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넌 자라 독후감 쓰는 일을 하게 될 거야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래 희망은 의사다. 일곱 살 즈음의 꿈으로 기억하는데,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유치원에서 예쁘게 꽃모양으로 오린 색종이에 각자의 장래 희망을 쓰고 그 아래 자신의 사진을 붙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장래 희망: 의사’라고 삐뚤빼뚤 적힌 글씨 아래 이 하나가 빠진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사진을 통째 코팅해 내가 중학교에 갈 때까지 냉장고에 붙여놓았다. 물론 왜 하필 의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린 시절 만나본 어른 중 가장 권위 있고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의사 선생님들이란 흔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열 살 때 꿈은 화가였다. 당시 담임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그림 작업을 하는 분이셨는데, 선생님의 전시를 보고 와서 나도 저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그 꿈은 금방 접었다. 당연했다. 난 화가가 멋있다고 생각했을 뿐, 그림을 잘 그리거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 이후 유년기부터 청소년기 동안의 꿈은 놀라우리만치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엄마에게 전화해 물어보았더니 “이것저것 두루 좋아했던 것 같은데…… 딱히 뭐가 되고 싶어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네”라며 마찬가지로 당황해하셨다. 나야 어린이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직접 양육하신 부모님마저 기억하지 못한다니. 아무튼 하나는 확실했다. 그로부터 이십 년쯤 뒤에 ‘기자’가 되리라고는, 부모님도 나도 확실히 몰랐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1991년 6월 7일 낮 12시 30분에 태어났다. 사주 보는 여자는 내게 ‘신문에 이름 날 사주’라 했다. 만 명 중 한 명 있는 사주라고 했다. (물론 범죄자가 될 사주로도 풀이할 수 있었겠으나, 부모님은 의심 없이 ‘큰 인물’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사주 보는 여자는 ‘재주로 벌어 먹고살 팔자’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그 ‘재주’라는 말이 늘 찜찜했다. 나는 ‘재주’ 같은 거 말고 ‘재능’이 갖고 싶었다. 그럭저럭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것 말고, 아주 자연스럽게 갖고 태어나 그것이 아니면 다른 수가 아무것도 없는, 말하자면 강력한 운명 같은 것.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압도적인 것. 그리고 가능하면 그 재능이 아주 눈부신 종류의 것이어서 많은 사람이 나를 알아챌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존재가 너무 시시한 나머지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를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런 재능이 있다면 이토록 지난한 직업 탐구의 여정은 거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재능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는 지루한 가능성의 시간들이었다. 뭐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시 말해 어느 것에도 딱히 이렇다 할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미술의, 음악의, 체육 계통의 진로를 결정하고 그걸 위해 정진할 때 나는 그냥 공부를 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던 건 아니지만, 재능은커녕 재주도 발견하지 못한 청소년에게 공부가 제일 만만한 선택지이긴 했다. 물론 책 읽기와 일기 쓰기를 즐겨 했다는 점에 미뤄 혹시 내가 이쪽 계통(?)의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렴풋하게 짐작해보긴 했다. 하지만 상위권 성적을 가진 대한민국의 수험생에게 그건 그저 시험 기간 다른 과목보다 국어 공부를 소홀히 해도 상대적으로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다는 유용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전히 확실한 재능은 발견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어영부영 수능 공부를 했고, 어쩌다가 대학에 갔다. 그쯤엔 내가 무엇이 될진 몰랐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게 됐는데, 나는 영화와 문학을 좋아했다. 그것들에 대해 읽고 보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온통 불가해한 것투성이인 세계에서 시야가 그나마 뚜렷해지는 순간은 전부 거기에 있었다. 물론 좋아하는 것과 그걸 직업으로 삼는 것 사이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게 경험이었다. ‘좋아한다’와 ‘한다’ 사이에 있는 ‘하고 싶다’를 실천해볼 타이밍이었다.


2011년 겨울, 한강 어귀 어느 공원에서 독립영화 촬영이 한창일 때였다. 나는 제작부 막내였고, 맹렬한 추위에 입이 다 얼어버린 배우들과 움직임이 둔해진 스태프들을 위해 수십 개의 종이컵에 담긴 믹스 커피를 휘젓는 중이었다. 종이컵 위에 덜 녹은 커피 가루 덩어리들이 둥둥 떠 있었다. 현장에 녹아들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내 존재가 마치 그 가루 덩어리같이 느껴졌다. 첫 영화 현장은 끊임없는 실수와 사죄의 연속이었다. 촬영이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제작부의 일이었는데, 나는 오히려 계속 실수를 연발해 원활한 진행을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내가 정확히 영화를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것도 나를 주춤거리게 했다. 멀리 환하게 빛나는 조명 장비 근처에서 배우들과 감독님, 주요 스태프들이 다음 촬영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진짜’ 영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믹스 커피 스무 개를 타는 게 영화 같지는 않았다. 영화를 하고 싶어서 찾아온 현장이었는데, 영화를 ‘한다’는 게 뭔지 점점 더 모르게 되는 것만 같았다. 내가 풀죽어 있는 게 느껴졌는지 제작부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많이 춥지? 제일 힘든 현장이 겨울 현장인데 하필 첫 현장이 이래서 어떡하냐.”

“선배, 근데 제가 진짜 영화를 하고 있는 게 맞을까요? 저기 감독님이랑 배우들이 영화를 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저중 한 명이라도 아프거나 사라지면 영화를 찍을 수 없겠죠. 그런데 제가 지금 당장 사라져도 영화를 못 찍는 건 아니잖아요. 믹스 커피 타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잖아요.”

“뭔 소리야. 제작부 막내가 얼마나 중요한데. 너 없으면 현장 안 돌아가지. 당장 내 할일이 얼마나 늘어나겠어. 야 안 돼. 너 도망가면 절대 안 된다?”


그 말이야말로 평범하지만 진리인 답이었다. 영화는 절대 감독과 배우만으로 만들 수 없었고, 모든 스태프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줘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미숙함에, 좌절할 대로 좌절한 귀에,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내 머릿속은 이미 ‘믹스 커피를 타는 게 절대 내 재능일 리 없어’라는 확신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좌절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좋아하는 걸 잘하게 되기보다, 좋아해도 잘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는 게 어른이 되는 과정 같았다. 영화감독, 드라마 작가, 소설가, 기자…… 내 재능은 도대체 어디 있을지 찾아 헤맨 끝에 나는 신문사에서 문학 기사를 쓰는 기자가 되었다. 많은 실패와 타협 끝에 찾아낸 ‘내 일’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내게 ‘딱 맞는 직업’이라는 얘기를 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도 문학 기자가 되기만을 꿈꾼 적은 없었는데, 돌이켜보니 그간의 모든 실패들이 이 직업을 위한 준비 과정처럼 보였다. 나만 몰랐을 뿐이지 처음부터 나를 위해 마련된 직업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탐구해온 지난 모든 순간이 유용했다. 심지어 실수뿐이었던 제작부 막내 경험까지도.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소녀시대 태연이 “왜 노래를 하세요?”라는 질문에 “잘하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하는 것을 봤다. 재능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구속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반대로, 어느 것 하나 특출나지 않아 오랫동안 방황한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탐구할 기회를 실컷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세상엔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일과 직업이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 내게 “어떻게 문학 기자가 되셨어요?”라고 물어봐도 “그러게요……”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만 몰랐을 뿐이지. 게다가 어쨌든 ‘신문에 이름 날 사주’라는 예언은 맞아떨어진 셈이다. 거의 매일같이 신문에 이름이 나는 신문기자가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