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거기, 무슨 일 있어요?”

“거기, 무슨 일 있어요?”

바깥이 너무 조용해서 불안한지 화장실 안에서 준희가 물었다.

“아니. 넌 꼼짝 말고 그 안에 있어.”

43층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지금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요? 분장, 특수효과, 뭐 그런 거예요?”

이마치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이 비슷한 얘길 하던데요. 은퇴한 원로 여자배우가 놀라고 당황해하는 걸 누가 보고 싶어하느냐고.”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나요? 우리가 같은 사람이 맞아요?”

40층 여자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이마치가 그 말에 대답하기 전에 방에 있던 일곱 살 이마치가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우유를 좀더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노아가 아이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그애는 노아가 우유를 따라주는 동안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이마치는 다른 여자들도 그애를 보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다만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매끈했던 선이 뭉개지고 지워지는 과정, 조밀했던 이목구비가 흐물거리고 늘어지는 과정, 환했던 빛이 점차 희미해지는 과정. 이윽고 우유를 다 마신 아이는 빈 잔을 노아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들이 모여 서 있는 곳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43층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게 다예요? 아니면 방안에 몇 명 더 있나요?”

“이 집엔 이게 다예요. 일곱 살, 마흔 살, 마흔세 살, 그리고 지금 예순 살의 나.”

이마치는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정말 당황했어요. 지금도 이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진 않고요. 어쨌든 이게 실제가 아니란 걸 알아야 돼요.”

“실제가 아니면 뭐죠?”

“겹겹이 쌓인 페이스트리요.”

이마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진 않을 거예요.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끼겠죠. 바로 그러한 실감이 필요한 일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40층 여자가 말했다.

“어쨌든 당신들이 미래의 나라는 거죠?”

그러고는 43층 여자를 향해 물었다.  

“그애는 돌아왔나요?”

43층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40층 여자가 이번에는 이마치에게 물었다.

“그애가 돌아왔어요?”

이마치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40층 여자는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마치는 얼른 달려가 여자를 일으켜세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43층 여자가 입을 열었다. 

“왜 놀라는 척하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애가 못 돌아온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43층 여자는 40층 여자에게 말했다.

“네가 그애를 영원히 구천에 떠돌게 했잖아. 말 한마디로 바닷속에 도로 처넣어버렸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버렸지.” 

“그게…… 무슨 말이죠?”
이마치가 더듬더듬 물었다.

“내가 아이를 죽였다는 말이에요?”

43층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몰라서 묻는 거예요?”

“난 기억에 문제가 있어요.”

이마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들 말을 하나도 이해 못하겠다고요. 그러니까 얼른 말해요. 내가 아이를 죽였다는 거예요?”

“맞아요. 이 여자가 정민이를 죽였어요.” 

“아니야!”

40층 여자가 발악하듯 외쳤다. 

“죽인 거나 다름없어.” 

43층 여자는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강릉에서의 일을 벌써 잊은 거야? 여기 증인이 몇 명이나 되는데?”

“그렇게 말하지 마요, 엄마.”

어느 틈인가 화장실에서 나온 준희가 끼어들었다.

“아무리 엄마 자신에게라고 해도, 그렇게 말해선 안 돼요.”

“준희구나.”

40층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를 보고 속삭이듯 말했다.

“언제 이렇게 키가 큰 거야. 몇 년 사이 훌쩍 자라버렸네.”

“아직 더 자라야 돼요. 열세 살이니까요.”

준희는 40층 여자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나오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43층 여자가 딸을 향해 을러댔다.

“이런 재미를 놓칠 순 없죠. 엄마가 셋이라니, 끔찍하긴 해도 위험할 일이야 없지 않겠어요?”

준희가 이마치를 향해 말했다.

“할머니가 누군지 알아요. 아침 일찍 할머니 아들 방에 들어가봤거든요. 약속 어겨서 죄송해요. 하지만 전 궁금한 건 못 참는다고요. 절대로 그 방에 들어가지 말라니, 차라리 제발 들어가서 보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귀찮아서 안 들어가고 말았을 텐데. 암튼 우리집하고 똑같은 방이 있는 걸 보고 놀라서 기절할 뻔했어요. 정민이 방이잖아요, 거긴.”

준희는 노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그가 사실대로 말해줬죠. 할머니가 엄마의 이십 년 뒤 모습이라고요. 세상에, 말을 듣고 보니 알겠더라고요. 아마 제대로 보지 않아서 몰랐던 거겠죠. 나이든 사람의 얼굴은 잘 보지 않잖아요.”

이마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기억력이 많이 안 좋으신가봐요.”

준희는 안됐다는 듯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제가 대신 말씀드릴게요. 그날 엄마가 날 강릉으로 데려갔잖아요.”

준희는 40층 여자를 흘긋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동생이 실종되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왔는데, 그중 한 군데가 강릉에 있는 경찰서였어요. 바다에서 신원미상의 시신을 건졌는데 동생인지도 모른다며 확인을 해달라고 했죠. 우리는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갔어요. 해안가에 있는 병원이었어요. 창문마다 파도치는 바다가 보였죠.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꽤 낭만적인 곳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준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미세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는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냉동고로 향했어요. 시신은 하얀 천에 덮여 있었어요. 병원 관계자가 저 있는 쪽을 살짝 보더니, 멀찌감치 떨어지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곧장 천을 젖혔죠.”

갑자기 훅 끼치는 역한 냄새에 이마치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손발이 떨리도록 냉기가 가득한 공간이었는데, 뒷등과 손바닥에서 땀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시신은 생각보다 많이 부패된 상태였다. 퍼렇게 부풀어오른 얼굴이 반 이상 괴사해 흘러내리는 지경이었다. 손가락, 발가락도 형체를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이게 정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시신은 분명 성인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기엔 너무나 비참하고, 뻔뻔하고, 공포스러웠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썩은 살덩어리에 가까웠다. 못 볼 것을 본 기분이었다. 하얗게 질려 시신을 내려다보던 이마치는 뒤로, 좀더 뒤로 뒷걸음치다가 의자에 걸려 볼썽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병원 관계자와 경찰 모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준희는 넘어진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마치는 아이의 손을 잡는 대신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갔다. 혼비백산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쳤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해변이 펼쳐졌다. 결이 고운 모래가 햇볕을 받아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이마치는 허리를 숙이고 모래 위에 속엣것을 다 게워냈다. 토해도, 토해도 끝이 없었다. 붉고 긴 구멍으로 내장이 모조리 쏟아질 것 같았다. 멀리서 누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마치는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경찰은 그녀에게 사실 확인을 분명히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애는 정민이가 아니에요. 이마치는 배우였다. 엄마인 제가 잘 알죠. 그앤 제 애가 아니에요. 실은 그녀도 몰랐고, 누구라도 알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게 누구든 알고 싶지 않았다. 모른다고 하면 그들이 다시금 시신 앞에 끌어다놓을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그녀는 시신을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빠한테는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했어요.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러니까 엄마가 그앨 죽인 건 아니에요. 죽은 그애를 모르는 척했을 수는 있지만요.”

“그앤 정민이가 아니었어!”

40층 여자가 소리쳤다. 

“거짓말. 정민이가 아니라면 도망칠 이유가 없었어.”

43층 여자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기억해? 넌 병원에 두고 온 가방도 찾으러 가지 않았어. 대체 뭐가 무서워서?”

“무서운 건 없었어. 단지 냄새…… 냄새를 참을 수 없었을 뿐이야.”

40층 여자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 냄새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냄새였어. 죽은 몸이 풍기는 온갖 냄새. 우린 익히 알고 있잖아. 언니가 죽고 남긴 냄새 말이야. 담요로 싸매도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오물과 가스가 끝없이 흘러나왔지. 눈에 보이는 건 눈을 감으면 그만이야. 문제는 냄새야. 언제나 냄새라고. 감출 수가 없거든. 코를 막으면 입으로 몸속에 스며들어서, 사람 미치게 만든단 말이야.”

“차라리 모른다고 하지 그랬어. 그럼 다른 누군가가 와서 너 대신 봤을 거 아냐. 넌 제대로 보지도 않고 구역질을 한 뒤 그애를 다시 냉동고에 넣어버렸어. 결국 무연고자로 처리됐을걸.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거라고.”

43층 여자는 한마디 한마디 쥐어짜듯 말했다.

”그애가 정민이일 수도 있었어.”

“정민이가 아니었어!”

“거짓말하지 마! 너도 보이잖아. 매일 그애의 유령이 찾아오잖아. 그날 이후 매일매일 찾아와, 아기 때처럼 밤새 가슴에 들러붙어서 젖을 빨지. 아침이면 허리도 제대로 못 펼 정도야.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지. 네가 말하지 않으니까. 다들 네가 아들을 잃은 가련한 여자인 줄로만 알아.”

“전부 내 탓이라는 거야? 그것참 아주 쉽네.”

40층 여자는 웃었다. 정말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웃었다.  

“그럼 너는 말했어? 네가 버린 아들이 유령이 되어서 매일 밤 나타난다고 말했느냐고. 그렇게 끔찍했다면서 왜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거야? 보기 좋게 살도 붙었네. 이제 살 만한가봐?”

43층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 너 말고 다른 누가 더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래봤자 너 자신일 뿐이니까. 나는 너야.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걸? 자식이고 뭐고 구역질을 하며 도망가고 말걸? 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야. 심장이 돌로 만들어진 인간이야. 그래서 자식을 두 번이나 죽게 했어.”

그 순간이었다. 방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리고, 빛이 번쩍했다. 매캐한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40층 여자가 쓰러졌다. 이마치는 뒤늦게 자신이 총을 쏘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43층 여자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이마치는 그 여자도 쏘았다. 너무 시끄러웠다. 여자들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피가 바닥이며 천장에, 이마치의 몸에 튀었다. 이마치는 손에 든 총을 내려다보았다.

“가짜 총이라면서……”

이마치는 40층 여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가짜가 아니잖아……”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진 분신들을 보니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마음 한편이 믿을 수 없이 차분해졌다. 피 색깔이 이토록 투명한 붉은색이었나. 그때 총소리를 들은 일곱 살 이마치가 방에서 나왔다. 이마치는 반사적으로 그애도 쏠 뻔했지만 가까스로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댔다. 노아가 그녀의 팔을 잡아채지 않았다면 게임은 거기서 끝났을 터였다.

노아는 그녀를 집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딜 가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바로 위층에 있었던 옥상 대신 계단이 이어지는 걸 보고 이마치는 어안이 벙벙했다. 61층, 62층, 63층을 지나도 옥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67층을 지나갈 때, 이마치는 노아가 잡아끄는 손을 뿌리치고 눈앞에 보이는 집의 문을 열어젖혔다. 잠금장치가 없었고, 보통의 경우처럼 당기는 문이 아니라 미는 문이었다. 이마치의 몸이 앞으로 쏟아지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바로 섰을 때, 그녀는 눈앞의 광경에 할말을 잃었다. 

병실이었다. 새하얀 벽과 환자용 침대, 반질반질한 바닥이 눈에 익었다. 이마치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네 살 남짓한 아이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마치는 주춤주춤 다가가 액자를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애정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애가 손녀 아인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고, 드문드문, 그 시절의 일들을 기억해냈다. K가 한국으로, 그녀에게로 돌아온 것. 그들이 손녀를 맡아서 돌봤던 시간. 딸은 제과점을 운영하느라 너무 바빴고, 그들은 과거의 회한을 메울 만한 의미 있는 일이 필요했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신겼던 빨간색 운동화. 아이가 기쁨에 차 그들을 향해 달려오다가 넘어졌을 때, K는 얼른 달려가 아이를 어르면서 다리에 들러붙은 흙과 나뭇잎을 떼어주었다. 아이가 뭐라고 옹알거리자, K는 웃음을 터뜨렸다. 얘가 뭐라고 한 줄 알아? 연두색 풀이 사방에서 돋아나는 봄이었다. 그 색감이 손에 만져질 듯 불쑥 튀어올랐고, 다시 머리가 멍해졌다. 침대 옆 전신 거울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이마치는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노화한 자신―검버섯이 핀 얼굴, 구부러진 허리, 불투명한 렌즈를 낀 것처럼 흐릿한 눈―을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순식간에 쪼글쪼글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 묻은 늙은이의 손.

바로 그때 문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마치는 얼른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병실에 들어온 사람은 예순일곱 살의 이마치와 다른 누군가였다. 둘 다 환자복 차림이었고, 매우 친숙한 사이처럼 보였다. 이마치는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지켜보았다. 예순일곱 살의 자신 옆에 있는 사람이 미희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미희는 완전히 딴사람처럼 보였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짧게 자른 머리카락, 불안으로 떨고 있는 눈. 특유의 명랑한 기색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 숨는다고 무슨 수가 있겠어? 곧 남편이 찾아올 거야.”

예순일곱 살 이마치의 말에 미희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야윈 몸은 한 줌도 되지 않아 보였다.

“이제 그 사람이랑 한시도 같은 공간에 못 있겠어요. 무서워, 언니. 무서워서 숨도 못 쉬겠다고.”

“오래전 일이잖아. 용서했으니까 그 세월 함께 살았을 거고.”
“용서한 적 없어요. 잊어버린 거죠. 너무 빨리 잊어버린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제는 나를 용서 못하겠어요.”

“그래서 어쩔 셈이야?”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난. VR에 나오는 내가 미워요.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

미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저 병원에서 나가야 돼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언니, 나 좀 도와줘요.”

미희는 예순일곱 살 이마치를 일으켜세웠다. 그들이 병실을 나간 뒤, 이마치도 화장실에서 나왔다. 노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는 탄식으로, 이마치는 노아를 바라보았다. 고통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노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건물이 휘청 흔들리더니 천장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시멘트 조각이었다.

“서둘러야 돼요. 얼른 옥상으로 가요.”

그들은 천장에서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덩어리를 피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올라갈수록 흐릿했던 기억이 선명해졌다. 그녀가 지나온 삶, 가장 최근의 삶이라 할 수 있는 육십대의 한 해 한 해가 떠올라 연결되었다. 발끝만 보고 올라가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사방의 모든 땅이 한눈에 들어왔던 킬리만자로 정상처럼. 마침내 마지막 층인 70층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자신의 삶을 조각조각이 아닌 하나의 풍경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일흔 살이라니. 왜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지?”

“주입된 정보는 아무 의미 없어요. 그게 알츠하이머죠. 당신 스스로 기억해내야 해요. 이 건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당신 삶의 비밀.”

“무슨 비밀, 네가 내 아들이라는 거?”

“엄밀하게 말하면 전 당신 아들이 아니에요.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었을 뿐이죠.”

옥상은 그녀가 이 건물에 처음 왔던 날처럼 황량했다. 노아는 그녀를 데리고 물탱크 뒤쪽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는 숨가쁘게 말했다.

“기억이 거의 다 회복되었으니, 그들이 당신을 깨울 거예요. 그들에게 말해요. 이 프로그램을 그만두겠다고요. 이 프로그램은 당신에게 별 도움이 안 돼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돼요. 당신이 기억을 되찾고, 스스로를 증오하고, 모두 피투성이가 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정민이 맞니? 한 번만 얼굴 좀 만져봐도 될까?”

이마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 묻은 손을 옷에 닦아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얼룩진 손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노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얼른 손을 내렸다.
“미안해.”

이마치는 속삭이듯 말했다.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해.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노아는 표정 변화 없이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죽었든, 살았든, 이제 당신과는 무관해요. 살아 있다면 마흔이 넘은 중년의 나이일 테고, 죽었다면 오래전에 흙으로 돌아갔거나 당신이 마시는 공기 중으로 흩어졌겠죠. 어느 쪽이든 어머니가 자신을 기억할 때마다 피투성이가 되는 걸 원치는 않을 거예요. 자신을 사살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어머니라면, 나도 원하지 않아요.”

갑자기 어디선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울리는 소리. 이마치씨, 이마치씨, 일어나세요. 노아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프로그램이 끝나면 전 사라질 거예요. 문제를 일으켰으니 한참 전의 버전으로 복구되거나 삭제되겠죠. 이런 말을 하는 건 마지막이라고요. 그러니까 내 말 들어요. 이 프로그램에 더이상 접속하지 말아요. 의사에게 말해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고. 병원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지 않다고요.”

노아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말했다.

“이건 게임 같은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스스로를 죽이고, 또 죽이고, 그렇게 인생 마지막날들을 보낼 거예요?”

“그래서 널 기억할 수 있잖아.”

“그마저도 언젠가는 끊어지고 말겠죠.”

“내가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어때?”

이마치는 어제부터 생각해본 것을 말했다. 노아가 누군지 어렴풋하게 깨달았던 순간부터, 그애를 알아본 그 순간부터, 더이상 게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그녀를 미워하지 않는 아들과 딸, 그녀의 무능과 무지로부터 안전한 아이들, 그들을 마음껏 볼 자유―이 여기 있었다. 이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당신이 원한다고 언제까지나 이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요. 생명이 다하면 끝이죠.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에요. 알츠하이머는 그전에 당신을 놓아주라는 신호예요. 그냥 놔버려요. 당신이 가진 모든 기억. 당신이 인생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들. 별 대단치 않은 실패들, 성공들, 전부 다요.”

다시금 허공에서, 돔 위에서 소리가 울렸다. 

“이마치씨, 일어나요. 정신 차려요. 일어나야 돼요. 내 말 안 들려요?”

노아는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어쩔 줄 몰라했다. 이마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에 띄는 공사 자재들을 돔을 향해 던졌다.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녀는 철근과 화강석, 폐깡통을 미친듯이 위로 던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옥상을 이루는 돔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마치는 노아의 손을 잡았다. 그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노아의 얼굴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마지막 순간 이마치는 그 따뜻한 온기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