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첫번째 질문: <성덕>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성덕 일기> 연재에서는 영화 <성덕>의 관객과의 대화(GV)에 등장했던 질문들을 주제로 삼으려 합니다. 기억하고 싶은 좋은 질문을 기록하고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대답을 마음껏 해보려고 합니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극장을 찾는 가장 자연스러운 이유였지만, 때로는 영화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기도 했다. 그건 바로 GV. 영화 팬들에겐 익숙한 두 글자가 누군가에겐 생소할 것이다. ‘Guest Visit’의 약자인 GV는 쉽게 말해 관객과의 대화를 뜻한다. 그러니까 감독이나 배우 등 영화의 직접적인 관계자가 영화 상영 후에 관객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본 직후에 감독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씨네필 지망생이었다씨네필이라고 스스로를 칭하기엔 너무나 거창하고, 씨네필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지망생 정도의 상태가 알맞았다.

 

갑작스럽게 영화에 꽂혀버린 열일곱,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인터넷 강의를 듣는 척 하고 영화만 보던 나는 그 해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가본 영화제였다. 관객과의 대화도 처음인지라 분위기를 살피느라 질문은 마음 속에만 남겨두었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마주친 감독과 배우를 모르는 척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사진과 친필싸인을 얻어내고, 묻지도 않은 감상까지 주절주절 쏟아내며 소극적인 관객을 자처하던 나의 첫번째 GV 경험이 끝났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민평론단으로 일하기 시작한 열여덟에는 이미 GV 마니아라고 쓰고 빌런이라고 읽는다가 되어 있었다. 하루에 영화 네 편을 가득 채워 시간표를 짜다 보니 그 중 두세 번은 영화 관람 후에 감독에게 직접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GV회차를 우선으로 두고 시간표를 짰는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이지 궁금한 게 많은 영화과 입시생이었고심지어 호기심 많은 나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모더레이터(사회자)가 관객들을 향해 눈길을 주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궁금해 미치겠거나 영화의 감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만한 심오한 질문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나는 그냥, 영화를 만든다는 엄청나게 멋있는 일을 해낸 사람과 말을 섞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쥐어짜낸 질문들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아아. 마이크가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고등학생인데요. (중략) 제가 감독님 영화는 처음 봐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하.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그래서 제 질문은요. 별거 아니긴 한데, 고양이가 두 번 등장하던데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 의도하신 건가요? 제 생각에는요(후략).”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이지만, 감독을 피로하게 만드는 데 제대로 기여하는 질문들을 마구 퍼부었다. 거기다 저마다의 해석과 감상쯤으로 남겨둘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취조를 하듯, 프로파일러가 된 것 마냥 탈탈 털어내려고 했다. 이를테면 해석을 열어두고 마무리한 영화의 결말을 굳이 감독의 입으로 다시 들으려고 한다거나, 여운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인물의 행방을 묻는다거나 하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다.

 

이쯤 되면 <성덕>을 만든 계기를 물었더니 왜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나 싶을 것이다. 이 말을 하기까지 서론이 참 길었다. GV 빌런으로 활약하면서 자주 했던 질문 중 하나는 왜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냐는 것이었다. 누구나 궁금해할 만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당찬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그대로 돌아왔다.

 

GV 빌런의 횡포로 얼룩진 다른 질문들이야 그렇다 쳐도, 이 질문이 감독을 괴롭게 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런데 상황이 역전되어 질문자가 아닌 답변자의 위치에 서게 되니 이 간단한 질문이 의외로 가장 고민스러웠다.

, 이 영화를 왜 만들기 시작했지? ,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얼마나 자세히 말해야 할까. 아니 그런데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와 이렇게 완성하게 된 계기는 또 다른데 그럼 이 영화를 이렇게 완성하게 된 계기를 말해야 하는 건가. 아니지, 시작을 물었으니까 가장 처음의 기억으로 들어가야지. 그런데 처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시작한 때와 내가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때는 또 다른데 언제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렸다.

 

십 대 시절을 다 바쳐 사랑한 OPPA가 성범죄자가 되어버리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 며칠은 분노로 들끓었지만 며칠은 별생각 없이 보냈다. 매일매일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느라 감정을 소진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사건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 하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항상 품고 있었다. 눈물을 찔끔 흘렸다가,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인해 기분이 어떤지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를 거쳐, 그 사람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유머로 승화하기에 이른다. 나의 고통은 타인의 행복이 된다고 했던가. 친구들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다가도 눈치를 살피며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취향이라며 은근슬쩍 놀렸다. 그럴 때면 나도 함께 웃었다.

 

그러다 지인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그동안은 상상도 못했던 말을 들었다. 그걸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든 일을 영화와 연결짓는 경향이 있다. 일상에서 작은 사건 하나만 생겨도 영화 같은 일이라거나, 영화로 만들자는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한다. 그렇기에 그 말 역시 그냥 농담이겠거니 생각했다. 실제 경험이 영화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줄곧 해왔지만, 그게 이번 사건에도 적용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의 입으로 몇 번 더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영화의 제목은 뭘로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자기도 출연시켜 달라는 친구들도 하나둘 생겨났다. 한 번 읽어보고 말았던 기사들을 다시 정독하고, 캡처해서 보관해두기 시작했다. 커뮤니티나 SNS에서 팬들의 반응을 수집해 따로 폴더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슬슬 뭔가가 진행되는 상황에 재미를 느끼면서도, 이게 영화가 되겠나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뜨는 마음을 억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팬사인회 줄을 서다 친해져서 덕질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동생 B와 통화를 했다. 사전 취재라기보단 어디 털어놓을 데 없는 속마음을 들어주는 것에 가까웠지만, 우리는 오랜만에 긴긴 대화를 나눴다. B는 말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면서 수행하는 많은 일들매일 이름을 검색하고,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보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고. 그래서 한동안은 사건에 대해 자세히 찾아보는 것으로 그 일들을 대체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대중과 언론의 관심도 줄어들고, 정말 아무런 새로운 소식도 접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드니 일상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그 말을 들으니 내 속에 있던 슬픔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웃고 털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었다. 추억을 빼앗기고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 다시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이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주제 넘는 생각이긴 하지만, 나는 B를 비롯한 친구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나도 그들에게서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과의 대화가 필요했다.

 

그 즈음에 오빠가 범죄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팬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질이 강제종료된 팬들이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남아 있겠다는 팬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제발 그만하라고 말리고 싶은 욕구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참으로 대단한 오지랖이다. 우습게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라는 질문의 목적지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나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누굴 좋아할 수 있었던 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시절의 내가 꼭 남처럼 느껴졌다. 내내 함께였다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 과거의 나와 여전히 남아 있는 팬들에 대한 궁금증은 날로 커졌다.

 

이게 영화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당장 만나고 싶은 사람과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팬들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결심 외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카메라조차 없으면 금방 흥미를 잃고 포기해버릴 것 같았다. 포커스가 잘 맞는지 그런 기술적인 것들은 모르겠지만 일단 Rec 버튼을 누르고 눈 앞에 있는 것들을 찍어보자고. 인터뷰 방법론 같은 건 역시 모르지만 그냥 실컷 화내고 신나게 욕하고 소리 내 웃자고. 별 의미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날짜별로 폴더가 쌓이고 찍은 만큼 데이터가 쌓이니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미 <성덕>이라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하게 될 줄 몰랐는데, 신이 나서 쓰고 나니 그냥 다 허세인가 싶기도 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벼락을 맞듯이 어떤 계기가 번쩍 하고 생기지는 않았다. 누군가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물으면 분노가 원동력이 되어 카메라를 들었다고도 했고, 궁금증이 생겼다고도 했다. 다 맞는 말이지만, 결국은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어주었다. 우리가 겪은 웃기고 슬프고 화나는 상황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고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은근한 자신감도 있었다. 갖은 이유를 들어 설명할 필요 없이이미 다 설명했지만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것. 어쩌면, <성덕>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게 다였다.

이 작품은 매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