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기 얼마 전부터 그녀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그간 미사에 빠진 적이 없었는데 한순간에 그리되었다. 먼저 마음을 접은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그녀의 계속되는 믿음을 존중했지만 자신은 갈 수 없다고 했다. 이해했다. 남편이나 그녀에게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고 자비 없이 손녀를 데려간 신이 제격이었다. 마음 둘 곳 없는 중에 바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녀는 계속 성당에 나갔다. 미사 외에 보육원 봉사도 가고 기부금 마련을 위해 장터에 내놓을 김치와 잼을 만드는 일도 적극 거들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을 다르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전적으로 그녀만의 시간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권리였다. 남편에게 털어놓지 않은 것은 그편이 그에게 나았기 때문이었다. 다 늙은 나이에 아내의 비밀을 알아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녀는 성당 대신 경마장에 갔다. 경마장이라니. 남편이 들으면 이런 이런, 하며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힘껏 내저었을 것이다. 성정이 고요하고 점잖은 남편이 당황할 때면 하는 버릇이었다. 신자가 그런 곳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신부님 때문에 하게 됐다. 얼마 전 농담하기 좋아하는 한 보좌신부님과 사담을 나누다가 경마장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경마장에 가면 사람들이 죄다 얼굴을 찡그리고 손을 치켜올린 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러는지 알아요? 신부님이 그녀를 비롯한 신도들에게 물었지만 답을 바란 게 아닌 듯 스스로 답했다. 기도하는 거죠. 그게 그 사람들한테는 기도니까.
신부님이 경마장도 가세요? 한 신도가 웃으며 물었고 신부님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세속을 겪어봐야 평화를 아는 법이라고 대꾸했다. 주님이 성당으로만 오십니까, 경마장에도 임하시죠. 두 손을 맞대야만 기돕니까, 바라고 원하면 다 기도지. 하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서 그녀는 그 말을 흉내내기를 즐겼다. 바라고 원하면 다 기도라는 말을 따라 하다보니 평화를 위한다면 무슨 짓이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명 화상경마장이라 하는 장외 발매소는 그녀가 자주 다니는 청과 시장 인근에 있었다. 하루는 사과를 사려다가 우중충한 빛깔의 옷을 입은 일군의 중노년 남자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신호가 바뀌자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하도 다급해 보여 건너편에 사고라도 났나 싶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가게 주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저리 서둘러 가면 뭐해요. 남들보다 일찍 개털이 되겠죠.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가 사과를 사서 돌아 나오는 길에 저절로 알게 됐다. 횡단보도에 서니 그들이 다급히 가려던 곳이 어디인지가 보였다. 바닥에는 경마 정보지가 잔뜩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걸 한 장 주워 사과가 든 비닐봉지 안에 넣고 남자들이 간 적벽돌 건물 삼층으로 올라갔다.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불콰한 얼굴빛이 그녀를 붙들었다. 하나같이 들뜬 표정이었는데 성공을 확신한다기보다 그저 빠져들 곳이 필요한 얼굴이었다. 그들을 보자 그녀는 자기의 삶에서 누락되어 있던 것을 찾은 기분이었다. 신부의 말대로라면 그녀에게 평화가 없는 이유는 세속을 겪지 않아서인지도 몰랐다.
대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가진 돈을 모두 잃고 나서야 그곳을 떠났다. 홀가분했다. 인생이 숨기고 있던 열쇠를 발견한 듯했다. 열쇠로 열어젖힌 문이 대단찮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다 잃은 것도 아니었다. 사과가 든 봉지는 그대로 그녀의 손에 남았다. 그것뿐이었는데, 아무것도 잃지 않은 듯하고 심지어 뭔가 얻은 기분이 들었다.
시장에서 사온 사과를 다 먹을 무렵 그녀는 다시 경마장에 갔다. 이번에는 과일가게에 들르지 않고 바로 갔다. 경마장에서 모두 잃었지만 역시 마음이 가벼워졌다. 삶에 다른 장소가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가게에서 사과를 샀다. 단맛이 덜하고 비쌌다. 다음번에 경마장에 갔을 때 입구를 빠져나오는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와서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당연히 거저 주는 것은 아니었고 깜짝 놀랄 이율을 댔다. 이런 식으로 대가를 치르는 일이 반복되자 비로소 그녀는 깨달았다. 세속이 주는 평화는 단 한 번뿐이었다.
그녀는 비밀을 평생 간직할 생각이었다. 딸한테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고 고해성사도 결코 하지 않았다. 자신이 경마장에서 헛된 기도를 하는 사이 남편이 쓰러졌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음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어느 인생에나 그런 시간이 있기 마련이라고 가까스로 생각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그러자 인생의 마지막이라 여기는 순간도 더디게나마 지나간다는 걸 알게 됐다. 다시 또 그런 때가 온다는 것도. 다리를 놀릴 수 없어 혼자서는 화장실도 뜻대로 가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마지막에 가까운 순간 같았다. 평화와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딸애의 부축을 받아 겨우 화장실 변기에 앉고 나면 크나큰 공포가 밀려들었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최소한의 위생을 지킬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생리 현상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대소변을 보고 나면 다른 사람이 엉덩이를 닦아주거나 소변을 보려고 플라스틱 관을 몸에 삽입하는 일, 항문과 요도가 기능을 잃어 몸에 주머니를 달고 거기다 대소변을 봐야 하는 행위는 전부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오늘따라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며 그녀는 멍하니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다. 딸이 환경을 위한다고 변기 온열 시트를 꺼버려 차츰 엉덩이가 저려왔다. 문이 잠긴 건지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급기야 그녀는 화장실에 갇힌 사람처럼 문을 두드리고 고함을 쳤다.
늦게 나타난 딸은 전화통화를 하느라 듣지 못했다고 했는데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문은 안에서 잠그게 되어 있으니 그녀 스스로 열어야 한다고 했다. 딸은 피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여러 차례 문 여는 법을 가르쳤다. 몸으로 밀지 말고 ‘돌리라’고 했다. 뜻대로 안 되어 당황한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결국 딸이 열쇠로 문을 열어주었다. 딸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 간혹 그녀는 깜빡했다.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같은 걸 또 물었거나 오래전에 겪은 일임을 알아차렸다. 딸의 지친 표정을 보고 깨닫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잊어버린다는 것이 괴로웠다. 더 괴로운 건 지금의 불안함조차 곧 잊을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너무 늙었고 겁을 먹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다. 거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신에게로 죽음이라는 물결이 점차 밀려오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아직 그 물결에 몸을 맡기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런 그녀를 조소하듯 다리의 통증이 발작적으로 찾아왔다. 시기와 강도를 예측할 수 없는 통증 앞에서 그녀는 무력함을 느꼈다. 몸에 내재된 화기는 내키는 대로 그녀의 몸을 긋고 지나가고 검불처럼 그녀를 달궜다. 시시때때로 무겁고 따가운 침봉을 떨어뜨렸다. 딸이 그녀의 통증을 가리켜 말한 대로 몸속에 불덩이가 들어와 자리를 튼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 나이가 되도록 통증을 대하는 일에 능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해 전 그녀는 낡은 김치냉장고를 내다버리려고 혼자서 들으려다가 허리를 다쳤다. 극심한 통증에 곧장 집 근처 정형외과로 갔지만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어보고는 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물리치료를 받고 진통 주사를 맞으니 다소 괜찮아졌지만 밤이 되자 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며칠간 치료를 받아도 나아지는 기미가 없어 다른 병원에 가봤다. 그곳에서도 뼈는 괜찮다고 했다. 여전히 차도가 없어 한의사도 만나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병명을 찾아 병원을 전전하는 동안에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통증의 정확한 원인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그게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라도 있는 것처럼. 차라리 의사가 모니터 속 사진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세포 변이를 설명하거나 추가 검사를 지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몸을 검사해 나온 여러 수치를 죄다 ‘나이가 든 탓’이라고 해석하는 것 말고 특정한 수치를 꼭 집어서 문제삼았으면 했다. 예약 후 얼마간을 기다려 대학병원에 갔을 때에야 의사는 엠알아이까지 찍어보고서 골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척추뼈 중 일부가 손상되면서 부서진 뼛조각이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어 통증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두어 달쯤 지나면 차츰 잦아들기는 할 텐데, 비수술적 치료에도 호전되지 않는다면 척추 압박골절이 발생한 부위에 골 시멘트 삽입술을 고려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그녀는 안도했다.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 치료법을 찾아내서는 아니었다. 비로소 자기가 아는 몸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다행이라고, 그녀가 작게 말하자 의사가 호응하듯 운이 좋다고 했다. 그만하길 다행이라는 뜻 같았다. 그러면서 의사는 이렇게 다쳤다가 거동을 못하고 와병 생활로 이어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운이 좋다니. 이런 통증을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하긴 의사가 뭘 알겠는가. 제 몸이 아파봐야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겨우 아는 법이다.
그녀가 여러 날을 허비하며 병원을 전전하고 얻은 결론은 결국 뼈가 부러졌다는 사실뿐이었다. 병명을 알았다고 해서 통증이 약해지거나 가시지는 않았다. 당장 통증을 완화할 명확한 치료법을 찾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놓고 아팠다. 더는 통증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아파야 할 때는 기어이 아프고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는 그녀에게 딸이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요. 이제는 다 지나갔어요.
지나갔다니. 그녀는 자신의 통증을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딸이 서운했다. 그녀가 한마디할라치자 딸은 아이에게 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친 말투로 달랬다. 엄마, 또 그런다.
딸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는 즉각 쉬운 방법을 택했다. 다시 인상을 썼다. 보통의 경우라면 딸은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딸은 질문을 관뒀다. 그녀가 통증을 호소해도 정말 아픈 것인지 의심하는 눈빛을 보이는 게 다였다. 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체 메시지로 그녀가 입원 소식을 전하자 친구들은 걱정하며 딸 편에 냉동 곰탕이나 전복죽 같은 것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바빠졌다. 그녀가 아픈 만큼 어딘가 아프거나 심지어 더 아팠다. 패키지여행을 떠나거나 잡다한 집안 대소사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나중에는 그녀에게 아직도 아프냐고 묻거나 아예 아픈 적 없던 사람 취급해서 그녀로 하여금 통증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인지 붕대와 거즈를 더는 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녀는 홀가분한 동시에 난데없는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아픔을 누릴 권리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상처가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 전해지지 않을까봐 조바심이 났다. 근육이 죄다 빠져 종잇장처럼 너덜거리는 종아리를 부축받으려면, 누군가에게 떠밀려 다리를 밟히지 않으려면 아파 보이는 건 이득이었다. 늘 가까이서 그녀를 지켜보는 딸조차 그녀의 아픔을 제대로 모르니까. 다리가 가벼워졌지만 여러 겹의 거즈와 붕대 덕분에 통증을 과시하지 않아도 아픈 사람처럼 보이던 행운과 멀어졌다. 거즈와 붕대가 없다고 통증이 가시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더는 아파 보이지 않음으로써 이제 통증은 본래의 속성대로 그녀 혼자만의 것이 되었다. 가눌 수 없는 통증을 저 혼자만 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