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이래도 내가 잘못 봤다고 할 거야?”

“이래도 내가 잘못 봤다고 할 거야?”

이마치는 조용히 물었다.

“이건 무슨 평행우주 같은 건가? 아니면 내가 정말 신이라도 되어 말씀으로 이곳을 짓고 허물 수 있는 거야?”

노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스템이 재정비되는 거예요. 당신이 정보를 주면, 건물이 판단하고 받아들이죠. 일종의 업데이트예요.”

“업데이트? 건물의 조건이 바뀐다는 건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물은 끊임없이 학습해요. 살아 있는 생물처럼, 당신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거나 알아차리면 그걸 반영해서 다시 구성되죠.”

“그래서 갑자기 밤이 되고, 장미가 나타난 거야.”

이마치는 중얼거렸다.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이마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노아를 보았다.

“첫날 나한테 분명히 그랬잖아. 이곳에서 내 말대로 뭔가 달라지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노아는 묵묵부답이었다.

“사실을 알면 내가 이곳을 망쳐버릴까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반대예요. 오히려 이곳을 더 완벽하게 만들까봐, 그게 문제죠.”

“완벽이라니, 집집마다 문이 닫힌 걸 보고서 하는 말이야?”

이마치는 기가 막혀 웃었다.

“내 기억은 남극의 얼음처럼 사라지고 있어. 간신히 남은 몇 개의 얼음조각 위에 깨금발로 서 있지. 그마저도 서서히 가라앉는 중이고.”

“알고 있어요.”

노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때가 되면 이 건물은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을 거예요. 당신이 개입할수록 때가 늦춰지겠죠. 난 기억이 보완되고 연장되는 걸 당신이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건물은 어딜 가도 고통뿐이잖아요. 사라진다면 그것으로 고통의 종말이죠.”

“고통의 종말이라니. 대체 네가 고통에 대해 뭘 알지? 넌 인간이 아니고, 가진 것을 잃어본 적도 없잖아.”

노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마치는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멀쩡한 정신으로 모든 걸 기억하는 거야. 그애가 집에 왔을 때 내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이마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중에야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이란 것을 알았다. 자신의 인생은 화려한 겉모습과 다르게 실상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것, 그 비루한 일상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구석구석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이마치는 집을 나왔다. 나오고 나서야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집 앞 계단에 주저앉았고, 어쩌면 노아가 쫓아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마치는 몸을 웅크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 상태 그대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눈을 감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 바쁘게 움직이는 발소리, 바퀴가 레일 위를 굴러가는 소리. 이마치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옥상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벽을 더듬으며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 철문을 열자, 귀가 거슬리는 끼익 소리가 들렸다. 조명과 반사판, 카메라 지미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촬영장이었다. 이마치에게 집과 같았던 곳. 한평생을 보낸 곳.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가 뱅글뱅글 돌고 있는 가운데, 조명이 비추는 바로 그곳에 통로가 열려 있었다. 삼차원의 입체감을 가진 통로였다. 입구에는 문이 있었고, 그 문은 진작 아파트 현관에서 보았던 유리문과 똑같았다.

이마치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하나는 노아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 또하나는 자신이 그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로가 있다는 말 따위 그녀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환한 빛으로 감싸인 통로. 이마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왜 망설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그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문을 열자 노란빛이 쏟아졌다.

 

 

6. 축복의 테라스

 

“눈 떴어요!”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이마치는 눈을 깜빡거렸다. 시야가 캄캄했다. 누군가 그녀의 고글을 벗겨주었다. 그녀는 커다란 리클라이너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대여섯 명 되는 사람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여자와 간호사 무리.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다.

“이제 정신이 드세요?”

이마치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발머리의 젊은 의사였다. 이마치가 떨리는 손을 들어올리자 그녀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차갑고 메마른 손이었다. 이마치가 몸서리를 치면서 팔과 다리, 머리에 연결된 온갖 선이 함께 흔들렸다. 이마치는 채집된 곤충처럼 의자에 묶여 있었다. 의사는 이마치를 진정시키고 간호사들을 시켜 그녀에게 붙은 장치를 떼어줬다.

“갑자기 프로그램을 종료해서 몸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너무 어지러워요.”

이마치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수백 개의 풍선으로 가득찬 것 같았다. 시시각각 머릿속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물감과 부유감으로 속이 메스꺼웠다.

“사이버 멀미 때문이에요. 곧 나아질 테니 걱정 마세요.”

“노아는 어디 있죠?”

이마치의 물음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의사는 자세를 낮추고 이마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생님, 제 말 잘 듣고 질문에 답해주세요. 이름과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예순 살, 이마치예요.”

이마치는 깔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이마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은 지금 병원의 VR 진료실에 계세요. 치료를 받던 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깨어나셨고요. 노아는 가상현실에 등장하는 인물이에요. 제 말 이해하실 수 있나요?”
이마치는 안락의자 옆 협탁에 있는 노란 튤립을 바라보았다.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모두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시간을 좀 주세요.”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이해하는 중이에요.”

천천히 꿈에서 깨는 기분이었다. 꿈을 꾸는 도중에는 그것이 꿈이라는 걸 모른다. 깨고서야 비로소 이해한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전부 가짜였다는 것,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것. 하지만 꿈이라는 걸 알고 난 뒤에도 마음은 여전히 그에 사로잡혀 있다. 긴 앞머리가 눈을 덮은 청년. 그의 잔영이 아직도 눈꺼풀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이마치는 의사를 향해 도움을 청하듯 말했다.

“제제 선생님은요? 내 주치의요.”

“선생님은 개인 사정으로 일주일간 휴진이에요. 그래서 제가 대신 케이스를 맡았고요. 일단 병실로 이동해 좀 쉬세요. 회복되는 대로 후속 치료를 하도록 하죠.”

이마치는 간호사를 따라 긴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가 짐작하던 것보다 병원의 규모는 훨씬 더 컸다. 다섯 평쯤 되는 개인 병실은 반짝거릴 정도로 깨끗했고, 언제든 간호사를 부를 수 있는 버튼이 벽마다 있었지만 온도 조절을 하는 버튼은 없었다. 이마치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언제 입었는지 모를 환자복 차림이었다. 간호사가 벽장문을 열고 카디건을 꺼내줬다. 그녀의 것이 분명한 버버리 카디건이었다.

“내가 전에 여기 온 적이 있나요?”

“그럼요. 이틀 전에 입원하셨어요.”

간호사는 온화한 얼굴로 말했지만, 이마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VR 치료를 언제 시작했는지, 그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진료실의 리클라이너 의자에 앉은 기억조차 없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흰죽과 물을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시계를 보니 저녁 일곱시였다.

그날 밤 이마치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에 간호사가 수면유도제를 놔주었고, 까무룩 잠든 후 깼을 때 병실에는 전날의 여자의사가 와 있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는 부드럽게 물었다.

“심박수며 혈압이며 이제 좀 안정이 된 것 같아요. 어제 VR 치료중에 갑자기 깨어나서 놀라셨죠?”

“내가 언제 VR 치료를 시작했죠?”

이마치는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요.”

“혼란스러우실 거예요. 제가 천천히 설명해드릴게요.”

의사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VR 치료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상현실 체험이에요. 선생님은 연도별로 생애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가상의 건물에 들어가서 출구를 찾는, 일종의 사이버 게임을 하게 되죠.”

“사이버 게임……”

“말하자면요. 고유한 시나리오가 있고, 목표를 달성해서 엔딩에 이르니까요.”

“하지만 거기 나오는 사람들…… 전부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일일이 그린 삽화를 실사로 변환한 거예요. 기술팀에서 들으면 으쓱해하겠지만, 실사와 백 프로 같다고 보긴 어렵죠. 그렇게 받아들인 건 아마도 선생님의 취약한 인지기능과 마취제 영향일 거예요.”

의사는 한껏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가상현실에 접속한 이후 뇌피질에 전류를 흘려보내는데, 이때 적당량의 마취제를 쓰거든요. 이건 대외비예요.”

의사는 빙긋 웃었다.

“모든 캐릭터는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환자 개인과 상호작용해요. 가뜩이나 심신이 미약한 환자들은 실제라고 믿기 쉽죠. 특히 노아는 실체가 없는 창작물이어서 그에 대해서만은 인공지능의 데이터 수집에 제한을 두지 않았어요.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친밀감을 느낄 수 있도록요.”

“다른 사람들의 VR에도 노아가 있나요?”

“물론이죠. 이름과 생김새, 기질은 제각각이지만요. 환자별로 맞춤 설정이 있달까요. 누구나 낯선 곳에서는 안내자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이마치는 의사의 말을 절반 정도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말들이 공중에 흩어져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치료가 제대로 마무리됐더라면 모든 걸 기억할 수 있으셨을 거예요. 어제 갑자기 깨어나신 이유가 뭔지는 병원에서도 찾으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자칫 위험할 뻔했거든요.”

“내가 통로를 찾아서 깨어난 게 아닌가요?”

“아니요. 통로를 찾으면 그 통로를 통해 다른 집으로, 자신이 원하는 집으로 넘어가게 되죠. 그런 식으로 퀘스트를 수행해 엔딩에 이르는 게임이에요. 그런데 어제는 갑자기 뇌피질의 국소마취가 풀리면서 위험할 정도로 혈압이 떨어져 VR을 계속 진행할 수가 없었어요.”

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이제 안정이 되었으니 오후부터 치료를 재개할까 해요. 컨디션은 괜찮으시죠?”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의사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 집이요?”

“내 집이요. 라파트멍 60층.”

말을 하자마자 이마치는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비품 중 하나인 빗을 가져왔다. 그 빗에는 ‘라파트멍’이라는 이름과 함께 ㄷ자를 구십 도 돌린 모양의 로고가 붙어 있었다.

“라파트멍은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에요. 저희 병원의 입원실 병동 이름이기도 하고요.”

이마치는 할말을 잃었다.

“지금 선생님 상태는 너무 불안정해요. 치료를 재개하지 않으면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될 거예요. 차라리 여기서 좀더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시는 게……”

“집으로 가겠어요.”

이마치는 라파트멍의 로고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진짜 내 집은 어디죠?”

 

보호자 확인 없이는 퇴원 조치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이마치는 딸 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딸은 바로 병원에 오겠다고 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어딜 오겠다는 거니? 혼자 퇴원할 수 있어. 사리 분별을 못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이 좀 엉켰을 뿐이야.”

“병원에서는 치료 과정이 아직 덜 끝났다고 하던데요. 그러지 말고 좀더 거기 계시면 어때요?”

“여긴 너무 춥고 답답해. 하루도 더 못 견디겠어.”

“그럼 할 수 없죠. 알겠어요.”

딸애의 목소리는 평소와 좀 다르게 들렸다.

“너야말로 별일 없는 거지?”

“네, 아인이도 저도 잘 지내요. 별일 없어요.”

“아인이가 누구니?”

아주 잠깐의 침묵 후 딸은 입을 열었다.

“제 딸이요. 이름을 지었다고 제가 말 안 했나요?”

“안 했어. 예쁜 이름이다.”

딸은 의사를 바꾸어달라고 하더니 한참 통화를 했다. 통화가 끝난 후 의사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님이 모든 책임을 진다고, 퇴원 조치해달라고 하네요.”

이마치는 옷을 갈아입고 병원을 나왔다. 그녀의 진짜 집, 그곳의 주소는 알고 있던 것과 다름없었다. 전에 가족과 살던 아파트가 재건축되어 팔 년 만에 재입주했다는 사실도 같았다. 60층이 아닌 19층이라는 것, 그리고 아파트의 이름만 달랐다. 축복의 테라스. 이마치는 그 생소한 이름을 입속에서 되뇌어보았다.

병원 앞 택시 승강장에는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뒷줄의 기사들은 차에서 내려 저들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마치는 그 속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는 터프가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알아본 그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이마치는 차례를 기다려 그의 택시를 탔다. 그는 두 번이나 슈퍼스타를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고 웃어 보였다.

“두 번이요? 세 번이 아니고요?”

이마치는 그에게 첫날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백미러를 통해 조심스럽게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그런 기억은 없지만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에스코트할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차를 탈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면서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의 이름은 고기석. 이마치는 그 이름이 터프가이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기석은 이마치를 ‘축복의 테라스’ 아파트 동 입구에서 내려주고 떠났다. 그 아파트는 애초에 그녀가 알고 있던 라파트멍의 단지 구조와 똑같았다. 이마치는 현관에 서서 투명 유리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마침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둥글둥글한 인상의 중년 여자가 그녀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덕분에요.”

이마치는 가까스로 둘러댔다.

“지난번에 따님이 돌린 빵은 잘 먹었어요. 정말 맛있던데요.”

여자가 떠난 후 이마치는 얼떨떨한 얼굴로 돌아섰다. 딸이 언제 여기 와서 빵을 돌렸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에 도착한 이마치는 익히 아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갔다. 거실을 찬찬히 훑어보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찬장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라면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아들 방에 들어가서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한 이마치는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창문마다 촘촘한 창살을 넣어놓은 것이 의아했다. 창살 사이로 바쁘게 오가는 차와 사람들이 내려다보였다. 번화가 한가운데 위치한 아파트였다. 초목이라곤 아파트 단지 내의 수풀과 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다. 이마치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문득 미희를 떠올렸다. 전화를 걸었지만, 미희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한번 더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이마치는 일어나자마자 몸무게를 쟀다. 그녀의 몸무게는 58킬로그램이었다. 집안에 라면 말고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아파트 건너편에 창고형 대형 마트가 있었다. 그녀는 야심차게 그곳에 들어갔지만 코너를 돌자마자 길을 잃고 말았다. 식료품과 공산품, 모든 것이 낯설었고, 상품의 진열 방식 또한 생소했다. 유제품 냉장고 앞에서 하얗게 질린 그녀를 매장 직원이 발견했다. 직원은 그녀에게 괜찮으냐고, 도와줄 게 있느냐고 물었다. 이마치는 출입구 쪽이 어딘지 알려달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녀는 과일도 샐러드용 채소도 사지 못하고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비상계단으로 가보았지만, 한 층을 다 올라가기도 전에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이 60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돕는 손길이 있다고 해도,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한 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노아와 함께 있을 땐 시간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믿어진 것이다. 그 이상한 일들, 그 이상한 공간이 실제인 것처럼.

이마치는 그날, 또 다음날도 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끈질기게 연락했지만 끈질기게 받지 않았다. 이마치는 창살 사이로 도시의 소란함과 분주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집은 완벽히 고요했다. 물속 같은 고요였다. 이마치는 초조함을 느꼈다. 아무 근거도 없는 초조함이었다. 뭘 기다리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유령마저 그녀를 영영 떠난 듯싶었다. 전에는 하루라는 거대한 공백을 어떻게 채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마치는 비틀비틀 침대로 가서 누웠다. 한낮이었으나 달리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곧 파도와 같은 잠이 밀려왔다. 이마치는 서너 시간 자다 깼고,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또 너덧 시간 자다 깼다. 그렇게 이어갈 수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퀼트를 짜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뗏목에 올라 물위를 떠내려가다가, 했다. 마지막에는 라파트멍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계단을 끝없이 오르고 또 올라서 어느 집에 다다랐다. 막 이사를 떠난 집처럼 텅 비어 있었다. 거실에 들어선 그녀는 벽에 걸린 커다란 스크린을 보았다. 처음에는 카운트다운이 떠오르더니 다음 순간 환한 빛이, 영상이 떠올랐다. 이마치는 속수무책으로 서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삶이라는 영화. 보자마자 알아챘다. 이마치의 나이 서른아홉, 그날이었다.

 

그날 그녀는 새벽 야외촬영을 마치고 해뜰 무렵이 다 되어 집에 돌아왔다. 남편의 수제화, 스포츠용품 전문점, 건강식품 체인점 사업까지 부도로 마무리되면서 그들 가족은 빚더미에 앉은 참이었다. 남편은 돈을 구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잠적해버렸다. 이마치는 촬영장까지 들이닥친 채권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뺨을 맞아야 했다. 그녀는 연기자였다. 모욕당하는 자의 참담한 얼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만족할 때까지 엎드려 빌었고, 그들이 떠나고 나면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괜찮아요? 놀란 촬영장 스태프들이 다가와 물으면, 아유 괜찮아요, 돈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바보처럼 웃어 보이고는 촬영을 하러 갔다. 일일극 두 작품을 동시에 촬영하면서, 아역 탤런트와 함께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모피와 안마의자 모델로 케이블방송 광고를 찍으러 가면서, 정력제 홍보차 찜질방이나 스크린 골프장으로 사인회를 다니면서, 이마치는 문득문득 자신이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었던 것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빚은 사라지지 않고, 결국 다 갚을 돈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빌빌대며 사정했을까. 그래야 빨리 끝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마치는 언제나 계산이 빨랐다. 사용가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머리 감을 시간도 없이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었다. 차에서 얼어붙은 김밥을 꾸역꾸역 밀어넣고, 한 시간 두 시간 겨우 눈을 붙였다. 그날도 그렇게 두세 건 스케줄을 마치고 자정을 넘겨 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어두운 거실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그녀는 강도라도 본 것처럼 놀랐다. 석 달여 만에 보는 남편이었다.

“어디서 오는 거지?”

길에서 마주쳤더라면 못 알아볼 정도로 그는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비대하게 살이 오른 얼굴, 빨갛게 충혈된 눈, 목소리마저 깊이 잠겨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남편은 다시금 어디서 오는 거냐고 물었다.

“촬영장.”

이마치는 짧게 대답하고 그를 스쳐지나갔다. 감기 기운이 심했고, 종일 땀을 흘려서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서 씻고 자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전날 밤 집에 왔다고 말했다. 아이들 밥을 먹이고, 몸을 씻기고, 손톱과 발톱을 깎였다고. 아이들이 이마치가 돌아오지 않는 집에서 밤에 자기들끼리 자고, 아침에 일어나 컵라면에 물을 부어 먹고, 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그게 대단한 비극이라도 된다는 듯 읊어댔다. 이마치는 감흥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정민이 발톱 깨진 거 알고 있었어?”

남편은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 발톱이 살을 파고들어서 걸을 때 피 나는 거 몰랐어?”

“몰랐어.”

이마치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남편은 할말을 잃은 듯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이마치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마셨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주말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왔다고 대답했다. 큰애와 작은애 둘 다 놀이동산에 가고 싶어하더라고, 내일 같이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남편이 정말 우스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습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남편의 사업이 망가지고 또 망가지는 사이, 그들 관계도 수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망가졌다. 그들은 이미 이혼에 대한 합의를 마쳤다. 딸은 그녀가, 아들은 그가 데리고 가기로 했다. 다만 당장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돈에 쫓겼고, 그래서 이혼이 후순위였던 것뿐이다. 먹고사는 문제의 후순위.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살림을 차압당하지 않으려고, 그녀는 등이 휠 정도로 일했다. 촬영장에서 추위에 떨며 이틀을 보냈다. 집에 있는 남편을 보자, 차에서 좀더 자고 가라는 K의 권유를 뿌리치고 올라온 것이 후회되었다. 꿀처럼 달콤한 잠이었는데. 겨우 눈을 붙인 참이었는데.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야 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화를 냈다. K와 그녀가 어떤 사이인지 안다고, 이미 오래전부터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고 했다.

이마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있었던 일―채권자에게 뺨을 맞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빌었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끝내 그녀가 입을 다물자, 다그치던 남편은 시든 화분을 걷어차며 집을 나갔다. 마른 흙이 거실 사방에 흩어졌다. 이마치는 소주를 좀더 마셨다. 돈 문제가 목을 죄면서 그녀는 불면으로 고통받았다. 때때로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매일 술을 마시고 잠드는 패턴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녀는 소주를 한 병 더 꺼냈다. 뒤늦게 잠에서 깬 아이들이 거실로 나왔다. 애들은 아빠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이마치의 뒤를 쫓아다니며 놀이동산은 언제 가느냐고 징징거렸다. 이마치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지린내 나는 타일 바닥에 웅크려 눕자 더할 수 없이 편안했다. 아이들이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울면서 그녀를 불렀다. 이마치는 문을 열지 않았다. 곧 물에 잠기는 것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그날 오후 한시가 지나서 이마치는 깼다. 집안은 조용했다. 그녀는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은 집에 없었다. 그녀는 애들끼리 놀이터라도 나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둘이 곧잘 그러니까. 돈을 들고 슈퍼에 가서 뭘 사 먹기도 하니까. 아이들이 없는 집에 홀로 있으니 편안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목욕했고, 난장판이 된 집도 오랜만에 대청소했다. 청소를 다 끝내고 진한 녹차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딸은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친구네에서 밥을 먹고 놀다 왔다고 했다. 정민은 어디 있느냐고 그들은 서로에게 물었다. 둘 다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은 이마치가 서 있는 거실을 한없이 페이드아웃하면서 끝났다. 마치 깊은 터널의 한가운데 그녀만 남겨두고 모든 이가 반대편으로, 출구로 떠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머금은 어둠을 배경으로 그들의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로 올라가고, 마침내 스크린에는 fin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이마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침대맡의 시계를 보니 여덟시 오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전 여덟시 오분인지 오후 여덟시 오분인지, 자신이 얼마나 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몸이 시든 채소처럼 축축 늘어졌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렸다. 도시의 불빛이 사방에서 반짝이며 시선이 닿는 곳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마치는 촘촘한 창살 사이로 그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열여덟 토막으로 나뉜 밤의 도시. 그녀는 죄수처럼 창살을 움켜쥐었고, 바로 그 순간 뭔가 뜨겁고 축축한 것이 다리 사이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황홀한 망각 상태에 빠졌던 이마치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을 때에야 이지를 되찾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주춤주춤 욕실로 가서 젖은 바지를 벗고, 다리와 무릎, 조붓하게 늘어진 늙은 성기를 닦았다. 이마치는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잠시 앉아 있다가 기석에게 연락했다. 그는 신호음이 한 번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마치 그 전화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응답했다. 출발선에 서 있다가 신호와 동시에 튕겨나가는 달리기 선수처럼 그녀에게 왔다.

그들은 그날 저녁 아파트 앞 편의점에서 만났다. 기석은 그곳에 잠깐 택시를 세우고, 삼분 죽을 사왔다. 그것을 직접 데워 조금 식힌 후, 그녀가 다 먹을 때까지 함께 있어줬다. 그리고 이마치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병원에 태워다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차를 돌렸다.

 

제제는 여전히 병원에 없었다. 여자의사는 갑자기 찾아온 이마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마치는 나흘 만에 VR 진료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모든 과정을 선명히 기억하리라 마음먹었지만,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뒤 고글과 헬멧을 쓰고 팔다리에 온갖 주삿바늘과 전선줄을 연결하고 나니 어찌할 바 없이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마치는 의사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마음먹어보세요. 막말로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그곳은 가상세계잖아요. 깨고 나면 사라질 세계죠.”

“내가 회복될 수 있다고 확신해요?”

“그럼요. 다시 절 보실 때 즈음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의 불일치한 모든 것을요.”

“제제에게 전해줘요. 주치의면서 나를 이렇게 방치한 책임을 꼭 물을 거라고요. 나는 이 병원에 적지 않은 돈을 냈어요.”

이마치의 농담에 의사는 소리 내어 웃었다.
“깨고 나면 그분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선생님도 그분을 용서할 수밖에 없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