 사희가 소리 없이 웃는다. 마치 인애로부터, 함께 있는 현재로부터 앞서나가 있는 듯한 늙은 웃음.
그래. 거짓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한테 그냥 다 말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달라졌을까?
……
사희가 인애를 가만히 쳐다본다. 정말 달라졌을 거라 믿느냐고 눈빛으로 묻는다. 인애는 사희의 눈을 피한다. 말문이 막힌다. 인애 역시 단언할 수 없다.
인애야.
응.
난 다 잊었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데, 근데 다 잊었어.
사람이 어떻게 그래.
어떻게 안 그러겠어, 사람이 뭐라고.
그럴 수 있지, 사람이니까. 사희가 나직이 속삭인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나. 인애는 속으로 되뇐다. 낮게 깔린 구름 뒤편에서 해가 떠올랐는지 사위가 조금씩 밝아온다. 칼바람이 사희와 인애 사이를 할퀴며 지나간다.
갈까?
뭐 찍으려던 거 아니야?
오늘은 아닌가봐.
사희가 카메라를 끄고 삼각대를 접는다. 인애는 보온병을 챙겨든다. 카메라 스트랩을 목에 걸며 사희가 묻는다.
저수지가 깨지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