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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2021년 <성덕>이 세상에 나왔다. <성덕>은 범죄자가 된 ‘OPPA’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보낸 감독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친구들과 만나는 여정을 담은 블랙코미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기행문을 닮은 이 영화는 가을치고 꽤 후덥지근했던 10월의 어느 날 부산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그 이후로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사람들과 만났다. 새해에는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또 다른 여정을 준비 중이다. (개봉박두!)


성-덕-일-기 라는 네 글자를 뜯어본다. 성(공한)덕(후)보다는 실(패한)덕(후)에 가까운 내가 ‘실덕 일기’가 아닌 ‘성덕 일기’를 써도 되는 걸까. 일기라는 이름을 달고 쓰이는 글은 얼마나 솔직해야 하나.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의 제목을 일기 앞에 붙이고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의식하고 쓰는 글이 일기가 될 수 있나.


일기를 너무 좋아해서 매일같이 일기를 쓰고, 처음 만든 영화에서 일기 몇 쪽을 읽기도 하고, 아예 영화 자체를 일기장처럼 만들기도 했다. 솔직함에 대한 갈망과 일기에 대한 애정은 언제나 함께 자랐다. 그래서 크기도 두께도 다른 수십 권의 일기장에다 기분과 생각과 마음과 시간을 쌓아놨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일기를 쓸 때 완전히 솔직해지지는 못했다.


일기장을 꼬박꼬박 선생님께 검사받아야 했던 초등학교 때는 그렇다 치자. 할머니가 불고기를 해줬는데 맛있었다고 쓰는 것이 친구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사건에 대해 쓰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일기장을 검사하다 학급의 문제 상황을 직면하고 심란해하실 선생님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 텐데, 내가 그걸 인정하고 글로 써 내려가기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는 선생님을 배려하는 나 자신에 취해서 스스로 멋있는 어린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오로지 내 의지로 일기를 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어떤 불안감이 생겼다. 일기장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혹시나 일기장의 등장인물이 이걸 읽게 되면 어떡하지? … 일기장의 주인이 나라는 것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장면이 자꾸만 그려졌다. 그때부터는 일기장과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사람에 대해서 쓸 때 이름 대신 이니셜을 썼다. 마음속에 있는 고민보다는 가벼운 생각이나 앞으로의 다짐에 대해 썼다. 그러다 보니 일기장을 펼치는 횟수가 줄어들고, 지난 일기를 봐도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관객분들께 <성덕>이 솔직한 영화라는 평을 들으면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웠다. 일기를 쓸 때조차 솔직하지 못한 내가, 다른 이에게 꾸밈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모순이 참 우습다. 영화를 만드는 내내 나를 잘 들여다보고, 속마음을 다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치만, 더 솔직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관객분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귀중한 질문들을 받고서는 웃음 욕심에만 사로잡혀 진솔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갖가지 이유로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자꾸만 마음에 남는다. 이건 어쩌면 솔직함에 대한 이상이나 강박이 만들어낸 아쉬움일지도 모르겠다.


<성덕>에게도 일기에게도 더 솔직해지고 싶다. ‘성덕 일기’는 가장 솔직한 이야기가 아니다. 솔직해지려고 애쓰는 이야기다. 깊은 상처와 함께 많은 것을 남긴 지난 사랑에 대해, 숱한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첫 번째 영화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으려는 시도다. 이런 이야기라도 괜찮다면, 일기장을 펼쳐봐 주시길 바란다.


연재는 1월 20일에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