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그애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기 모여 있어요. 이미 이곳엔 없는 그애를 위해.



응랑산장에서 시체 2구 추가로 발견돼


지난 15일 강원도 응랑에서 발생한 인질극의 현장을 조사하던 경찰이 시체 2구를 추가로 발견했다. 신원은 산장의 원소유주이자 얼마 전 타계한 최경섭씨(74)의 외손자 신 모 씨(19)와 응랑파출소 소속 순경 서 모 씨(26)로 확인되었다. 

이로써 응랑산장 인질극 관련 사망자는 범인 이 모 씨(37)와 최 모 씨(20)를 포함, 총 4명으로 늘어났다. 실종자는 1명이다.


*


괜찮아요? 늦지 않았나요? ……아니요, 커피는 괜찮아요. 예, 춥진 않아요. 실은 빨리 걸었더니 조금 땀이 나네요. ……하하, 어려서 그렇다구요. 감사합니다. 사실 내일이 생일이에요. 고맙습니다. 그애가 사라진 다음해에 태어났으니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난 옛일이군요. 세포에 불과한 채였지만 내가 그애와 짧게나마 같은 시간을 공유했다는 건 나의 자랑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잖아요. 미술관을 걷다 불현듯 오래된 그림 속 인물과 사랑에 빠지는…… 그에 비하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셈이지요. 적어도 한순간은 그애와 같은 강물에 발을 담갔으니까요. 아무리 인간의 삶이 반복의 연속일지라도 그애는 오직 하나뿐이니.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모두 하나뿐인…… 그애를 사랑하고 계시지요? 아직까지? ……대단하네요. 나도, 여러분도. 그애도 그렇고요. 그애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기 모여 있어요. 이미 이곳엔 없는 그애를 위해. 나는 가장 훌륭한 유산은 기억이라는 걸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깨달았어요.

하시던 일 마저 하세요. 무얼 하고 계셨나요? 아, 사진을 보고 있었군요. 나도 그 사진 좋아해요. 열여덟 살 때? 이때만 해도 볼이 통통하네요. 어딘지 부은 듯한 인상이에요. 앞니가 조금 커서 어린아이 같아요. 몸은 깡말라서 휘적휘적. 아직 팔다리의 사용법을 모르는 듯한 인상이에요. 위태롭고 우습고 사랑스러워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 사진이에요. 스무 살 때 찍은 사진. 검은 물에 반쯤 잠긴 듯이 어두운 배경 위로 흰 얼굴이 떠올라 있어요. 솜씨 좋은 왕궁의 침모가 요정 대모의 손을 빌려 심은 것처럼 빽빽한 머리칼이 보여요. 눈꼬리는 앞머리에 가려졌지만, 검고 푸른 눈동자는 이쪽을 또렷이 보고 있고요. 이때는 꽤 말랐어서 도공이 굵은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낸 듯 날카로운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네요. 턱도 고양이처럼 뾰족하고요. 귀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살엔 갈색 반점이 하나 있어요. 주근깨처럼 연한 색깔의…… 네. 점이 꽤 많은 편이었지요. 얼굴과 몸에 한가득. 누가 잉크를 쏟은 것처럼요. 그애는 화장하는 데 오래 걸려 힘들다고 했지만 나는 그걸 단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말하자면 페르시아산 카펫의 흠 같은 거였죠. 그들은 완벽함은 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한 올씩 실을 빼둔다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그 빠진 올로 인해 진정한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거죠.

다시 돌아갑시다. 버선처럼 끝이 오똑하게 올라간 코가 있고, 그 아래 무언가 말하려는 듯 살짝 벌어진 입술이 있네요. 그 사이로 보이는 아랫니는 그의 눈의 흰자위만큼 희어요. 막 낳은 바다거북의 알처럼 점액질이 묻은 촉촉하고 미끈한 눈. 끝이 뾰족한 은수저로 뜨면 그대로 푹 하고 말끔하게 떠질 것 같은, 임금님의 황금 식탁에만 별미로 올라가는, 푸른 닭이 낳은 순백의 달걀 같은 눈, 그와 같은 색의 이예요. 요정의 무덤에 세운 비석처럼 가지런한 이가 하나, 둘, 셋, 네 개. 만약 신이 내게 죽기 전 원하는 걸 가질 수 있게 해준다면 난 그중 하나를 달라고 할 거예요. 그리고 마른 제비꽃잎으로 감싸 로켓에 넣은 뒤 목에 걸고 눈을 감겠어요. 아니면 영원히 녹지 않는 사탕처럼 입에 문 채 숨을 멈추거나요.

하지만 모든 찬사는 그애의 입술 아래 무너집니다. 활 모양의 윗입술과 도톰한 아랫입술. 물고기의 내장처럼 부드러운 그 입술엔 무지가 묻어 있거든요. 노인의 입술은 비겁한 자들의 입술처럼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있다는 걸 모르는 무지요. 무지는 젊은 모두의 특권입니다. 성급한 시간은 그 권리를 앗아가지요. 하지만 모두가 음울한 학자처럼 많은 걸 알아버려도 그애만은 영원히 백치입니다. 그 순백의 무지가 내게 달콤한 슬픔을 안겨줍니다……

이렇게 다시 그애의 죽음을 이야기하게 되었네요. 다들 얘기하기 싫으신 거 알아요. 가십처럼 주고받고 싶지 않겠죠.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하지만 말예요, 우리가 아니면 누가 얘기하겠어요? 그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요? 단지 죽었다는 이유로 그애를 동정하는 사람들이요? 그냥 얘기해봐요, 우리끼리. 실은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잖아요. 말해지지 않은 게, 그 여자들과 그애에 대해 말해지지 않은 게 너무 많으니까요. 아니면 상상이라도 해봅시다. 생각은 죄가 아니잖아요. 어디에도 말하지 않고 그냥 우리끼리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보는 거예요. 신이 세상을 만든 순서대로, 무대를 정하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비가 내리는 깊은 산의 산장에서. 그래요. 그애가 있었던 작은 손님방 문 앞에서부터……



1


손님방 문 앞 바닥의 나무판자는 서로 어긋나 있었다. 바닥이 꺼지는 것을 녹슨 못이 간신히 막고 있었지만, 삐걱대는 소리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오래된 산장인 만큼 사방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건 당연했지만 그 자린 유독 심했다. 임시방편 삼아 깔아둔 낡은 러그도 소용없어 바람만 스쳐도 앓는 소리가 났다. 유령도 그 위를 조용히 통과하진 못할 듯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나미였다. 그는 깡마른 나무토막 같은 몸을 잘 훈련된 뱀처럼 움직였다. 빠른 손은 정확했고, 더러운 병구완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조금 무뚝뚝하긴 했지만 그의 움직임을 십 분만 관찰하면 누구라도 아, 저런 게 천성이구나, 세상엔 타고난 간호사라는 게 있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몸이 부자유한 이의 상상은 언제나 나쁜 쪽으로 뻗어가기 마련이었다. 소년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나미의 표정 없는 얼굴을 배려가 아닌 무감정으로 받아들였다. 나미는 단추를 채울 때도, 똥오줌을 치울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아 거의 기계 같았다. 그 때문에 소년은 수치가 아닌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자주 나미가 정의의 로봇의 전원을 내리려는 악당 기계처럼 보였고, 가끔은 떠나는 나미를 붙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럼 그가 오는 때를 셈하며 미리 겁을 먹을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주전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멎고, 한순간 집안이 놀라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정적을 깨기 위해 소년은 부러 헛기침을 하며 침대 시트를 들척였다. 그러자 문밖에서 기묘한 인기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짓누르는 듯한 침묵. 천천히, 밀물처럼 밀려오는 묘한 압박감에 몸이 달아오른다고 느껴질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예상대로 한 손에 갈아입을 옷을 든 나미였다.

“부르지 그랬어요.” 

“아녜요. 지금 막 일어났는걸요.”

무뚝뚝하다고 해도 좋을 말투에 소년은 어색함을 숨기며 눈웃음을 쳤다. 그러나 나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릴 뿐 평소처럼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상체를 거의 움직이지 않는 기이한 걸음걸이로 침대맡으로 다가온 나미가 한여름임에도 묘하게 선뜩한 손을 소년의 이마에 얹으며 낮게 말했다. 

“열은 없는 것 같네. 불편한 덴 없고요?”

“예.”

“화장실 가고 싶었을 텐데.”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대신 물위에 떠 있다고 생각하며 몸의 힘을 뺐다. 그걸 알면서도 나미는 염불을 외듯 중얼거렸다. 자, 몸에서 힘을 빼고…… 바지 내리겠습니다……

나미가 일을 마치자 방안엔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소년은 고민하다 조금만 창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비가 오는데.”

“괜찮아요. 조금만요.”

나미는 더 말하지 않고 창을 열었다. 그러나 조금이 아니라 아주 활짝 연 탓에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소년이 누워 있는 침대까지 빗줄기가 몰아쳤다. 순식간에 상반신이 흠뻑 젖어 소년은 손을 들어 외쳤다. 

“잠깐, 잠깐만요.”

그러나 나미는 창을 연 채 말이 없었다. 들이치는 비에도 눈 한번 깜빡 않고 젖은 숲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턱뼈가 도드라지도록 이를 앙다물고 있었지만 여전히 표정은 없었다. 소년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기요.”

“……”

“저기, 나미씨.”

그 말에 나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 닫아주세요.” 

창을 닫은 나미가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눈을 깜빡이더니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비가 많이 오네요.”

“……”

“답답하겠어요.”

“아녜요. 저야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는데요. 폐를 끼치는 거 같아 죄송하죠.” 

소년은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잠깐 침묵한 후 어렵게 꺼낸 혼잣말은 다음과 같았다. 하다못해 화장실이라도 혼자 가면 좋은데. 그러나 나미는 소년의 말을 무시했다.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는 게 힘들지 않냐는 그의 말에도 도대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한참 그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쓰레기통을 들고 일어섰다.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자 소년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문득 동물원의 철창은 동물을 가두기만 하는 게 아니라, 때론 동물을 인간에게서 보호하기도 하는지 모르겠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혼자가 된 소년은 붕대가 감겨 있지 않은 왼손으로 얼굴을 닦으며 방안을 돌아보았다. 창을 연 시간이 길지 않아 방안이 엉망이 되진 않았다. 촛대가 쓰러진 게 전부여서 다행이었다. 다행이었지만 소년의 기분은 엉망이었다. 단지 먹고 싸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지금의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그 이상의 성취감이 필요했다. 붕대가 갈비뼈를 올무처럼 옥죄고 양다리가 부목에 고정돼 구부릴 수도 없는 장난감 병정 같은 상태였지만 필요했다. 그는 인형이 아니었다. 인간이었다.

그렇게 소년이 쓰러진 촛대만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사이 문 앞 나무 바닥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것은 미희였는데, 젖은 바닥을 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미가 진통제 드리는 걸 깜빡했대요…… 근데 바닥이 왜 이래요?”

“창을 좀 열어달라고 했어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요?”

소년이 말없이 웃었다.

“이 사람 바보네.”

미희가 소년의 머리맡으로 다가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냈다.

“찜찜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괜찮기는. 이러다가 감기 걸려요. 여름 감기가 제일 무섭다는데.”

말을 마친 미희가 조금 망설이더니 물었다.

“갈아입는 게 좋겠죠?”

소년은 말 대신 눈으로 동의했다. 그의 마른 가슴 위로 미희의 손이 올라왔다. 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물크러진 과일 껍질이 벗겨지듯 얇은 천이 미끄러지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곤두선 젖꼭지를 미희의 손등이 가볍게 스쳤다. 어머, 미안해요. 미희가 얼굴을 붉혔다. 평소엔 그런 일이 드문 터라, 그 모습을 본 소년은 자기 몸의 상태도 잊고 가벼운 짜릿함을 느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미희의 손길을 원했다. 그러나 미희는 벗은 그의 몸을 닦아주는 대신 타월을 건넸다.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지 않냐고, 미희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미희가 자신의 몸을 닦는 일은 없었지만 소년은 괜히 아쉬웠다. 그러나 미처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오늘 치 도전 정신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며 맹렬하게 젖은 몸을 문질렀다.

그동안 미희는 바닥과 창틀을 닦았다. 쓰러진 촛대를 세우고, 커튼도 조금 걷어 바깥을 볼 수 있게 해줬다. 창밖은 낮밤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했고, 그 탓에 방안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듯 유리창 위에 어렸다. 창백한 형광등 아래에 서 있는 미희는 거의 색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희었다. 소년의 시력이 나빠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목에서 발목까지 끊어질 듯 길게 이어진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몸의 곡선과 검은 파도가 치듯 윤기 나는 머리카락만으로도 그의 아름다움이 전달됐다. 소년은 문득 사고를 당한 나그네가 그를 보살펴준 오두막집의 딸과 결혼하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경우라면 자신과 결혼할 사람은 미희가 될 터였다. 이 집에 젊은 사람이 미희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동화의 주인공으론 그가 제일 적절했다. 미희가 뒤를 돌아 물었다.

“다 닦았어요?”

“예.”

그 말에 미희가 의자를 끌어다 앉아 천천히 새 옷을 입히고 단추를 채워주었다.

“나미가 참,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가끔 그렇게 정신이 빠질 때가 있더라고요. 이해해줘요. 그래도 제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죠?”

“아녜요.”

“아니긴요. 저는 간병엔 소질이 없는 거 같아요. 툭하면 사고나 치고.”

“진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소년은 될 수 있는 한 진지하게 말했다. 실제로 소년은 착실하다 싶을 정도로 묵묵히 그를 돌보는 다른 두 사람보다 미희에게 더 큰 고마움을 느꼈다. 미희는 매사에 서툴러서 그와 함께 있을 땐 모든 게 소꿉장난 같았다. 물을 먹이다가도 금방 엎지르고, 수프 한 숟갈 제대로 뜨지 못해 옷에 뚝뚝 흘렸다. 그래서 미희가 식사 당번일 땐 소년 스스로 밥을 먹었다. 떨리는 왼손을 입으로 옮기는 건 대단히 불편했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소년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단순히 미희와 함께 있어서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자기 몫을 하는 것. 그게 깨끗한 옷이나 완벽한 돌봄보다 소년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걸 미희는 알고 있는 듯했다. 단추를 다 채운 미희가 소년의 등을 베개로 높이 받쳐준 뒤 약을 건네며 말했다.

“가끔 부담스러운 거 알아요.”

“……”

“그래도 나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이모도, 또 저도 그렇고요. 답답할 때가 있겠지만 조금만 참아줘요.”

소년이 흰 알약을 꿀꺽 삼키고 중얼거렸다.

“아녜요. 저는, 저는 감사하기만 한걸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저를 도와주셔서……”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끼리만 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당신을 돌보는 게 우리의 기쁨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미희의 진지한 얼굴은 작은 새의 두개골처럼 견고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세 분이 친척이라고 했나요?”

“네. 그렇지만 닮은 편은 아니에요. 전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나미는 걔네 아빠를 닮고. 이모는 또 외할아버지를 닮고. 전부 친탁을 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제멋대로가 되었어요. 같은 피가 섞였으면서 이렇게 안 닮기도 쉽지 않은데.”

“미희씨 아버님이 미남이신가봐요.”

“칭찬 고마워요.”

미희가 웃었다.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웃음을 갈무리하는 모습엔 사내다운 만용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다시 소년의 피가 깊은 곳에서부터 끓었다. 그러나 그가 반사적으로 미희에게 팔을 뻗는 순간, 미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쉬세요.” 

“아, 네.”

소년은 약간 당황했지만 들키지 않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희가 그 미소에 화답하며 빈 물컵과 빨랫더미를 들고 문을 나섰다. 소년은 떠나간 미희의 잔상이 여전히 눈앞에서 아른거린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몸을 기댔다.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하게 하는 달콤한 슬픔이 그의 가슴을 적셨다. 소년은 한 칸씩 밀려 끼워진 옷의 단추를 풀어 다시 채우며 코를 킁킁댔다. 모두 같은 비누를 쓸 테지만 미희의 냄새는 특별했다. 조금 그리운 향기랄까. 미희와 있을 때면 가슴이 쉴새없이 두근댔는데, 아주 좋은 방식으로 그랬다. 소년은 미희의 향기에 둘러싸인 채 묵직해지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미인과 그의 목숨을 살려준 친절한 여자들. 기억을 잃고 다친 것만 빼면 그는 아주 운좋은 사내였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머리맡에 서 있는 악몽을 꾸는 건 순전히 몸이 부자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소년은 눈을 떴다. 들어온 건 안나로, 소년을 향해 어린애처럼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년 역시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하면서 안나의 얼굴에 묻은 기묘한 희망의 빛을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안나는 아마도, 아마도 소년을 좋아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과 벌름거리는 콧구멍, 달아오른 뺨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두터운 화장은 주름만 가리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안나가 언제나처럼 김이 솟구치는 대야에 손을 풍덩 담가 타월을 적셨다. 물은 실수로 한두 방울이 튀는 것만으로도 앉은 자리에서 펄떡 일어날 정도로 절절 끓었지만, 안나는 그게 아기 목욕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타월을 주물거렸다. 그게 신기해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안나의 얼굴을 빤히 봤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안나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촉촉해졌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은 마음에 자기 단추로 시선을 돌렸다. 그 위로 안나가 꾹 짠 타월을 들이밀었다. 안나는 무른 상처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전장의 초보 간호사처럼, 혹은 이론으로 무장한 첫날밤의 신부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젖은 타월을 살에 문질렀다. 부끄러운 듯 주춤대는 손길에 옷이 눅눅해졌지만 소년은 불평하지 않았다. 벗은 몸을 보이는 건 그도 불편했고, 옷 안으로 몸을 닦는 정도로 코를 벌름대는 안나가 몽땅 벗은 자신의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기도 했다.

간단한 목욕이 끝나고 안나가 커튼을 걷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비에 젖은 숲을 보았다. 그러나 안나는 소년을 따라 바깥을 보는 흉내만 내는 게 분명했다. 가끔가다 힐끗 돌아보던 얼굴이, 어느 순간 반쯤 입을 벌린 채 아예 이쪽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안나의 입안에 서서히 단침이 고였다. 그 작은 연못에 넘쳐흐를 듯이 차오르는 물과 불같은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소년은 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다.

“사고였죠?”

“예? 뭐가……”

“저 말이에요. 무슨 사고였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그렇다고 젓는 것도 아닌 애매한 각도로 기울였다. 그날의 기억은 그에게도 좋지 않게 남았는지, 사고 이야기만 나오면 안나는 불쑥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을 아꼈다. 

“예에. 사고라면 사고겠지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소년은 안나의 목이 꿀꺽 울리는 걸 보고 넘치지 않게 된 연못 물에 안도하며 되물었다.

“어떻게 있었다고 했죠?”

“그냥 수풀에…… 수풀에 버려져 있었어요. 밤이었고…… 그때도 비가 많이 왔는데, 저랑, 식구들이…… 힘을 합쳐서 당신을 들었어요.”

“교통사고였을까요? 아니면 낙상?”

“글쎄요…… 교통사고…… 아, 아니 낙상이었을까. 둘 다일 수도 있고……” 안나가 말꼬리를 흐리다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나요?”

“아무것도 아녜요. 그냥요.” 소년이 망설이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얼마나 다친 건지, 언제쯤 움직여도 좋을지 궁금해서요.”

“일단은 그대로 있는 게 좋을 거예요. 함부로 움직였다가 뼈가 어긋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아직 두통도 있고. 혹시 뭐가 불편해요?”

“아니요, 전혀요. 전혀……”

문득 머리맡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떠올랐지만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모든 게 다.”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참아요.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니까요. 나머지는 다 그다음의 일이니……”

수프 다 끓었겠어요. 안나가 중얼거리곤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뒤 쟁반을 들고 왔다. 우묵한 그릇에 담긴 흰쌀밥과 머그잔에 든 수프, 그리고 물 한 잔이라는 메뉴는 언제나와 같았다. 조금 질리긴 했지만 밥투정을 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나 기다려도 안나는 밥을 줄 생각을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어딘가 심각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보던 안나가 그걸 입에 넣었다. 그는 마치 어린애가 사탕을 빨듯 숟가락을 맛나게 쪽쪽 빨더니 빛에 비춰 확인한 다음,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뭐가 좀 묻었네요. 미희가 설거지를 제대로 안 했나봐.”

안나가 수프를 한 숟갈 떠서 아, 소리를 내며 코앞에 들이밀었다. 소년은 불쑥 들어오는 숟가락에 싫다, 좋다를 말하지도 못하고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혀에 닿은 숟가락이 기분 나쁘게 미적지근했다. 그는 숨을 참고 빠르게 수프를 목으로 넘겼다. 그걸 보고 안나가 물었다.

“괜찮아요?”

“예, 평소랑 같은데요.”

“……”

“혹시 뭐 잘못됐나요?”

“아뇨, 그냥.”

좀 이상한 질문이네 싶어 안나를 빤히 보자 문득 그가 고개를 외로 꼬며 수줍게 웃었다. 순간 소년은 역겨움과 동정심, 그리고 자신도 이유를 모를 불같은 화가 치솟아 참지 못하고 손을 휘둘렀다. 퍽, 하고 물컵이 쟁반 위를 구른 뒤 바닥에 떨어졌다. 소년은 자기 행동에 자기가 놀라 돌처럼 굳었다. 시트를 적신 물방울이 나무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안나가 앉은 자세 그대로 허리를 굽혀 컵을 주웠다. 소년은 등줄기에 애벌레가 하나 기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더듬더듬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그냥……”

그러나 안나는 빈 컵을 협탁에 올려둔 뒤, 수프의 표면을 긁어내듯 떠서 소년의 입에 갖다댈 뿐이었다.

“아.”

“……”

“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미소였다. 목소리의 높낮이도 변함이 없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반응에 소년은 덜컥 겁이 났다. 어쨌든 그는 제 몸 하나 스스로 씻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걸 잊으면 안 됐다. 소년은 귀 뒤에서 뛰는 듯 쾅쾅 울리는 심장 소리를 무시하며 안나를 따라 온순하게 입을 벌렸다. 갑자기 안나가 팔을 쭉 뻗어 붉은 목젖을 자몽의 과육처럼 도려내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다행히 숟가락은 부드럽게 혀 위에 안착했다. 입천장과 혀를 맞대며 소년은 이가 없는 사람처럼 오래 우물거렸다. 그의 목울대가 울리고 침과 뒤섞인 묽은 수프가 넘어가자 안나가 웃으며 밥 한 숟가락을 떴다. 그다음은 물. 그리고 다시 수프. 순서를 맞춰 쟁반 위 음식이 천천히 비워졌다. 마지막으로 안나가 손바닥에 올려 내민 건 흰 알약이었다. 

“드세요.”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 새가 모이를 쪼듯 고개를 숙여 약을 입에 넣었다. 안나의 손바닥에선 온천에 삶은 달걀 같은 냄새가 났고 한여름의 이끼 낀 얕은 개천 물처럼 미적지근한 맛이 났다. 그는 안나가 손을 뒤로 숨기며, 그의 혀가 닿은 순간을 간직하듯 살짝 오므리는 것을 못 본 체했다. 그리고 약을 잘 삼켰는지 확인하는 척, 안나가 그의 외딴 해안 동굴처럼 비밀을 간직한 입안과 분홍색 자포동물 같은 혀, 파도에 깎인 조약돌 같은 이를 살피도록 내버려뒀다.

빈 그릇을 챙겨 드는 안나의 얼굴은 반들반들하게 기름이 돌았다. 그는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수줍게 손을 흔드는 안나에게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줬다.

문이 닫히고, 소년은 긴 한숨을 쉬었다. 밤마다 자기를 지켜보는 게 안나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 기묘하고 끈적한 시선이 미희의 것일 리는 없으므로, 가능한 건 안나와 나미뿐이었다. 한번 밤을 새워봐야 할까? 하지만 종일 누워 있는 탓인지 밥만 먹어도 졸렸다. 무언가 생각을 하려고 해도 금세 머리가 아팠고 누군가 모래사장에 그를 파묻은 것처럼 위에서부터 묵직한 잠이 쏟아져내려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끔뻑이며 생각했다. 이게 다 박제 탓이다. 소년은 잠에 빠져들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가짜라지만 사방에 이렇게 눈이 많으니 이상한 꿈을 꿀 수밖에 없는 거다. 이렇게, 이렇게 사방에 눈이 많으니…… 


소년은 환한 빛 아래 서 있었다. 손과 발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희던 빛은 물속에 풀어지는 물감처럼 천천히 다른 색이 되었다. 수백수천 개의 뒤엉킨 색은 잘게 쪼개지더니 각각의 색을 가진 작은 세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세포는 다시 각각 하나의 눈이 되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몸이 쇳덩어리처럼 아주 무거워져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었다. 그는 비명을 질렀지만 입에선 물거품만 나왔다. 헤엄치고 싶었으나 닻처럼 무거운 힘이 그를 끌어내렸다. 그는 끝없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자는 다름 아닌 죽음의 신이었다.


“갑갑해서 그런 꿈을 꿨나봐요. 아무래도 몸도 불편하고 방안에만 있으니까요.”

미희가 사뿐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바깥의 풍경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젖은 유리를 통해 알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검은 나무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미희가 다시 침대 곁으로 다가와 다리를 외로 꼬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오래 해를 못 봤잖아요. 당신뿐만 아니에요. 모두 다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 너무 염려하진 말아요.”

“하지만, 전에도 비슷한 꿈을 꿨어요.”

“언제요?”

매일 밤이요, 라고 소년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미희 앞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미희는 대꾸 없는 소년을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아프면 누구나 다 그런 거니까. 게다가 큰 사고였는걸요. 오히려 뭐랄까, 그런 꿈을 꾸는 편이 훨씬 더 건강한 건지 몰라요.” 

미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그의 손에 닿는 손길도 그랬다. 미희의 손이 살짝, 팔목으로 올라오자 소년은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그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강렬하게 미희를 원했다. 그 손이 만져줬으면 하는 부위를 알았다. 하지만 팔목 주변을 맴돌던 미희의 손은 금방 떨어져나갔다. 소년은 아쉬움에 자기도 모르게 짧게 외쳤다.

“하지만,”

“예?”

“……”

“무슨 일이 더 있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년은 고개를 젓고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혹시 누가 들어오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그럴 리 없어요.” 미희가 딱 잘라 말했다. “방문은 항상 잠가두는데요. 게다가, 말하지 않았나요? 다리가 끊겨서 오도 가도 못한다고.”

“예,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말을 흐리자 미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우리 중 누가 들어온다는 거예요?”

“아뇨, 그럴 리가요.” 

소년은 조금 허둥대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좀, 불안한가봐요. 몸도 아프고, 비도 오니까. 이 방은 박제도 많고요.”

그제야 미희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방안을 살폈다. 

“아무래도 차분해지는 인테리어는 아니죠.”

“예. 그렇다고 난잡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다 못으로 박힌 거라 뗄 수는 없어요. 방을 옮겨드리면 좋겠지만 회복중인데 함부로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요.” 

미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사방에 걸린 헌팅 트로피와 눈싸움을 하더니 말했다. 대신 눈이라도 좀 가려둘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미희가 타월을 가장 큰 숫사슴 머리 박제에 둘렀다. 그러나 그는 소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 안 되겠다. 꼭 사형수처럼 보이네. 어쩔 수 없네요. 지금은 좀 참고, 나중에 좀더 몸 상태가 좋아지면 그때 방을 바꿔봐요. 일단은 식으니까 밥부터 먹고요.”

미희가 손을 뻗어 협탁 위 쟁반을 소년의 무릎 위로 옮겼다. 옮긴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짧은 거리였지만 지나치게 서두른 탓인지 물잔이 휘청였고, 놀란 미희가 컵을 붙잡으려다가 한 손을 쟁반에서 떼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수프 접시가 미끄러졌다. 기울어진 접시에서 팔팔 끓인 수프가 용암처럼 흘렀다. 앗 뜨거! 미희가 소리치며 손을 뒤로 뺐다. 반사적인 행동이라 나무랄 순 없었지만 그 바람에 컵도, 접시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이불이 물풍선이 떨어진 것처럼 축축하게 젖었다. 수프가 활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천장까지 튀었다. 이불 위, 벽, 바닥. 사방에 튄 노란 점을 보며 미희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명령어를 입력받은 로봇처럼 눈만 깜빡이던 미희가 간신히 입을 벌려 한 말이라고는 어떡하죠?가 전부였다. 어떡하죠, 라니…… 소년은 허둥대는 미희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닦아야겠죠?”

“아, 맞다. 맞아.”

미희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가까이 있던 타월로 이불을 마구 문질렀다. 당연히 흰 이불에 물든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번졌다. 그렇게 하면 더 더러워진다고, 찍어내듯 닦아보라고 충고했지만 미희는 알겠다고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요령 없이 동작만 크게 키웠다. 그러다가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지저분한 타월을 손에 쥔 채 중얼거렸다. 이걸 언제 다 빨아. 문득 소년의 머릿속에 거품이 인 붉은 대야 안에서 움직이는 미희의 흰 종아리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어차피 자신은 볼 수 없었다.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희에게 호의를 베풀어주기로 했다. 그가 천천히 왼손으로 이불을 뒤집기 시작하자 미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냥 뒤집어서 덮으려고요.”

“왜요?”

“그럼 미희씨가 안 빨아도 되잖아요. 제가 그냥 실수했다고 하고, 나중에 다른 분한테 부탁드릴게요.”

“그래도 괜찮아요? 냄새날 텐데……”

“상관없어요.”

“고마워요.”

미희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아직 식사 못하셨잖아요. 수프 새로 떠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미희가 방문을 열어둔 채로 사슴처럼 겅중겅중 뛰어나가더니 재빨리 수프를 가지고 돌아왔다. 소년은 별로 먹고 싶진 않았지만 어쨌든 미희가 신경써서 가져다준 식은 수프를 입에 넣었다.

“맛이 어때요?”

“미희씨가 끓였나요?”

“아뇨? 이모가 끓인 건데. 무슨 문제 있어요?”

“아뇨. 평소보다 더 맛있길래 물은 거예요. 미희씨가 담아줘서 맛있나보다.”

그 말이 우습다는 듯 미희가 덧니를 드러내고 푸하하 웃었다.

“내가 바보짓 했다고 너무 의기소침하게 굴었나보다. 그래도 가짜로 비행기 태우진 말아요.”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맛이 좀 다른 거 같아요. 평소엔 혀가 아플 정도로 쓰고 짭짤할 때가 있어요.”

“왜 그러지? 바닷가 근처라 그런가봐. 가끔 물에서 이상하게 쓰고 짠 맛이 나더라고요.”

“그쵸?”

“네.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요.”

소년은 미희와의 음식 투정을 반찬 삼아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미희가 엎드려 바닥에 튄 수프를 문질러 닦는 것을 지켜본 뒤 평소처럼 누워 잠을 청했다. 생각할수록 그는 미희의 존재가 고마웠다. 가끔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미희의 장점이었다. 움직임이 부자유한 자신보다도 훨씬, 훨씬 모자란 미희. 아름다운, 그러나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게 아니라 웃으면 덧니가 드러나는 귀염상에 가는 목 아래 가슴이 크고 팔뚝이 통통한 백치 미희. 그는 미희의 옷 아래 가려진 몸을 상상함과 동시에 문득 인간이 아기를 낳는 것은 자기보다 못한 존재를 돌봄으로써 전능감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닌지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수프 냄새를 풍기는 이불이 찜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귀한 마음의 평화를 얻어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잠을 청했다.


조금 흐린 아침인가 싶었는데 착각한 것이었다. 한밤에 깨어난 소년은 잠시 가만히 누워 머릿속의 시차를 현실에 맞췄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이상했다. 매번 잠에서 깰 때면 느껴지던 가벼운 두통과 현기증이 없었다. 아직 꿈을 꾸는 건가? 그러나 꿈을 꿀 때마다 머리맡에서 얼쩡거리던 그림자는 없었다. 세상이 뱅글뱅글 도는 감각도 없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마치 안개 낀 숲에서 며칠을 헤매다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처럼 선명한 감각이었다. 소년은 눈을 깜빡였다. 지금이 몇시인지, 도대체 며칠인지 궁금했지만 이곳엔 시계도 달력도 없었다. 

문득 모래를 쑤셔넣은 것처럼 목이 탄다는 자각이 들었다. 물컵을 찾으려고 머리맡의 협탁을 더듬는 순간, 그의 귀에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자체로도 이상했는데, 소리의 근원지는 더 이상했다. 울음소리는 두꺼운 나무판자가 깔린 바닥에서 나고 있었다. 소년은 등에 소름이 오싹 돋아 누운 채 왼팔을 든 자세 그대로 멈췄다.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하려 했지만 소년의 머릿속에선 이미 침대 아래에서 누군가 기어나와 그의 머리맡에 서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소년의 긴장도 고조되었다. 소년의 이마로 굵은 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순간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그는 곤두선 온몸의 털 하나하나, 활짝 열린 땀구멍 하나하나를 모조리 감각할 수 있었다. 한동안 기다려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소년은 망설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그의 시야에 문 앞에 깔린 동그란 러그의 한 귀퉁이에서 스며나온 가는 실금과 같은 빛이 걸렸다. 저게 뭐지? 그러나 소년이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찡그리는 순간 빛은 소리가 사라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년은 버려진 아이처럼 멍청히 눈만 깜빡였다. 꿈인 걸까?

결국 그는 아침이 될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잠이 오지 않아 못 잤다. 머리는 좀 멍했지만, 그의 몸은 물위를 부유하는 쪽배처럼 깊은 잠의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늘 부력보다 중력이 강하게 작용해 저항할 수 없이 빨려드는 기분이었는데 어제는 아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너무 길어 무섭기까지 한 밤을 혼자 표류했다. 시간이 그의 피부 위를 겉돌았다. 묘한 괴로움에 발버둥치던 그는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서 아침이 된 걸 알았다.

방문을 똑똑 두드린 뒤, 마치 노래하는 작은 동물 친구들을 옆에 거느린 양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 건 안나였다. 소년은 막 일어난 척하며 지나치게 밝은 탓에 번들거리는 안나의 두 눈을 보며 웃어주었다. 그리고 뒤처리를 끝낼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 다음 수프를 먹고 늘 그랬듯 진통제를 받으며, 문득 어젯밤 약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