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 하세요?”
31층에서 나와 계단을 오르던 노아가 이마치에게 물었다.
“남편의 구두에 대해서.”
“구두요?”
“현관에 있는 구두 못 봤어?”
남편에게는 수집벽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고급 수제화를 모으는 것이었다. 고급스러운 광택에 날렵한 디자인의 남성화들. 은행원의 수입으로는 꽤나 사치스러운 취향이었다. 결혼 후 이마치는 그가 가지고 온 신발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진동하는 가죽냄새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구두 말이야. 그게 남편의 첫 사업 아이템이었어.”
이마치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둘째가 태어난 후 그는 더이상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껏 당신을 돕느라 제대로 일을 찾을 생각도 못했잖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간 일을 구하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린 이유가 그녀 때문이었다는 듯. 이마치는 속으로 웃었다. 그가 일 년도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살아남는다는 게 어떤 건지, 뭘 주고 뭘 받는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수제화 사업을 시작해보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말리지 않았다. 스스로 무능함을 자각하고 나가떨어지길 기다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내가 무지했던 거야. 사업에 실패하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몰랐어.”
이마치는 노아에게 말했다.
“그는 거대한 구멍이었어. 돈이 빨려들어가는 구멍. 메워도 메워도 끝이 안 났지.”
“돈이 마르니 사랑도 끝났나요?”
그녀는 설핏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부부 사이가 끝나는 건 돈이나 사랑이 아니라 농담이 마를 때야. 부부끼리만 하는 우스갯소리 말이야. 서로를 조금은 두려워하고, 조금은 동정하고, 조금은 경멸하고…… 그런 마음을 웃긴 얘기로도 내뱉지 않게 되면…… 그땐 정말 끝이 나는 거지.”
이마치는 청춘스타의 입지에서 서서히 내리막을 걷던 시기에 남편을 만났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배우들이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영화판에서 이십대 후반은 마의 구간이라 불렸다. 세포의 탱글탱글함이 사라지는 시기. 중성적인 그녀의 이미지를 모방, 재해석한 후배들이 속속 나타나면서 이마치는 연이어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어렵게 배역을 따낸 뒤 크랭크인 직전 신인에게 역할을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이마치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당시 그녀는 모 방송국 사장과 연애중이었다. 그녀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점에 끌렸지만 얼마 안 되어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그녀는 그 모든 소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연기를 그만두고 카페나 소품숍 같은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녀의 헤어 디자이너가 자기 사촌 오빠를 한번 만나보겠느냐고 슬쩍 물었다. 법대를 졸업하고 은행에 다닌다는 남자, 사진에서도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였던 그 남자를 그녀가 덥석 만나겠다고 한 것은 당시 일이 없어 심심했고, 그러한 고요가 너무나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약속 장소에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입고 나타났다. 내부의 비닐도 뜯지 않은 신형 중형차를 몰고 와서 드라이브 내내 비제의 오페라 곡을 틀었다. 이마치는 그가 우스웠다. 하지만 그다음 주에도 딱히 할일이 없어서 한번 더 그를 만났다. 두번째 만남 약속 장소에서 그는 그녀가 온 줄 모르고 뒤돌아서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반짝거리는 차 옆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는 젊은 남자의 뒷모습. 이마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르메스 스카프는 그날 선물 받은 것이다. 그가 이마치의 목에 키스 마크를 남긴 날이었다. 그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하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서 스카프를 사주었다. 그리고 세번째 만남에서 청혼했다. 그때까지 이마치는 수많은 남자를 만났고, 컬렉션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각양각색의 인격을 경험했지만, 그녀에게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다시 말해 이마치가 결혼한 이유는 청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정직했고, 쇼 비즈니스 바닥에서 지칠 대로 지친 이마치에게 그것은 매우 신선한 미덕이었다. 그들은 그로부터 육 개월 뒤에 결혼했다.
신혼 첫해 그녀는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고질병인 불면이 사라졌고,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으면서 혈색이 달라졌다. 집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는 것, 밤마다 누군가의 체온을 느끼며 잠드는 것, 매일 누군가와 같이 밥 먹는 것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어느 직장이든 길게 붙어 있지 못했다. 완고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 조직생활이 맞지 않았다. 퇴사와 재입사가 반복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젊고 유능한 새댁의 이미지를 입은 이마치에게 다시 일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결혼으로 그녀의 슬럼프는 끝났다.
남편은 밤낮이 따로 없는 그녀의 일을 이해했지만, 아이만은 빨리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이마치는 아이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좋거나 싫은 게 아니라 아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자상함, 천진함, 유약함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길에서 어린애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지곤 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초조해졌다. 그녀가 줄 수 없는 것 때문에 그가 자신을 떠날까봐, 그가 모르는 자신의 본성, 불모의 실체가 드러날까봐 두려웠다.
이마치는 순순히 남편이 시키는 대로 배란일을 계산하고, 관계 후에는 두 발을 벽에 대고 잤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 모든 걸 비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부모가 되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니가 죽었을 때 반,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온 뒤 나머지 반, 그녀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집을 나온 뒤에는 여러 남자를 만났고, 두 차례 임신 중절의 경험도 있었다. 그때 헐값으로 치른 수술들이 자신을 영구적인 불능의 몸으로 만들었을 거라고, 혹시 임신이 된다고 해도 제대로 유지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다음해 그녀는 임신했고, 건강한 딸을 낳았다. 밥벌이하는 나이가 된 이후 집에 들어앉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출산 직후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실명으로 패닉에 빠졌다. 시력은 곧 돌아왔지만, 출산한 지 일주일 만에 보는 딸의 얼굴이 너무나 낯설었다. 이렇게까지 자기 아이가 타인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까? 그녀는 아이와 서로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도 엄마들이 말하는 방법, 혀 짧은 소리를 내고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미소 짓는 방식은 알고 있었다. 그걸 누구보다 그럴싸하게 흉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구원은 뜻밖에도 남편에게서 왔다. 마지막 직장에 사직서를 낸 후 그는 당분간 일을 쉬고 싶다고 말했다. 이마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면서 자연스레 양육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대신 남편이 집에 들어앉았다. 그는 도시락을 싸서 종종 딸과 함께 촬영장에 놀러오기도 했다. 딸이 부르는 엄마 소리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남편과 같이 아이를 가운데 두고 걸을 때면 그럭저럭 스스로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마침내 정상적인 삶에 돌입했다는 허영심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바로 그 허영심이 그녀를 무디고 무르게 만들었다. 다음해 이마치는 또다시 임신했다. 여장부, 호스티스, 젊고 유능한 새엄마…… 전과는 결이 다른 역할이 밀려들 때였다. 몸이 둘로 쪼개져 각각 일터로 갔으면 좋겠다는 섬뜩한 농담을 종종 했는데, 실제로 그녀의 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하나면 된다고 합의했던 남편이 피임수술을 했다고 거짓말한 탓이었다. 이마치는 임신 사실을 너무 늦게 확인했다. 놀라울 정도로 입덧도 없고 태동도 없었다. 아무런 소요 없이, 아이는 뱃속에서 크기를 키웠다. 임신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남편을 이마치는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깐 소파수술을 생각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남편은 입버릇처럼 낙태가 역겹다고 말했고, 그런 짓을 하는 여자들이 살인자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녀는 그렇게 주저앉았다. 그녀만큼이나 이름을 알린 여자, 흥행 보증수표라는 별명을 가졌던 여자, 가족 모두가 쓰고 넘치게 돈을 벌어들였던 여자가 남편에게 비난받을까봐 두려워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감당하기로 한 것이다.
두번째 임신은 모든 면에서 첫번째와 달랐다. 임신 후기부터 조금만 무리해도 피가 비쳤고, 이명과 어지럼증으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스스로의 몸을 감당할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얼굴과 손발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붓기 시작하면서 일찌감치 출산 휴가에 들어가야 했다. 이마치는 어렵사리 차지한 액션 영화의 주연 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녀를 그 자리에 추천했던 감독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마치는 마지막 한 달간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아이를 낳았다. 남편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아들을 낳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남자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는 것, 그간 그녀가 가정의 경제를 지탱해온 일, 홀로 곤욕을 치르며 돈을 벌어들인 일에 대해서는 아무 감사가 없었으면서 이제 와 자신이 가장인 척 그녀를 치하한다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한 번도 유심히 보지 않았던 것들, 그의 새 구두와 카메라와 테니스 라켓에 눈이 갔다. 전부 그녀의 돈으로 사들인 것이었다. 한량처럼 책이나 들여다보고 여유만만 취미생활을 즐기는 그 남자가 경멸스러웠다. 그러자 모든 게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남편과 왜 헤어지지 않았어요?”
계단을 오르며 노아가 이마치에게 물었다.
“사랑도 농담도 진작 끝났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헤어지려고 했어. 그런데 아이가 사라졌지. 그후로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어. 이혼이고 뭐고 생각할 정신이 없었지.”
“그건 핑계죠.”
이마치는 놀란 얼굴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맞아. 그럴지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나는 공범이었지. 서로의 존재를 고발했는지 모호한 공범 말이야. 그런 관계에서는 한쪽이 죽는 것밖에 자유로워질 길이 없어. 그 사람이 죽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을 죽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그는 가족력 있는 암에 걸렸어요.”
노아는 그 일을 모두 지켜본 사람처럼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당신에게 고마워했을 거예요. 허울뿐인 가족이라고 해도, 여기저기 다 해진 지붕이라고 해도, 하늘 아래 아무것도 없이 서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특히 죽음 앞에서는요.”
“죽음이 어떤 건지 알아?”
이마치는 영원히 젊은 그 청년을 놀리듯 물었다.
“알죠. 그건 고장난 엘리베이터 같은 거예요. 깊은 어둠 속을 한없이 하강하다가 마침내 쾅, 부서져버리는 거요.”
머릿속에 떠오른 강렬한 이미지에 사로잡혀 이마치는 한동안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응답 없는 집들을 거쳐 41층 무렵까지 올라왔을 때 갑자기 누군가 우다다 발소리를 내며 위에서 내려왔다. 이마치는 그애가 전날 마주쳤던 43층에 사는 딸, 준희인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마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애를 잡았다.
“얘, 괜찮니?”
준희는 우뚝 멈춰 서서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애는 그녀의 손을 잡아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노아가 무슨 참견이냐는 듯 눈치를 줬지만, 이마치는 못 본 척 딸애 옆에 계속 서 있었다. 어린 딸은 돌연 울음을 그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60층 할머니 맞죠?”
그애가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에 이마치는 흠칫 놀랐다.
“그래. 맞아.”
“폭로할 게 있어요. 저희 엄마가 누군지 아시죠? 우리가 겪은 일을 전부 다 아시겠죠? 실종사건 말이에요.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 동네에선 길가의 개들도 날 알아봐요.”
“난 네가 누군지 모르는데.”
멀찌감치서 지켜보던 노아가 말했다. 준희는 노아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아저씬 누구예요?”
“내 아들이야.”
즉흥연기에서 합을 맞추듯, 이마치는 노아를 향해 눈을 깜빡해 보였다. 준희는 맹렬한 눈빛으로 그들을 번갈아 보더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희 엄마는 애인이 따로 있어요. 불륜 관계죠. 아빠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묵인하며 사는 거예요. 그런 지 십 년도 넘었어요. 그러면서 자기들에게 나를 쥐락펴락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는 증오심에 이를 갈듯 말했다.
“수학여행은 가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신청서에 사인을 하더니 절 마음대로 보내려고 해요. 내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불안하다나요? 일주일 내내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는 날이 더 많으면서, 우습잖아요? 갑자기 왜 어깃장인가 했더니 엊그제 애인과 헤어진 거였어요.”
준희는 코웃음을 쳤다.
“저는 그 아저씨를 잘 알아요.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요. 엄마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게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모든 걸 각성했는지, 미국으로 떠난대요. 한마디로 차인 거죠. 그래서 저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예요.”
“어른들 일을 네가 어떻게 다 알아?”
이마치가 물었다.
“왜 몰라요? 전 태어나면서부터 그 여자를 봤어요. 이 아저씨도 할머니가 숨기는 걸 다 알걸요? 안 그래요?”
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전 항상 혼자예요. 아무도 저를 끼워주지 않는다고요. 학교에서 하루 여섯 시간이야 그럭저럭 견딘다고 해도, 수학여행까지 가서 온종일 그 꼴을 당할 수는 없어요. 그건 고문이라고요.”
“엄마에게 직접 이야기해보지 그러니.”
이마치는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네가 고통받는다는 걸 알면 달리 생각하실 거야. 대체 너한테 왜 화풀이를 하겠니? 잠깐 봐도 널 엄청 사랑하시는 것 같던데.”
“엄마는 다른 사람 앞에선 진짜 얼굴을 안 보여주니까요. 하지만 난 알아요. 아무도 없을 때 드러나는 엄마의 진짜 얼굴을 안다고요. 그래서 날 미워하는 거예요. 내가 모든 걸 다 봤기 때문에.”
“네가 뭘 봤는데?”
이마치는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계단 아래로 달려가버렸다.
“저애가 어디로 가는 걸까.”
이마치는 노아에게 물었다.
“어디로도 못 가요. 건물의 문이 잠긴 거 봤잖아요.”
“안됐네. 영원히 집을 떠나지 못한다니.”
이마치는 아이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렇게 걸핏하면 화를 내고 못되게 굴더니, 제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는 힘이 다 빠져서 고분고분해지더라고. 그때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딴사람이 된 것 같았어. 다음해 그앤 집에서 아주 멀리 있는 대학으로 갔어.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죠.”
“내가 자길 미워한다고 생각하다니…… 어른이든 아이든 부모를 미워하는 건 괜찮아. 아니, 당연한 거지. 하지만 부모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건, 그건 좀 다른 문제야. 그러면 사람이 병들거든.”
“딸을 미워했어요?”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는 없어. 상상력 부족의 문제일 뿐이지.”
“상상력이요?”
“누구나 자기가 아는 세상 안에서만 살아가니까…… 내가 아는 것, 내가 본 것, 내가 받은 것을 줄 수밖에 없는 거야. 자식에게 그 이상의 것을 주고 싶어도 그게 뭔지 몰라. 아니, 상상도 할 수가 없지. 내 손에 있는 것 말고는 줄 게 없어.”
“하지만 이마치씨는 배우였잖아요?”
“배우의 상상력은 가짜 삶에 국한되지. 사람들에게 패턴화된 삶을 보여주는 거야. 하지만 진짜 삶에 패턴 같은 건 없잖아.”
이마치는 자신의 텅 빈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는지, 나는 늘 그게 궁금했어. 영화처럼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타인의 삶 전부를 말이야.”
이마치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노아가 다가와 팔을 잡으라고 했지만, 점잖게 거절했다. 이제 혼자서도 걷기가 어렵지 않았다. 말없이 계단을 오르고, 벨을 누르고, 기다리고, 또다시 계단을 오르고, 벨을 누르고, 기다리면서 이마치는 생각했다. 딸애가 본 그녀의 얼굴에 대해서.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볼 수 있는 건 타인의 얼굴뿐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마치는 어쩔 수 없이 그애들의 얼굴에 비치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의 유년, 그곳에서는 아직 진물이 흘렀다. 악취가 진동했다. 그녀는 그 일을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그 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이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을 때마다, 전속력으로 달려와 그녀에게 안길 때마다 의아했다. 이애들은 어쩌면 이토록 천진하단 말인가. 어떻게 이토록 떳떳하단 말인가. 이마치는 그애들을 공주와 왕자처럼 대해주고 싶다가도, 다음 순간 매섭게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냉기가 그녀를 떨게 했다. 밤마다 그애들은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으며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하루에 단 한 점 주어지는 어머니의 몸에 탐욕스럽게 엉겨붙었다. 그녀는 잠결인 척 뒤척이며 어떻게든 팔을 빼냈다. 아이들의 향기를, 아이들의 체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을 요구하면서, 포옹을 기대하면서 그녀를 휘감는 그 손길이 뱀처럼, 가시덩굴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자신에게 닿지 못하도록 몸을 웅크리고 멀리 피했다. 그런 그녀를 가장 혐오했던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5. 노아
계단을 올라 60층까지 오면서 이마치와 노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마치는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재빨리 노아가 붙잡는 덕에 바로 설 수 있었다. 노아는 이제 그만 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온 뒤 이마치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모래자루를 매단 것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종일 건물을 오르내리며, 사라졌던 기억이 새살 돋듯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생생한 감각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문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깊은 저음의 중얼거림. 쿵, 쿵,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
이마치는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노아는 의자를 딛고 올라가 높은 찬장을 뒤지고 있었다.
“라면을 찾으려고요. 그걸 먹으면 힘이 나실 거 같아서…… 어제도 그랬잖아요.”
“그만 내려와. 내가 해줄게.”
노아는 얌전히 식탁 앞에 앉아 기다렸다. 이마치는 라면을 끓였고, 그들은 전날처럼 마주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라면을 먹었다. 노아는 정말 먹성이 좋았다. 오래 굶은 사람처럼, 조난에서 구조된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기 바빴다.
“노아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지?”
이마치는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저 스스로요. 당신의 기억을 잘 살펴본 뒤, 그중 하나를 골랐어요.”
“노아?”
이마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아는 유일한 노아는 극장에서 본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엄청난 비와 커다란 배, 수많은 동물이 스크린에서 줄줄이 쏟아지는 것 같던 그녀의 첫 영화.
“그 영화, 큰비가 내려서 인류가 몰살되는 일종의 재난 영화였지. 노아를 아는 사람들, 그의 가족들만 배에 타서 살아남아.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도 살아남지. 카메라 무빙 때문에 극장 안이 배처럼 느껴지거든.”
거대한 배가 물위에서 떠오르는 순간, 이마치는 속이 울렁거려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정말로 뱃멀미를 하는 기분이었다. 노아 역할을 맡은 남자배우의 파란 눈은 어린 이마치의 마음까지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 땅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말하던 우울한 얼굴의 남자. 하얀 거적때기 같은 걸 두르고 있는데도 그에게서만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전부 특수효과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짓다니, 대단한데.”
이마치는 싱긋 웃으며 노아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줬어. 데뷔할 때 소속사에서 이름을 바꾸라고 성화였는데, 내가 끝내 우겨서 지켰지. 내 인생에 아버지가 있었다는 흔적은 그것뿐이니까.”
“딸과 아들의 이름은 누가 지었죠?”
“딸애 이름은 언니 이름을 따서 내가 지었어. 아들을 낳았을 때는 남편이 직접 짓겠다고 하더니 작명소에서 정민이란 이름을 받아오더군.”
이마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그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어. 아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남편이 용인하지 않더라구. 싸우고 싶지 않아서 단념했지. 나 혼자만 한동안 다른 이름으로 그애를 불렀던 거 같아. 그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그애를 보자마자 떠오른 이름이 있었는데.”
비교적 수월했던 첫 출산에 비해 둘째는 난산이었다. 그녀는 몸이 수 갈래로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비명을 내지르는 그녀를 보고 둘째 엄마가 맞냐고 의사가 연신 핀잔을 줬다. 뭐라 대꾸하기 전에 아기가 빠져나왔다. 그녀는 온몸의 신경을 울리는 고통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의사는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팔에 아기를 안겨주었다. 그애의 몸은 따끈한 크림 같았다. 이대로 서로의 피부가 달라붙어 한몸이 된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강렬한 체험이었다. 아기의 냄새, 바람과 소금과 신선한 날것의 냄새가 그녀를 감쌌다. 그애는 작고 잘생긴 아기였다. 밤톨 같은 얼굴에 오뚝한 코와 눈썹이 감탄스럽게 예뻤다. 이마치는 처음 그애를 보자마자 언니를 떠올렸다. 놀랍도록 언니를 닮은 아기. 그 아기를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기회가 있었다면 바로 그 순간이었을 거라고 이마치는 종종 생각했다. 과거에서 벗어날 기회, 완전히 새로워질 기회. 그때 분명히 그녀 앞에 문이 열렸었다. 하지만 그녀는 못 빠져나갔고, 문은 금세 닫혀버렸다. 간호사들은 서둘러 아기를 데려갔다. 이마치의 몸은 금세 차갑게 식었다.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환희는 어안이 벙벙할 만큼 순식간에 경멸로 바뀌었다.
정민은 예민한 아기였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있지를 않았다. 울음소리는 얼마나 크고, 또 바둥거리는 힘은 얼마나 센지, 아이를 잠시만 안고 있어도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젖병 거부로 아이에게 황달이 오고 나서 이마치는 어쩔 수 없이 모유 수유를 시작했다. 타고나기를 젖이 말랐다는 가슴에 유선을 뚫는 마사지를 받았고, 이틀을 꼬박 고열로 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젖을 빨았다. 이마치는 그때마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목이 마르고 입술이 부르트더니, 발뒤꿈치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애는 밤새 그녀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돌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돌면 왼쪽으로 필사적으로 젖을 찾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마치는 하늘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아이를 밀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뺨을 때리지 않기 위해서, 둘 중 누군가의 목을 조르지 않기 위해서.
이마치는 도망치듯 일터로 떠났다. 출산한 지 한 달도 안 된 몸으로 한여름에 종일 에어컨을 틀어놓은 촬영장에서 겹겹으로 숄을 두르고 버텼다. 다들 그녀더러 지독하다고,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고, 천생 배우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도망칠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집에서 종일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도, 등뒤에서 어른거리는 남편의 존재도 숨이 막혔다. 그나마 촬영장에서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은 종일토록 나지 않았다. 해가 기울면 마음이 울적해졌다. 퇴근길엔 늘 발을 질질 끌듯 걸었다.
“이 집에 유령이 있다는 거 알아?”
이마치는 노아에게 라면을 더 덜어주면서 말했다.
“아까 나는 그가 온 줄 알았어. 찬장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유령이요?”
“그래. 이사온 날부터 매일 아주 시끄러웠지.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병원에 다녔던 거야.”
“그가 지금도 여기 있나요?”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아니, 지금은 없어.”
“보이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알아요?”
“그게 올 때마다 물냄새가 나거든. 민물 아닌 바닷물 냄새.”
“바다에서 죽은 유령인가보죠?”
“모르겠어. 내 이야기만 했지, 유령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마치는 입안 가득 면을 빨아들이는 노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내가 돌아간 뒤에도 이집 저집 먹을 걸 구하러 다닐 것 같은데.”
그는 볼이 불룩해진 얼굴로 웃었다.
“설마요. 전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길 뿐이에요.”
이마치는 식탁의 노란색 불빛 아래 빛나는 노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는 점점 더 먹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방송국에서 까마득한 후배로 만났더라면, 맛있는 것을 정말 많이 사줬을 텐데. 듣기 좋은 목소리에 키도 헌칠하고 얼굴선이 남자다워서 배우를 하기에 좋았을 것이다. 그의 등뒤는 하얀 벽이었다. 무대 위의 그를 상상하다가 이마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여긴 그림자가 없네.”
노아는 뒤돌아 벽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벽에 그림자가 돋아났다. 얼룩 한 점 없는 하얀 벽에 검은 실루엣이 새겨지는 것을 그들은 동시에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