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세상의 끝

1.

“이곳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말한다.”(『캉탕』)

어떤 사람은 ‘캉탕’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 질문이 ‘세상의 끝’을 향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세상의 끝이 어딘지 안다면 묻지 않을 질문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이라니! 그게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이 반문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순진한 궁금증이 아니라 의심과 부정이다. 이렇게 묻는 사람은 자기가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은 그곳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곳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은 ‘캉탕’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걸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이 사람은 그곳이 한 군데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세상의 끝’이 많이 있다고 이 사람은 생각한다. 캉탕이 그 여럿의 ‘세상의 끝’ 가운데 하나라고 이해하는 사람은 묻지 않는다. 이 사람이 아는 것은 캉탕의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 ‘세상의 끝’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끝이 어딘가 있다는 걸 믿는 사람은 캉탕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고, 세상의 끝이 어딘가 있다는 걸 믿지 않는 사람은 캉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믿지 않으면서도 묻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묻는다. 사람들이 신에 대해 갖는 태도와 유사하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으면서도, 가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묻고, 믿는 사람은 믿으면서도, 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묻지 않는다. 


사실 세상에는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곳이 아주 많다. 대개 바다에 닿아 있는 육지의 끝부분에 이런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땅끝. 이 명명에 의하면 세상은 육지로 제한되고, 지구조차 담지 못한다. 지구는 바다를 포함하니까. ‘땅끝’이라는 의미의 ‘세상의 끝’은 지구 곳곳에 있다. 한반도의 최남단,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에도 땅끝마을이 있다. 캉탕이 어디 있는지 묻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세상의 끝’을 땅끝과 동일시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소설의 첫 문장이 캉탕을 ‘대서양에 닿아 있는 작은 항구도시’라고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서양에 닿아 있는 작은 항구도시인 캉탕은 태평양과 연결되어 있는 해남의 땅끝마을을 자연스럽게 소환한다. 이 연상 작용에 의해 캉탕은 땅끝마을과 같은, ‘세상의 끝’들 가운데 한 곳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은 땅(육지)과 같은 말이 아니다. 땅과는 달리 세상은 ‘곳’을 지시하지 않는다. ‘곳’을 포함하지만 ‘곳’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장소와 시간과 사람이 ‘세상’에 다 들어 있다. 세상은 이것들을 다 포함한다. 무엇보다 사람이 빠진 세상은 생각하기 쉽지 않다. 세상은 대체로 인간 세상이다. ‘세상의 끝’에서 흔히 지구의 멸망이나 우주적 종말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땅끝’은 어딘가에 있는 장소지만 ‘세상의 끝’은 어떤 상태이다. 그러니까 ‘캉탕’이 어디냐고(어디 있다는 말이냐고) 묻는 사람은, ‘세상의 끝’에서 ‘땅끝’을 떠올리지 않은 사람이다. ‘세상의 끝’을 ‘땅끝’과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이다. ‘땅끝’은 어딘가에 있고, 그러니까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세상의 끝’은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로 있고, 그러니까 눈에 잡히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가 스키터 데이비스의 오래된 팝송 <The end of the world>에 공감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진 사람은 여전히 햇빛이 비치고 파도가 치고 새가 노래하고 별들이 빛나는 것을, 세상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세상은 끝났기 때문이다.

 

왜 심장이 뛰고 눈물이 흐를까?

모르는가,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당신이 내게 작별을 고하는 순간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그의 세상은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세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그는 ‘세상의 끝’에 있다. 장소가 아니라 어떤 상태라는 건 그런 뜻이다. 끝은 그렇게 온다. 개별적으로, 세상과 상관없이. 말하자면 실존적으로. 


2.

『캉탕』은 ‘세상의 끝’에 도착한 세 사람의 이야기다.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 다시, 이들이 와 있는 이곳,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 그들은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옛날 사람들은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 믿었다. 세상이 평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바로 계속 걸으면 출발한 자리로 돌아온다는 걸, 세상이 둥글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는 안다. 둥근 지구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출발점이 도착점이다. 끝은 시작에 있다. 등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다. 등뒤에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한없이 걸어 끝까지 가야 한다. 


등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아니다. 끝에 가서 만나게 되는 사람은 그 ‘등’을 가진 사람, 자기 자신이다. 끝까지 가는 사람은 출발한 자리로 돌아온다. 끝이 시작에 있다. 출발한 사람이 끝에 이르러 만날 사람과 동일인이다. 세상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나다. 그가 나다.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다. 나는 나의 ‘세상의 끝’이다.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고, 내가 가장 잘 모르고, 내가 가장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또 있을까?”(헬무트 틸리케, 『신과 악마 사이』) 각성한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의 의무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헤세는 말한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뿜어져나오려는 것을 실현하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헤르만 헤세, 『데미안』)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렵냐고? 헤세는 이미 답을 말해버렸다,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사람은 기꺼이 자기를 찾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라.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을 찾지 않으려고 달아난다. 어쩔 수 없을 때까지 달아난다. 자기 자신이 가장 멀리 있다. 끝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다.  

사람은 자기 앞에 가는 사람을 미워하고, 미워하면서 따라가고, 자기 뒷사람은 부정한다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말한다.


내 뒤에서 내 뒷사람이 되어 걸어보아야 한다. 그러면 네가 얼마나 빨리 나를 미워하게 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 (「민들레」) 


우리는 왜 뒤를 돌아보지 않는가. 뒷사람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모든 뒷사람들은 앞사람을 미워한다.” 앞사람인 나는 나를 미워하는 뒷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몸을 돌려 뒤에 있는 그를 만나는 대신 부정하는 편을 택한다. 뒤를 돌아보는 대신 앞으로 걷는 쪽을 택한다. 만나지 않으려고 앞으로, 끝까지 걷는 그 걸음이 뒷사람을 만나는 길이라는 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앞으로, 끝까지 가야 한다. 만나지 않으려고 끝까지 앞으로 가서 그 앞에 있는 뒷사람, 만나고 싶지 않은, 두려운 그/나를 만난다. 

보르헤르트의 이 남자, 432번 죄수는 호두알처럼 굳게 닫힌 감방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만난다.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놈과 함께 갇혔다.” ‘내’가 열 수 없는 문이 뒤에서 닫히고, ‘나’는 독방에 갇힌다. 홀로, 그러니까 비로소 내가 가장 만나기를 원치 않는 마지막 사람, ‘나’와 함께. 내가 나 자신과 홀로 남게 되는 이 사태는 내가 나에게 ‘맡겨진’ 것이고, 나에게 ‘넘겨진’ 것이다.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 오직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고 넘겨진 상태, 자기를 미워하는, 무섭고 만나기 싫은 뒷사람을, 오직 그/나만을 마주한 상태. 세상의 끝.


그런 시간이 있다.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 피할 수 없는 시간. 부딪쳐야 하는 시간.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얼굴을,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쳐다보아야 하는 시간.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오.” 이 말은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눈이 멀기 전의 오이디푸스에게 한 말이다. 눈먼 예언자는 눈뜬 왕에게 어디서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이디푸스만 들을 말이겠는가.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탄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 한다. 보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눈먼 예언자는 눈이 멀기 전의 오이디푸스에게 말한다.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라오.” 나는 이 말이 무섭다.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 돌릴 수 있는 한 나는 살 수 있다. ‘앞사람’을 바라보며 미워하는 한 살 수 있다. 세상이 내 곤경의 탓이 되어주는 한 살 수 있다. 나에게 도달하지 않는 한 살 수 있다. 자기가 자기의 재앙이라는 걸 오이디푸스가 몰랐다고 할 수 없다. 몰랐다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기로부터 달아나려 했겠는가. 한사코 자기에게 도달하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세상이 외부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워서 내부로 도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려하면서 내부의 나를 만나기가 두려워 외부로 도피한 사람들에게 신경쓰지 않는 것은 그들이 덜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단은 개별성을 삼킨다. 삼켜야 만족한다. 삼켜지지 않은 개별성을 보면 집단은 어쩔 줄 몰라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동기가 도피인 사람이 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인데, 그 열심은 외부로 도피하기 위함이다. 그는 내부의 나를 만나기가 두려워서 외부에서만 산다. 외부에서 열심히 산다. 누구보다 바쁘게 최선을 다해서 산다. 『캉탕』의 한 인물처럼, 전쟁하듯 산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 싸운다. 한순간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 늘 마음을 들고 살아야 해서 힘들다. ‘자기 착취’가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사람 눈에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그 결과 일정한 성취를 이뤄내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오이디푸스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는가! 신탁과 운명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그는 망명객이 되고 나그네가 된다. 밖으로, 외부로, 되도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시간이 온다. ‘뒤에서 문이 닫히고’, 혼자 나에게 넘겨지는 시간. 그렇게 필사적으로 세상과 싸우며 살던 『캉탕』의 인물 한중수는 어느 날 사이렌소리를 듣는다. 강연장에서 자기 강연을 듣고 있는, 오래전에 죽은 아버지를 본다. 그가 세상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며 쌓아올린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려 한다. 그는 버티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캉탕을 향해 간다. ‘세상의 끝’은, 그러니까 한사코 도달하지 않으려 한 그의 내부다. 내부로 들어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내부가 끝에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외부가 알지 못하는, 한사코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내부를 만난다. 


우리의 눈은 밖을 보도록 설계되었다. 눈이 밖을 향해 나 있어서 우리는 안을 보지 못한다. 설계도를 바꿀 능력과 자격이,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기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안(에 있는 것)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아야 한다. 예컨대 기능을 바꿔야 한다. 눈을 감음으로써 외부를 차단해야 한다. 외부를 차단하는 것이 내부를 보고 듣는 방법이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캄캄한 것을 보는 맹인이라는 사실이 뜻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외부를 차단하는 것이 어떻게 내부를 보는 방법이 된단 말인가, 라는 질문을 예상할 수 있다. 예컨대 눈을 감으면 빛이 차단되고, 캄캄해질 뿐이지 않은가, 눈을 감는다고 눈이 안으로 휘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 반문은 사람의 내부를 외부와 같은 ‘공간’으로 간주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그러나 사람의 내부는 없다. 사람의 내부는, 외부와 같은 식으로, 그러니까 하나의 장소로 있지 않다. 내부는 ‘어디’(공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뒤에서 문이 쾅 닫히고, 독방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 세상의 끝,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주하게 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놈’이 내부다. 그러니까 내부는 궁극이다. 마지막이다. 막다른 길이다. 거기서 더 나갈 수 없다. 언제나 ‘나’는 가장 나중에 만난다. 


내부, 즉 ‘나’를 보는 눈은, 그러니까 내 눈이 아니다. 내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내 눈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내 눈으로는 무엇이든 볼 수 있지만 ‘나’는 볼 수 없다. 눈은 밖을 향해 열려 있는데, ‘나’는 밖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나’를 어떻게 보는가. 다른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를 보는 이 눈은 누구의 눈인가. 오이디푸스를 향한 예언자/코러스의 말에는 이에 대한 암시, 예언의 말이 들어 있다. 


모든 것을 보는 시간은 그대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를 찾아내어……


‘그대가 모르는 사이에 그대를 찾아내’는 그것을 현자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본다고 말한다. 소포클레스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보는 존재를, 시편의 저자 다윗은 ‘주(Lord)’라고 부른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신인 야훼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어 주(아도나이)라고 대신 불렀다.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으며 주 앞에서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주는 거기 계시며 내가 하계에 가서 누워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시편 139:7-8) 

시간이 ‘그대’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대’가 시간에 의해 발견된다는 것, 시간의 눈이 그대를 본다는 것이다. 그대가 시간의 눈으로, 그러니까 모든 것을 보는 신의 눈으로 그대 자신을 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보는 시간/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히브리서 4:13) 그대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사의하다는 점에서, 시간은 신의 은유이다. 아니면, 신이 시간의 은유일까.


4.

그렇다. 세상의 끝에서는 ‘나’가 발견된다. ‘시간/신의 눈에 의한 발견’이다. 시간/신에 의해 ‘나’가 발견되는 존재 상황이 세상의 끝이다. 

거기에 이르기 전까지 나는 다만 보는 자, 발견하는 자이다. 보는 순간 나는 내가 본 것을 규정한다. 분류하고 범주화한다. 보는 순간 그런 일이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것이 보는 방법이다. 내가 나의 외부만을 발견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나는 나의 내부가 발견되고 규정되는 걸 견디지 못한다. 나는 나의 내부, 즉 ‘나’만 빼고 다 발견한다. 나는 나의 내부, 즉 ‘나’만 빼고 다 규정한다. ‘나’를 보는, 볼 수 있는 눈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신의 눈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그것은 세상의 끝에서만 가능하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캉탕/세상의 끝에서 그대/나는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겪는가? ‘나’는 나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가?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놓아야 합니다.(히브리서 4:13)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을 드러내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끝’에 이른 사람은 모든 것을 드러내놓는다. 드러내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내놓는다. 모든 것을 보는 시간/신에 의해 발각되었기 때문에 드러내놓는다. 고백은 벌거벗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기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능동의 형태를 띤 이 동사 ‘고백하다’에 자발적인 성격은 거의 없다. 고백하는 사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이다.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까지 고백하지 않는다. 고백은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행해진 고백은 천하만큼 무겁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은 사람이 하는 고백, 자발적인 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아마 자랑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 자랑이다.

『캉탕』의 인물들은 모든 것을 드러내놓기를 요구받는다. 그렇게 어려운, 거의 불가능한 요구. 이 요구는 ‘나’로부터 온 것이다. ‘나’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피하지 못한다. 이들은 회고록이나 일기의 형태로 고백한다. 모든 글은 일종의 고백이고, 모든 고백은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는 시간/신, 즉 ‘나’이다. 회고록은 자기를 드러내고, ‘일기는 자기를 향해 쓰는 기도이다.’ 이것은, 파스칼을 따라 말하면, 위대함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비참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사람은 위대하다고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는 비참하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진정 위대하다,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팡세』)


그런데 그 위대함의 획득이 끝에 가서 이루어진다니! 마지막이라니! 이 끝 다음에 무언가 있지 않다면 이 획득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렇지만 끝은 끝. 마지막은 마지막. 끝 다음에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고, 마지막에 이르렀는데도 또 갈 곳이 있다면 거기는 마지막이 아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끝 다음에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시작이다. 끝 다음에는 시작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마지막에 도달한 다음에 갈 수 있는 곳은 출발점밖에 없다. 종착역이 출발역과 같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슨 대단한 역설이 아니다. 우리는 종착지에서 출발한다. 이 문장은 다음 문장과 의미가 같다. 우리는 출발지에 도착한다. ‘세상의 끝’이 나의 등뒤, 나의 내부, 나 자신이라는 것은 곧 마지막이 출발점과 같다는 뜻이다. 앞을 향해 끝까지 걸어 처음에 이른 것이다. 

안타를 친 타자는 홈에서 출발해 홈으로 돌아온다. 윷놀이 판의 말이 돌아와야 하는 곳도 출발한 곳이다. 도착점이 시작점이다. 그러나 시작점이 도착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출발하지 않고 도착할 수는 없다. 출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시작점만 있을 뿐 도착점은 없다. 아니, 그에게는 시작점도 없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해서 도착한 사람만이 도착점을 가진다. 출발해서 도착한 사람에게만 도착점이 시작점이 된다. 이때 시작점은 도착 이후의 시작점이다. 그는 시작점으로 돌아왔지만, 원래 있던 자리로 단순히 회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자리에 선 것이다. 자리는 같지만 그 자리는 같은 자리가 아니다. 그는 도착한 자로서 시작점에 선 것이다. 그는 세상의 끝까지 갔고, 거기서 시간/신, 즉 ‘나’에 의해 발각되었고, 발각되어 벌거벗기움(고백됨)의 상태에 이르렀고, 그러므로 그는 다른 그다. 고백한 사람은 고백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고백한 사실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그렇다. 그는 개종한 사람과 같다. 개종한 사람은 개종 전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중력과 관성에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이니, 개종은 되풀이해서 일어나야 한다. 거듭 시간/신의 눈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거듭 도착해야 하고 늘 출발해야 한다. 출발하기 위해 도착해야 하고 도착하기 위해 출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므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일 때만, 다른 사람으로서만 새로 출발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