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끝에 서 있는 사람이 겁에 질린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그의 몸은 길게 늘어져 앙상했다. 비쩍 마른 사람 넷이 그를 향해 천천히 모여들었다. 가느다랗고 기다란 몸은 끌로 깎아낸 듯 울퉁불퉁했고, 뚜렷한 윤곽이 없어 유령의 형상처럼 어른거렸다. 그들은 고층 빌딩 외벽에 설치된 미디어 파사드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자신이 갇힌 줄도, 전시되는 줄도 모르고 길을 걸었다. 제가 있는 세상이 전부라는 듯 확신에 찬 시선을 타인에게 던진 채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도시는 거대한 파사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에 따라 색채를 바꿨다.
빌딩 건너편 광장에서 검은 털모자를 쓴 노숙자가 털이 더러운 강아지를 데리고 앉아 동냥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하얀 손이 불쑥 다가와 천원짜리 지폐 네 장을 떨어뜨렸다. 지폐는 은총처럼 허공에서 나팔나팔 떨어졌다. 노숙자가 돈을 보고 좋아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털이 깨끗한 강아지를 데리고 걸어가던 여자의 뒷모습이 이십사 시간 편의점 불빛을 이고 있다가 곧 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털이 더러운 강아지가 발딱 일어나서 편의점과 노숙자를 번갈아 보며 팔짝팔짝 뛰었다. 노숙자가 강아지를 보고 캬, 하며 술 마시는 시늉을 하자 강아지가 재촉하듯 더욱 요란하게 뛰어댔다. 노숙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근처 벤치에 앉아 있던 또다른 노숙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의 절반이 턱수염으로 뒤덮인 노숙자는 빈 막걸리 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었다. 병 바닥에 깔린 술지게미를 탈탈 털어 입에 넣은 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털모자를 쓴 노숙자 앞을 가로막고 섰다. 털모자가 저리 가라는 듯 어깨로 턱수염을 밀쳐냈다. 실랑이는 몸싸움으로 번졌다. 처음에는 고성과 욕설이, 나중에는 주먹이 오갔다. 턱수염이 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위협했다. 털모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턱수염이 칼을 휘두르자 털모자가 복부를 부여잡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러면서도 손에 꼭 쥔 지폐를 놓지 않았다. 턱수염이 털모자의 손에서 피 묻은 지폐를 빼냈다. 그걸 본 털이 더러운 강아지가 왈왈 짖었다. 턱수염이 겁에 질려 강아지를 발로 찼다. 강아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강아지가 내지르는 소리에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턱수염 안에 처박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턱수염이 두려움에 몸을 떨며 주위를 살폈다. 어둠 속에서 편의점 간판이 빛을 발하며 신기루처럼 이글거렸다. 그 아래 부착된 CCTV가 그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턱수염이 몸을 움츠리고 돌아서서 다시 주위를 살폈다. 빌딩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은 너무 밝았고 CCTV도 너무 많았다. 턱수염은 광장 한가운데서 쏟아지는 조명 빛을 받고 서 있다가 뭔가 결심한 듯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광장 위 고가에 조성한 공원은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푸른빛을 띠는 경관 조명이 도시의 혈류처럼 공원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휘어졌다가 펼쳐지고, 펼쳐졌다가 휘어지는 푸른빛이 어둠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 아래는 도로였다. 도로는 붉었다. 차량의 흐름을 좇아 붉은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턱수염은 공원길 유리 펜스 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미디어 파사드에 전시되는 사람들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허깨비처럼 몸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턱수염이 있던 광장에는 털모자가 바닥에 묻은 검은 얼룩처럼 쓰러져 있었다. 턱수염이 유리 펜스를 향해 발을 디뎠다. 발은 자꾸 미끄러졌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펜스 위에 몸의 절반을 걸친 턱수염이 반동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천원짜리 지폐 네 장이 허공을 휘저으며 나부끼다가 도로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수십 개의 CCTV 화면이 이 모든 모습을 조각조각 이어붙여 보여줬다. 투신한 노숙자는 즉사했다. 흉기에 찔린 노숙자는 새벽까지 방치되어 있다가 구조되었는데 다행히 중상은 아니라고 했다.
뉴스를 보던 남자가 슬그머니 방에서 나왔다. 그의 누나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이 방에 남아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남자는 소주 한 병을 들고 주방 겸용으로 쓰는 거실로 갔다. 그러고는 동선에 방해되지 않도록 한쪽 벽면에 웅크리고 앉아 술을 마셨다. 또다른 방은 문이 닫혀 있었다. 닫힌 문 너머에는 여동생과 동거하는 이혼남과 그가 데려온 아이가 자고 있었다. 여섯이 살기에는 턱없이 좁은 집이었다. 방 두 칸에 거실 겸 주방이 다였다. 남자는 이곳에 들어올 때 며칠만 머물겠다고 말했지만 몇 달째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남동생과 함께 주방 겸 거실에서 생활했다. 누구라도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에 남자는 거리에 나앉은 기분이었다. 죄다 인상을 쓰고 방에서 나와 인상을 쓰고 화장실에 갔고, 다시 인상을 쓰고 나와 주방으로 갔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그를 챙겼고, 때때로 나가달라고 애원했다. 남자는 그것을 이해했지만 우울감이 깊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울해서 늘 술을 마셨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소도시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기거하며 그곳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남자는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 관리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남자는 돈을 벌어 고시원으로 나가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일용직 일은 경쟁이 치열해 쉬는 날이 더 많았다. 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운전을 할 줄 알았고, 몸이 건강하고 다부졌다.
그는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새로 또 한 병을 비웠다. 그러면서 거실에 놓인 물건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벽면 옷걸이에 걸린 옷 대부분은 남동생의 것이었고 그중 몇 벌만 남자의 것이었다. 모두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가 사준 거였다. 남자는 옷걸이에서 목도리를 집어 목에 둘러봤다. 그건 여자의 것이었다. 여자가 남자의 목에 둘러준 거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되돌려주지 못했다. 그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스마트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런 다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열린 방문 틈으로 누나와 동생들의 옆모습이 보였다. 뉴스 화면이 빠르게 바뀌고 앵커는 또다시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남자는 거실을 서성였다. 몇 발짝 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도 다시 몇 발짝을 뗐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는 국가에서 치러줄 거라고 생각했다. 방치된 사망자는 도시 미관과 위생을 해치기 때문에 공익을 위해서라도 국가가 나서는 게 당연했다. 남자는 그것이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서른이 넘도록 장례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런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 벽면에 난 기다란 채광창으로 햇빛이 흘러들었다. 남자가 밖을 내다봤다. 창 옆으로 개천이 흘렀고, 그 너머 도로에는 주말 나들이 차량이 많았다. 남자는 어딘가로 움직이는 차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현관과 이어진 기다란 복도 끝에 대문이 있었다. 남자는 밖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대문을 바라봤다.
낡고 허름한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노후 지역은 도시와 외곽의 경계에서 외곽 쪽으로 조금 밀려나 있었다. 재개발구역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싼값에 방을 얻을 수 있었다고 남동생이 말해줬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가까운 데 방을 얻어 나가면 서로 왕래하기에도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될 거라는 뉴스가 나오면서 주변 방값은 치솟았다. 그마저도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늘 불안했다.
남자는 좁고 기다란 복도를 계속 서성거렸다. 복도에는 남동생이 사다 놓은 턱걸이용 문틀 철봉이 설치되어 있었다. 남동생은 거기에 매달리고는 했다. 남자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목도리를 풀어 철봉에 걸은 후 매듭을 지었다. 그러고는 철봉에 매달려 매듭 안으로 머리를 밀어넣었다. 남자가 철봉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복도 창문으로 흘러든 빛이 남자의 몸에 비쳐 들었다. 하늘에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고, 구름을 가르며 비행운이 나타났다가 곧이어 사라졌다.
*
질펀히 흐를 용(溶) 자를 쓰는 용수를 태운 비행기가 막 활주로에 들어섰다. 몇 시간 전보다 빨라진 시각과 낮아진 기온을 안내하는 기장의 멘트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승객들은 안전띠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 위 짐칸에서 자신의 짐을 찾아 내렸다. 면세품이 담긴 쇼핑 봉투와 여행 가방, 외투 따위를 손에 든 사람들이 출입구를 향해 늘어서자 통로에 긴 줄이 생겨났다.
용수는 나란히 붙은 세 개의 좌석 중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복도 쪽에 앉아 있던 남자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통로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평온해진 얼굴로 출입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남자를 빤히 보고 있던 창가 쪽 여자가 갑자기 조급해져서 자신의 행로를 막고 느긋하게 앉아 있는 용수를 힐끔거렸다. 인생 복불복, 재수가 없으려니 느림보 옆에 앉게 되었고, 고통을 겪는 건 이 느림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여자는 용수의 움직임을 곁눈으로 주시하며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이삼 분 동안 능동적으로 살겠다던 수많은 밤의 다짐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여자는 어떻게 사는 게 능동적인 삶인지는 알 수 없어서 스스로 자기 권리를 지키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그러자 더는 수동적으로 앉아 그가 일어나기만 바라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동적으로 사는 것은 심각한 피해 상황을 맞닥뜨리게 할 뿐이며, 그 피해를 보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여자는 많은 경험을 통해 알았다. 여자는 그런 감정에 휩싸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너무 급작스럽게, 그것도 너무 벌떡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다시 앉을 수도 없었다. 머리 위 짐칸 때문에 이미 우스꽝스럽게 구겨진 몸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체면이 구겨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게다가 다시 앉는 것은 다른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무 내색도 하지 못하는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고통을 주는 상대방에게 오히려 주도권을 내맡긴 채 멀뚱거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일어섰다가 다시 앉는 것은 처음부터 앉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여자는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 옆자리에 앉은 느림보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 대놓고 용수를 노려봤다. 일어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구부정한 자세로 용수를 빤히 내려다보는 여자의 눈에서 안광이 쏟아졌다.
용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자의 시선 때문에 정수리 왼쪽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정수리에서 시작된 불길은 왼쪽 뺨을 지나 왼쪽 어깨까지 화르르 번졌고 급기야는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용수는 그러나 통로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틈 없이 꽉 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평소 그가 실천하는 방정한 행동의 체계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급박한 상황에서 체계는 시험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시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니고 싶었고, 게다가 당장 통로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며, 더욱이 복잡한 여건에서 원치 않는 상황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그는 그런 생각에 휩싸여 취향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지만 점잖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수준 높은, 품위를 갖춘, 그러면서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등의 수식어만 잔뜩 머릿속에 굴러다닐 뿐 구체적인 취향의 내용은 생각나는 게 별로 없었다. 연수의 쇼핑 목록과 연수가 즐겨 먹는 음식이 떠오를 뿐이었다. 혀끝에서 시고 짜고 맵고 단 차이를 만들어내는 조미료의 세계와 코끝에서 비강을 거쳐 혀의 돌기들과 직접 교류하는 향신료의 세계를 설명하며 개인의 취향마저 유행을 탄다고 말하던 연수의 입술을 떠올리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동시에 여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용수는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타인의 시선에는 감시가 따랐고, 늘 그들이 원하는 행동을 요구했다. 용수는 더이상 여자의 시선을 모르는 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여자보다 더 조급하다는 듯 통로 쪽을 여러 번, 뒤에서 앞까지 찬찬히, 그러고 나서 앞에서 뒤까지 죽 훑어보고는 모두가 줄을 서는 상황에서 줄을 서지 못하는 사람에게 닥치는 손해의 불안과 도태의 공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자신도 통로에 늘어선 대열에 합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쪽보다 더 통로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이는 쪽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용수의 마음속 깊은 데서 통로에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껴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없던 결의가 생겨나자 몸이 알아서 긴장했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용수는 어떻게 하면 품위를 잃지 않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통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여행 가방, 면세점 봉투 사이로 들어설 수 있을지 고민했고, 고민하는 기색을 숨기려고 느긋하게 행동했다. 불안을 감추려고 느긋하게 뒤를 돌아봤고,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고, 느긋하게 앞을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느긋하게 통로에 들어찬 사람들을 훑어봤다. 그러면서 여자의 시선과 그 시선에 신경쓰던 자신도 잊은 채 통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출입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마취되거나 도취된 듯 제 의지가 아닌 어떤 힘에 이끌려 기체 밖으로 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들 대부분은 남들보다 빠르게 문밖으로 나가려는 의지 외에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고, 우물쭈물하거나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것으로 거치적거리는 행동을 교정하려고 했다. 상공이었다면 어땠을까? 용수는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정말 궁금하다기보다는 움직일 수도,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는 억압적인 상황을 피하고자 떠올린 생각일 뿐이었다.
얼마 전 용수는 사층 높이의 건물에서 허공으로 추락할 뻔한 적이 있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약속이어서 시간과 장소를 정한 후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사층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밀폐되어 있던 무거운 공기가 얼굴 쪽으로 훅 끼쳐왔다. 무방비한 몸에 무언가가 들러붙은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점점 더 나빠졌다. 계단을 겨우 올라 레스토랑 문을 마주하자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는가 싶더니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앞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복도 끝 비상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 위에서 비상구라는 사인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람을 쐬면 좀 나아질까 싶어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계단도 복도도 없었다. 문은 거짓말처럼 허공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어져야 할 시간이 통째로 잘려나간 기분이 이런 것일까? 당연히 있을 거라고 믿었던 공간에 전혀 다른 게 와 있었다.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식은땀도 그대로 얼어붙었는지 땀구멍마다 얼음 알갱이가 들어찬 것처럼 살갗이 따가웠다. 너무 놀란 탓에 두통도 사그라진 것 같았다. 용수는 자신이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꼼짝하지 않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 밑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고서야 환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평소의 태도를 잃지 않고 점잖게 걸었기 때문에 추락이든 추락사든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의 생명을 구한 방정한 행동 체계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더욱더 깊어졌다. 그러면서도 신념이나 체계를 앞세워 두려움을 속이고 있는 자신의 태도에 화가 났다. 오라는 데로 오고, 가라는 데로 가는 자신이 싫었다.
뒤늦게 뛰어온 건물 관리인이 용수를 밀쳐내고는 쿵, 소리 나게 비상문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이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설계법 때문에 비상문을 만들기는 했는데 비상계단은 없다고 했다. 추후 건물 외벽에 사다리를 놓을 거라고도 했다. 그 문으로 나가려다 추락할 뻔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설명을 들었어도 용수는 납득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문을 잠그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용수는 당황해서 그렇게 물었지만 비상문을 잠가두라니,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해서 괜히 밑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상문을 잠가두는 것은 설계법에 어긋납니다. 그러니까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관리인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 말을 지껄였다. 비상문이 허공으로 이어진 것도 모자라 오히려 눈에 잘 띄도록 사인을 켜두고, 그 문을 잠가두지도 않았으며, 사과는커녕 추락 사고를 운운하는 말과 사고 예방을 위해 임시로 문을 잠그는 것이 설계법에 어긋난다는 말 등 전체적으로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당당한 관리인의 태도에서 현실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용수는 비상문을 열었다는 이유로 주의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돌아서는 관리인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쌍둥이 자매는 허리에 검은 리본이 달린 검은 원피스를 똑같이 입고 있었다. 진주 하나가 중앙에 박힌 검은 초커를 목에 차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굵은 목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어딘가에 매여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고 용수가 말하자 둘은 동시에 까르르 웃고는 우리는 다 어딘가에 매여 있다고 말했다. 용수는 화제를 돌려 허공으로 이어진 비상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 잘못인 거 같은데. 첫째가 말했다.
비상문을 열었잖니? 둘째가 별생각 없이 말하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제 말이 의아하다는 듯 첫째를 바라봤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어도 너는 우리의 가족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신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삼가는 게 좋을 거야. 둘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첫째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화가 많이 나셨어.
신용카드를 뺏길 수도 있어. 둘째가 걱정하는 투로 말했는데 구경하는 즐거움을 숨기려고 연기하는 사람 같았다.
통로에는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용수는 의자 밑 선반에서 보스턴백을 꺼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한껏 모은 양 무릎 위에서 바닥 면적을 다 쓰지도 못하고 절반은 무릎에 절반은 허공에 위태롭게 떠 있는 가방이 가련해 보였다. 용수는 무언가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가방 안을 뒤적이는 체했다. 그러나 창가 쪽 여자의 자비 없는 시선이 계속 느껴져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다. 통로의 줄이 줄어들었다. 용수는 그제야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창가 쪽 여자는 원망스럽다는 듯 용수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소심하게 그의 어깨를 밀치고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용수는 여자에게 신경쓰지 않고 승객이 모두 빠져나가기를 기다린 후에 통로로 나와 출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