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다이브 인(2)

잠깐만. 그런데 처음 보는 것과 다름없는 그애의 말을 어떻게 믿나? 그림은 저 혼자 집에서 그리면 되는 것 아닌가? 오 년 전에 만난 사람의 집까지 굳이 찾아오다니. 그것도 한 번 헛걸음하고는 며칠 후 또다시. 만약 오늘도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날도 올 셈이었나? 속내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명확하고 강렬한 동기.

이건 사기 사건일 수도 있다. 영험한 기름을 판다는 집단이 이제는 기름 대신 그림을 전략으로 활용하는 건 아닐까? 복수 영화일지도 모른다. 사실 엄마가 오 년 전 열네 살 휴이에게 어떤 큰 상처를 남겨서 휴이가 앙심을 품고 되갚아주려 찾아온 것은 아닐까?

 

*

 

돌이켜보면 엄마는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도, 약속을 잘 지키는 편도 아니었다. 몇 년 전에는 아빠와 부부 동반 중학교 동창회에 함께 가기로 해놓고 그날 저녁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혼자 모임에 다녀온 아빠가 불콰한 얼굴로 따지고 드니 까먹었다고, 뮤지컬을 보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했다. 작년에는 일 년에 딱 두 번 예약을 몰아서 받는 유명한 퓨전 한식집 풀코스 4인분을 겨우 예약했는데, 엄마가 점심을 늦게 먹어 배부르다면서 돌연 가지 않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결국 내가 2인분을 먹었다.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화분에 그림 그릴 준비를 해두겠다는 말도 엄마는 지키지 않았다. 그다음주, 휴이가 다시 찾아왔을 때 엄마는 집에 없었다. 휴이는 커다란 에코백을 품에 안고 나타났다. 가방 안에는 둘레가 두 뼘 정도 되는 토분이 대여섯 개는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너 이걸 어떻게 들고 왔냐, 무겁지도 않았냐, 물었는데 휴이가 잠시만요, 하더니 다시 내려가 차에서 에코백을 하나 더 가져왔다. 그 안에도 역시 동일한 형태와 크기의 토분이 가득했다.

생각보다 무겁네요.

휴이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림을 그릴 화분이 열몇 개나 되는 줄은 몰랐다. 선물할 생각이라고, 휴이가 설명했다. 9월에 독일로 피아노를 배우러 가는데 그 전에 자기가 좋아하는 동굴 풍경을 그려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씩 줄 거라고. 열 개도 넘는 화분에 혼자서 그림을 그리려면 며칠은 꼬박 걸릴 것이었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했구나. 이건 사기 사건이나 복수 영화가 아니라 공동 작업이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얼굴이 벌게진 휴이를 위해 얼음을 유리컵 끝까지 채워 아이스커피를 만드는 동안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열댓 번은 걸었다. 마침내 전화를 받은 엄마는 ‘수업중’이라고만 말하고 끊어버렸다. 나는 엄마에게 물음표만 적은 메시지 세 개를 연달아 보냈다. 읽기는 했는데 답은 없었다. 네번째 메시지를 보냈다. ‘화분에 그림은 어쩌고?’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우리가 커피를 다 마시고 남은 얼음까지 녹여 먹는 동안에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에 답장은 보내왔다. 변명도 사과도 없는 짧은 두 문장, 그리고 반 문장 더. ‘이런, 까먹었네. 네가 알아서 좀 해줘. 부탁 좀.’ 까먹기는 무슨. 엄마는 무서운 거다. 기억나지 않는 세 시간 동안의 남 같은 나를 만나기가 두려운 것이다.

엄마가 오늘 약속을 깜박했나봐요.

내가 휴이에게 말했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요. 나는 에코백 두 개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악 소리가 나올 만큼 무거웠다. 이걸 어떻게 들고 왔담. 나는 양손으로 에코백 손잡이를 잡고는 아래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같이 내려가자고.

까먹었다고요?

휴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것참 편리하네요. 휴이는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다음에 다시 오라고 했으나 휴이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도 않고 빈 유리컵만 쳐다봤다.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토분이 든 에코백만 멍하니 들고 있다가 내려놨다. 양팔이 욱신댔다.

그러면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일단 셋이 그림을 그리고 있자고 제안한 건 할머니였다. 너희 엄마가 설마 밖에서 자겠냐, 집에 오긴 올 거 아니냐.

큰일날 소리였다. 소파 옆의 야구 배트가 눈에 들어왔다. 휴이는 가출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과감한데다가 토분으로 가득찬 에코백을 번쩍번쩍 들 정도로 힘이 센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화가 난 휴이가 돌발 행동이라도 한다면 이 집이 생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얼른 소파 뒤로 배트를 밀어넣고는 할머니를 쳐다봤다. 휴이를 설득해서 내보내는 게 맞았다. 목뒤가 당겼다. 사건이 됐든 영화가 됐든 작업이 됐든, 얼른 마무리한 뒤 다시 담요를 덮고 낮잠이나 자고 싶었다.

내가 할머니를 간절하게 쳐다보자 할머니는 뭐 다른 방법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휴이는 집에 안 가겠다고 하지, 엄마는 집에 안 오겠다고 하지.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분명 재밌을 거라고도.

 

휴이가 참고하라며 휴대폰으로 찍은 동굴 사진을 내밀었다. 가운데 커다란 못이 있고 주변은 검은 바위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들여다봐도 사진이 어둑해서 뭐가 뭔지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았다. 플래시라도 켜고 찍지. 일단 흑색 물감이 많이 필요하긴 해 보였다.

나와 할머니는 휴이가 먼저 그리면 그걸 보고 따라 그리기로 했는데, 휴이의 그림은 영 참고할 만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뭔가를 그리려고는 한 것인지, 그냥 붓 가는 대로 흑색을 덕지덕지 칠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형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휴이 스스로도 느꼈는지 토분의 면을 삼분의 일 정도 채우고 나서는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붓을 차마 더는 갖다대지 못했다.

잠깐 쉴까요?

붓을 든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커피라도 한잔 더 마시면서 쉬자고 제안했다. 모범 토분도 문제였지만 그걸 따라 그린 나와 할머니의 토분도 눈 뜨고는 못 봐줄 정도였다. 우리 둘의 토분은 검은 곰팡이가 피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휴이는 흉측한 토분들만 한가득 안고 돌아갈 처지였다.

우리는 토분을 식탁 구석으로 치워두고 각자 두번째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생각보다 어렵네요.

휴이가 말했다. 할머니가 휴이에게 그림은 많이 안 그려봤나봐, 말하곤 웃었고 휴이는 오 년 전 효진 선생님께 배운 게 전부라고 대답하며 멋쩍은 얼굴을 했다. 나는 그때 엄마 수업이 재밌었냐고 휴이에게 물었다. 실은 오 년이 지난 후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휴이는 솔직히 재미없었다고 하면서 웃었다. 아마 그리고 싶은 게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고, 그래도 한 달 동안 만들었던 공간 박스나 컵 같은 것들은 아직도 모두 집에서 잘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가출은 왜 했나?

할머니가 물었다.

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휴이가 토분을 쳐다보며 답했다. 휴이는 열 살 때부터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했다. 부모님의 제안이었고 휴이도 흔쾌히 동의했다. 열 살의 휴이는 피아노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피아노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싫었다. 학교 의자도 싫고 책상도 싫고 칠판도 싫고 친구들도, 선생님도 싫었다. 하루종일 피아노만 치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은 지 사 년쯤 지나자 피아노 말고도 다른 것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부모님한테 이제부터는 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더니 부모님이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더라고, 휴이가 회상했다.

그게 저희 부모님이 안 된다고 말하는 방식이었어요.

휴이의 부모님은 단호했다. 난데없이 학교에 가고 싶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피아노에 잠시 지친 거다. 부모님은 휴이의 시간표를 조정해주었다. 피아노는 원할 때만 치게 되었다. 도시로, 산으로 가족 여행도 자주 갔다. 열흘 넘게 건반에 손을 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건반의 매끈한 촉감이나 손가락 끝을 밀어내는 미묘한 저항감이 생소해질 때쯤에도 휴이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몇 번 더 말해보지 그랬어요.

아무리 그래도 가출이라니, 겁도 없이. 센터에서 지낼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휴이는 그후에도 부모님에게 여러 번 말해봤다고 했다. 화도 내보고 편지도 썼다고. 심지어 노래도 만들었어요. 휴이는 저녁식사 후에 엄마와 아빠를 앉혀놓고 피아노를 치면서 학교에 가고 싶다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느리고 어두운 분위기로 시작해 빠르고 경쾌하게 끝나는 곡이었다. 휴이는 콧노래로 그때의 음조를 흥얼거렸다. 부모님은 노래를 끝까지 다 듣고 박수는 크게 쳐주었지만 학교에 보내주지는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왜 학교에 가지 않기를 바란 거냐고 물었다. 휴이는 제가 정의하거나 설명하기보다는 경험하는 사람이면 했대요, 하고 답했다. 피아노도 쳐야 했고요. 휴이는 실과나 정보, 미술을 배우는 대신에 베토벤과 리스트, 쇼팽을 배웠다.

미술 정도는 배워두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가 붓자국이 정신없이 난 토분 세 개를 바라보며 농담했다. 고약하게 생긴 토분들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휴이도 뒤따라 웃다가, 아무래도 동굴에 다시 갔다 와야겠다고 말했다. 보고 나면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지금 다 같이 가서 보고 오자고.

 

*

 

할머니는 집에 두고 가려고 했다. 해안으로 가려면 차를 삼십 분은 타야 하는데 좁은 차 안에 그렇게 오래 구겨진 자세로 있다가는 병원에서 단추 크기로 좁아졌다고 했던 할머니의 척추관이 단추에 난 구멍 크기로 좁아질지 몰랐다. 그렇지만 내가 말릴 새도 없이 할머니는 챙이 두 뼘은 되는 밀짚모자를 챙겨 쓰고 혼자 일층으로 내려가버렸다. 엄마가 몇 년 전 관광지에서 사 오고서 그뒤로 한 번도 쓰지 않은, 여러 번 접힌 채 거실 책장에 방치되어 있던 모자였다. 나는 급한 대로 허리 쿠션을 챙겨 휴이의 차에 올랐다.

휴이는 해안 절벽 쪽으로 차를 몰았다. 넉 달 전 열여덟번째 생일이 지나자마자 면허를 땄다는 휴이는 제법 능숙하게 커브를 돌 줄도 알았다. 한참을 달려 해안 절벽 뒤편 낮은 동산에 도달했다. 진입로 앞에서 차가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해요.

나는 뒷좌석의 할머니에게 길도 험할 텐데 차에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럴 거면 내가 여기까지 왜 왔겠느냐고 대꾸하더니 뒷문을 열고 아이고, 하는 기합을 넣으며 차에서 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닥이 이렇게 얇은 스니커즈는 신지 않았을 텐데. 흙길에 박힌 올록볼록한 돌들이 고무 밑창을 뚫고 느껴졌다. 할머니는 내 팔에 반쯤 무게를 싣고 걸었다. 딱 그 정도가 할머니가 원하는 도움이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살피며 걷다가도 종종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고 그때마다 밀짚모자의 챙이 자꾸 내 어깨를 찔렀다. 바다가 가까워지는지, 걸을수록 비릿한 짠내가 풀냄새를 조금씩 덮었다. 바닥도 점점 질어졌다. 발을 뗄 때마다 진흙이 신발을 붙잡았다. 걷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휴이가 흙길을 벗어나 풀이 무성한 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렇게 등산로를 이탈해 휴이를 따라 걷다보니 관목이 가득한 지대가 나왔다. 허리 높이의 관목들 뒤로 검고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굴이 있었다. 정말 여기 동굴이 있구나. 입구는 성인 한 명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정도로 작았는데, 위로 갈수록 더 좁아지는 기다란 삼각형 형태였다. 할머니가 밀짚모자를 쓴 채로는 못 지나갈 너비였다.

들어가도 되는 곳 맞아요?

안쪽은 완전히 암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손만 뻗어도 저 어둠 속으로 몸 전체가 훅 빨려들어갈 듯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히 관광지 같기는 했다. 입구 앞 흙바닥에 빨간 구명조끼가 가득 담긴 종이 상자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상자에는 ‘미착용시 입장 불가’라고 검은 매직으로 휘갈겨 쓰여 있었다. 휴이는 구명조끼를 이것저것 들어보고 크기를 가늠하더니 할머니와 내게 하나씩 건넸다. 정작 자기 것은 챙기지 않았다. 상자에서 적당한 걸 하나 골라 휴이에게 내밀었더니 휴이는 조끼를 건네받아 다시 상자에 넣었다.

저는 어차피 오늘 물에 안 들어갈 거라서요.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나도 물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이런 반바지와 반소매 차림으로는. 맨몸으로 샤워기 아래에조차 서려고 하지 않는 할머니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였다. 휴이는 할머니와 나의 구명조끼 버클을 단단히 조여주었다. 내가 다시 한번 할머니의 구명조끼를 확인하며 괜찮겠냐고 묻고 있는데, 휴이가 자기 양쪽 어깨를 툭툭 쳤다.

잡아요. 입구가 좁아 여기서부터는 한 줄로 들어가야 해요.

나는 할머니의 밀짚모자를 구명조끼 상자 뒤에 감춰두고 휴이의 어깨를 잡았다. 휴이가 앞장서고 내가 그 뒤에, 할머니가 가장 마지막에 섰다. 통로에는 빛이 들지 않아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나는 휴이의 뒤통수만 보며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기억을 잃던 그날, 엄마도 한참을 쳐다봤을 뒤통수였다. 휴이의 냄새와 주변의 냄새가 섞여 옅은 생강 향과 풀 내음, 먼지 냄새, 물비린내가 났다. 휴이가 발을 뗀 자리에 내가 바로 발을 디뎠고, 내가 발을 뗀 자리에는 할머니의 발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정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갈수록 물비린내가 진해졌고 바위에서는 습한 한기가 뿜어져나왔다. 통로가 좁아 몇몇 돌출된 바위들이 양어깨를 자꾸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