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이 시국에 안부를 묻는 건 실례일까요 _슬릭

처음 이랑님의 존재를 알게 된 사건은, 다름 아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트로피 경매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어요. 누가누가 상 받나, 후보도 아닌 주제에 좋다고 같은 회사 사람들이랑 구경을 갔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은 저에게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뮤지션들에게도 상을 준다니, 음악 시상식이라면 그래미 어워드와 공중파 방송국 3사의 연말 가요 시상식, 그리고 엠넷 MAMA 시상식 정도만 알았던 터라 뭔가 순수해 보이는 이 시상식이 퍽 마음에 들었더랬죠. 저도 은근히 이 상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무대에 올라와 상을 받고는 곧장 트로피를 경매하는 인디 뮤지션을 보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부풀고 뻐근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하는 의아함과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교차했습니다.


실은 그 퍼포먼스가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속세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힙합 뮤지션들 사이에서 고고한 리리시스트lyricist 혹은 그 언저리의 무언가로 각인되기 위해 꾸며댔던 저의 부푼 자아는, 이랑님 덕분에 소박한 정체성 한구석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솔직하고 용기 있는 슬릭이 탄생한 데는 이랑님을 비롯한 좋은 음악가들의 허물없는 친절이 정말 큰 역할을 맡아줬거든요. 아무튼 그때의 이상하고 찌릿한 혼란은 과거의 마음이 되었고 저의 장래희망은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에서 ENTP로 바뀌었습니다만, 그날의 이랑님이, 새까만 옷과 흰 얼굴과 무거운 트로피가 종종 생각나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멀리서 보던 이랑님께 편지를 쓰고 있네요. 긴장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들리진 않겠지만 이 시점에서 헛기침을 한 50번 정도 한 것 같아요. 실은 첫 편지라 그런지 많은 말들을 적었다가 지우는 중입니다. 이랑님과 제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뭘까, 이랑님이 저와 나누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뭘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는 말은, 그리고 종국에는 이 모든 글들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기 때문에 영원히 할 수 없는 말들은…… 생각이 많아지니 단어들이 엉켜 정작 하얀 화면은 생각만큼 채워지지 않네요.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참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게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네요. 몇 년째 적는 글들은 거의 모두 가사가 되었고, 어쩌면 청자를 특정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한 사람에게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도 합니다. 이랑님을 알고 지낸 시간은 짧지만 오히려 실제로 만났던 자리에서는 한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왔는데, 혼자 무언가를 고하려니 좀 어색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쓰는 편지가 이랑님께 쓰는 편지라 다행입니다. 제가 쓴 첫 편지의 내용이 어떻든 이랑님의 답장은 아주 멋질 거고, 저는 또 그 답장의 멋짐을 어떻게든 잇고 싶어하느라 최선을 다해 재밌어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의 인트로가 영 별로여도 실망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힙합 출신이라 보통 훅hook에서 잘 터뜨립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요즘 저의 최대 관심사는 대재난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입니다. 안 그래도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프리랜서 인생인데, 이제는 앞날의 캄캄함이 스페이스 그레이였다가 매트 블랙이 되어버린 기분입니다. 사실 저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대한 걱정입니다. 코로나 시대 전까지만 해도 저는 그렇게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두어 달 정도의 계획만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그뒤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조차 호사라 느껴지네요. 그래서인지 작금의 상황이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1년 뒤, 5년 뒤, 10년 뒤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코로나와 같은 재난(저는 인재人災라고 생각합니다)과 심각해진 기후위기는,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한 치 앞만 보면서 살아가던 저의 미련함을 깨우쳤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저는 정말로 미련하게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이제 두어 달의 끼니는 어찌어찌 해결하겠지만 어렴풋하던 그다음이 흔적도 없이 삭제된 것 같아 무섭습니다. 요새는 정신을 딴 데 두지 않으면 끝없이 괴로워서 SNS도 잘 들여다보지 못하고 스위치 게임기만 주구장창 붙들고 있네요. 첫 편지부터 우울함을 늘어놓고 싶진 않았는데, 이 시국에 해맑기도 쉽지만은 않으니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랑님은 어떤 생각들 속에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이 시국에 안부를 묻는 것조차 실례일까 두렵지만, 이랑님이 어떻게 지내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부디 저와 주고받는 편지가 부질없다고 느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2020824

슬릭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