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6물

6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퍼질 대로 퍼져라

 

트럭 문을 열자 차 안에 고여 있던 냉기와 함께 딸기향이 훅 끼쳐왔다. 을주는 찬 손을 비비며 달큼한 향을 들이마셨다. 대시보드 위에 벗어둔 작업 장갑에서 나는 냄새였다. 오전 내내 을주는 그 나일론 장갑을 끼고 잘 익은 딸기를 따서 얕은 대야에 옮겨 담았다. 딸기 농장에서 일하며 매일 딸기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지금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과육의 향을 맡으면 새삼 감미로운 기운에 긴장이 풀렸다. 불행이 찾아왔다가도 마음을 순하게 바꿔 먹고 돌아갈 것 같달까. 을주는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져 애가 탔다. 트럭 밖은 캄캄했고 창유리에는 성에가 끼어 시야가 뿌옜다. 그럴 때면 을주는 강도나 도둑이 트럭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을 위협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왜 그런 망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짓을 저지르는 범죄자에게도 코는 있을 것이다. 코가 있다면 이 딸기향을 맡을 수 있겠지. 콧속의 점막을 은근하게 잡아당기는 달콤한 내음을 맡으면 못된 짓을 10만큼 하려다가도 3이나 2 정도만 하겠지. 을주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 노력했다. 잘 되지 않았다. 시동 장치가 먹통이었다. 한파에 배터리가 방전된 건지도 몰랐다. 을주는 한 손을 가랑이 사이에 찔러넣고, 다른 손으로는 실내등 버튼을 찾기 위해 천장을 더듬었다. 다행히 불이 들어왔다. 전조등도 멀쩡한 걸 보니 전기 문제는 아니었다. 을주는 핸들 가까이에 붙어앉아 다시금 키 박스에 꽂힌 열쇠를 비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이고 오복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오복이를 떠올리자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그 순간 말 울음소리를 길게 내며 시동이 걸렸다. 을주는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조수석 헤드를 붙잡았다. 허리에 찬 공구 벨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전화 알람이었다.

 

<욕+받이> 라이브 한 시간 전.

 

을주는 트럭을 후진시키며 거침없이 흙길을 내려갔다.

 

해변에도 불투명한 먹색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을주는 어슴푸레한 달빛을 올려보며 오복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간조를 기다린 오복이는 질퍽한 흙에 코를 들이밀며 빗살무늬를 그리면서 흘러가는 물위를 첨벙거렸다. 을주는 한쪽 팔을 쭉 뻗은 채 이따금 오복이와 연결된 리시줄에 몸의 무게를 싣고서 오복이의 돌진을 멈춰 세웠다. 바닷물이 조금씩 더 먼 바다로 끌려가고 있었다. 해안가 남쪽에는 붉고 우람한 침식 바위와 함께 그 아래 쌓인 흰 조개껍데기가 둔덕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고, 북쪽에는 울퉁불퉁한 갯바위 너머로 가파른 절벽과 곰솔에 뒤덮인 옥녀산이 버티고 있었다.

옥녀산은 예부터 살쾡이가 많다고 해서 쾡이산, 근방의 음기가 모조리 거기로 모여든다고 해서 태음산이라고도 했다. 그 살벌한 음기를 다스려야 한다며 산중턱에 매부리코처럼 튀어나온 회색 돌덩이를 자지 바위라고 불렀다. 을주가 어릴 땐 만물상회 평상에 모여 앉은 어른들이 자지 바위, 물자지 바위라고 크게 소리치며 떠들었다. 을주는 그런 말을 쓰는 어른들의 생김새를 유심히 봐두었다. 저렇게 생긴 사람은 사는 동안 되도록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바위를 그렇게 부르는 건 돌이나 물이나 그것에게나 죄다 예의가 아니었다. 어려도 을주에겐 지키고 싶은 선이 있었다. 산의 소나무를 밀어 ‘옥녀 치맛길’을 만든다는 것도 을주에게는 선을 넘는 짓이었다. 다행히 그 개발 계획은 관광객 수 대비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무산되었으나 언덕 아래에는 눈이 왕방울만한 옥녀 그림과 옥녀 치마 이야기가 새겨진 표지판이 세워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가 사랑했던 장군에게 버림받고 매일 밤 절벽에 올라 자기 치마폭을 흔들었다는 전설 어쩌고저쩌고. 옥녀와 장군의 달맞이 콘셉트로 꾸미려 했던 해변 전망 카페는 한동안 벽돌과 패널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카페로 리모델링을 시도하기 전에는 어느 돈 많은 타이어 공장 사장이 젊은 애인을 데려가 바람을 피우는 장소였다. 그전엔 철제 울타리 주변에 쥐똥과 찌그러진 맥주 캔이 굴러다니는 빈집으로 또 얼마간 덩그러니 서 있었다.

처음 옥녀산 등성이에 집이 들어선 건 을주가 아홉 살 때였다.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를 내뿜는 소독차처럼 무성한 소문을 꽁무니에 몰고 다니던 무당 아줌마가 억센 해송을 벌채한 땅에 ‘돈지랄 건물’(만물상회 주인인 고모부의 표현이었다)을 지었다. 그 무당은 보름이나 그믐날 해안가 조개무덤에서 ‘정성’을 드릴 때만 띄엄띄엄 그 집에서 자고 갔다. 만물상회 평상에 모여드는 어른들 말에 따르면 그 여자의 눈짓, 손짓에 따라 나라에 도로가 생기고 땅값이 뛰고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가지가 달랑거린다고 했다. 꼭두각시래, 두 내외가 아주. 여의도랑 방송국 꾸정물이 다 그 여자 귓구멍으로 들어간다더만. 일부러 알아낼 필요도 없이 지들이 와서 줄줄이 말하고 간대. 언제 어디에서 내가 이런저런 더런 짓을 할 건데 잘 좀 되게 해달라고. 을주가 기억하는 또다른 이야기는 ‘어부의 딸’이라는 이름의 식당을 하는 이모가 점심 특선 회덮밥에 넣을 깻잎을 뭉텅이로 썰며 했던 말이었다. 이모는 그 여자가 인맥과 돈맥을 끌어모아 바닷가의 제사 터를 아예 사버린 것 같다고 했다. 이제 돈 없고 빽 없는 귀신들은 거기 얼씬도 못할 거라고. 그러자 홀에 있는 난로의 연통에서 재를 긁어내던 이모부가 중얼거렸다. 빽은 무슨, 귀신이 한 많고 사연 많은 게 빽이지. 그 무렵 을주는 끝이 녹슨 부삽과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홀로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며 옥녀산에서 내려오는 쪽찐 머리의 여인을 훔쳐보곤 했다. 위아래가 세트인 새하얀 운동복을 입고 자줏빛이 감도는 선글라스를 쓴 그 여인은 가끔 해넘이 때에 맞춰 바닷가를 산책했다. 옥녀일까? 모래 더미에 도사린 유릿조각처럼 사악하게 빛나는 그 여자의 오라에 을주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자기가 밟는 조개껍데기에 양해라도 구하듯 여자는 아래를 내려보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눈알을 치뜨고 목소리를 바꿔가며 사람을 홀리는 여편네(이모의 표현이었다)라고 하기엔 심하게 아리따웠다. 술집 여자? 아홉 살의 을주는 ‘야하다’는 말과 그 쓰임을 알았지만, 그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아 다른 말을 떠올렸다. ‘관능적’이라거나 ‘고혹적’이라는 말은 아직 저학년 아동의 어휘 사전에 없어서 을주는 자신이 아는 가장 ‘하늘하늘한’ 말을 생각해냈다. 그러고는 자기가 떠올린 그 표현이 자지 바위란 말과 비슷한 건지 고민하며 물 빠진 뻘밭 위를 비틀거렸다. 그 시절 을주는 만물상회 앞에 앉아 있으면 간밤에 한 화장을 지우지도 않은 채 라면이나 부탄가스를 사러 오는 술집 언니들을 마주치곤 했다. 그 언니들이 건네는 촉촉한 시선에 넋을 놓은 채 그 언니들이 잡아당기고 간 자기의 뺨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루만졌다. 첫사랑이었다.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고, 사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은지 마주앉아 도란도란 말을 주고받고 싶고, 또 한편으론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사랑이라면, 그 시절 을주는 그 언니들을 사랑했다.

“그만 가, 오복아. 너는 다리가 네 개지, 나는 두 개야.”

을주가 컴컴한 수평선을 향해 길게 목을 뻗은 오복이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오복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오복이의 다부진 아몬드색 가슴과 날렵한 옆구리를 마사지하듯 동시에 힘껏 어루만졌다. 우리에겐 아가미가 없고, 바다 밑바닥은 갑자기 푹 꺼지기도 해서 그렇게 무작정 앞으로만 가다간 물귀신이 될 수 있다고. 너 땜에 나 신발 또 젖었다고. 을주는 오복이와 대화로 협상을 시도한 뒤 다시 일어나 보름달이 뜬 옥녀산을 올려다봤다. 오복이가 자꾸 바다로 끌려가듯 을주의 시선도 산마루에 있는 삼층집으로 이끌렸다. 왜 저 집엔 늘 사연 있어 보이는 여자가 사는 걸까. 바닷바람에 몸통을 뒤틀며 자란 고목들이 환한 빛이 새어나오는 가로로 긴 유리창에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반듯하고 깨끗했던 외벽 모서리는 곰팡이가 슨 건지 희끄무레한 얼룩으로 뒤덮였고, 오늘처럼 달이 차오른 날에는 그 얽은 부분이 으스스한 무늬로 빛났다. 비어 있던 집에 사람이 이사온 건 이 년 전이었다. 아니 벌써 삼 년째인가. 을주는 짠 바다 내음을 들이마시며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온 시기를 헤아렸다. 언제까지 너 올 때만 기다려야 하느냐고, 농장 일 안 할 거면 딸기고 뭐고 다 뒤집어엎을 거란 이모부의 말에 돌아오긴 했지만, 어릴 때나 그때나 을주가 애착을 느낄 만한 고향 풍경은 그다지 없었다. 바다는 도무지 쉴 줄 모르는 거대한 액체 덩어리 같았고 개펄과 모래는 언제, 어떤 위치에서 봐도 지루했다. 자연은 지나치게 날것이어서 날마다 더 외톨이로 움츠러드는 을주의 마음 한구석을 비춰볼 작고 탁한 내면의 거울이 되어주지 못했다. 차오르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바닷물의 주기가 변함없이 질서정연해서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시들지 않는 조화나 무대 위 가짜 배경을 보는 것처럼 어딘가 의심스러웠다. 보고 있으면 심통이 났다. 아무도 바다의 순리를 거역하지 못했다.

옥녀산 위 납작한 지붕의 집은 좀 달랐다. 그 집은 이 바닷가의 웃자란 이파리였다. 휴가철이나 관광객 장사에 영향받지 않는 번외 지역이었고, 어딘가 외설스러운 자태로 달과 바다의 끝도 없는 돌림노래가 못마땅하다는 듯 너른 물을 굽어보았다. 본래 그곳은 심한 외풍과 오가기 불편한 위치 때문에 사람들 눈을 피해 은거하기 좋은 장소였다. 무성하게 자란 침엽수들과 돌투성이 맨흙 길이 천연 가림막이자 요새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숨으려는 의도가 세간의 관심을 더 불러모았고, 을주 역시 그 언덕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여자를 주의깊게 살폈다. 이상한 건 그 여자가 하루는 짧은 커트 머리를 하고 있고, 다음날은 미역처럼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발인가? 붙임 머리?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자전거를 타는 걸 수도 있었지만 멀리서 보이는 얼굴이나 체격을 감안하면 한 사람이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거라고 을주는 결론을 내렸다. 높은 데 살면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위험이 크다는 걸 아시나요? 지난여름 해변에서 그 여자와 마주쳤을 때 을주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요? 그게 나쁜가요? 여자는 꼭 그렇게 대꾸할 것처럼 세상만사에 무심한 얼굴로 을주를 지나쳐갔다. 완전히 지나쳐가진 못했다. 오복이가 있었으니까. 우리 잘생긴 오복이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는데 그냥 갈 수 있나.

“조용히 다녀, 사람 없는 데로, 알지?”

혓바닥으로 콧방울을 훔치며 안달하는 오복이에게 을주가 속삭였다. 어둠 속에서 몸을 움츠린 을주는 거듭 주변을 살피고는 오복이의 리시줄을 최대한 늘였다. 천천히 등을 펴고 일어나 마치 의도치 않게 손에서 흘러내린 것처럼 은근슬쩍 줄의 손잡이를 놓았다.

 

나 봐, 나 얼마나 빠른지 봐!

 

긴 줄을 뻘밭에 끌며 오복이가 뛰어올랐다. 늘씬하고 유연한 허리를 둥글게 꺾으며 물살을 향해 쏜살같이 뛰다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밀물에 드러난 바위 쪽으로 달려갔다. 오복이는 찐득한 흙바닥을 파헤치다가도 바람과 뺨을 맞대어 비비듯 허공을 향해 머리를 휘저었다. 허겁지겁 자유를 만끽하는 오복이를 볼 때면 을주는 염전 공장 뒤에서 종일 짧은 줄에 묶여 살았다던 오복이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을주는 오복이와 많은 걸 공유했지만, 어린 강아지로 살았던 그 시절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오복이가 두려워하는 구둣발이나 오복이가 꾸는 악몽, 오복이가 파고드는 흙의 세세한 냄새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어둠이 내린 바닷가 한구석에서 저렇게 기쁘게 몸을 쓰고 있는 오복이를 보면 을주는 오복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을주는 어둠 속을 주시하는 올빼미처럼 눈자위에 바짝 힘을 주고서 오복이의 뒤를 따랐다. 금세라도 오복이에게 달려가 목덜미를 끌어안을 수 있는 거리였다. 단 몇 분의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오복이를 쫓다보면 을주 역시 숨이 차도록 이리저리 점프하게 되었고, 종종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개펄에 떨어지기도 했다. 을주는 예방 차원에서 허리에 찬 공구 벨트의 벨크로를 단단히 조여 맸다. 벨트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두 번 진동했다. 을주는 여전히 오복이를 따라 달리며 화면 상단에 뜬 알람을 확인했다.

 

<욕+받이> 실시간 방송이 시작됩니다.

 

을주는 빨간 라이브 탭을 누르고 싶었으나 화면을 끄고 오복이를 쫓아 너럭바위를 기어올랐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개는 도망치고, 사람은 놓쳐버린 줄을 잡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갯바위 위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따개비에 손바닥을 찔려가며 을주는 오복이처럼 네발로 걸었다.

 

*

 

on air      오늘의 욕받이는 노란 실로 ‘586’이라 박음질한 명찰을 왼쪽 가슴에 달고 있다. 자동차 바퀴만한 솥뚜껑 안에서 라면과 만두, 가래떡이 끓고 있다. 협소해 보이는 접이식 간이 테이블 위에는 싱싱한 대파 한 단과 달걀 두 개 그리고 국자와 가위 따위의 조리 도구가 놓여 있다. 테이블 뒤에는 칙칙한 상아색 칸막이가 서 있고, 옆쪽 벽에는 마커펜으로 썼다 지운 자국이 가득한 작은 스케줄러 보드가 걸려 있다. 반대편 벽에는 노루지로 만든 큼지막한 일력이 걸려 있고, 그 앞으로 국방색 양철 캐비닛과 빈 정수기 생수통, 내용물을 잔뜩 채워넣어 겉이 울룩불룩한 부직포 봉투, 플라스틱 바구니, 흙 묻은 작업화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욕받이가 엉거주춤 일어나 버너의 불길을 조절한다.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젓다가 뜨거운 김에 이맛살을 찌푸린다. 파에 손을 댔다가 달걀을 건드렸다가 버너의 불길을 다시 조절하며 허둥지둥한다.

 

라면 안 끓여봤네 저거

만두 불고 있음. 저러다 만두 다 터짐

나라 망친 똥팔육 색히가 먹방도 ㅈ망

저 달걀은 병아리 될 때까지 기다리나보1지?

 

욕받이가 실시간 채팅이 올라오는 화면을 흘깃거린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문다. 채팅창에 글이 빠르게 올라온다.

 

면­만두­떡­밥말, 어르신아 이게 어려워?

하, 내 시안 퇴짜 놓던 차장새꾸 닮았다

나도 라면에 파김치 먹고 싶다

니 주제에?

기어이 만두 젓가락킬...

혹시 저 모르세요? 혹시 술 ㅊ먹고 저 밟으시던 우리 애비세요?

 

시청자는 두 개로 분할된 화면을 보고 있다. 화면 1에서는 욕받이가 실시간으로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 나오고, 화면 2에서는 욕받이의 사전 인터뷰 영상이 재생된다. 인터뷰 영상에서는 흰 페인트를 쏟아부은 듯한 눈부신 백색 조명이 욕받이를 에워싸고 있다. 흡사 톱스타의 인터뷰 장면처럼 욕받이는 다리가 긴 원목 의자에 발을 엇갈리게 꼬고 앉아 자신의 대각선 방향에 있는 카메라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인터뷰    경력이랄 게 있나요. 학교 때는 공부를 좀 해서 뭐 그때는 잘나갔던 설비공학과에 들어갔고, 건설회사 설계팀에서 근무하다 총괄 관리부 부장까지 하고 퇴직했습니다. 한동안 자연 관련 일을 해볼까 하다 거래처 사장이었던 양반이 나한테 전화 와서 지금 회사에 사람이 딸린다고, 사람 관리하고 현장만 봐주면 된다길래 (사이) 몇 년간 하루도 안 쉬고 일했습니다. 경기가 괜찮았어요. 돈이 좀 돌았는데, 그땐 애들 용돈도 넉넉하게 주고, 큰딸이 한 번도 그런 소리 안 하다가 웬일로 지 남자친구를 보여준다길래 (웃음) 만나서 회도 사주고 그랬습니다.

 

시대 잘 타고나서 평생 꿀 빨았죠

탓탓탓 해줘해줘해줘 오늘은 586탓이냐?

데모하다 취업하고, 버스에서 담배피고, 금리 초달달에, 접대비로 단란 가던 시대

저 세대가 여아 낙태 겁나게 해댔지. 초음파로 태아 성별 보고 여자애면 긁어냄

딸 슴 큼?

참..... 이 시궁창 패륜들.....을 어찌할꼬

아버니ㅁ 힘내십시오,,,,,저는 선플, 달기, 운동,,중입니다,,,,대한민국

파이팅!@@우리 국민 파이팅!@@삼성 파이팅!@@ 참된 행복은 가까이 있다,,,위를,

보1지 말고, 옆과 아래를, 보며 나누고, 살면은,,,

 

‘시대 잘 타고나서 평생 꿀 빨았죠’라는 문장이 굵은 글씨체로 바뀌면서 채팅창 상단에 고정된다. 해맑은 효과음이 연달아 나며 채팅창 위에 있는 막대의 숫자가 5의 배수로 커진다. 오백원, 천원, 천오백원…… 효과음이 이어질수록 일만원 막대가 빠르게 채워진다. 라면을 앞 접시에 건져내던 욕받이가 상생 지원금을 보고 희미하게 표정이 바뀐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으려다 뜨거운 열기에 놀라 입술을 뗀다.

 

 인터뷰    거긴 영 딴판이더만요. (사이) 사람을 믿은…… 제 탓이죠. 인테리어 사업을 크게 하다 동업자가 사기를 쳐서 (사이) 누굴 원망하거나 그러진 않습니다. 팔자려니 하는데 (얕은 한숨) 지금은 대리 기사랑 택배를 겸업하고 있습니다. 젊을 때 현장에서 일하다 무릎을 다쳐서 그것도 많이는 못하는 처지네요.

 

지금 팔육이 울고 있다. 겨로 울고 있어

팔륙이의 팔자타령에 30먹은 저도 힘을 냅니다

선거 때 투표나 잘해라. 왜 너희끼리 싸우냐?

엣헴 금지 뒷짐 금지 등산복 금지

도배장판 공구리로 사기쳤구나?

여음병 동업할 용기

 

‘팔륙이의 팔자타령에 30먹은 저도 힘을 냅니다’라는 문장이 채팅창 상단에 고정되고, 자전거 벨소리 같은 효과음이 이어지더니 오만원 막대에 붉은색이 채워진다. 지원금이 곧바로 십만원 막대를 채워나가자 채팅창을 보던 욕받이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입술을 모은다. 고춧가루가 더덕더덕 붙은 파김치 한 뿌리를 라면 위에 얹어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인터뷰      애들은 딸내미 둘에 막내아들 하난데, 막내가 좀 늦둥이라 (사이) 애엄마랑 이혼하면서 애들이랑은 따로 살고 있고. 전화는 가끔 하는데, 애들도 바쁘고 저도 사는 게 팍팍해서.

 

말투 진짜ㅗ 저거 어디 사투리임?

586세대가 꿀만 빠는 꿀벌이라고? 벌 없으면 너희는 딸기도 못 먹고 복숭아도

딸 둘에 아들이면 아들 낳고 싶어서 마누라 조ㅈㅣㄴ거

선플. 달기. 운동. 중. 입니다!~넘어지고 쓰러져도~ 좌절치~말자!~

못 먹어. 너희 현대사 시간에 뭐했냐? 586 없었으면 아직도 독재 정권이야

86님아 숟가락에 만두 올려서 옴뇸뇸 먹어주세요!

아파트랑 한녀혼은 떨이쳐도 안 사요

사투리가 뭐? 똥서울 말투보다 낫구만

여기서 현대사 강의하는 ㄴ 뭐냐?

너는 내 애비니까, 너는 내 애비니까아아

이혼가정 올려치지 마라. 한부모 가산점 박살난지 오래다

 

인터뷰      저는 원래 나무랑 산을 좋아하고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는데 (사이) 이런 방송이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됐고, 우리 둘째 똑똑새는 외국에 있고, 호주로 어학연수 나갔고, 아, 그땐 연수고 이제는 정식으로 취직해서 자리잡는다는데 (웃음) 큰애는 회사 팀장까지 됐고 (사이) 넷이 카톡 하는 것도 시간대가 안 맞아요. 근데 아들내미가 이게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 누나들이 뭘 그런 걸 보냐고, 뭐라더라, 뇌가 썩는다고 했나? (마지못한 웃음) 막내가 이건 상생 프로라고, 서로 돕고 살자는 취진데 뭐가 나쁘냐고, 자기도 능력만 되면 나가고 싶은데 (주저) 그런 걸 스펙이라고 합니까? 이십대 고졸 백수는 너무 흔해서 자기는 욕받이 스펙이 달린다는데 (허탈)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인가 싶어서 이 방송을 보니까, 보다가 한참을 봤습니다. 새벽에 대리 뛰다보면 춥고 졸려서 누구랑 말은 하고 싶은데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고, 다 자는 시간이고. 그래서 이 방송을 하나씩 보다가, 네.

 

욕받이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소주병의 뚜껑을 딴다. 잔에 따라 단숨에 비운 뒤 라면을 후후 불어 먹는다. 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욕받이의 귓바퀴 부근에 난 새치와 음식을 씹을 때마다 불끈거리는 턱의 힘줄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시뻘건 파김치를 내려다보다 다시 소주병을 향해 팔을 뻗는다. 팔꿈치에 스친 국자가 바닥에 떨어진다. 욕받이가 아래로 몸을 수그리자 접이식 의자가 삐걱거린다.

 

을주는 휴대전화를 양손에 쥐고 빠르게 글자를 입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채팅창에 글을 올려도 쉴새없이 밀려드는 조롱과 비아냥에 을주의 소수 의견은 무력하게 휩쓸려갔다. 사람들은 금지어인 욕설 대신 더 교묘한 조어를 쓰며 출연자를 힐난했고, 그 말이 채팅창에 고정되면 또다른 비웃음들을 불러일으켰다. 을주는 오복이를 편의점 앞에 두고 낮은 턱을 올라가면서도 채팅창을 보느라 고개를 떨궜다. 유리문을 어깨로 밀치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갈 때 젊은 커플이 뒤따라오는 게 보였다. 을주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닫히려는 문을 잡아주었다. 매대로 걸어가 김치 컵라면과 버터구이 오징어를 고른 뒤 새로 나온 음료를 보고 그것도 집어들었다. 딸기향이 첨가된 단백질 음료였다. 을주는 한쪽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있어 방송에서 남자가 라면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계산을 끝내고 편의점을 나오자 담배를 피우는 무리가 오복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삐딱하고 아니꼬운 자세로 서서 개를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야!”

을주가 소리치자 그들의 시선이 일시에 을주에게 꽂혔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 그들 중 한 명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을주는 계단을 내려서며 싯누런 발톱과 하얗게 버짐이 핀 남자의 발가락을 노려봤다. 엎드린 자세로 곧게 목을 세운 개는 꼼짝하지 않은 채 을주를 주시했다. 겨울 점퍼를 입은 또다른 남자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더니 오복이를 향해 더러운 운동화를 신은 한쪽 발을 들어올렸다. 그 남자를 밀쳐내듯 을주가 소리쳤다. 검지를 뻗어 짧고 간결하게 신호를 보냈다.

“서금!”

개가 엉덩이를 치켜든 채 어깨를 낮게 숙이며 자기를 둘러싼 무리를 향해 공격 자세를 취했다.

“서금, 서금!”

개가 아르르 성대를 떨며 이를 드러냈다.

“서금, 서금, 서금!”

오복이가 엄청난 목청으로 짖어댔다. 파라솔 기둥에 걸어놓은 리시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다 테이블 전체가 옆으로 쓰러졌다. 기겁하며 뒷걸음치던 무리가 맞은편 길로 뛰어갔다. 만취한 남자가 중간에 넘어지자 다른 이들이 그의 점퍼 깃을 부여잡고 질질 끌고 갔다. 그들은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타며 상스러운 말을 퍼부었다. 을주가 김치 컵라면을 옆구리에 끼고서 양손의 중지를 쳐들었다.

“됐어, 끝났어, 이제 괜찮아.”

을주가 목덜미를 끌어안자 오복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길고 축축한 혀로 자기 콧방울을 적시며 몸을 흔들었다. 을주는 방금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걸 알았다. 오복이에게 그 말은 하면 안 됐다. 소금이란 말은 염전 공장에서 지낼 때 허기와 구타를 무기로 명령을 따르도록 세뇌당한, 오복이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을주는 흥분해서 소금이라고 똑바로 발음하지도 못했다. 손가락 욕은 또 뭔가. 을주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편의점 안에 있던 고모부가 문을 열고 나와 을주와 쓰러진 테이블을 번갈아 바라봤다. 검은색 승용차가 도로 중간에서 유턴해 편의점 쪽으로 빠르게 돌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