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지숙에게 연락해보기로 했다. 인근에 살면서 매일같이 서로의 집을 오갔는데, 지숙이 시니어스 타운에 입소하면서 만나지 못했다. 지숙은 그녀의 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버타운이라고 하는 대신 입주사의 지칭대로 시니어스 타운이라고 말하며 그곳의 시설을 자랑했다. 보증금과 월 생활비가 상당해 보통의 재력으로는 입소가 어려웠는데, 대기까지 걸어둔 끝에 일 년 반 만에 겨우 남편과 함께 입소할 수 있었다며 기뻐했다. 세탁과 청소 등의 가사 서비스가 제공되고 영양사에 의해 조율된 식사가 매 끼니 준비된다고 했다. 정비된 공원 안에 산책로를 품은 인공 호수가 있고 계절마다 조경사가 방문해서 침엽수를 둥글게 깎는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아침이면 상주 의사가 순회하는 게 믿음직스럽다고. 지숙이 생각하기에 질병은 노화나 노쇠라기보다는 재앙이나 단죄에 가까웠다. 그녀는 즉각 그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지적했다. 손녀를 떠올리면 질병은 그저 신의 가차없는 우연에 불과했다. 지숙은 그녀의 반발을 귀담아듣지 않고 경제 수준이 엇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있어 말실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고 덧붙였다. 그 말에 발끈한 그녀는 누군가 죽은 자리에 네가 들어가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쏘아붙여 지숙을 화나게 했다.
하지만 지숙과만 나눌 수 있는 얘기가 있었다. 아는 사람 누가 병을 앓다 죽은 얘기, 아는 사람 누구의 자식이 사업을 망쳐 집을 날리고 목숨을 끊으려 약을 먹었다는 소문, 아는 사람 누구는 외식을 나가 오줌통을 달고 테이블 사이를 누볐다는 험담 같은 것들. 딸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대번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엄마는 사람 죽은 얘기가 재밌어요? 재밌기는. 딸은 그게 두려워서 하는 얘기인 줄 몰랐다. 하긴 그걸 알면 더는 젊은 게 아니었다.
지숙과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숙이 전화를 받으면 서로 민망하지 않게끔 누군가의 투병 얘기라도 지어낼 생각이었다. 거짓말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해도, 누군가 암에 걸렸다거나 뇌질환으로 고생한다는 얘기만큼 흔한 사연은 없었다. 아직 우리는 괜찮다는 안도감을 공유하려는 게 아니었다. 홀로 살아남아 아는 이의 죽음을 죄다 목도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지숙은 왜 전화를 받지 않을까. 완벽한 시설 안에서 수준 맞는 노인들과 느긋한 오후를 보내느라 외부 연락에 연연하지 않게 된 것일까. 오후에는 각종 학습 시간이 배정되어 있다던데 젊은이가 진행하는 수업을 듣는 재미에 빠진 걸까. 키오스크 체험을 포함한 디지털 수업이나 맨손체조, 미술 수업 같은 것들 말이다. 수업시간에 크레파스나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은 방에 걸어둘 수도 있는데, 지숙은 평생 유명 화가의 판화를 걸어둔 집에서 지낸 미감으로는 마뜩잖은 배려라고 했다. 키오스크 사용법을 배웠지만 밖에 나갈 일이 없어서 써먹을 수 없다고 자조 섞인 투로 투덜대기도 했다.
모자랄 것 없는 곳에서도 아프기는 할 테니 지숙에게 불운의 차례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왜 아니겠는가. 저마다의 삶에는 각자의 통증이 있기 마련인데. 나이가 드니 아픈 사람을 보는 일은 흔했다. 병원에 입원할 일이 잦아서인지도 몰랐다. 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녀는 날마다 우는 여자들을 봤다. 함께 병실을 쓰던 여자들은 냄비에 든 곰탕을 그릇에 따르다가, 뜨거운 만둣국을 부엌에서 거실로 나르다가 사고를 당했다. 급식실에서 일하던 중 기름이 튀거나 쏟아져서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 날 병상을 가린 커튼 뒤에서 누군가 전화통화를 하며 “이렇게 살아서 뭐해”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같은 병실의 환자들이 꼼짝 않고 있는 것을 의식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속으로 타이르듯 대꾸했다.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하지만 그 말을 소리 내어 하지는 않았다. 통증을 참기 힘들어 간호사를 호출해야 하는 밤이면, 마약성 패치를 붙여야 겨우 잠이 드는 밤이면 그녀 역시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어서였다.
병실의 환자들이 커튼으로 병상을 가리고 생활해서, 그녀는 그렇게 말한 환자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침 회진 때 주치의가 그 여자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여자의 낙담한 대답도 들었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도 들었다. 아마도 얼굴과 상반신이 온통 거즈로 뒤덮여 있을 여자는 화상의 경위를 짐작할 만한 설명을 했다. 입원 초반에는 아무래도 전화로 그런 말을 자주 하게 됐다. 여자는 간호사의 호출을 받으면 다 들리도록 한숨을 크게 쉬고는 병실의 미닫이문을 꼭 닫고 처치실로 갔다. 처치실은 그녀가 입원한 사 인용 병실 바로 앞이었다. 그녀는 다리를 심장보다 높이 올린 채 침대에 누워 꼼짝없이 처치실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긴 울음소리가 다 들렸다. 치료를 끝낸 여자가 병실로 돌아오려고 이동식 링거 폴대를 끄는 소리가 들리면 다른 병상의 환자들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여자가 다른 사람과 마주치는 걸 내켜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까 때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못 본 척했다.
그녀는 딸에게 그 얘기를 했다.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는 얘기 말이다. 돌이켜보면 삶을 향한 그녀의 유일한 신념은 그것뿐이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도, 남편이 죽어가던 순간 자신은 경마장에서 말을 재촉하려 헛되이 기도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때도, 어린 손녀가 내내 앓다가 세상을 떴을 때도, 딸이 슬픔으로 무너지는 것을 나날이 목격했을 때도 그녀는 살아냈다.
그녀의 얘기를 들은 딸이 작게 한탄하듯 말했다.
그렇죠, 사는 게 중요하긴 하죠.
그 말은 무척 슬프게 들렸다. 병상의 커튼 너머로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상기시켰다. 이미 딸이 전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모르고 지나갔으면 싶은 것까지도 다 안다는 느낌. 딸에게는 삶을 알아차릴 기회가 너무 많았다.
그녀는 딸에게 지숙이 입주한 시니어스 타운의 전화번호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차례 말해준 시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 탓이지만 다행히 몇 가지 특징은 기억났다. 강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 여름이면 공원에 목백일홍이 근사하다는 것, 아침마다 국산콩 두유를 나눠준다는 것 등등. 그녀는 이 나이쯤 되면 친구의 자식들 전화번호도 적어둬야 한다고 농담했지만 딸은 웃지 않았다.
그녀가 재촉하자 딸은 마지못한 듯 인터넷으로 몇 곳의 시니어스 타운을 찾아 그녀에게 보여줬다.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하고 지숙의 이름을 댔다. 몇 번 그러고 나서 딸은 지쳤는지 어디에도 지숙 이모는 없다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불길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고 마음이 두려울 때면 언제나 그러하듯 다친 부위에 통증이 일었다. 그녀가 정강이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자 딸이 그만 좀 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 여기를 봐요.
딸이 흉터를 가리켰다. 그녀의 정강이에는 편자 모양의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시간이 경과했음을 입증하듯 잘 들여다봐야 보이는 상처였다.
이제는 거의 안 보이죠? 그렇죠? 다 나았죠?
딸이 다리를 다친 것은 얼마 전이 아니라 십수 년 전의 일이라고 못박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토록 생생한 통증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니.
하지만 더 놀라운 얘기는 따로 있었다. 지숙이 갑작스러운 암의 발병으로 몇 해 전 죽었다는 것, 그후에도 지숙의 남편은 여전히 시니어스 타운에서 지낸다는 것, 계약된 입주 기한을 채우기 전에는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딸이 다그치듯 쏟아내는 얘기를 듣고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지숙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다시 슬픔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그 시간을 이미 지나왔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녀는 문득 딸의 얼굴이 너무 나이들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엄마가 쉰 살에 죽었는데, 딸의 얼굴은 그 무렵의 엄마와 닮아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아지는 걸 아는 때에 다다른 것이다. 상처가 영영 아물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품고 사는 나이 말이다.
그녀는 다시 시간이 엉망이 되기 전에 딸에게 부탁을 해두었다. 자신에게 다시는 누군가 죽은 얘기를 해주지 말라고. 딸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지숙의 얘기를 들었지만 언젠가는 남편이 죽은 얘기를, 심지어는 손녀가 죽은 얘기를 다시 듣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잊을 테니까. 지금이야 이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여기지만, 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조차 결국 잊을 테니까. 그러라고 무슨 일이든 겪게 하는 게 삶이니까.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몸의 기억뿐이었다. 몸속에 각인된 화기나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작은 뼈의 조각 같은 것들. 어쨌거나 몸에 이상이 생겨도 전혀 놀랄 게 없는 나이임을 감안하면 그저 그런 통증에만 매달리는 게 나을 성싶었다.
그녀는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웠다. 딸의 지친 표정이 마음을 후벼팠다. 자신이 이렇게 오래 세상에 남을 줄은 몰랐다. 어두컴컴한 천장을 보며 그녀는 작게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딸의 이름도 부르고 지숙의 이름도 불렀다. 살구의 이름도 부르고 손녀의 이름도 불러보았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느리게 거실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살구일 것이다. 그녀는 겁먹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지금은 그저 살구 뒤를 따라 걷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