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석이 곧장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이마치는 만류했다. 다시 왕복비를 내고 택시를 불러야 했다. 기다리는 사이 고양이 그리는 노파가 이마치에게 팜비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줬다. 팜비치 주민들은 의료를 포함한 생활 전반의 서비스 비용을 관리비 명목으로 내고 있었다, 팜비치에 들어가려면 기존 주민 과반수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노파는 이마치에게 힘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입주 희망자들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몇몇 사람이 있지만 묵살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이마치가 입주 계획이 없다고 재차 말해도 노파는 했던 말을 자꾸 반복했다. 노파가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사실을 노부부가 살짝 귀띔해준 뒤에야 이마치는 고맙다고 말했다. 왜 자신을 그토록 도와주려 하는가 묻자, 노파는 뒤늦게 이마치의 팬임을 고백했다. 그녀의 작품들, 그녀가 연기한 사람들로부터 매 순간 위로받았다고. 이마치는 볼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 말에는 면역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 아름답다거나 명석하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연기가 좋았다는 말은 믿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여기를 어떻게 찾았죠? 외진데다 서로 알음알음해서만 오는 곳인데.”
노부부가 그녀에게 물었다.
“예전 이 자리에 병원이 있었죠.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어서요.”
“병원이라니. 여긴 돌밭에 올린 신축 건물이에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이마치는 해변에서 만난 서퍼와 햄버거 가게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부부는 그녀를 이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난해 태풍 이후로 해변에 있던 가게는 모두 부서지다시피 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쪽은 수심이 너무 얕고 바위와 산호초가 가득해서 휴가철에도 스노클링이나 하지 서핑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요. 못 믿겠으면 다시 한번 가봐요.”
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을 때 이마치는 내리막길 끝에 있는 해변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자신이 그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로 제법 먼 거리였다. 마침내 도착한 그 해변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폐허가 된 가게, 지붕도 문도 없이 뼈대만 남아 허물어진 가게들뿐이었다.
이마치는 검게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그곳으로 한 발 내디뎌보았다. 발목에서 잔물결이 흰 거품을 내며 부서졌다. 금세 바짓단이 도로 젖었다. 파도는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한낮의 부드럽고 나른했던 물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얼음 같은 물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 발을 잡아채는 느낌에 이마치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이마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그녀는 일흔 살이었고, 아직도 삶이 놀라웠다.
0. 나의 마치
이제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기다리느라 애썼다. 지금부터가 진짜 이야기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이토록 긴 이야기가 필요했다. 나를 알려면 이마치를 먼저 알아야 하므로. 출신이나 성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몸.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몸에 대한 고찰이다.
이마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그녀는 생애 대부분을 텔레비전 드라마 배우로 살았다. 배우는 다른 이들의 삶을 대리한다. 물론 연기일 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속는다. 나아가 이마치가 누군지 안다고 생각한다. 클로즈업된 이미지를 자신이 가까이 가서 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본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우연의 기표를 발견하는 것이다. 껍데기에 불과한 정상성을 벗겨놓고 보면 그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더럽고 누추한지, 뒤죽박죽인지를 부인할 길 없이 확인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가까이 가서 볼수록 역겹고 악취가 난다. 싫증이 난다. 하지만 그보다 좀더 가까이, 모공이 보이는 거리보다 가까이, 피부와 점막이 들러붙을 만큼 가까이, 그러다 완전히 하나로 흡수되어버릴 정도로 가까이 가면 그때부터의 앎은 좀 다른 양상을 띤다. 내 말을 믿어도 된다. 나는 이마치와 하나였다.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았던 한 사람이다.
태초의 이마치는 내게 웅웅웅 울리는 소리다. 기분좋은 흔들림, 부드러운 물결,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음률. 이마치의 말소리는 길게 늘어지는 베일 같다. 낮이나 밤이나 그녀가 외는 대사들, 나는 그것들을 좋아한다. 습관처럼 외는 체호프의 『갈매기』는 내게 자장가나 다름없다. 그 말들, 내 몸을 둥둥 울려주던 말들. 그것만 있다면 나는 어디서든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나는 허기를 모른다. 입만 열면 이마치가 흘러들어온다. 나는 그녀를 양껏 먹고 또 먹는다. 그녀는 주로 단맛이지만, 울 때는 쇠맛이다. 이마치가 내 존재를 처음 안 순간, 그 순간은 아주 벌건 쇠 맛이다. 사방이 빠듯하게 조여온다. 나는 깊은 슬픔과 절망, 무력감을 느낀다. 이마치가 깊은 슬픔과 절망, 무력감을 느꼈다는 뜻이다.
이마치는 술을 마시면 노래하는 습관이 있다. 흥얼거리는 소리, 규칙적인 흔들림, 사방이 느슨하고 나른하게 풀리는 느낌. 나는 이마치가 술 마시는 게 좋다.
캄캄하고 아늑한 곳을 둥둥 떠다니는 내게 지루함이라곤 없다.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스릴이 넘친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새어들어오는 작고 희미한 빛들. 나는 그 빛들이 궁금하지 않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 허락도 없이, 누가 나를 이마치에게서 끄집어낸다. 우리 둘을 분리한다. 눈을 찌르는 빛에 모욕과 증오를 느낀다. 떨어져나온 자국 그대로 벌건 살갗이 된다. 탄생은 죽음이다. 춥고, 건조하고, 거친 촉감들. 나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곧바로 이마치에게 안긴다. 그 몸의 온기. 냄새. 나는 손을 펴서 그것을 움켜쥔다. 움켜쥐자마자 또다시 순식간에 누군가 우리를 떼어낸다. 낯선 공기, 낯선 소리, 낯선 촉감. 나는 허공을 찢듯 울어젖힌다. 다시 이마치에게 돌아가고 싶다. 이마치를 먹고, 이마치가 되고 싶다.
나는 하루 일곱 번 젖을 먹는다. 꿀렁꿀렁, 몸이 채워지는 느낌. 온몸이 축축해지는 느낌. 만족감이 나를 적시고, 내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우리의 몸은 맞닿아 있다. 이마치가 자세를 바꿀 때마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그녀에게 들러붙는다. 살갗이 없던 시절, 우리가 하나였던 시절처럼. 이마치는 내게 젖을 주면서 종종 운다. 익숙한 쇠맛. 나는 진저리를 친다. 이마치를 올려다본다. 처음으로 보는 얼굴. 생애 첫 얼굴. 그 얼굴이 먹고 싶어서 다시 입을 벌린다. 혀를 날름거린다. 끙끙대며 몸부림친다. 그러면 이마치가 나를 안아준다. 비록 쇠맛이 진동하더라도, 이마치는 내가 원하는 전부다. 누나와 아버지, 그 외의 모든 인간은 내게 필요 없다. 존재가 없다. 나는 오직 이마치만을 바라본다. 오직 이마치만을 원한다.
젖만 먹어 하얗게 변한 내 혓바닥 위에 어느 날 누나는 초콜릿 한 조각을 올려놓는다. 나는 허겁지겁 빨아먹는다. 누나의 손가락을 붙잡는다. 누나는 목이 울리도록 크게 웃더니 내게 초콜릿 한 조각을 더 준다. 그렇게 누나는 이마치 다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아버지는 다시는 나에게 초콜릿을 주지 말라고 누나를 야단친다. 나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정작 사라져야 할 아버지 대신 이마치가 사라진다. 하루아침에 증발한다. 누나는 번쩍이는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킨다. 이마치가 그곳에 있다고 말한다. 나는 거실 한쪽에 있던 안락의자, 집에서 이마치가 유일하게 쉬는 공간이었던 그 의자를 본다. 이마치는 그곳에 없다. 의자는 텅 비었다. 나는 의자에서 고개를 돌린다. 의자가 그곳에 없는 것처럼 외면해버린다.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배운다.
날이 갈수록 집에서 이마치를 보는 것은 희귀한 일이 된다. 이마치는 새벽에 들어와서 새벽에 나간다. 이마치를 만나려면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 나는 잠들지 않으려고 팔뚝이나 손가락을 깨문다. 그래도 결국 잠들고 만다. 아침이면 그새 이마치가 들어왔다 나갔다는 소리를 듣는다. 뒤늦게 이를 세워 나를 깨문다. 통통한 팔에 매일 잇자국이 새겨진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제대로 된 기술을 터득한다. 유치원에서 다른 사람을 물면, 이마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난처럼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피가 날 정도로, 아예 절단이 날 정도로 세게 물면 유치원으로 날 데리러 온 이마치를 볼 수 있다. 나는 사람을 물고, 물고, 또 문다. 유치원에서는 매일 비명소리가 울린다. 그러면 두세 시간 후 파란 원피스를 입은 이마치, 격자무늬 숄을 두른 이마치, 흰 구두를 신은 이마치가 나타난다. 이마치는 나를 잡아끌어 차에 태운다.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른다. 나는 만족한다. 이마치를 자주 볼 수 있다면 유치원 기둥이라도 종일 깨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마치는 내가 문제라고 아버지에게 말한다. 모든 게 문제지만 그중 내가 제일 문제라고. 아버지는 아이가 있는 데서 그런 말 말라며 화를 낸다.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말이 내게 어떤 의미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또다시 이마치와 함께 있으려면 누구의 팔을 물어야 할지 그것만 생각한다.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 아줌마들은 줄줄이 내게 팔을 물려 그만둔다. 새로 온 아줌마는 내 안의 악마를 몰아내야 한다고, 나를 교회에 데려가도 되느냐고 이마치에게 묻는다. 이마치는 아이를 고칠 수만 있다면 어딜 데려가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나는 교회에 가서 처음으로 우리 가족 말고 다른 가족들을 보게 된다.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게 된다. 그들은 이마치와 다르다. 아니, 이마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아줌마의 통나무 같은 팔을 문다. 하지만 아줌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목사님 설교중에는 감전이 되어도 꼼짝하지 않을 아줌마다. 목사님은 세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타인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세례라고 말한다. 아줌마는 소리 없이 울고, 예배가 끝난 후 내 목덜미를 잡아채서 집으로 돌아간다. 아줌마는 나의 강철 이에도 끄떡없이 버티지만, 집안의 귀중품을 훔치다 아버지에게 걸려 쫓겨난다. 교회에서 아무리 울어도, 자기 안의 악마는 몰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아버지의 사업 부채로 더이상 우리는 아줌마를 부를 수 없고, 유치원에서 나를 다시 받아줄지 결정을 보류중이기 때문에, 나는 생전 처음 일주일 내내 이마치를 따라가게 된다. 이마치와 같이 차를 타고 방송국에 간다. 이마치가 다른 사람처럼 화장하고 옷 입는 것을 구경한다. 그곳에서 이마치는 낯선 이름으로 불린다. 낯선 목소리로 말한다. 낯선 사람들의 가족인 양 행세한다. 나는 카메라처럼 이마치를 바라본다. 이마치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본다. 이마치는 나를 흘긋 보고는 아무도 모르게 웃어준다. 내게는 바로 그 순간이 세례 같다.
쉬는 시간에 누군가 대기실로 오렌지를 가져다준다. 이마치는 이로 오렌지 껍질을 살짝 물어 흠집을 낸 후 손으로 쓱쓱 깐다. 칼 없이 오렌지를 까는 법은 엄마에게서 배웠다고, 그 여자가 가르쳐준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쓸쓸한 말이지만, 오렌지는 달고 맛있다. 나는 이마치에게 오렌지를 더 까달라고 한다. 사방에 상큼한 오렌지향이 진동한다.
일주일 후 나는 유치원으로 돌아간다. 이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오렌지를 먹는다.
가끔 내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얼마나 많은 오렌지를 먹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곳에 가봤을지. 나는 어린 나이에 죽어서 그 모든 기회를 잃어버렸다.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제 와서 그 일이 누구 책임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지금 나는 그 일을 멀리서 바라본다. 죽음이란 삼인칭이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이 삼인칭으로 산화함을 아는 것이다.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 그날의 소동에는 오해가 있다. 제일 먼저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잠시 후 누나와 내가 나간 것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무슨 수건돌리기를 하듯, 이어달리기를 하듯 연쇄반응이 일어난 줄 안다. 비극에 대한 뻔한 플롯.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는 그날 새벽 집을 나갔다가 도로 돌아와서 나와 누나를 데리고 나갔다. 셋이서라도 망할 놀이동산에 갈 참이었다. 차가 출발하기 직전, 나는 이마치를 데리고 오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시혜를 베풀듯, 그는 내게 십 분만 주겠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마치는 여전히 화장실에 있었다. 그녀의 껍데기 같던 그 작은 오물의 방. 일단 들어갔다 하면 그녀 스스로 나오기 전에 다른 누가 억지로 끌어내기란 불가능했다. 십 분이 다 되었고, 나는 울며 사정했지만 이마치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조금 오래, 그래봤자 십 분보다 조금 더 지체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갔을 때 차는 떠나고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찾는 일에 그토록 목을 맨 것은 이 대목의 죄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이마치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린 누나는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입속에 욱여넣은 진실이 그가 남은 평생 입을 열 때마다 목구멍을 찌른다. 암으로 죽어가던 마지막날 그는 간병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으려 한다. 간병인은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용히 좀 하라는 시늉을 한다. 그는 끝내 그날의 진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날 아침 나는 내복 위에 점퍼를 입고, 누나의 리본 달린 부츠를 신고 있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집밖으로 달려나갔을 때 아버지의 차는 사라지고 없다. 그때 차 한 대가 다가온다.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누굴 기다리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아버지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여자는 방금 떠난 차가 어디로 가는지 봐뒀다고, 아버지에게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여자의 차에서는 찌든 기름 냄새가 난다. 하지만 나는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 차에 오르자마자 문이 잠기고, 그때 바로 나는 일이 잘못된 것을 안다.
여자는 나를 민수라고 부른다. 소리 내서 울자 바로 매서운 주먹이 날아온다. 누군가에게 맞는 경험은 처음이고, 그후 몇 개월간 나는 그것이 새로운 언어임을 배우게 된다. 여자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잘 들으면 집에 데려다주겠다든지 전화 통화를 하게 해주겠다든지 하는 헛소리는 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나는 민수이고, 그 환상을 깨려고 하지 않는 한 나는 안전하다. 안전이란 여자의 작은 방 안에서 종일 텔레비전을 보고,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여자 옆에서 잠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밖의 다른 것을 원하면 곧바로 주먹이 날아온다. 민수는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나는 민수에 대해 생각한다. 민수가 아닌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여자의 방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종일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 프로그램이 나온다. 멋진 절벽과 바다와 파도와 모래사장, 선탠을 즐기는 사람들. 나는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채널에서 이마치가 광고하는 안마의자가 나온다. 웃는 이마치, 편안하다고 말하는 이마치, 최고의 휴식을 누리라고 말하는 이마치. 꾹꾹 참아왔던 울음이 화산처럼 폭발한다. 나는 화면을 향해 엄마라고 소리지른다. 엄마, 엄마, 엄마, 비명을 지른다. 그 말이 여자를 미치게 만든다. 엄마라는 말. 여자는 나를 길들인다는 명목으로 평소보다 더 힘을 쓴다. 여자는 내 머리를 바닥에 내리찧고, 내리찧고, 또 내리찧는다. 마침내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여자는 뒤로 물러선다. 좀처럼 피는 멎지 않고, 여자는 당황한다. 약을 구하러 나가면서 문을 다 잠그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 집을 나온다. 아.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 집은 말 그대로 숲속에 있다. 나는 도시 아이다. 숲을 모른다. 조금 달려가면 눈앞이 확 트이면서 자동차와 빌딩이 보일 줄 안다. 하지만 곧 어둠이 사위에 내려앉고,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게 된다. 눈물이 얼굴 위로 꽝꽝 얼어붙고, 곱아든 손과 발도 얼어붙는다. 나뭇가지가 얼굴과 손을 할퀴어도 아무 느낌이 없다. 결국 나는 밤을 한 치도 넘기지 못하고 멈춰 선다. 여기까지라는 걸 안다.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목이 마르다. 오렌지, 그것을 한입만 먹어도 좋을 것 같다. 바위에 기대앉아 끝이 오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꿈을 꾼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그 에메랄드빛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꿈. 아니, 그곳은 바다가 아니라 이마치의 몸속이다. 태초의 물속이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그곳에서 눈을 뜬다. 얼음조각처럼 하얗게 굳어버린 내 몸, 삼인칭이 된 내 몸을 내려다본다. 나는 나무 위에 있다. 예전에 살았던 아파트만큼 크고 단단한 나무다. 그곳에는 깊은 옹이와 튼튼한 가지, 새집이 있다. 나는 새집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요란을 떤다. 어미 새가 신경에 거슬리는지 뾰족한 부리로 애먼 가지를 콕콕 찌른다. 어차피 그곳에 더 머물 생각은 없다. 중력 실험을 마치자마자 나는 그곳을 떠난다. 집으로, 이마치에게로 간다. 울고 있는 이마치. 나는 바람처럼 그녀를 스치고 지나간다. 폐부 가득 쇠맛을 들이마신다.
모든 영혼에게 이런 특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신은 편애하는 자다. 이것도 사랑하고 저것도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편파적이고 독점적이다. 비논리적이며 불공평한 것이다. 나는 구별된 자, 유예된 자로서 이마치 곁에 머문다. 이마치를 본다. 그것이 내 존재의 목적이다. 이마치는 빈집에서 종종 나의 존재를 느낀다.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벽이 휘어지고 구부러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는 못한다. 자식을 잃은 여자들은 유령을 긴 양말처럼 질질 끌고 다닌다. 신지도 못하고, 벗지도 못하고, 그것이 점점 커져 자신을 삼킬 때까지 기다린다.
몸을 벗어나고 보니, 이마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알던 이마치가 실제 이마치와 얼마나 달랐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실소만 나온다. 실제 이마치에 대한 앎. 그것은 그녀의 본질에 대한 앎이다. 그녀가 기억을 잃고, 말하는 법과 옷 입는 법, 심지어 인간임을 잊는다고 해도 그녀를 떠나지 않을 영혼, 그 영혼에 대한 앎이다. 그러한 앎은 사라지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축복이자 세례이며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나의 시선은 영원한 어린아이의 것이지만, 이마치는 점점 늙어간다. 나의 집이었던 그 몸피에서 수분과 생명력, 기억이 말라가는 것을 본다. 헝겊 인형처럼 변한 이마치의 몸에 의사는 계속 핀을 찔러댄다. 고글을 쓰고 휘청거리며 라파트멍을 걷게 한다. 이마치는 그곳에서 스스로를 죽이고 또 죽이고, 그렇게 겨우 과거를 변제받는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
이제 내가 이마치의 유령임을 알 것이다. 노아의 그림자임을 알 것이다. 바다를 사랑한 서퍼임을 알 것이다. 몸을 입고 이마치를 만나는 일은 금기였다. 하지만 영원히 앎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마치를 향해 가야 했다. 이마치를 구해내야 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또다른 3월, 이마치는 팜비치의 야외 수영장 벤치에 앉아 있다. 그곳은 아침부터 방문객들로 시끄럽다. 누군가의 자식들, 손자와 손녀들이다. 피붙이가 아니라면 노인을 만나러 올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작은 물총을 쏘면서 논다. 어린아이들이 물을 튀기며 노는 모습을 노인들은 진귀한 광경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다. 건물 벽에 무지개가 생겼는데 누구 하나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뭐라고 떠들며 깔깔 웃고, 이마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따라 웃는다. 웃다가 사레가 들린다. 누군가, 어떤 남자가 이마치에게 물병을 건넨다. 이마치의 가죽만 남은 등을 쓸어내려준다. 그는 웃을 때 여전히 소년과 같은 천진함이 있고, 쭈글쭈글한 손은 기적처럼 따뜻하다.
남자는 이마치의 병증이 앞으로 더욱 악화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녀가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지고 또 쪼개질 것을 안다. 그마저도 곧 사라지고 말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떠나지 않는다. 일주일에 나흘은 이마치 곁에 머물고, 사흘은 택시를 운전하러 간다. 그는 택시 안에 작은 스크린을 설치해 온종일 이마치가 나온 영화와 드라마를 튼다. 사람들은 거의 다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이마치 자신도 곧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점점 더 많은 시간 이마치는 황홀로, 망각으로, 무명의 허공으로 들어간다.
가끔씩 제정신이 돌아올 때면 이마치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 여기서 뭘 하는 거냐고 묻는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야.”
남자는 그때마다 그렇게 말한다.
“나는 아름다운 여자를 돕는 사람이고.”
이마치의 딸은 이마치가 VR 치료를 그만두는 데 반대하고, 팜비치에 입주하는 것도 반대하지만, 끝내 지고 만다. 이마치의 딸은 종종 가족들과 함께 팜비치를 찾아온다. 먼 거리 때문에 방문 횟수는 점차 줄어든다. 이마치도 이미 예상하고 또한 용인한 일이다. 이마치는 딸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이마치가 끝까지 기억한 사람은 딸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이가 사물로 변해버린다. 아침이면 책장과 휴지통이 건들거리며 다가오고, 접시와 리모컨이 말을 건다. 그리고 마침내 딸마저도 사라져버린다. 딸은 작은 머핀으로 변한다. 이마치는 그것을 방안에 감추어두고, 배가 고플 때마다 조금씩 베어먹는다.
지금 이마치는 자신이 팜비치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한평생 그녀에게 헌신했던 남자가 옆에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녀에게 세계는 한덩어리의 무의미에 불과하다. 호기심 혹은 공포심이 그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질 뿐이다. 그녀는 처음 태어났을 때의 상태와 같다. 3월까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마치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지게 된 여자 아기. 그 이름은 생존의 표식이자 상패였다. 이마치는 진작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먹는 것과 자는 것도 금세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침상에 누워 버둥대다가 숨쉬는 것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몸에 들러붙어서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녀의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을 씹고 맛본다. 그녀가 그르렁거리며 숨을 쉴 때마다 나의 몸이 함께 울린다. 그녀의 숨구멍에서는 녹슨 쇠 맛이 난다.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매달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작아지고 작아지다 마침내 탁, 하고 날아오르는 순간. 이마치는 내 것이 될 것이다. 소유가 아니라면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마치는 내 것이다. 그때 어떤 기척을 느낀 듯 그녀의 텅 빈 눈이 나를 돌아본다. 곧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정말이지 그 순간은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