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는 왕릉 앞에 있는 조각상에 이르러 사람들을 멈추게 했다. 조각상의 이름은 진묘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낸 환상의 동물인데 천 년간 도굴되지 않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했다. 하마 같기도 하고 돼지 같기도 한 통통한 몸에 짧은 다리와 꼬리. 머리에는 뿔 하나가 달려 있고 뒷다리 하나는 부러져 있었다. 이런 돌덩이가 죽은 자를 지켜줄 수 있다고 정말 믿은 걸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예나가 왕릉 뒤편을 가리켰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삐삐가 울고 있던 곳이 저기예요.
예나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실은 삐삐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순간 형지는 움찔했다. 자신이 삐삐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는 걸 들켜버린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예나가 삐삐와 만난 건 십 년 전, 비 오는 날이었다고.
정말 작았어요.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예나가 먼저 발견한 건 아니었다. 예나는 비가 오니까 왕릉 주위를 걷고 있었다고 했다. 형지는 비가 오는 것과 왕릉을 산책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질문하려다 그만두었다. 한 달에 한 번 찜질방에서 자는 것처럼 예나의 루틴 같은 거겠지.
제가 사실 반려동물을 기를 처지는 아니잖아요.
이럴 때 보면 사리 분별이 아주 분명한 사람 같았다. 그날 예나는 무언가를 둘러싸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 중심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데려가겠다며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고양이 맞아?
일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고양이를 품에 안았던 사람은 젖은 풀밭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고양이 사진을 검색해서 대조해보는가 하면 울음소리를 찾아 틀어보기도 했다.
귀가 너무 뾰족한 것 같아. 발톱도 좀 다른데. 울음소리도 이상한 것 같고.
의심이 하나둘 더해질 때마다 그들은 고양이로부터 한 발씩 물러났다.
버릴 거야?
그 말에 고양이를 안았던 이가 멀찍이 떨어지며 말했다.
버리다니, 잠깐 안아본 건데. 놓아주는 거야.
고양이라고 믿으면 고양이지.
누군가 설득하듯 말했지만, 그들은 곧 사라졌다. 빗속에 삐삐를 내버려두고.
*
고양이라고 믿어서 고양이가 된다면 진실이 아닌 걸 진실이라고 믿으면 그것은 진실이 되는 걸까요? 지금 이곳은 스터디 카페입니다. 오늘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수도원에 있을 때처럼 새벽 네시면 눈이 떠지니 시간이 아까워서요. 당근으로 구한 알바 자리인데 역에서 멀지 않습니다. 오전에 들러 두 시간 정도 청소를 합니다. 연필을 사용한 사람이 앉았었는지 창가 앞 책상 자리에 지우개 가루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어요.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청소를 한 뒤에는 카페를 이용해도 좋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좀더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기대했었어요.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지 않을까, 머리가 반쯤 하얗게 센 남성이 울면서 나타나지 않을까 하며 두리번거렸죠. 고등학생 때까지는 가게에서 엄마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남자 손님이라도 보면 그 사람이 나의 아빠인가 하는 생각에 설레어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 밤이면 엄마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기를 가진 처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는 항의하듯 대들었죠. 그래도 요셉이 있긴 있었잖아.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결핍을 억지로 채우려고 하면 망상이 되는 거라고. 빈자리를, 외로움을 상상력으로 채우다가는 계속 환상 속에 살게 되는 거라고. 그래서 나도 아빠의 빈자리를 상상으로 메우는 일을 언젠가부터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하필이면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엄마 외에 가족이라고 여겼던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겼지만 매일같이 카톡으로 안부를 나누던 날들도 있었죠.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 번 이 도시를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매번 돌아와야 했지요. 실직하거나 다치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헤어지거나 하는 여러 가지 이유로요. 당분간은 자포자기하듯 광장에서 사는 일에 순응하기로 했어요.
엄마와 함께 만두를 빚고 성경을 읽고 성지를 순례하지 않았다면, 당신을 만날 일도 없었겠죠. 엄마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을 실천했어요. 저축은 하지 않았죠. 여기저기 기부했고 돈이 좀 모이면 나와 함께 은총을 받으러 성지를 찾아다녔어요. 기적이 일어났다는 언덕 위에서, 돌 더미 앞에서, 흙구덩이 옆에서,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페루로 떠난 성지순례는 서른 명 정도가 함께하는 패키지여행이었습니다. LA에서 경유해야 했는데 일행 중 내 항공권에만 SSSS가 찍혀 있었어요. 2차 보안검사 대상이라는 뜻이었죠. 검색대에서 항의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굳게 다문 채 몸을 맡기고 있는데, 히잡을 쓰고 아기를 안고 있는 중동 여자와 눈이 마주쳤어요. 보안 요원은 아기띠까지 샅샅이 훑었죠. 나 역시 그들이 내 필통을 열어 펜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두 배나 오래 걸리는 심사를 마치고 리마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녹초가 된 뒤였습니다. 당신이 피켓을 들고 마중을 나와 있었죠. 여행사에서 고용한 현지인 통역이라며 가이드가 당신을 소개했습니다. 당신의 유창한 영어와, 어눌하기는 해도 일 년 정도 배웠다는 한국어가 그때는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패키지 여행객들 대부분은 부부였습니다. 얼마 전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엄마가 쓸쓸해하셔서 모시고 왔다는 딸도 있었지만 우리와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엄마와 나는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렇다 해도 단순히 열흘의 순례 일정 동안만 함께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사이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순례가 끝나갈 무렵 반정부 시위로 당신의 나라 곳곳에서 소요 사태가 벌어졌고, 우리는 발이 묶였어요. 마침 나는 실직 상태였으니 급한 일정이 있는 다른 이들에게 엄마와 함께 비행기표를 양보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며칠을 더 보내야 했지요. 호텔을 알아보려는 우리에게 당신은 자신의 집을 권했습니다. 리마 외곽의 공항에서 멀지 않은 당신의 집은 운이 좋지 않으면 총을 맞을 수도 있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를 기억해요. 전등이 고장나 캄캄했던 욕실도. 초를 가져다주면서 당신은 번역기를 통해 말해주었죠. 내일 친구가 고쳐주러 올 거라고. 온수가 나오지 않아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뒤 삐그덕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로 올라가서 누웠어요. 아래층 침대에서 엄마가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일 당장 호텔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우리에게 방을 내준 아이들은 거실에서 자야 했어요. 불투명한 방문 유리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렴풋이 들려오던 당신과 당신 남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느 순간 잠이 들었죠. 다음날 당신의 남편이 운전하는 작은 차에 실려 성당에 갔습니다. 엄마는 넷째 아이와 함께 보조석에, 나와 당신은 뒷자리에 세 아이와 함께 구겨지듯 앉았죠. 교통경찰이 단속하는 거리를 지날 때는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비좁은 차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불편하지만 따뜻하다는 생경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차에서 내릴 때는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결국 호텔로 옮기지 않고 새해까지 함께 보냈죠. 꽃으로 장식한 식탁에 둘러앉아 촛불을 켜고, 성가정을 위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 기도를 바칠 때마다 느꼈던 쓸쓸함이나 배제된다는 기분이나 과연 우리가 그 안에 속하느냐는 의문 없이.
그런데 마이라, 나는 당신을 항상 의심했습니다.
찜기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엄마가 찜기 앞에 서 있으면 뿌연 수증기 때문에 마치 안개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형지는 안개를 헤치고 왕만두 두 개를 꺼내 봉투에 담았다. 광장에 가려고 나와보니 붕어빵 포장마차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다시 가게로 돌아와 만두를 찌다가 행진에 늦었다. 오늘은 금강을 따라 걷는다고 했다. 형지는 행렬을 뒤쫓아 걸으며 예나를 찾기 위해 깃발을 주의깊게 살폈다. 자주 마주치던 중년 여성 두 명이 보였다. ‘혼자 살고 싶은 사람들’과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원한다’고 쓰인 제각기 다른 깃발을 들고 있었다. 한 명은 가족을 원하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가족을 원했다. 둘의 대화를 종종 가까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그들은 비슷한 나이대이며 이곳에서 만나 친해진 듯했다. 족저근막염이나 오십견과 같은 통증과 노화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누구보다 크게 소리를 내어 구호를 외치곤 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구호를 저 사람들은 정말 믿고 외치는 걸까. 어쩌면 이중에 제일 이상한 사람은 이유 없이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일 거라고 형지는 생각했다. 그때 예나가 킁킁거리며 나타났다. 만두를 건네자 예나는 두 손으로 받아 들고는 서두르지 않고 우아하게 베어 물었다. 형지는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삐삐는 지금 어디쯤 있죠?
예나는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여기쯤. 그래서 무거워요.
예나가 걸음을 멈추더니 행렬에서 벗어났다.
잠시만요. 나무 위에 올라갔어요. 내려올 때까지 기다릴까요.
그사이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걸어갔다. 예나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형지는 무언가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부드러운 털 뭉치 같은 것. 예나는 나무 위 어딘가를 올려다보았다.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벚꽃이 핀 줄도 몰랐네, 라고 생각하며 형지도 같이 바라보았다. 예나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어제는 병원 복도에서 잤다고 했다. 하루하루 머무는 곳이 달랐다.
왜 집으로 가지 않아요?
삐삐가 나무에서 내려왔다며 예나는 다시 행렬을 따라 걸으면서 대답했다.
자꾸만 채우라고 해서요.
뭘요?
빈자리를 채우라고 했어요. 샴푸가 떨어졌으니 새로 사라는 말처럼, 계절이 바뀌었으니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처럼 아주 쉽게요. 다른 고양이를 키우라고.
예나는 빈자리를 빈자리로 두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새 고양이를 들이는 대신 삐삐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가족과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게 됐다고. 이번에는 예나가 물었다.
엄마랑 살아요?
형지는 예나에게 엄마가 돌아가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대답했다.
아무와도 살지 않아요.
그때 예나가 탄성을 지르듯 말했다.
삐삐 털이에요.
예나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정말 고양이 털과 비슷한, 이불솜 같은 것이 눈처럼 나풀나풀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연신 재채기가 나왔다. 뒤늦게 그게 강변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버드나무의 솜털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제 정말 봄이라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불현듯 형지는 고백하듯 말했다.
나는 버들류예요.
어울리네요.
예나가 말했다. 진심 같았다. 그러더니 이어 말했다.
나는 소나무 송이예요.
어울려요.
형지도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