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은 몸에 구멍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의사가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구멍이라고. 메워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도 했다. 그녀는 의사가 상처나 손상이라고 하는 대신 ‘구멍’이라고 말한 것을 인상적으로 기억해뒀다. 물론 의사는 다른 말도 했다. 피부가 ‘익었다’거나 신경조직이 ‘죽었다’ 같은 말. 의학적 표현은 아니지만 덕분에 그녀는 바로 알아들었다.
구멍이 생긴 곳은 정강이였다. 보온병이 넘어지면서 끓는점 부근에서 온도를 유지중이던 물이 그녀의 다리에 쏟아졌다. 그녀는 즉각 비명을 내질렀다. 세상에. 살면서 비명을 지를 일이 또 생기다니.
딱 한 번 그렇게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수십 년 전, 여섯 살이던 딸아이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순식간에 도로로 뛰어들어서였다. 아이는 이삿짐 용달차 뒤에 매달린 곰 인형을 가까이에서 보려고 돌발적으로 달려나갔다. 마침 신호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질주하던 차들이 멈춰 서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인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녀가 딸을 끌어안고 인도로 올라섰지만 딸은 품에서 벗어나려고 계속 버둥댔다. 그녀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안도하기보다 일어났을 법한 일을 상상하며 겁에 질렸다. 그 바람에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고 덩달아 겁먹은 아이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두려워한 이유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품에 안긴 딸이 결코 엄마를 부르며 울지 않는다는 것.
그녀는 그 일을 잊지 못했다. 아이가 자신의 손을 놓고 도로로 뛰어든 순간 느낀 공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 그 일은 아이가 자신으로부터 기어이 멀어지리라는 강력한 점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그런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때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두려움과 함께. 딸이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사진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하기에 그녀가 그 나이에 남자들이나 찍는 사진을 배워서 어떻게 먹고살려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랬다. 그때 딸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신호 대기나 정체 없는 자동차전용도로를 맨몸으로 질주하는 표정으로.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자기보다 한참 나이 어린 작가 밑에서 보조로 일하게 된 딸이 느닷없이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그녀는 딸에게 일은 안 하고 집에서 살림만 할 생각이냐고 핀잔을 늘어놓았다. 딸은 잠자코 쳐다봄으로써 그녀가 일관되지 않은 기준으로 비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했다. 묵직한 낭패감이 느껴지면서 여섯 살의 딸이 자신에게서 분리될 때의 두려움이 떠올랐다. 딸은 그때부터 줄곧 도로 한복판에 홀로 서 있기를 선택한 것 같았다.
화상 부위를 살펴본 의사는 대뜸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가 주저하자 의사는 수긍하듯 나이가 있어 전신마취는 부담이 크니 얼마간 버텨보자고 말을 바꿨다. 운이 좋으면 이식 범위를 최소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버티는 건 자신뿐이었으므로 그녀는 청유형 어미가 부적절하게 느껴졌지만 당장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여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나중에야 그녀는 느닷없다 여긴 의사의 말이 딸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임을 깨달았다. 딸이 그녀를 돌봐야 할 테니까.
처음 의사는 회복에 서너 달 정도 걸릴 거라고 했으나 점차 거리낌없이 그 기한을 연장했다. 칠십대인 그녀의 연령을 고려하면 재생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치료 기간이 단축되거나 이식 없이 회복될 가능성은 일축했다. 다리 부위이다보니 원하는 대로 움직이다가는 예후가 나빠져 이식 범위가 커질 것이라는 경고도 했다. 고령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소견이었다.
절대안정을 요하라는 엄포에 비해 의사의 처치는 놀랍도록 간단했다. 화상 부위에 드레싱을 하고 약제가 도포된 밴드를 부착하고 그 위를 마른 거즈로 여러 겹 감싼 후 붕대를 친친 동여매 반깁스 형태로 고정했다. 그렇게 하니 피부가 ‘익었다’거나 ‘죽었다’기보다 관절이나 뼈가 부러진 듯 보였다. 입원해 날마다 치료를 받았지만 통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가시 돋힌 불덩이를 다리에 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게 치료의 전부라니. 그녀는 매번 짧고 간략한 처치를 불만스러워했으나 의사에게 불평하지 말라는 딸의 은근한 압박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화상 부위에 약제가 닿을 때 느껴지는 쓰라림과 살갗이 벗겨지는 극심한 통증에 잇새로 끝없이 신음이 새어나왔다.
의사의 권고대로 일상에서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자 퇴원 후 딸네 집에 머물기로 했다. 휠체어에서 내려 딸의 부축을 받아 들어선 집은 허둥지둥 몸만 빠져나온 듯 살림살이가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었다. 물주전자와 자국 난 유리컵이 거실 바닥에 그대로 놓인 게 눈에 띄었다. 그녀는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것을 싫어했는데, 딸네 집 물건들은 원래 자리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딸은 작은방의 책상을 벽 쪽으로 바짝 밀어붙이고 그녀를 위해 일인용 메모리폼 매트를 준비해두었다. 주로 딸이 작업할 때 사용하는 방이었다. 딸은 비교적 안정적인 디자인 회사를 다니다가 관두고 그 방에서 무슨 일인가 한다고 했다. 사진을 찍던 애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런 일이 생계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지, 일을 한다면서 왜 내내 틀어박힌 기색인지 그녀는 아는 바가 없었다.
성년이 된 후 딸의 선택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일식집에서 처음 만난 사위는 긴장해서인지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하자 사위에게 초대한 사람의 성의를 무시한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그녀가 못마땅해하는 걸 알아채고 친구들이 거든 것이었다. 딸이 사위에게 과분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생각에 친구들이 동의해주는 듯해서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다음번 한식집에서 만났을 때 사위는 일전의 부진을 만회하려는 듯 반찬 하나 남김없이 죄다 접시를 비웠다. 그녀는 이번에는 나서서 친구들에게 사위가 집안이 거덜날 지경으로 먹어댔다고 투덜댔다. 친구들과 함께 웃는 중에도 그녀는 왜 사위가 못마땅한지 말하지 않았다. 사위는 결혼 시기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말하자면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이 먼저 꺼낼 때까지 기다릴 정도로 참을성이 있었다. 이혼조차 딸이 말문을 열게 했다. 바로 그 점이 그녀가 여태 사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였다. 무엇이건 동의만 하면 된다면 세상이 너무 수월하지 않은가.
동년배에 비해 늦게 얻은 딸은 그녀만큼이나 독립적으로 자랐다. 대학 입시를 치른 후 여느 아이들이 어른이 된 것에 취해 섣불리 놀고 즐기던 시기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더니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뒀다. 딸은 경제적 독립을 정서적 자립과 동일하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등록금을 벌면서부터 제 인생을 그녀에게 이해시키는 일을 관두었다. 이제껏 부모를 의지해온 이유가 경제적 지원이 필요해서라는 뜻 같았다. 그녀는 종종 딸의 성향을 자랑삼아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사람들이 기특히 여겨야 서운한 마음이 누그러졌다. 오래 참지는 못했다. 딸의 결정에 느긋한 태도를 취하다가 종내 트집잡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는 뻔했다. 딸은 점점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딸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딱 한 번 출산했다. 손녀는 내내 앓다가 일곱 살에 세상을 떴다. 딸은 손녀의 유일한 행운이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모두 부모가 지켜본 것밖에 없다고 자조했다. 이후 한동안 딸을 만날 수 없었다. 어쩌다 전화통화를 하게 되면 딸은 세상 모든 것에 분노하고 억울해하며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럴 만했다. 딸은 비관하고 자학하고 애통해해야 마땅했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딸은 종종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쏟아냈다. 그만 마음을 추스르라는 그녀에게 자식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아느냐고 쏘아붙였다. 그녀는 그러는 너는 어린 자식을 앞세운 딸을 둔 적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매번 눌러 참았다. 하지만 딸에게도 시간이 흘렀다. 괜찮아진 듯 보였다. 텔레비전을 보고 깔깔대고 웃거나 계절에 맞춰 피는 꽃이나 맑은 하늘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은 후 스스로를 탓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퇴원하고 처음 그녀는 딸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러주기를 부탁했다. 딸은 대번에 곤란하다고 했다. 치매 걸린 노견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살구라는 이름의 그 노견은 집 아닌 다른 곳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그녀 역시 집 아닌 다른 장소에서 잠을 못 자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점에서 살구가 우선시되었다.
며칠 지내고 보니 살구는 익숙한 집에서도 잠을 잘 못 잤다. 그녀가 쿠션을 겹쳐 만든 거치대에 다친 발을 올려두고 작은방에 누워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면 살구가 거실을 맴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오래 자지 못한 건 더위 때문이기도 하고 살구 때문이기도 했다. 오른쪽 안구가 함몰되어 한 눈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살구는 자그마한 몸으로 허공에 시선을 두고 걸음을 옮겼다. 예전에는 딸이 외출 준비를 하면 금세 알아차리고 딸의 신발 옆에 서 있던 살구는 이제 하루의 대부분을 방석에 누워 지내다가 한밤이 되어서야 겨우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어두운 거실을 배회했다.
그녀는 살구 곁에 쪼그려앉아 기다려줬다. 살구야,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자. 살구는 느린 걸음을 계속하다가 그녀가 연신 이름을 부르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함몰된 눈이 너무 깊고 검어서 그녀는 슬쩍 살구를 피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면 인생이 길기만 할 뿐 남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간혹 살구를 억지로 끌어안고 속삭였다. 살구야, 먼저 가. 내 딸 그만 고생시키고, 응? 살구는 못 들은 척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댔다. 어둠 속을 배회하다가 가구에 부딪혀 낑낑거리는 살구를 볼 때면 그녀는 인생에 대한 산수를 해보게 됐다. 딸에게 의탁하는 처지가 된 상황을 납득할 수 없을 때도 삶에서 받은 걸 애써 헤아렸다. 그러지 않으면 끝없이 내준 것만 떠올랐다. 인생은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언제나 가져간 것이 더 많았다.
가없는 산수는 기어이 남편의 죽음에 가닿았다. 남편은 몇 해 전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그녀가 성당에 다녀온다며 나간 사이 홀로 있던 남편이 거실에서 쓰러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운 나쁜 사람들이 그렇듯 남편에게는 더는 기회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한밤이면 그녀는 남편이 쓰러져 있던 자리를 멍하니 보며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 말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와중에도 그녀는 비밀을 삼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날 성당에 가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