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이마치는 노란색 튤립이 가득한 꽃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7. 연인, 은둔자, 광대

 

이마치는 노란색 튤립이 가득한 꽃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꽃의 색깔과 향기에 취해 허리를 숙였다. 그중 가장 빛나는 황금색 꽃에 손을 뻗었을 때, 바닥이 갈라지면서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이마치는 옥상에 있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살았던 주택의 옥상이었다.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봉숭아, 방울토마토, 상추, 고추 모종이 화분에 심겨 일렬로 늘어서 있고, 대학생 오빠가 세 든 옥탑방이 있었다. 이마치는 그곳에서 언니와 몰래 방울토마토를 따 먹고, 비 오는 날이면 봉숭아 꽃잎을 따다 손끝을 물들였던 것을 기억했다. 어디선가 라면냄새가 났다. 이마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옥상 구석에서 버너에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노아를 보았다. 그는 그녀가 내준 트레이닝복을 여태껏 입고 있었다. 이마치가 그 앞에 가서 서자, 그는 태연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좀 드실래요?”

“아니, 난 이제 이게 가짜란 걸 알아.”

이마치는 심상하게 대답했다.

“네가 가짜라는 것도 알지.”

“진짜고 가짜고,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죠? 어쨌든 당신은 이곳으로 돌아왔잖아요. 난 당신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어요. 영원히.”

“좀 섭섭한데? 난 네가 보고 싶었거든.”

노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정말 게임 같은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말하던데. 그래서 이번엔 끝까지 가보려고.”

노아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래요. 한번 끝까지 가봐요. 뭐가 있는지.”

그들은 옥상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 가보고 싶은 데 있어? 통로를 찾으면 내가 원하는 집으로 갈 수 있다던데.”

“원칙적으로 저는 통로를 통과할 수 없어요. 당신 혼자만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거죠. 지난번에는 당신이 통로를 통과하기도 전에 깨어나버려서,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난 거고요.”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었기에 이마치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일전에 했던 대로 빈집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50층에 다다랐을 때, 이마치는 여태껏 그 생각에 매달려 있었다는 듯 노아에게 물었다.

“내가 없으면, 너는 여기서 뭘 하지?”

“당신에 대해 공부하죠.”

노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 이제 나에 대해 충분히 아는 것 같아?”

“아뇨, 아직 부족해요. 나는 당신에 대해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싶어요.”

“좀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노아는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난 당신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

“나도 알아. 농담이었어.”

“저는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해요.”

이마치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따뜻했고, 심장의 두근거림마저 느껴졌다. 가상세계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실감이었다.

그들이 40층에 도달했을 때, 벨을 누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낡은 실크 로브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 마흔 살의 이마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당신들 누구예요?”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길래 며칠 동안 이 주변을 서성거리는 거죠?”

“저흰 아파트 관리팀입니다. 누전 때문에 주변을 돌아보고 있어요.”

노아가 능숙하게 나서서 말했다.

“괜찮으시면 집을 좀 봐도 될까요? 자칫 전기 사고가 날 수 있어서요.”

여자는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차림이었지만, 순순히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집안은 이마치가 기억하듯 엉망진창이었다. 뒤죽박죽 쌓인 살림들, 정체불명의 비닐 포장들, 뭉쳐서 굴러다니는 먼지들, 발에 닿는 끈적거리는 얼룩들. 아들이 사라진 지 일 년, 선글라스를 쓴 여자의 얼굴은 흡사 해골 같았다. 움푹 파인 두 뺨과 덜덜 떨리는 마른 입술이 생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때 그녀는 10킬로그램 이상 몸무게가 줄면서 심각한 탈모를 겪었다. 머리를 감으면 한 줌씩 잡혀 나오곤 했다. 아침마다 미용실에서 보수공사를 하듯 화장을 하고 가발을 가져다 붙였다. 새삼 저 상태로 드라마를 찍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녀가 맡은 역할은 한국 남자를 사랑하게 된 늙은 게이샤였다. 그녀의 앙상한 몸과 텅 빈 눈동자가 비운의 주인공과 소름 끼치게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드라마의 성공으로 연말에는 상도 받았다. 이마치는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육신이 움직이는 모양을 멀찌감치서 초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채권자들을 달래기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했고, 집을 나간 아들은 영영 소식이 없었고, 딸은 친척집에 맡겨둔 터였다. 그녀는 자멸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신기했다. 이만큼의 절망으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

40층 여자는 집안을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마치는 여자를 스쳐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두 대의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전부 한국 드라마였고, 이마치 본인이 출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두 개의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자신에게 텔레비전 두 대를 동시에 보는 취미가 있었던가? 이마치는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할 수도 없었다. 해골처럼 마른 그 여자는 완전히 낯선 사람 같았다.

안방은 고급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이십대 이마치의 방과 달라진 게 없었다. 정리도 하지 않고, 청소도 하지 않은, 오랫동안 해가 들지 않은 방. 이마치는 화장대 앞에 섰고, 물건을 되는대로 쑤셔넣어 잘 열리지 않는 서랍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그 안에 그것이 있었다. 촬영용 권총. 이마치는 그것을 한참 동안 쥐고 있었다. 노아가 밖에서 이만 나오라고 부를 때까지.

“아무도 없는 방에 텔레비전이 켜져 있길래, 제가 껐어요.”

거실로 나온 이마치는 그때껏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내가 켠 게 아니에요.”

여자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버석한 입술로 말했다.

“온종일 집안의 온갖 전기제품이 저 혼자 켜지고, 꺼지고, 아주 난리예요. 소란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죠?”

“누전인가보죠. 아니면 유령이거나.”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어떤 때는 형상으로, 어떤 때는 소리로 나타나요. 나는 매일같이 그것을 기다려요. 가끔은 희미한 얼굴을 보여주기도 하거든요. 오늘은 아직 오지 않았네요. 올 때마다 물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40층에서 나와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마치의 머릿속은 온통 여자가 했던 말로 뒤죽박죽이었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생각에 잠겨 몇 층에 다다랐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익숙한 냄새가 났다. 멈칫하는 그녀를 보고 노아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마치는 그곳이 15층인 것을 확인하고 말없이 벨을 눌렀다. 잠깐만요, 라고 외치는 소리. 잠시 후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뒤집개를 손에 든 이마치의 어머니였다. 집안에 지글지글 부침개 익는 냄새가 가득했다. 이마치는 그게 뭔지 알았다. 오징어가 들어간 김치부침개.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여자는 핑크색 핫팬츠에 민소매 티셔츠 차림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높이 묶은 포니테일이 목뒤에서 찰랑거렸다. 민망하리만치 젊어 보이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노화의 폭풍을 정통으로 맞은 사람 같았다. 늘어진 피부와 주름을 감추려 덧바른 핑크 색조 화장이 눈이 시리도록 천박했다. 패트릭 대령, 열 살이나 어린 그 미국 남자에게 맞춘 기호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그를 데려온 후 굴종에 가까운 태도로 살았다. 그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취향이나 입맛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평소에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를테면 오징어가 들어간 김치부침개를 굽는 것은 그가 다른 지역 부대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서 하루이틀 집을 비울 때만 가능했다. 젊은 남편이 집을 비우면 그녀는 종일 뭔가를 먹었다. 주로 한국 음식과 술이었다.

여자는 벌써 반쯤 취해 보였다. 누전 점검을 한다는 말에도 헤프게 웃었다.

“무슨 점검인지 모르겠지만, 어서 끝내고 이리 와서 이것 좀 드세요. 부침개가 아주 맛있어요.”

그 집 바닥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이마치는 발이 푹푹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집안을 돌아보았다. 부부침실에는 휘장이 달린 오크나무 침대가 있고 그 옆에 미니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 안에 와인과 함께 초콜릿이 있다는 것을 이마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없을 때 몰래 꺼내 먹다 들킨 적이 있었다. 고작 초콜릿 한 조각이었을 뿐인데 도둑질을 했다고 매질을 당했다. 그들이 집안을 둘러보는 동안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아이, 제이슨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패트릭 대령 사이에서 낳은 그애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 차지였다. 어머니는 언니에게 그랬듯 이마치에게 그애를 맡기고 자주 집을 비웠다. 이마치는 그애를 단 한 번도 동생이라 여긴 적 없었다. 따뜻하게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애가 누나, 라고 부를 때마다 무섭게 노려보거나 몰래 꿀밤을 먹였다. 그녀는 새삼 그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의 손님에 신이 난 아이는 그들을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오래전 이마치가 제이슨과 함께 썼던 방이었다. 다시 봐도 기괴한 풍경이었다. 한쪽에는 아홉 살 남자아이의 물건, 장난감 자동차와 축구공이 굴러다니고, 다른 한쪽에는 열다섯 여자아이의 물건, 작은 수첩과 가방과 색색깔의 펜들이 발에 밟혔다. 서랍마다 옷이 비어져나와 있고, 사방에 물건이 널려 있고, 말라붙은 음식이 발에 밟혔다.

어머니는 그들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것만은 공평했다고 이마치는 생각했다. 제이슨에게도 별 애정이 없었던 것. 자신이 낳은 아이들 전부를 무책임하게 대했던 것. 그들의 생활은 어머니의 부재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마치가 조금만 타협했다면 익숙한 방임에 묻혀 그럭저럭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마치는 걸핏하면 언니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가 좋아했던 곳, 언니가 싫어했던 음식, 언니가 입으면 어울렸을 옷…… 노래하듯 언니 이야기를 해서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머니는 이마치가 자신에게 도전한다고, 반항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분노가 무관심의 벽을 넘어섰다. 전에는 그들 사이에 없던 어떤 끈끈한 감정, 악랄함과 증오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마치를 감시하며 심부름과 잡일을 시켰다.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머리채를 휘어잡고 벽에 내동댕이치며 폭언을 했다.

너 같은 건 제대로 혼이 나봐야 된다. 아무 쓸모도 없는 년. 네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애 대신 네가. 너는 맞아 죽어도 할말 없어. 개 같은 년. 쥐새끼 같은 년. 도둑년.

이마치는 상처받지 않았다. 잠잠히 화풀이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폭력이 절정에 이르면 도리어 마음이 후련했다. 오래 묵은 원한이 모두 산화되는 것 같은 쾌감이 일었다. 그녀의 말간 얼굴에 어머니는 더 화를 냈다. 그녀를 벌거벗겨 때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밟아 짓이겼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패트릭이 모르게 했다. 김치부침개에 소주를 먹는 날, 대개는 그날이 이마치를 잡아 족치는 날이었다.

“화장실을 봐도 될까요?”

이마치의 말에 콧노래를 부르며 부침개를 굽던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긴 안 돼요.”

어머니는 이마치를 자주 화장실에 가두었다. 그곳이 집에서 가장 좁고, 또 오물을 처리하기도 쉬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화장실 문 위쪽을 더듬어보면 그곳에 잠금장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마치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체호프의 「갈매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는 니나의 독백.

 

전 무대 위에 서면 취해요. 거기서는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여기 고향에 온 날부터 걸었어요.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 마음과 영혼이 매일매일 강해져가고 있는 걸 느꼈어요. 이제 알 것 같아요. 코스챠, 작가든 배우든 간에 우리 일에는 내가 꿈꾸었던 어떤 것들도 명예나 성공이 문제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해요.

 

이마치는 멈칫했다. 그때 노아가 다가와 화장실 문 위의 잠금장치를 풀어버렸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뒤집개를 든 여자가 득달같이 달려왔고, 노아가 막아섰다. 노아의 큰 키와 힘에 여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대치하는 사이 이마치는 화장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열기와 지린내가 훅 끼쳤다. 열다섯 살의 이마치. 바닥에 속옷 차림으로 누워 있던 그애는 이마치를 향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이마치는 말없이 그애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말 저렇게 작았나? 소녀 거인이라 불렸던 그녀가?

“나와.”

이마치는 그애에게 말했다. 그애가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아 한번 더 말했다.

“어서 나와.”

그애는 몸을 일으켰고, 주춤주춤 그녀를 향해 나왔다. 빛 아래 서자 곤죽이 된 얼굴, 허리띠인지 전깃줄인지 질기고 탄력 있는 것으로 맞아 살이 터진 팔다리의 상처가 보였다. 어머니는 그들을 주거침입으로 신고하겠다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이마치는 어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위협감을 느낀 어머니는 뒤로 물러섰다. 어머니의 몸, 아담하고 가무잡잡한 몸에서는 달큰한 냄새가 났다. 이마치는 여자의 몸을 움켜쥐었고, 그 몸을 질질 끌고 가서―여자는 그악스레 버텼다―화장실에 밀어넣었다.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노아는 손을 뻗어 재빨리 자물쇠를 잠가버렸다.

“절대 열어주지 마.”

열다섯 살의 이마치, 그애는 유순한 양 같은 눈으로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라만 보던 제이슨도 그들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열다섯 살 이마치는 그애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애가 손을 잡았을 때 뿌리치지는 않았다.

“이 집은 안전하네. 누전 같은 건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이마치는 노아에게 이제 그만 나가자고 말했다.

 

복도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 노을이 보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들은 60층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마치는 노아 옆에서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마음이 고양감으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직 부끄럽지 않은 배우였을 때, 어려운 작품에서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냈을 때, 까다로운 신을 한 번에 찍어냈을 때 느꼈던 감정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이마치는 옆에 있는 노아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가 없었다면 어머니와 그런 식으로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몸을 붙잡아 가두지 못했을 것이다. 한없이 계단을 올라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야 정말로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60층에 도착했을 때, 집 앞에서 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43층 여자의 딸, 준희였다.

“저 돈 좀 빌려주세요.”

그애는 보자마자 대뜸 이마치에게 말했다. 이마치는 아이의 발치에 서 있는 커다란 캐리어를 훑어보았다.

“가출이라도 하려는 거니?”

“수학여행 기간 동안만요.”

이마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해보라고 했잖니. 이야기해봤어?”

“무슨 이야기요.”

“수학여행을 왜 가기 싫은지. 친구들과의 문제 말이야.”

“돈 안 빌려줄 거면 그만둬요. 잔소리라면 지긋지긋하니까.”

아이는 당장이라도 가버릴 것처럼 캐리어를 끌어당겼다.

“차라리 우리집에서 자고 가. 그럼 돈 빌려줄게.”

이마치의 말에 준희는 의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보더니 정말 그래도 되느냐고 물었다. 이마치는 대답하는 대신 노아를 흘긋 바라보았다. 노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이는 얼른 캐리어를 들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 집이 우리집보다 훨씬 넓네요. 엄청 부자인가봐요.”

준희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이마치는 그애가 봐서는 안 되는 사진 액자 몇 개를 부리나케 치웠다. 노아가 방에 들어간 후에는 아이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저 방에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

“할머니 아들 방이요?”

“그래, 저 방. 애가 성격이 까칠해서 누가 들어오면 정말 싫어하거든. 저기 들어가지 않는다고 약속해라.”

준희는 문제없다고, 걱정 말라고 장담했다. 이마치가 자기 방 침대를 양보해주겠다고 하는데도, 아이는 극구 사양하고 거실 한구석에 캐리어를 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감사의 선물이에요.”

봉투 안에 든 것은 진저맨과 곰돌이 모양의 버터 쿠키였다. 노아는 어느샌가 슬그머니 밖에 나와 있었다. 이마치는 노아와 그 자리에서 쿠키를 다 먹었다. 아이가 직접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는 쿠키였다. 감탄하는 그들을 보고 준희는 우쭐해서 다른 것도 만들 수 있다며 큰소리를 쳤다. 아이는 캐리어에서 베이킹 재료를 하나둘 꺼냈다.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는 물론 비커, 미니 저울, 계량스푼까지 없는 게 없었다.

“길에서 빵이라도 만들어 팔 작정이었던 거야?”

“저한테 제일 소중한 걸 들고 나온 거죠. 앞으로 어떻게 될 줄 모르니까요.”

잠시 후 집안에는 빵 굽는 냄새가 가득찼다. 노아는 준희 옆에 붙어서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했는데 조수 역할이 어설퍼서 적잖이 구박을 들었다. 그래도 시키는 대로 반죽을 젓고, 치대고, 모양을 잡는 등 열심을 다했다. 준희는 빌트인 오븐을 이용해서 카스텔라와 소보로 빵, 티라미수를 만들었다. 다 만들고 나니 부엌은 난장판이었다. 그들은 빵을 담은 바구니만 소중히 들고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거실 바닥에 빵 바구니를 놓고 모여 앉았다. 그러고 있으니 나들이라도 온 것 같았다. 따뜻한 우유와 갓 만든 빵은 눈물이 날 만큼 맛있었다. 이마치는 말없이 빵을 먹고 또 먹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노아 역시 빠른 속도로 빵을 먹어치웠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빵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저희 집에선 빵을 만들어도 먹을 사람이 없어요. 엄만 살찐다고 안 먹고, 아빤 밀가루가 체질에 안 맞는다고 하거든요.”

준희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동생이 있었다면, 그애가 왕창 먹어치웠겠죠. 어렸을 때부터 가리는 거 없이 정말 다 잘 먹었거든요. 아쉬워요, 정말. 그애한테는 빵을 만들어준 적이 없어요.”

“그땐 너도 어렸잖아.”

티라미수를 박박 긁어 먹으며 노아가 말했다.

“빵을 안 만들어줘도 그애는 널 좋아했을 거야. 남동생들은 원래 아무 조건 없이 누나를 사랑하거든.”

“전 그애가 정말 지긋지긋했어요.”

준희는 고백하듯 말했다.

“저를 너무 괴롭혔거든요. 몰래 제 물건을 숨기고, 진저리나게 놀리고, 제가 어딜 가든지 졸졸 따라다녔죠. 엄만 제가 그애를 받아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어요. 저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로 그애를 따돌리고 혼자 친구네 집에 가버린 거예요. 그날 아침에요. 그게 끝이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한 번, 그때 딱 한 번이었는데.”

이마치는 말없이 준희의 빈 잔에 우유를 좀더 따라주었다. 전에는 그렇게 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잠들기 전에 따뜻한 우유를 따라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노래를 불러주거나, 기도를 해준 적이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늘 그러고 싶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누가 못하게 막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타로 점 봐줄까?”

이마치의 말에 준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 것도 볼 줄 알아요?”

“일 때문에 배웠어.”

그녀는 바로 전 작품에서 타로술사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 대본만 줄줄 외고 싶지 않아, 타로술사를 직접 만나 카드 다루는 법과 점괘 읽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말고 다른 곳에서 시범을 보인 적은 없었다. 이마치는 서랍에서 기하학 문양의 천과 타로를 꺼냈다. 천을 깔고, 카드를 펼치고 섞는 모습을 준희와 노아 모두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왼손으로 카드를 한데 모은 뒤 세 개의 무더기로 나누고, 다시 차례로 쌓았다.

“궁금한 게 뭐지?”

“과거, 현재, 미래 전부 다요.”

“좋아, 세 장 뽑아봐.”

아이는 중간에서 나란히 세 장의 카드를 뽑았다. 이마치는 그것을 차례로 뒤집었다. 연인, 은둔자, 거꾸로 된 광대. 그녀는 세 개의 카드 위 허공을 손바닥으로 밀고 지나갔다. 준희는 숨을 죽였다. 노아는 턱에 손을 올리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무너지는 탑은 사고와 손실을 의미해. 너의 과거는 하나의 상처에서 비롯돼. 그 상처를 통해 자랐다고 해도 좋아. 그 상처는 너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가르침과 교훈도 주었지. 그래서 너는 뿌리 깊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이마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드를 해석했다.

“은둔자는 비밀을 가진 자고, 고독을 가진 자지. 너는 너의 세계를 무너뜨릴 만한 비밀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절대로 발설하지 않지. 그렇게 했을 때의 충격과 소란이 두려운 거야. 너는 그냥 한없는 어둠 속에 침잠해 있고 싶어. 긴 잠을 자는 것 같은 인생이야. 너는 그 어둠 속에서만 안식하고 너 자신이 되는구나.”

내내 카드를 내려다보고 있던 준희는 고개를 들어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그애의 눈동자는 옅은 갈색빛이었다. 따뜻한 갈색빛.

“거꾸로 된 광대는 여행 아니면 죽음을 의미해. 곧 너에게는 변화가 있을 거야. 네가 원한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것은 분명 너에게 들이닥칠 거고 그땐 어디로 나아갈지 선택을 해야 해. 쉽지 않을 거야. 발끝은 낭떠러지고, 너는 오래전의 추락도 기억하니까.”

“그래서 남자친구는 언제 생기는데요?”

이마치는 씩 웃었다.

“글쎄. 두 가지 길이 보이는데. 어떤 별의 영향을 받느냐에 달려 있어. 명왕성의 기운이 강할 경우, 너는 한동안 혼자일 거야. 하지만 반대로 금성의 수호를 받는다면, 영혼의 단짝을 만날 수도 있지. 모든 건 여름이 지나야 분명해질 거야. 그전에 너 자신을 찾아야 해. 카르마가 너무 짙으면 별들이 피해가거든.”

준희는 요란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얘긴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점괘라니. 너무 무책임하잖아요. 적어도 귀인이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는 말해줘야죠.”

“공짜 점 치면서, 거참 말 많네.”

뒤에서 지켜만 보던 노아가 중얼거렸다. 준희는 고개를 휙 돌려 노아를 보았다.

“공짜라뇨, 제가 빵 만들어줬잖아요.”

“대신 이 집에서 재워주잖아.”

그들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앞머리는 왜 그렇게 긴 거예요?”

준희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눈이 안 보이니 사람이 엄청 소심하고 음침한 것 같잖아요.”

노아는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좀 잘라줄까요?”

노아는 뜻밖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희는 얼른 일어나 부엌에서 가위를 씻어 가지고 왔다. 커다란 비닐봉지를 기다랗게 뜯어 노아의 목에 두르더니 망설임 없이 머리카락을 잘라나갔다. 침묵 속에서 사각사각, 가윗날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아, 이거 안 되겠는데요.”

기세 좋게 머리를 자르던 준희가 갑자기 가위질을 멈추었다.

“이러다 계단식 앞머리가 될 거 같아요.”

준희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과연 그애가 자른 노아의 앞머리는 삐뚤빼뚤, 고르지 않게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한쪽만 드러난 노아의 눈이 영문을 모르고 반짝반짝 빛났다.

“죄송해요. 저 사실 머리 자르는 거 처음이거든요. 할머니가 마저 하세요.”

이마치는 손사래를 치며 물러섰다.

“난 손재주가 없어서 안 돼. 점선을 따라서 종이 자르는 것도 잘 못한다고.”

“그럼 이 모양 이대로 둬요?”

준희의 말이 맞았다. 누군가는 끝내야 할 일이었다. 이마치는 떨리는 손으로 가위를 받아들었다. 빗을 찾아와, 먼저 노아의 머리를 가지런히 빗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고운 모래처럼 부드러웠다. 이마치는 괜스레 그 감촉을 지우려고 허벅지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손에서 이내 녹아버릴 것 같은 머리카락의 촉감. 이마치는 그의 머리카락을 아주 조금 붙잡고, 그 끝을 미세하게 잘라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노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이마치의 성공을 빌었다.

마침내 일이 다 끝났을 때 이마치는 자신이 제법 잘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썹을 살짝 덮는 앞머리. 그 아래 완전히 드러난 노아의 두 눈은 이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언니 준과 같은 옅은 갈색이었다. 투명한 갈색. 그 안에 자작나무와 소나기와 잘 영근 호박을 담고 있는 갈색. 눈이란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 노아의 눈이 드러나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고, 이제 이마치는 그의 완전한 눈, 코, 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그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뭔가 잊고 온 것을 찾듯이, 오래전 묻어둔 것을 찾듯이. 그리고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대로였다. 미아 찾기 팸플릿에 나왔던 그대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었다는 정민의 이십 년 뒤 예측 얼굴 그대로. 부자연스럽게 새카만 머리카락과 동그란 눈동자, 그와 어울리지 않게 긴 얼굴, 움푹 파인 야윈 볼. 그래, 이마치는 수도 없이 봤다. 아들이 청년이 된다면 바로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던 그 사진. 바로 이런 얼굴로 남자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그럴 수도 있었다고 그녀의 눈을 찌르던 그 사진. 그 얼굴.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얼른 눈물을 닦았고, 다행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운 것, 그녀가 알아챈 것, 그녀가 그들의 모체인 것. 증인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한때 한몸이었고, 한쪽의 장막이 찢어지며 다른 한쪽이 세상에 나왔다. 찢어진 쪽에서는 상처의 형상을 몸에 새기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마치는 알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았다. 노아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그 손을 잡고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을 때부터. 물론 이것은 가상현실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팸플릿을 보았을 거고, 아마도 미술팀 아니면 기술팀 그 누군가가 노아의 얼굴을 그려넣었을 터였다. 적절히 말하는 법, 감정을 느끼고 그에 대응하는 법을 코드화했을 것이다. 노아가 정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대한의 정민이 아닐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정민이긴 했다. 한 방울 혹은 두 방울의 정민이라고 해도 이마치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했다. 이마치는 그 사실을 노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너는 나에게 정말 귀한 존재라고, 세상 무엇과도 너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꼭 지금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완벽한 순간. 앎이 은총이 된 순간. 이마치는 그저 아이들 곁에 좀더 머물고 싶었다. 밤이 한창 깊었는데도 그애들은 잠들 줄 몰랐다. 준희는 노아와 같이 타로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었다. 점을 봐준답시고 노아에게 카드를 고르라고 한 뒤 엉터리 점괘를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노아는 낄낄 웃었다. 이마치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그애들의 목소리,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영원히 듣는 것 말고 더 바라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아이들을 양쪽 팔에 끼고 눕고 싶었다. 예전처럼 도망치지 않고, 그애들의 몸에 자신의 몸을 마음껏 비비고 뒹굴고 싶었다. 머리카락과 귀와 턱 밑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고 해도, 진작 그들의 삶을 망친 건 그녀라고 해도, 아이들이 오늘밤만은 봐주기를 바랐다. 그녀가 모든 것을 알게 된 오늘밤만. 이마치는 앎의 부요함, 따뜻함, 달콤함 속에서 잠들었다. 아무도 그녀를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