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틈(마지막)

*

 

문이 열리고 쌀쌀한 공기와 함께 인애가 다실 안으로 들어섰던 때 사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사희는 언제고 인애를 다시 만날 날이 올 거라고, 적어도 한 번은 마주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왔다. 인애가 사희를 찾아온다면 그건 사희가 인애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인애가 비로소 알게 됐다는 의미였다.

어서 와.

사희가 인사를 건네자, 인애는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사희를 쳐다봤다. 문 앞에 엉거주춤 서 있다가 둥근 나무 탁자 자리로 가 앉았다. 영업시간이 끝난 후 규영이 먼저 퇴근을 한 터라 다실에는 사희와 인애 둘만 남았다. 간판 불을 끄고 블라인드도 내린 다실은 고즈넉했다. 사희는 인애 가까이에 전기난로를 옮겨다놓고 차 우릴 준비를 했다.

보이차 괜찮아?

응.

물 끓는 소리가 다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인애는 아무 말 없이 사희가 차판 위에 자사호와 숙우, 찻잔 두 개를 올려놓는 모습을 지켜봤다. 사희는 주전자에 끓인 뜨거운 물을 드립포트에 옮기고 그 물을 다시 자사호와 찻잔에 부었다. 차칼로 긴압된 숙차를 조금 떼어내 차칙에 담고, 자사호를 비워 찻잎과 물을 넣고 세차를 했다. 차를 우려내는 이십 초 남짓 동안 사희는 줄곧 차판만 내려다봤다. 인애는 사희에게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호기롭게 기차에 올랐을 때와는 달리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다실 나무 탁자 앞에 앉아 탁자 표면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오랜 흠집과 옹이 자국을 본 뒤에야 인애는 깨달았다. 자신이 반갑지 않은 불청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애가 다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희는 인애 발밑에 따라붙은 그림자를 보듯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애는 사희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다실 안을 둘러봤다. 깨진 도자기 조각을 활용해 만든 모빌과 갖가지 소품, 킨츠기 작품 들이 곳곳에 아기자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조도가 낮은 노르스름한 조명등이 공간에 온기를 더했다. 사희는 세차한 찻물을 버리고 자사호에 두번째 찻물을 부은 뒤 차판을 들고 와 인애 맞은편에 앉았다. 자사호에서 우러난 찻물을 숙우에 담고 숙우에서 다시 두 개의 찻잔에 옮겨 따랐다.

멀지?

사희가 찻잔 하나를 인애 앞에 내려놓았다.

머네.

식기 전에 마셔봐.

사희가 먼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인애도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다섯번째로 우려낸 차를 모두 마실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사호 뚜껑을 여는 소리, 찻물 따르는 소리,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 그뿐이었다.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로 소리가 되지 못한 무량한 말들과 헤아릴 수 없는 마음들이 밀도 높은 침묵이 되어 내려앉았다. 지난 구 년의 시간을 이미 말해버리고 벌써 들어버린 듯한 긴긴 침묵이.

 

나중에야 알았어.

너와 연락이 닿지 않은 지 삼 년쯤 지난 뒤에 잠깐 한국에 들어온 화정을 만났을 때, 그제서야.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던 그애가 치위생사로 일하며 밴쿠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은 고모에게 전해들어 알고 있었지. 타국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아서, 시차를 맞춰 연락을 주고받기에는 각자의 생활이 바빠서 내게 연락 한 번 못 했다고만 생각했어. 살고 싶었던 나라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잘 지내고 있으면 됐다, 그렇게 넘겨짚었지. 그땐 나도 아이를 도맡아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으니까. 화정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을 때 왜인지 풀죽은 그애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어. 흔쾌히 약속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그애가 고마워요 언니, 하고 말했을 때도 나는 눈치채지 못했어. 돌이켜보면 참 우스워. 그렇게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내가 고모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을 때 화정은 여덟 살이었어. 오 년을 한집에서 지냈지만 나이 차가 있는데다 같이 쌓은 추억이 많지 않아서 아주 가까웠다고는 할 수 없었지. 부모님이 이혼한 뒤 내가 격렬한 사춘기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기도 했고. 그래도 어린 그애가 엄마와 단둘이 살던 집에 내가 들어온 걸 무척 좋아했던 기억은 나. 학원이나 독서실을 핑계로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그애가 날 위해 남겨둔 꽈배기나 만두, 카스텔라 같은 간식이 식탁에 놓여 있었어. 인애 언니 거, 라고 쓰여 있던 조그만 색종이, 가지런히 개어 내 책상에 올려둔 양말,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면 꼭 건네줬던 직접 그린 카드. 화정은 조용하고 순한 애였어. 뜻하지 않게 일찍 어른스러워진, 내가 싫어하는 나의 어떤 면들을 빼닮은 아이.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에 화정을 만나기로 했어. 그애가 집 근처 카페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는 가볍게 포옹을 하고 밀린 안부를 묻고 서로의 달라진 점과 그대로인 점들을 짚으며 한동안 얘기를 나눴지. 근데 갈수록 그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거야. 자꾸 물을 들이켜고 손톱 주변 거스러미를 뜯으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시차 때문인가, 유난한 늦더위 때문인가 생각했지. 한국 와서도 푹 못 쉬었지? 내가 묻자, 그애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어.

언니, 모르고 있는 거죠? 사희 언니가 아무 말 안 했어요?

사희야. 나는 자주 그날을 생각해. 네가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고 집들이에 나를 초대했던 날을.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그때의 일들을,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재생해보곤 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던 걸까 되짚어봐.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한번 그 생각에 빠져들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

늦가을이었고 토요일 오후였지.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화정에게서 전화가 왔어. 서울에 볼일이 있어 왔는데 잠깐 얼굴이라도 보지 않겠느냐고. 오랜만에 온 연락이라 나는 잠시 망설였지. 화정을 그냥 보내기가 미안하기도 하고, 남편이 출장을 간 탓에 혼자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생각을 하니 막막한 참이기도 했거든. 일단 사희 너한테 전화를 걸었어. 사정을 얘기하고 화정과 가도 괜찮겠냐고 물었지. 우리 셋은 오래전에 인사를 나눴고 두어 번 함께 밥을 먹은 적도 있었으니까. 너는 선뜻 같이 오라고 했어. 기섭씨도 좋아할 거라면서.

너와 기섭씨의 새집은 곳곳이 너다운 것들로 채워진, 네 취향이 짙게 묻어나는 정갈한 공간이었지. 나는 내심 너와 내 처지를 견주어보며 너를 부러워하고, 너를 부러워하는 나를 부끄러워했어. 우리는 집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기섭씨가 준비한 샐러드와 라자냐, 파스타를 배부르게 먹었어. 그날따라 아이는 평소만큼 보채지도 않고 잘 놀았지. 오트밀색 러그가 깔린 거실을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혼자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나. 디저트로 먹을 멜론을 자르고 있을 때 이른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우리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창가에 서서 눈 구경을 하며 그치기를 기다려보기로 했지. 근데 그치기는커녕 눈발이 갈수록 굵어져서,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내가 기저귀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네가 기섭씨에게 속삭였지. 당신이 좀 데려다줄 수 있어? 택시를 타면 된다고 사양했지만 넌 고집을 부렸지. 아이까지 데리고 먼길을 와줬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우리는 기섭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눈발이 쉴 새 없이 흩날리는 도로를 느릿느릿 달려 집으로 왔어. 차 안에서 포근하고 고급스러운 향기가 나서 무슨 디퓨저인지 물었던 것도 생각나. 화정과 나를 빌라 입구에 내려주고 너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명랑하게 흔들었어. 오늘 와줘서 고마워. 춥다, 얼른 들어가. 빌라 주차장에서 아이의 손목을 잡고 나도 손을 흔들어 보였지. 사희 이모, 안녕. 안녕히 가세요.

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날 일의 전부였어. 그날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 빌미가 됐다는 걸 그땐 우리 중 누구도 알지 못했지.

화정 그애는, 사희 네가 내게 직접 말하겠다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모양이더라. 어쩌면 네게 미루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그동안은 내게 먼저 연락하기가 두려웠다고, 이번에 용기를 내 연락했을 때 내가 그간의 일을 다 알고서도 반갑게 전화를 받아준 거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어. 맞은편에 앉은 그애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는데 솔직히 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어. 도무지 이해가 안 됐거든.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모든 일이, 메워지지 않던 틈들이 눈앞에서 뚜렷해졌어. 삽시간에, 한꺼번에.

 

인애야.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자신이 납득할 만한 서사로 바꿔서라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동물인 것 같아. 불가해하고 모순적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보다 그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우니까.

오래전, 내가 네게 하지 못했던 말들은 사실 나 자신에게도 할 수 없는 말들이었어.

그거 아니? 자기 집 현관에서 낯선 신발을 목격한 사람은, 닫힌 방문 앞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여본 사람은, 귀를 기울이면서도 차라리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 사람은, 식은땀이 흥건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영원을 살아본 사람은 그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걸.

안방 문 너머에서 두 개의 숨소리가 거듭 포개지며 거칠게 고조되고 있을 때 나는 숨을 죽이고 문 앞에 서 있었어. 문고리를 꽉 움켜잡은 채로 얼어붙어 있었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젖힌다면 내가 무엇을 맞닥뜨리게 될지, 눈앞의 광경이 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너무나도 무서웠거든. 문 너머에 감당할 길 없는 폭풍이 도사리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깡그리 삼킬 것만 같았거든. 그런 순간에도 나는 나를 생각했어. 지켜내고 싶은 나의 안위, 나의 자존, 나의 미래 따위를. 훗날의 내게 지워지지 않을 가혹한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일념. 그건 알량한 자존심이거나 현실 부정, 인지부조화였는지도 모르지. 인애야, 갈등 끝에 내가 뭘 했는지 아니. 노크를 했어. 중지를 구부려 두 번. 문 너머가 잠잠해졌지. 소름이 끼칠 만큼 순식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안쪽에서 딸깍,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어. 그 미세하고 태연한 소리가 얼어붙어 있던 나를 산산이 깨뜨려버렸어. 딸깍. 간단하고 쉽게, 완전히.

왜 끝내 그 문고리를 돌릴 수 없었는지, 있는 힘껏 문을 내리치고 고함을 지르고 악다구니를 쓰며 기섭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는지, 당장 문을 열라고 요구하지 않았는지, 그 모든 것에 관해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그때 문 너머에서 기섭과 화정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를, 딸깍, 문을 잠근 그 손은 누구의 것이었을지를 끊임없이 상상했어.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멈출 수가 없었어. 매일 밤 얕은 잠 속에서 나는 또다시 그날의 문 앞에 서고, 땀이 밴 내 축축한 손바닥이 얼음처럼 차가운 문고리에 들러붙어. 문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어. 손을 떼야 할까. 손을 떼면 살갗이 뜯기고 찢어져 피가 나겠지. 아플까. 아프겠지. 문고리의 한기가 온몸을, 내 존재를 매번 변함없이 얼어붙게 만들어. 꿈은 몇 번이고 되풀이돼. 꿈이 반복되는 것인지, 내가 꿈을 반복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돼.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알게 돼. 내 멈출 수 없는 생각과 꿈이 실은 그날 끝내 문고리를 돌리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한 보상이자 대가라는 걸. 문을 열어젖혀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결코 피할 수 없는 내 몫의 지옥이라는 걸.

지옥을 끝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어. 내가 기섭을 놓아줘야만 이 지옥이 끝난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지금의 나는 인애야, 기섭을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놓치기로 했어. 내가 그를 놓아줄 만큼 움켜쥔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어. 한 톨의 앙심도 없이, 그가 이 세계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를 바라기로 했어. 육 년 전 겨울 저수지에서 나는 그러기로 선택했어.

 

마지막을 생각했었던 저수지의 그 자리에서, 난생처음 저수지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소리였지. 얼어붙은 저수지 표면으로 햇살이 서서히 비쳐들고 있을 때였어. 새 울음소리 같기도, 알 수 없는 전자음 같기도 한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왔지. 소리는 수면 밑에서 연이어 울려퍼졌어. 저수지의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계속해서 이어졌어.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지. 무심코 뱉은 탄성을 들으며 내가 아직 무언가에 감응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징그러웠고 동시에 기특했어. 뜻밖의 농담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어버렸지. 얼었던 저수지는 깨지며 마치 외계로부터 도착한 전파 같은 소리를 만들어냈어. 머나먼 외계에서 보내는 신호나 암호일까. 미지의 생명체가 울부짖는 소리일까. 그도 아니면 온기의 기척일까. 그런 실없는 상념에 한동안 빠져들어 있다가 알아차렸지. 지금 눈앞에서 깨지고 부딪히며 작게 쪼개져 흘러가고 있는 것이 실은 나 자신이라는 걸.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전과 같을 수도 없다는 걸. 다가올 미래에는 내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어. 그 파동이 내 안으로 번져올 때까지, 그리고 내 안에서 잦아들 때까지 저수지를 마주보며 오래도록 서 있었어. 그곳에서 인애 너를 생각했어. 네게 이 저수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저수지가 깨지는 소리를 꼭 한번 들려주고 싶다고. 언젠가 널 만나게 되면 이런 나를 털어놓고 싶다고.

 

끝끝내 두 사람은 오랫동안 담아뒀던 말들을 서로에게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린 차를 마시며 숙차와 생차에 관해, 칸이킨츠기와 혼킨츠기, 조지아 오키프와 수레국화와 수관기피, 내일 오후 기차 시간표에 관해 드문드문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눴을 뿐. 사희가 다실 정리를 마무리하는 동안 인애는 선반 위에 전시된 개완에 남아 있는 가느다랗고 붉은 옻 자국을 가만히 매만졌다. 인애의 눈에 그것은 마치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핏줄처럼 생기 있어 보였다.

 

*

 

아직 바람이 싸늘한 늦겨울, 볕이 다사로운 날이다. 인애는 털모자와 장갑, 무릎 담요로 무장한 채 휠체어에 앉아 더 가까이 가보자고 속삭인다. 바퀴가 모래에 묻혀 휠체어가 더디게 나아간다. 이름 모를 새가 저수지 수면 위로 낮게 날아간다. 손녀가 물가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저수지로 던진다. 도르르 돌멩이가 구른다. 아가, 이리 와. 와서 들어봐. 손녀는 겉옷에다 손바닥을 문질러 닦고 거죽만 남은 인애의 손을 잡는다. 보드랍고 싱싱한 아이의 손. 얼마 지나지 않아 인애와 딸 내외, 손녀는 저수지 앞에 멈춰 서서 얼음이 쩍 갈라지고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소리, 다른 차원을 여는 듯한 소리다. 조각조각 깨진 얼음들이 떠내려가며 더 작은 조각들로 깨어져 흘러가는 광경을 지켜본다. 수면 안팎으로 퍼져나가는 파동에 귀를 기울인다. 잦아드는 듯하다가 다시 시작되는 그 소리가 자신의 질긴 목숨을 닮았다고 인애는 생각한다. 인애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오래전에 잃었던 사람, 안 시간보다 모르게 된 세월이 훨씬 더 길었던 그이의 얼굴을. 인애는 자신 안에서 닳고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나는 단단한 호두알 같은 슬픔을 발견한다. 언젠가 꼭 저수지가 깨지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던 사희를 눈앞에 그려본다. 소리가 어떤데? 인애의 물음에 사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한다. 들으면 알게 될 거야.

춥진 않아? 딸이 묻는다. 손녀가 인애의 파리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눈이 부신지 손으로 이마 위에 자그마한 손차양을 만든다. 할머니 울어요? 인애는 마른 입술을 앙다물고 힘겹게 고개를 젓는다.

비로소 인애는 깨닫는다. 아주 오래전 사희를 만나러 가기 위해 기차에 올랐던 늦은 오후, 충동이라고만 믿었던 그 열띤 감정이 실은 충동이라는 가면을 쓴 채 오랫동안 자신을 속여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 해진 가면을 늦게나마 벗겨볼 수 있었을 뿐. 마침내 인애는 감정의 진짜 얼굴과 마주했다. 주름이 파이고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노쇠한 그리움. 역시나 마주했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무런 소용없는, 때늦은 용기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런 일에 불과한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실눈으로 저수지를 건너다보던 인애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얼음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깨어짐은 온기의 기척이구나.

인애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다. 물론 마지막 날숨을 내뱉기까지 일 년 정도가 남아 있다는 구체적인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인애는 자신이 뒤늦게 직면한 감정의 맨얼굴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전혀 다른 지점으로 데려다놓을 거라고, 그것이 자기 삶의 최후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 순간, 인애의 마른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온 한숨이 저수지를 지나는 바람결을 따라 번져 간다. 어김없이 찾아올 새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