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봄―터널

손을 잡으면 손안에 터널이 생긴다. 우리의 손등이 터널의 외부를 지을 때 세계는 작은 터널이라는 비밀을 간직한 장소로 변모하고, 우리는 손안의 어둠이라는 비밀을 생성하고 수호하는 두 사람이 되어 걸어간다. 터널을 들고 터널 안을 걷기. 터널의 안에는 인도와 차도가 구별되어 있어 빠르게 달리는 차들 곁을 느리게 걸을 수 있다. 우리 손안의 터널에도 인도와 차도가 구별되어 있다면 그곳을 느리게 걷는 것들은 어떤 미래일 것이다. 영원히 터널의 밖으로, 맞잡은 두 손의 밖으로 쏟아지지 않는 미래. 미래는 우리의 잡은 손 안에 갇혀 있다. 미래를 가두며 걷기. 다른 연인들이 잘하는 것을 우리도 잘한다.


터널의 입구에서 어둠으로 북적이는 터널의 안을 본다. 입구 앞에 설 때 출구의 존재는 사실이 아니라 믿음이고, 우리는 그러한 믿음으로 터널 속 어둠에 발을 담글 것이다. 어두운 곳에 들어갈 때 손을 잡듯이 밝은 곳으로 나갈 때에도 손을 잡는다. 명도는 우리의 모습을 스펙트럼화한다. 어떤 빛도 너를 결정하지 않는다. 어떤 어둠도 그러지 않듯이. 그러나 시간을 얇게 쪼개면 매 순간 결정은 무수하게 내려지고, 그렇기에 결정은 없다고 보아도 좋다. 혈관 속 혈액 흐르는 소리. 이 흐름의 무엇도 결정할 수 없음.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편이 인간적이다. 오늘 네가 입은 선명한 파란색 셔츠 덕분에 어떤 안개는 조금 걷힌다.


너는 나를 결정하지 않고 그것은 내가 너를 결정하지 않는 방식과 같다. 우리를 결정한 계절이 우리를 에워쌀 때 우리는 계절 안에 위치하게 된다. 계절은 강한 손으로 세계에 우리를 고정하는 압정을 박는다. 그래서 계절은 얼마간 살과 뼈를 뚫는 흐릿한 아픔이다. 오션 브엉의 시 「노트의 파편들」에는 할머니가 “신은 계절인가봐”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뒤이어 그는 “신이시여, 당신이 정녕 계절이라면, 내가 여기에 오기 위해서 통과한 계절이옵소서”라고 쓴다. 그렇다면 나에게 신은 통증이고, 내가 통과한 계절은 내가 통과한 통증이다. 살아 있음은 언제나 신을 동반하듯 통증을 동반하고 통증은 나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빛이 그 아픔의 표면을 어루만진다. 그러므로 빛은 나의 음악, 나의 오케스트라, 록밴드이자 아기 상어. 그래서 이번 봄에도 봄을 따라 부르며 죽지 않기. 봄을 총체적으로 거절하지 않기. 봄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벌어진 손가락 사이를 조금 찢어놓는다. 살아 있다는 뜻이다. 멀리 있는, 나의 죽은 친구들에게도 이 빛이 닿아 삶과 그들의 거리가 좁혀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나의 마음도 조금 찢어지는 것 같다.


터널을 건널까. 터널 안에서 미래는 빛. 현재는 어둠. 아니다. 미래는 커다란 안개여서 빛나는 현재로도 그것을 뚫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은 현재도 안개고 과거도 안개다. 우리는 안개로 안개를 뚫으려 했나. 터널 앞에서 우리는 멈춰 선다. 한 무더기의 개나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봄에 처음 만나는 개나리는 언제나 부드러운 충격을 준다. 봄볕은 개나리와 우리에게 공평하게 쏟아진다. 개나리와 우리는 공평하게 서로 마주본다. 우리의 눈동자가 노랗게 차오른다. 개나리에게 눈동자가 있다면 그 속에 우리가 차오를 것이다.


터널 안으로 들어가면 개나리는 선명한 과거가 되겠지. 터널 안에서 문득 뒤돌아볼 때 개나리는 사라져 있을 수도 있다. 개나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만 있어 영원히 그 앞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면으로 남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나의 등뒤를 잘 믿지 못하는 편이다. 터널 속 어둠과 개나리는 한 개의 직선 위에 배치되어 있다. 우리가 개나리를 등지고 걷는다면 반대편에서 오는 누군가는 개나리를 향해 걷게 된다. 우리에게 입구였던 곳이 그에게는 출구가 되어 마침내 터널 밖의 터지는 빛 속에서 한 무더기의 개나리를 보게 되고, 부드러운 충격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노랗게 차오르고…… 같은 터널을 걸었던 이상 타인은 더는 완벽한 타인이 아니게 된다. 공간이 시간과 무관하게 사람들을 엮어내는 방식이다.


개나리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는 잡았던 손을 잠시 놓는다. 작은 터널이 허공에 풀어진다. 개나리는 주변의 빛을 모두 빨아들인 것처럼 밝다. 그러나 너의 빛은 여전히 너의 것으로 있다. 너의 파란 셔츠는 노란 개나리 아래에서도 여전히 파랗고, 파란색은 자동적으로 바다의 이미지를 불러오고, 나는 바람이 불어 넘실거리는 너의 셔츠 앞섶에서 우리가 아직 가지 않은 미래의 바다를 본다. 수면의 잔물결이 너를 감싸며 느리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바다는 우리의 미래. 개나리는 우리의 현재. 파랑과 노랑이라는 색채의 명랑한 이름하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느슨하게 뒤섞인다. 노란 개나리 아래에서 파란 옷을 입은 너는 웃고, 나는 따라 웃으며 너를 찍는다. 평면 위에 이미지를 생성하고 간직하기 위해 너의 실물과 부피, 구체성을 유실한다. 사진이 생긴다. 사진은 떠오른다. 너의 표면이 사진에 담길 때 표면이란 얼마나 표면에 불과한 것인지 생각한다. 그러나 너의 표면으로 너를 기록하는 일이 좋다. 세계의 표면으로 세계를 기록하는 일을 좋아하듯이. 표면 없이는 실물도 부피도 구체성도 없다. 너의 표면과 봄의 표면이 하나의 평면 위에 담긴다. 사진에는 깊이가 없고 사각형의 넓이만이 존재하지만 평면 이미지에서 깊이를 보는 것이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잘 나온 사진. 못 나온 사진. 사진들을 보며 함께 웃는 동안 우리는 터널을 잠시 잊는다. 손 안의 작은 터널도 우리가 건너가야 할 거대한 터널도 잊는다. 우리는 봄에 있다. 봄은 우리로써 기념된다. 우리의 사진으로써, 우리의 웃음으로써, 우리의 걸음으로써 우리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봄의 일부가 되듯이. 우리는 이렇게 봄에 참여한다. 콘크리트 벽 위로 길게 늘어진 개나리 덤불의 약한 흔들림처럼 봄의 미세한 움직임이 된다.


다시 손을 잡는다. 잡은 손 안에 어둠이 고인다. 우리 손안에 들어찬 어둠 속에서 미래가 느리게 걸어다니고 있다. 미래는 간지럽다. 어둠을 자꾸 헤치려고 한다. 이제는 터널 안으로 우리가 들어갈 차례다. 네 개의 발이 터널을 향한다. 뻗은 다리들과 두 개의 몸통이 터널 속 어둠에 잠기려 한다. 터널에 들어가는 느낌은 잠드는 감각과 비슷하다. 터널로 가는 길이 꿈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일종의 착각이지만, 때로는 착각이 우리를 걷게 하기도 한다.


터널은 우리에게 발생한 작은 사건이므로 우리는 입구로 들어가 터널 속에 잠기고 터널을 빠져 나와 마침내 터널을 잊어버리면 된다. 그러나 터널에 대해 쓰기로 결정한 이후의 터널은 이전의 터널과 조금 다르다. 집 앞의 이 짧은 터널을 건너는 일이 하룻밤의 잠처럼, 혹은 몇 달간의 여행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터널이 나에게 하나의 글이거나 혹은 글이 되기 직전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터널에 대해, 터널 입구에서의 우리에 대해 이렇게 적음으로써 터널은 종이 위에서 변주되고 증식한다. 터널은 너무나 중립적이어서 무한하다. 터널에 대해서라면 한없이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오늘은 터널을 통과하는 봄날의 우리에 대해서만 쓰기로 결심하였고, 사실 그 역시 한없이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죽을 때까지 터널에 대해서만 쓰기.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터널은 세계가 잠깐 꺼졌다 켜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잠깐은 영원이며 쓰는 일이란 곧 영원에 대해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자. 기록. 이미지. 나는 이 터널을 우리의 은유로 삼지 않도록 주의한다. 터널에 대한 묘사가 우리의 관계를 반영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터널은 빛과 어둠, 안과 밖이 모두 존재하는 양가적인 공간이고 따라서 글을 쓸 때 이분법적으로 사용되기 좋은 구도를 형성한다. 나는 그것이 편리한 은유로써 무언가를 손쉽게 의미해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와 봄과 터널에 대한 나의 기억과 감각이 종이에 적힘으로써 나에게서 지워져버리는 일은 좋다. 나는 내 삶의 여러 국면들을 글로 씀으로써 잊어버리고는 했다. 아마 다른 방식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잉크로 적힌 얇은 글씨의 한 획마다 팽창하는 허공이 투입되고, 획들이 작은 점으로 분해되어 점들은 서로 멀어지고, 마침내 그것을 지워짐 혹은 사라짐이라 부르게 되는 일련의 행위가 터널에 대한 쓰기를 모두 이루게 되는 것. 그 역시 마음에 든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터널을 지나야 집에 갈 수 있다. 터널 속의 걸음을 추동하는 집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단단한 몸에 명백하게 달려 있는, 텍스트도 관념도 아닌 두 발의 움직임으로 그곳에 간다.


터널에 들어선다. 터널이 조금 찢어진다. 잡은 손 안의 어둠이 흔들린다. 공간에 들어서는 일은 언제나 조금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느낌에 대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터널을 걸으며 신발 밑창에 닿는 땅의 감촉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묘사할 수 없다. 눈동자에 닿는 터널의 풍경은 어쩌면 빛과 어둠에 기대어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감각이 묘사될 수 있거나 말거나 우리는 걷는다. 눈앞에 들어찬 터널 속 어둠을 헤치며 나아간다. 몸안으로 쏟아지는 감각의 낙수를 감당하면서. 터널 속의 추위가 살에 닿는다. 아스팔트 바닥 위로 출렁거리는 녹색 빛에 우리의 그림자가 섞이고, 눈동자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묻었다 다시 지워진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이 진동시키는 터널 안의 공기는 나의 귓속으로 흘러들어와 고막을 건드린다. 터널 안에서 나는 너의 손을 잡고 있지만 너와 닿아 있는 오른손을 제외한 신체의 넓은 표면은 터널 안의 모든 것과 스킨십한다.


스킨십은 물질 간에 가능한 것이다. 정보에는 물성이 없다. 그러나 이 터널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터널이야라는 말은 터널에 관한 정보를 소리로 전환하여 나의 고막을 울린다. 터널이 준공되었던 1967년의 서울에 우리는 없었다. 혹은 우리가 아직 우리 아닌 것으로 있었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소립자로 우주 어딘가에 흩어져 있다가 1990년을 전후해 우리의 신체로 건축되었다. 백 년이 채 지나기 전에 우리는 다시 작은 입자들이 되어 먼 곳으로 흩어질 것이고, 다시는 같은 몸으로 모여들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체로 존재하는 시간은 사실 아주 잠깐에 불과하다. 터널이 터널의 신체로 존재하는 시간은 아마 그보다 좀더 길겠지. 나는 서울 여기저기에 뚫려 있는 온갖 터널들을 상상한다. 인간의 편리한 이동을 위해 부서져내린 산의 뼈와 살들. 그 잔해들은 지금쯤 모두 어디에 있을까. 우리집 화분에 담긴 한 줌의 흙이 칠십여 년 전 내가 걷는 이 터널을 채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산에서 오래전 나의 직계 조상님이 실족해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흙은 나의 조상님의 일부이고 이 터널은 조상님의 무덤이며 나는 조상님의 후손이므로 터널과 흙과 나 중 그 무엇도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모든 것, 그러니까 토성의 고리와 아버지의 결혼반지, 해 뜰 무렵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구름, 포름알데히드 병에 담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뇌, 그 유리병의 유리를 구성하는 모든 모래알과 아인슈타인이 그 뇌에서 떠올린 모든 생각, 내 고향 불가리아의 릴라 산맥에서 들리는 양치기 처녀들의 노랫소리와 그네들이 모는 양떼의 모든 양 (……) 내가 사랑하는 이의 북두칠성 모양 주근깨와 내가 그녀를 사랑할 때 부드럽게 진동하는 축삭돌기의 모든 떨림, 우리가 끊임없이 현실을 파악하고 바꾸는 도구로 사용하는 모든 사실과 환상, 이 모든 것은 138억 년 전 한 점에서 폭발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흙과 나와 터널 말고도, 세계의 모든 것이 실은 같은 점의 분신들이다.


터널은 넓고 길다. 백 명쯤 나란히 행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터널의 천장까지 이어진 높고 투명하고 지저분한 벽이 차도와 인도를 분리하고 있다. 그것은 오래전에 하늘로부터 터널을 향해 내리꽂힌 거대한 칼의 단면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 벽의 안쪽에서 걷고 있다. 더 좁은 쪽을 안쪽이라고 부르는 언어 습관. 외부와 내부라는 개념은 ‘오다’와 ‘가다’라는 동사처럼 주체의 위치를 희미하게 드러낼 뿐이지만 주체가 누구든 자신의 외부보다는 내부에 더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내부는 언제나 외부보다 좁은 장소다. 애정이란 언제나 더 작은 것을 향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세계를 통째로 사랑하거나 인류 전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언제나 자신의 개를 더 좋아한다. 그렇다면 터널의 안쪽은 터널의 바깥쪽보다 더 좁고 작기에 안쪽이라 불리는 것일까. 안쪽이라는 단어가 가진 온기를 생각한다. 내 마음대로 터널의 안쪽을 세계의 바깥쪽이라 불러도 될까. 세계를 주체의 자리에 놓아 보아도 될까. 터널의 안이 세계의 밖이라면 이곳은 아주 작은 밖, 드물게 안보다 작은 밖이다. 안과 밖이 뒤바뀔 때 출구는 입구가 입구는 출구가 될 것이다.


터널의 입구에는 개나리가 피어 있었다. 마침내 우리가 이 터널을 통과해 출구를 빠져나온다면 그곳에는 벚꽃이 피어 있을 수도 있다. 아직 벚꽃이 피기에는 이른 시기이지만, 터널이 우리가 걷는 동안 며칠의 시간을 앞질러 분홍색 꽃잎을 잔뜩 틔운 벚나무 앞으로 우리를 데려간다면? 혹은 우리를 실은 터널이 거대한 손에 의해 한 개의 롤케이크처럼 번쩍 들려서 옮겨진다면, 그대로 벚꽃 가득한 미래에 도착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처럼 어둡고 흐리고 미세먼지 가득한 봄 말고 봄이라는 관념에 가까운, 봄이라는 계절의 진부함을 실현하는 장면, 터널 밖 눈부신 빛 속에 도착했을 때 그 빛을 부드럽게 채우는 봄의 풍경이 우리의 눈동자 속에 차오르게 될지도.


혹은 터널이 우리를 전혀 다른 계절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터널을 지나면 눈 덮인 설국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우리는 떨며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터널 안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터널의 밖에 설국이나 미래의 벚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나의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풍경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곳을 지나면 외출하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의 집이 유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익숙한 집이 우리를 환대하리라는 정확한 믿음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우리를 걷게 한다. 미래는 믿음으로써 현재가 된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우리가 들어온 터널의 입구는 그의 출구가 될 것이다. 그곳은 우리의 출구와 마찬가지로 목적지가 있다는 믿음과 그를 연결하는, 목적지를 실현하는 풍경이 될 것이다. 그와 내가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서로를 지나친다. 살과 뼈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우리가 터널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