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인생 최고의 파도

10. 인생 최고의 파도

 

 

젊은이들이 볼 때는 예순 살 노인이나 일흔 살 노인이나 반 죽은 자와 매한가지라는 데서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육십대와 칠십대는 엄연히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를테면 예순 살은 노인 공동체에서 청년이라 불려도 좋을 나이다. 프림 반 설탕 반 각각 다른 옵션으로 형님들에게 커피를 타 날라도 좋을 나이. 젊음의 마지막 햇살이 한 뼘쯤은 남아 있을 나이다. 자신이 노인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나이, 아직 한두 번의 기회는 남아 있을 거라고 믿는 나이.

이마치는 개인 회복실 거울을 보며 지난 십 년을 돌이켜보았다. 거울 속 노파가 자신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노파는 줄곧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으로 따라붙었다.

“뭐 하는 거야?”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기석이 물었다.

“시차 적응중.”

이마치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해.”

“간호사 부를까?”

“아니. 주치의를 기다릴래.”

VR 진료실에서 깼을 때, 이마치는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 그렇게 운 것은 처음이었다. 의료진들은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일전의 여자 의사, 그리고 제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시나요?”

이마치의 울음이 잦아들자, 제제가 물었다. 새치가 섞인 갈색 머리카락, 주름진 이마를 보니 그도 이제 중년이라는 게 실감되었다. 길고 가늘어 휘청거렸던 몸은 몰라보게 후덕해졌지만, 소년 같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어째서 프로그램을 마음대로 종료시켰죠?”

이마치는 목멘 소리로 물었다.

“그애한테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었어요. VR 프로그램 오류가 바로잡히지 않는데다 설상가상 이마치씨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았거든요.”

제제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제제는 그녀가 VR 장치를 다 제거하기도 전에 급히 해결할 문제가 있다며 진료실을 나갔다. 곧 돌아오겠다더니, 종일 감감무소식이었다.

 

“내가 시간을 도둑맞은 건지, 도로 찾은 건지 모르겠어.”

이마치는 거울을 바라보며 기석에게 말했다.

“시간은 그 자리에 있었지. 당신이 잠깐 다른 곳에 다녀온 거야.”

기석은 주머니에서 레몬맛 사탕을 꺼내 권했다. 그녀는 순순히 받아 입에 넣었다. 병실 안은 무척 적막했다. 두 사람이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이마치는 기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마치는 그에게 물었다.

“택시를 몰고,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낯선 사람인 척 연기하면서?”

“당신이 섬망에 빠져 있을 땐 혼란을 일으키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라고 의사가 당부했어. 그러니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택시만은 진짜야. 내가 얼마나 운전에 소질 있는지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이마치는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왜 미국에서 돌아왔어? 겨우 도망쳐놓고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고통을 즐기는 취미라도 있는 거야?”

기석은 자세를 바꿔 앉으며 미소 지었다.  

“당신 때문에 고통받은 적 없어. 돌아온 뒤에는 아인이를 함께 돌보면서 오히려 큰 기쁨을 누렸지. 그앤 우리 사이에 있었던 가상의 딸이었어.”

VR 치료 이후 이마치는 기억을 상당 부분 회복했지만 아직 빈 공간이 드문드문 있었다. 가령 기석이 한국에 돌아와 택시 운전을 한다는 것과 그녀의 지척에 산다는 것을 기억해냈지만 딸과 손녀가 어디 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애들은 얼마 전까지 이 근처에 살다가 작년에 준희가 결혼하면서 지방으로 내려갔어. 아인이와 헤어지는 게 당신과 나, 우리 모두에게 힘들었지.”

기석은 준희가 아인의 생부와 재결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마치가 그 결혼을 끝까지 반대한 탓에 아인의 생부, 저명한 드라마 프로듀서라는 남자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도. 기석이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자 그제야 흐릿하게 기억이 났다. 샌님같이 생긴 그 남자, 이마치 앞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쩔쩔매던. 이마치는 여전히 그가 못 미더웠다.

십 년 전 준희는 산후도우미가 떠나자마자 아기를 데리고 그녀를 찾아왔다. 이마치 역시 육아는 문외한에 가까웠지만, 그애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준희가 자기 이름을 건 빵집을 시작하면서 이마치는 손녀를 맡아 키우다시피 했다. 아들과 딸이 자랄 때는 한시도 곁에 있어주지 못했지만 손녀가 첫 이유식을 받아먹던 것, 첫걸음마를 떼던 것은 모두 그녀가 지켜봤다. 딸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열었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 같던 그들 사이의 간극이 서서히 좁혀졌다.

딸과의 관계가 변한 것이 전부 VR 치료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녀의 인생에서 변곡점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죽음과 부활을 되풀이해서 경험하다보면 누구라도 삶의 변화를 겪을 것이다. 비록 가상이라고 해도, 정말 그럴듯한 세계였다.

이마치는 VR 치료의 초창기 환자였다. 처음 그녀가 VR 치료를 시작했을 땐 지금처럼 복잡하게 분화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아파트 안을 돌아다니며 유실된 과거의 기억을 찾는다는 설정은 같았으나 고작 빈집, 그 안의 사물들이 프로그램의 전부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빈 공간에 인물들이 투입되기 시작했고, 그들이 환자와 대화하고 상호작용하며 점점 더 사실과 흡사한 과거를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인공지능의 기술력이 치료를 예술의 경지로 바꾸어놓았다. 

이마치는 예순두 살에 알츠하이머 확진을 받았다. 모두가 예상했던 일, 나아가 기다리던 일이었다. 제제는 이마치의 병세가 깊어질수록, 망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VR 치료가 효과를 드러낼 거라고 했다.

“모래시계처럼 기억을 잃었다가 다시 또 되찾을 겁니다. 다 쏟아져나갔다고 생각할 때 뒤집기만 하면 새로 차오를 거예요.”

모래시계처럼. 다소 과장됐지만 VR 치료의 메커니즘을 잘 설명한 말이었다. 제제는 가상현실을 통한 알츠하이머 치료법을 연구해왔다. 기억의 지도를 만들어 길을 잃지 않도록 반복해서 오가게 하고, 동시에 뇌피질과 해마를 자극해 그 길을 물리적으로 굳히는 화학 치료를 병행한 것이다. 성과는 괄목할 만했다. 다만 그 효과가 모래시계처럼 일시적이라는 것이 맹점이었다. 환자들은 VR 치료 후 기억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지만 그것은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원하는 사람은 차고 넘쳤다. 그중에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아닌 이들도 있었다. 정상인이라고 해도 군데군데 구멍이 생기기 마련인 기억을 온전히 회복시켜서,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추체험해보겠다는 욕망을 가진 이들. 개개인 맞춤에 지속 기간이 짧은 VR 치료는 고비용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귀족 치료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치료가 거듭될수록 인공지능은 학습을 반복해서 진실에 더 가까운 과거를 구현해냈다. 진실은 돈이 많이 들었다.

 

준희는 그날 오후 아인이와 함께 병원에 왔다. 아인이는 어렸을 때처럼 기석에게 달려와 안겼고, 스스럼없이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기석은 환하게 웃었는데, 이마치로서는 처음 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둘은 정답게 손을 잡고 저녁거리를 사러 나갔다. 준희는 주치의를 만나러 갔다가 금세 돌아왔다. 제제가 자리에 없어 대신 여자 의사를 만났다고 했다.

“의사가 뭐라던?”

이마치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치료는 잘 끝났는데 프로그램 재생중에 버그가 일어났대요. 시나리오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고, 곧 수정할 테니 걱정할 건 없다고 했어요. 병원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던데요.”

노아가 문제일 거라고 이마치는 짐작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지난번에 엄마가 마취에서 갑자기 깨어난 것도 그렇고, 영 걱정되어서 물어봐도 답을 안 해주더라고요.”

“나도 모르겠어. 기다려보라니까, 기다려보면 알겠지.”

준희는 캐리어를 병실 한구석에 밀어넣었다. VR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생긴 회색 캐리어였다. 웬 짐이냐고 묻자, 아인이와 병원에서 하루 묵을 작정이라고 했다.

“내일 잔치도 있는데, 여기서 자고 같이 가면 좋잖아요.”

“잔치? 무슨 잔치?”

“엄마 생일이잖아요. 병원에 외출 허락도 받았어요.”

준희는 생일마다 식구들이 한데 모여 밥을 먹고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선물을 나누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매해 이마치를 위해 특별한 케이크를 구워, 그녀의 이름을 커다랗게 써넣었다.

“잔치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보다 미희를 좀 만나고 싶은데.”

순간 준희의 얼굴이 굳어, 이마치는 의아함을 느꼈다.

“누군지 몰라? 병원에서 만난 후배. 왜 늘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고 맞춤 투피스를 입고 다니던……” 

“누군지 알아요. 근데, 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준희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기억 안 나세요?”

이마치는 멍하니 준희를 바라보았다. 기억났다. 장례식장을 가득 채웠던 수천 송이의 장미. 미희 남편의 아이디어였고, 이마치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미희가 그렇게 된 후 경찰과 기자들은 종종 그녀를 찾아와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죽기 전 미희에게 어떤 징후가 있었던가? 치료 과정중에 힘든 내색을 한 적이 있었던가? VR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나?

미희는 VR 치료를 고통스러워했다. 마지막에는 우울증이 더해져 잠을 잘 수도, 말을 할 수도, 음식을 삼킬 수도 없게 되었다. VR에 나오는 자신을 혐오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피하게 되었다. 그녀의 라파트멍이 보여준 과거 때문이었다. 

미희는 스물두 살에 남편을 만났다. 첫 데이트 때 강간을 당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가 만족스러울 만큼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폭력과 강간이 이어졌다. 미희는 기이한 마비 상태로 결혼에 이르렀다. 남편은 결혼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맡은 배역, 룸살롱의 막내 호스티스를 한평생 사랑했고 또 증오했다. 창녀이자 요부인 그녀, 자신이 겨우 요조숙녀로 탈바꿈시킨 미희를 끈질기게 가스라이팅했다.

그녀는 죽기 전 이마치에게 긴 편지를 남겼다. 자신은 알츠하이머 환자가 아니라 불감증 환자였다고, 아이들의 엄마로 최소한의 위엄을,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라고 썼다. 미희는 병실에서 남편의 넥타이로 목을 맸다.

VR 치료 직후 자해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경우는 흔했다. 치료가 어떤 트라우마를 유발시키느냐고 묻는다면 이마치는 물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 좋은 기억만 남길 수 없으며, 무작위로 차오르는 기억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매번 새롭게 아귀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VR 치료를 중단하는 알츠하이머 환자는 없었다. 자신이 누군지를 잃어버리는 쪽과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쪽. 어느 쪽이나 지옥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지옥을 선택했다.

 

잠시 후 아인이와 기석이 먹을 것을 사 들고 돌아왔지만, 이마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진동하는 음식냄새에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 없었다. 식사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이마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다 같이 있기엔 병실이 너무 좁다고, 생일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다.

“여긴 내가 지킬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할 테니 걱정하지 마.”

당황한 준희와 아인을 기석이 달래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이 가고 나서 이마치는 간호사를 불러 주치의에게 데려다달라고 말했고, 다시금 그것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기석은 익숙한 듯 침대 밑에서 보조 침대를 끄집어냈다. 병실의 불을 다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이마치는 기석에게 물었다.

“집 창문에 쇠창살이 달려 있는 거, 애들은 모르지?”

“몰라. 모르게 했어. 당신이 그러길 원했지.”

이마치 역시 VR 치료 직후 발작을 일으켜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 한 적이 있다. 기석이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녀도 일을 내고 말았을 것이다. 기석은 수차례 이마치에게 치료를 그만두자고 했지만,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고마워.”

이마치는 어둠 속에서 말했다.

“당신한테 너무 많은 빚을 졌어.”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야.”

기석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나는 아름다운 여자를 돕는 사람이고.”

이마치는 침묵했다. 

“어서 자. 자고 일어나면 한결 속이 편해질 거야.”

 

기석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뒤에도 이마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참 뒤척이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안을 서성거렸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마치는 옷장을 열어 가방을 꺼냈다. 검은색 가죽가방 안에는 선글라스, 지갑, 그리고 대본이 있었다. 새삼스럽게도 십 년 전 하차한 드라마의 대본이었다. 대본 겉장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밑에 적힌 알 수 없는 주소지. 이마치는 주소를 입속에서 되뇌어보자마자 그곳이 어딘지 알아챘다. 강릉의 병원 주소였다. 오래전 딸과 함께 갔던 곳. 시신을 대면하고, 아니 외면하고, 뼛속까지 게워낸 바닷가. 순간 노아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그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천장의 돔과 함께 조각나 사라지기 전에 했던 말. 그는 가방 속 대본을 살펴보라고 했다. 그곳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이마치는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당직 간호사가 데스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탄 이마치는 건물 꼭대기층인 20층으로 향했다. 십 년 새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엘리베이터가 고급 호텔의 그것처럼 반짝거렸다. 순식간에 20층에 도착한 그녀는 노크도 하지 않고 주치의의 진료실 문을 열었다. 책이 산더미처럼 쌓인 커다란 책상, 그 앞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집에 안 가요?”

이마치는 제제에게 물었다. 그는 해쓱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순간 이마치는 그가 아이처럼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우는 대신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건물의 화려함과 별개로 그의 진료실은 예전 그대로였다. 이마치는 하얀 벽에 걸린 그림을 봤고, 그림 속 풍경이 아파트에서 바라보던 것과 똑같다는 걸 알아챘다. 웃자란 잔디와 넓은 평원, 그리고 뿌연 안개.

“동료가 그렸다고 했죠?”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이에요. 저에겐 동료나 다름없죠. VR의 모든 것이 그의 손을 거쳤으니까요.”

제제는 깔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가 만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은 시나리오예요.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가운데 여백이 군데군데 있고, 그 안에 진실이 있죠. 평생 수없이 많은 시나리오를 본 나로서도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예요.”

이마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겁없이 모든 걸 맡겼겠죠.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미희의 라파트멍에서도 그렇게 살인이 난무했나요?”

“그럴 리가요. 프로그램의 시나리오는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드는 거예요. 주로 환자 개개인의 방어기제를 따라가게 되어 있죠.”

“방어기제……”

“전 뇌 의학자예요. 심리학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죠. 이마치씨의 경우, 반복해서 스스로를 살해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불러오고, 또 그걸 용인했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노아는 그게 나를 망치고 있다고 말했어요.”

“인간의 기억은 부정적인 것에 훨씬 더 민감해요. 그것을 불러들이지 않고는 기억을 붙잡을 길이 없어요. 이것을 내주고 대신 저것을 받는 거죠. 보세요. 덕분에 이마치씨는 자신이 누군지 기억할 수 있게 됐잖아요. 따님과의 관계가 회복됐고, 환각에서 벗어났고, 과거를 인지하게 되었어요.”

“한 계절만요. 그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희미해지기 시작하죠.”

“모든 기술은 불완전함을 극복하면서 발전해요. 이마치씨는 제 초기 환자였고, 그만한 핸디캡과 보상을 전부 다 가져갔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면 또 모르죠, 영속적인 기억 복구가 가능해질지도요.”

“그래서, 노아는 어떻게 되나요?”

“그를 삭제하는 건 VR 데이터상으로도 너무나 큰 손실이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오류의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삭제하는 수밖에요. 신뢰할 수 없는 자동화 프로그램처럼 무서운 건 없으니까요.”

그는 안경을 벗고 눈가를 꾹꾹 누르더니, 다시 안경을 썼다.

“캐릭터가 시나리오를 이탈해 VR 안에서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건 처음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거든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저도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모르겠어요, 노아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무리 인공지능이 자율성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해도 우리가 걸어놓은 제한이라고 할까, 금지어라고 할까, 분명한 방어벽이 있거든요. 그는 그것들을 너무 가볍게 통과해서 이탈했어요. 이건 마치……”

“유령을 본 거 같다고요?”

제제는 침묵으로 수긍했다.

이마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제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보낸 십여 년이 떠올랐다. 그는 그녀의 인생을 그녀 자신만큼이나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기억을 조각조각 이어붙여 그녀에게 돌려준 사람.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마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요?”

뜻밖의 질문에 제제는 그녀를 낯선 사람처럼 응시했다.

“어머니는 저를 낳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아버지는 슬픔에 젖어서 어린 저를 돌볼 수 없었죠. 저는 프랑스에 있는 고모 집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가끔씩만 저를 보러 오셨고요. 간신히 살아간다는 느낌이었는데, 결국 제가 대학 가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안됐네요.”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어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발견한 한 가지 진실이 뭔지 아세요? 인생은 고통이라는 거예요.”

이마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제의 진료실에서 나온 이마치는 병실로 돌아가는 대신 1층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병원 복도를 소리 죽여 지나가는데, 수십 년 전 출연했던 영화의 주인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 그녀가 맡은 역할은 미술관에서 왕실의 보석을 훔쳐 달아나는 도둑이었다. 대본 지문에는 고양이 같은 걸음으로 사뿐사뿐, 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는 민망한 옷을 입고 카메라 앞을 온종일 기어다녔다. 이제 그녀는 그때처럼 날렵하지도 유연하지도 않았지만, 간호사들과 마주치는 불상사 없이 무사히 비상계단을 통과해 1층에 도착했다.

병원 문은 경비 인력이 퇴근하는 밤 열시부터 아홉 시간 일괄 폐쇄되었다. 안전과 보안의 문제로 자유로운 출입이 어려운 건물이었다. 이마치는 해가 뜨면 기석도 병원 사람들도 자신을 내보내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 다섯시면 청소 인력이 떼 지어 비상문으로 들어왔다. 시계를 보며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올 때 재빨리 빠져나갔다.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붙잡진 않을까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두 블록을 빠르게 걸어간 뒤, 마침내 아무도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에야 속도를 늦추었다. 멀리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미리 챙겨둔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리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버스 터미널에서 이마치는 잠깐 우왕좌왕했지만, 사람들에게 물어 매표소를 찾았고 표를 끊을 수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그녀는 가방 안의 현금과 두꺼운 겉옷, 그리고 요실금 팬티 여분을 다시금 확인했다.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이마치의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는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누군가와 통화했다. 지금 어느 지역을 지나고 있는지, 어떤 산과 나무가 보이는지, 커피는 언제 마셨고 점심은 언제 먹을 예정인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부 고해바쳤다. 귀에 거슬릴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의도치 않게 통화 내용을 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여자는 전화를 끊고 버스에서 내렸다. 잠시 후 다시 버스에 오른 여자는 이마치에게 호두과자 한 봉지를 건네며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이를 집에 두고 출장 가는 길인데, 너무 많이 울고 보채서요. 달래느라 통화가 길어졌어요.”

이마치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는데 하나는 여자가 기껏 대학생 정도로 앳되어 보인다는 것이었고 또하나는 여자에게 손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호두과자를 건네는 손, 반대편에는 팔 끝의 뭉툭한 절단면이 나와 있었다. 이마치는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잠시 허둥거렸다. 하지만 곧 평정을 찾고 여자와 함께 호두과자를 먹었다. 여자는 딸이 호두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루종일 호두를 까놓으면 유치원에 다녀와서 순식간에 먹어치운다고.

“제가 한 손으로 어떻게 호두를 깔까 궁금하시죠?”

여자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계를 쓰면 돼요. 한 손의 악력이 물론 좋아야 하고요. 손이 없는 이 팔도 어떻게든 도움이 되죠. 모든 수단을 동원해보는 거예요. 깐 호두는 너무 비싸서 사 먹일 엄두를 낼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여자는 이마치에게 강릉엔 무슨 일로 가느냐고 물었다. 바다를 보러 간다고 이마치는 대답했다. 여자는 빙긋 미소 짓더니 창문을 고갯짓하며 말했다.

“바다네요.”

지평선에 파란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이윽고 눈 닿는 곳마다 바다였다.

 

버스 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 이마치는 기사에게 주소를 내밀었다. 기사는 주소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여기 왜 가려는 거냐고 물었다. 너무 멀고 외진 곳이라 왕복이 아니면 가기 어렵다고 했다.

“근처에 병원이 있을 텐데요.”

“병원은 모르겠고, 수산물 가공 공장이 있었죠. 그것도 오래전 일이에요. 이제 이 근방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요. 사람들도 많이 떠났죠. 원전 뉴스 못 보셨나요?”

이마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VR 치료 이후 떠오르는 기억들은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있었다. 노아의 마지막 말 역시 그녀의 망상일지 몰랐다. 언젠가 죄의식에 젖어 적어놓은 주소를 보고 그녀가 착각에 빠진 거라면?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왕복으로 다녀오는 걸로 하죠. 말씀하신 대로 별게 없다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택시를 타고 가는 길, 이마치는 자신이 삼십 년 전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삼십 년. 차라리 다른 사람의 인생이라고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정민이 실종된 후 남편은 아이에 관한 연락이 오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갔다. 개중에는 정말 악질인 사람들도 있었다. 돈부터 요구하거나, 아이를 정말 찾은 양 속이기도 했다. 나중엔 앞뒤 상황 설명만 들어도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닌지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강릉에서 전화가 걸려온 날은 드물게 이마치의 스케줄이 온종일 비는 날이었다. 남편은 다른 일로 나가고 집에는 딸과 그녀뿐이었다. 그 전화는 그간의 다른 제보와 달랐다. 살아 있는 아이를 봤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이의 시신을 확인해달라는 것이었다. 실종 후 한 달이 지난 때였고, 그녀 역시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마치는 전화를 끊자마자 집을 나섰다. 만약 사실이라면, 시신이 정말 정민이의 것이라면, 집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딸애를 따돌리고 혼자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다짐했다. 돌아오는 차표도 알아보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맞은 사람은 경찰 한 명과 병원 관계자 한 명뿐이었다. 병원 관계자는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런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한 매뉴얼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어린 딸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신의 얼굴을 열어 보였다. 무방비로 마주한 익사체. 그곳에는 더이상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불어터진 몸, 부패해버린 몸, 실온에 나오자마자 냄새를 풍기는 몸, 고깃덩어리 같은 몸뿐이었다. 이마치는 보자마자 정민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정민이 아니었으니까. 이목구비가 다 뭉개졌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카락의 길이도, 몇 개 안 남은 치아도, 뭉개진 턱의 모양도 정민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을까? 그녀는 정말 그애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 지경이 된 몰골로도? 냄새가 그녀에게서 감상을 몰아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감상,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감상, 슬픔이라는 감상. 이마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돌아서서 해변으로 달려나갔고, 공기를 들이마시자마자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바다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시는 바다를 보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멀리서 해안선이 보이면 눈을 감고 돌아갔다. 모든 기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다 왔어요.”

택시 기사가 차를 세우기 전까지 이마치는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바다의 해안선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녀가 내린 곳은 근방에 문 닫은 가게들뿐이었다. 검은 모래가 섞인 해변에는 대여섯 살 된 남자아이와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관광객 같지는 않았다. 젊은 부부는 파도가 높고 거친 바다를 말없이 보고 있었고, 아이는 혼자 모래장난을 하고 있었다. 이마치는 그들 가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택시 기사가 얼마나 있을 거냐고 물었다. 이마치는 뒤돌아보며 자기는 그곳에 남을 테니 이만 돌아가라고 말했다.

택시가 떠난 뒤 이마치는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이마치의 잿빛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물때가 한창인지 금세 물이 차올라 모래가 젖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는 모래장난이 싫증났는지 공놀이를 시작했다. 제 아버지가 모래를 떨고 일어나 아이를 상대해줬다. 두세 차례 공이 오갔을까, 아이가 찬 공이 바다로 날아갔다. 아이는 “내 공!” 하고 소리쳤다. 아이는 물론 부모도 바다에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공은 벌써 저만치 멀리 떠밀려가고 있었다. 그때 이마치 뒤에서 장신의 남자가 튀어나와 샌들을 신은 채 바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이마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은 이미 구슬만하게 보일 만큼 멀어져 있었고, 바다의 깊이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가슴팍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뛰어들어간 남자를 파도가 덮쳤고, 순간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마치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뱃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이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놀란 아이와 부모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마치는 자기도 모르게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파도가 그녀의 발목을 넘실거릴 즈음 바다 안으로 사라졌던 남자가 둥실 떠올랐다. 남자는 손을 흔들었다. 그가 공을 가지고 천천히 헤엄쳐오는 모습을 이마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남자는 흠뻑 젖은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에게 다가가서 공을 건넸다. 아이의 부모와 잘 아는 사이 같았다. 그들은 도리어 이마치를 염려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많이 놀라셨어요?”

남자는 이마치에게 물었다.

“그쪽이 바다에 빠져 죽는 줄 알았어요.”

이마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삼촌은 서퍼라 바다에서 안 죽어요.”

아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남자는 유독 그을린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행색은 청년 같았지만 웃을 때 눈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걸 보면 어린 나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뭐, 무사하다면 됐어요.”

이마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옷 좀 말리고 가세요.”

남자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대로 있으면 감기 걸리실 거예요.”

이마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지 밑단이 다 젖어서 발목부터 점점 얼어붙고 있었다. 몸이 가늘게 떨려, 이마치는 거절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갔다. 해변의 문 닫은 가게 중 하나가 그의 것이었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팔고 서핑 용품을 대여해주는 가게였다. 낡은 외관과 달리 내부는 밝은 조명에 캘리포니아풍 벽화까지 꽤 산뜻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이와 부부가 가고 나서, 그는 이마치의 발치에 작은 온풍기를 놓아주었다.

“이게 작아도 성능이 좋아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마를 거예요.”

이마치는 시키는 대로 다리를 펴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걸이 달력에 지난 서핑 예약 건이 적혀 있었다.

“겨울에도 서핑을 하나요?”

“겨울 서핑이 제일이죠.”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고, 무엇보다 다른 서퍼들이 없으니까요. 전 겨울을 가장 기다려요. 가게는 적자여도 뭐,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난 그런 말 안 믿는데. 돈 안 벌면 뭐 하려고 가게를 하죠?”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요.”

남자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전 이 동네가 좋아요. 이곳에 오래 머물 명분이 필요해서 가게를 연 거예요. 햄버거가 아니라 신발이나 부채를 팔아도 상관없어요. 오래 떠돌다가 겨우 찾은 곳이니, 소중하게 여기며 떠나지 않으려고요.”

이마치는 그제야 가게 곳곳에 있는 남자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국의 풍광을 배경으로 서핑 보드를 들고 서 있는 사진들. 남자의 발음이 어딘지 어눌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쭉 외국에서 살았나봐요.”

“1990년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갔어요. 부모님이 이혼하신 직후였죠.”

“……지금은 몇 살인데요?”

“서른여덟 살이요. 아버지는 미국에 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재혼하셨죠. 저는 새어머니와 잘 지내지 못했어요. 다행히 집 근처에 바다가 있어서, 학교는 안 가고 매일 파도를 타러 다녔죠. 새어머니는 내가 집을 나가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어요. 시험삼아 사흘간 집에 들어가지 않은 적도 있죠. 배가 고파서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가니 저를 빼고 새어머니와 아버지 둘이서 미트 파이를 먹고 있더군요.”

“저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을 나왔죠.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어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파도만 쫓아다녔죠. 선수가 될 역량이 안 된다는 건 저도 알았고, 그게 딱히 불만도 아니었어요.”

“서핑 선수의 역량…… 그게 뭔가요?”

“다른 스포츠와 똑같아요. 끈기와 분석력이죠. 무엇보다 파도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해요.”

멀리서 사이렌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다와 지형, 해류를 읽을 줄 알아야죠.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에요. 오랜 시간의 훈련, 집념이 필요하죠. 전 집념이란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거든요. 바로 그 이유로 여자들도 전부 저를 떠났어요.”

남자는 맑은 눈으로 이마치를 보며 말했다. 

“서른이 되자마자 오래 사귄 여자에게 차이고, 한동안 방황했어요. 그 여자는 제가 미성숙한 인간이라고, 엄마 젖 좀 더 먹고 자라야 한다고 말했죠. 재미있는 건 그 말을 듣고서 정말 어머니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는 이마치의 젖은 바지에 따뜻한 바람이 골고루 가닿도록 이리저리 온풍기 방향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어머니는 그사이 재혼해서 새 가정을 꾸렸더라고요. 친척을 통해 한번 보고 싶다고 연락했지만, 거절당했어요. 기분이 정말 이상하더라고요. 내가 연락만 하면 당연히 바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한 달 넘게 이 낯선 나라를 노숙자처럼 떠돌아다닌 거 같아요. 헤어진 여자친구 말이 맞았던 거죠. 내 안에 분노로 가득찬 어린아이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엉망으로 술에 취해 이 근방을 헤매고 다니다가 해변에 널브러진 롱보드를 봤어요. 그걸 가지고 충동적으로 바다로 나갔죠. 잘 알지도 못하는 바다에서 버려진 서핑보드로 밤 서핑이라니, 제정신이 아니었죠. 순식간에 암초에 머리가 깨질 수도 있는데요. 달이 밝았지만 눈이 먼 상태나 다름없었어요. 넘어지면 보드를 다시 못 찾을 만큼 취했고요. 자살 행위였죠.”

“그래서,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아뇨, 그날 전 인생 최고의 밤을 보냈어요. 운이 좋았던 거예요. 처음 보는 파도였는데, 익히 알던 것보다 가속이 적고 힘이 약했거든요. 잔파도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졌어요. 발밑에 검은 양단이 깔린 것처럼, 끝도 없이 나아가는 기분이었죠. 저는 다시, 또다시 파도에 올랐어요. 조류가 읽히는 것도 믿어지지 않긴 마찬가지였어요. 어떤 파도를 잡아야 하는지, 어디서 몸을 돌려야 할지, 속도와 높낮이를 알 수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요. 그냥 알았어요. 느꼈어요. 무한한 어떤 것의 일부라는 느낌, 내가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사랑받는다는 느낌.”

“고국의 바다였군요.”

이마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맞아요. 고국의 바다였어요.”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이마치의 말을 따라 했다.

“그렇게 이곳에 정착한 거예요.”

남자는 이곳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한적한 바다에서 손님을 기다리듯, 초조함 없이, 두려움 없이,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다고. 그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이마치의 바지는 다 말라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작은 온풍기는 힘이 셌다. 남자는 이마치에게 무슨 일로 이 한적한 동네에 왔느냐고 물었다. 이마치는 예전에 병원이었던 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병원이라면, 혹시 저기 팜비치 아닐까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게 밖으로 몸을 내밀어 길 건너 오르막을 가리켰다. 오르막을 지나면 병원을 개조한 건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붉은색 건물이라 눈에 확 띌 거라고 했다.

“그곳에 가봐야겠네요.”

이마치도 남자를 따라 일어났다.

“안녕히 가세요.”

남자는 이마치와 헤어지기 전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다. 외국식 인사라고 해도 너무 갑작스러워 이마치는 잠시 휘청거렸다. 아직 물기가 남은 남자의 머리카락이 이마치의 뺨을 간지럽혔다.

“아까는 감사했어요. 누군가 그렇게 절 위해 비명을 질러준 게 너무 오랜만이었어요.”

남자는 그녀가 길을 건너갈 때까지 한참 동안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오르막은 꽤나 가팔랐다. 힘겹게 그 끝에 다다르자 정말 붉은색 건물이 보였다. 건물은 보기보다 훨씬 멀었다. 해가 높이 뜨자 지면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마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쳐 있었다.

붉은 건물의 초입에 팜비치라고 쓰인 작은 간판이 있었다. 진입로 양쪽 가장자리에는 하얀색 소라껍데기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3층짜리 건물 두 동이 나란히 연결된 구조였는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좀더 안으로 들어가자 아담한 크기의 수영장과 그 앞에 앉아 있는 노파가 보였다. 숏커트의 백발에 하늘색 플리츠 셋업을 입은 작은 체구의 노파였다. 그 옆에 치즈색 고양이가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이마치는 노파에게 다가가 이 건물 주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노파가 말도 없이 바라보기만 해서, 혹시 귀가 어두운가 생각했다.

“이마치씨?”

뒤늦게 입을 연 노파는 그렇게 물었다.

“이마치씨가 여긴 웬일이죠? 영화 촬영이라도 하러 오셨나?”

이마치는 미소 지었다. 

“아뇨, 전 오래전에 은퇴했는걸요.”

“아, 그럼 집을 보러 오셨나?”

그곳은 노인 주거시설이었다. 일종의 공동주택으로, 두 개의 건물에 총 열여섯 호가 있고, 도우미들이 상주한다고 했다. 이마치는 집을 보러 온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노파는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밥을 먹었느냐고 묻더니, 곧 식사시간인데 괜찮으면 같이 가서 밥을 먹자고 했다.

이마치는 노파와 고양이를 따라 오른쪽 건물 1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다른 노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마치는 노파의 친구로 소개되었고, 식사를 제공받았다. 메뉴는 쌀밥에 된장국, 쌈채소, 명란젓 조금과 달걀말이뿐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달걀말이는 부드럽고 채소는 신선했다. 쌀밥과 명란젓은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았다. 식당은 무척 조용했는데 그게 이상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이마치는 노파를 따라 그녀의 집에 갔다. 건물 꼭대기층 노파의 집 현관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와인 병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술을 마셔도 되느냐고 묻자, 노파는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뭐 어떠냐고 되물었다. 여기서는 누구도 강제로 문을 열지 않는다고, 프라이버시가 유일하고 강력한 원칙이라고 했다. 노파의 집에는 벽마다 고양이를 그린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고양이들의 표정이 너무나 생생해서 꼭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실 한쪽에는 그리다 만 그림이 이젤에 놓여 있었고, 다 쓴 유화물감이 바닥에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그림 속 고양이들은 평생 그녀와 함께 살았던 가족이었다. 그들 모두 떠나고, 이제 치즈색 고양이 한 마리만 남았다고 했다.

“내 소원은 이애보다 내가 먼저 죽는 거예요. 나도 누군가의 배웅을 받고 싶거든요.”

그때 노파의 휴대폰이 울렸다. 노파는 의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이마치는 그 집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한 노부부를 만났고, 그들을 따라 게이트볼을 치러 갔다. 게이트볼은 처음이었지만, 금세 요령을 익혀 제법 점수를 땄다. 그들과 함께 달콤한 아이스커피도 마셨다. 운동장에 있는 노인들은 생기와 활력이 있었다. 그에 비해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은 노인들은 병색이 완연했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을 구경하듯 게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 걸음 움직이는데도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 숨을 몰아쉬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 허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노인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뿐이라고, 이마치는 생각했다. 누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간다고, 이 잔을 비우고 나면, 그녀도 넘어갈 거라고.

 

오후가 다 되어 이마치는 휴대폰 전원을 켰다. 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아인이가 대신 받았다. 아인이는 엄마 화 많이 났어요, 라고 말했다. 딸은 전화를 넘겨받고도 아무 말이 없더니 이윽고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릉에 간다는 메모 한 장 남겨놓으면 다예요? 이걸 보면 우리가 얼마나 걱정할지 그런 생각은 안 해요? 엄만 항상 자기 자신만 생각하죠.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요.”

“네 말이 맞아.”

이마치는 조용히 말했다.

“여기 와보니 모든 게 후회뿐이야. 그때 널 여기 데리고 와서는 안 됐어. 네가 그 모든 걸 보게 둬서는 안 됐어. 넌 고작 아홉 살짜리 어린애였는데. 내가 널 보호해야 했어.”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올 때 말이야, 네가 있어서 좋았다. 넌 소리 없는 작은 동물처럼 내 옆에 있었지. 아무 존재도 아닌 것처럼, 마치 내 그림자인 것처럼, 숨만 내쉬며 내 옆에 있었어. 나중에야 깨달았다, 내가 널 의지했다는 걸.”

이마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내 인생은 반파된 자동차처럼 우그러진 채로 검은 연기를 풀풀 날리며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어. 그런 상황에서도 옆에 네가 있어서,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이마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알아. 내가 최악인 거. 난 엄마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에요.”

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를 비는 거야.”

이마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무 늦었지.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다음주에 마지막회가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