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쏟고 말았습니다. 노트북 자판 위에요. 성지순례를 위해 엄마와 떠난 바티칸에서 구매했던 모카 포트로 막 내린, 아주 뜨거운 에스프레소였지요. 핑크색 맥북을 당신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내가 리마에도 가지고 갔었으니까요. 전원을 끈 맥북을 품에 안고 AS센터로 달려갔어요. 애플 센터를 찾아가려면 버스로 한참을 이동해야 했습니다. 직원은 제조 연월일을 확인하더니 세척만 해주고는 말했습니다. 여기에 돈을 쓰는 일은 무의미해요. 도저히 가망이 없는지를 한번 더 확인하며 나는 덧붙였습니다. 이거 오래된 거예요. 그러자 직원이 무심히 대꾸하더군요. 그러니까요. 건조를 끝낸 맥북의 전원을 누르자, 다행히 부팅됐고 자판도 아직은 멀쩡했습니다. 직원은 서서히 기능을 상실하다가 멈출 거라고 하더군요. 어느 날 갑자기 스페이스 바가, 엔터키가, 자판이 하나둘 눌리지 않을 거라고. 커피는 ㅁㄴㅇㄹ 쪽에 집중적으로 쏟아졌어요. 엄마라든가, 마음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더이상 쓸 수 없는 순간이 오겠죠. 마이라, 당신의 이름도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도요.
엄마가 꼭 그랬습니다. 청력을, 시력을, 기억을, 언어를 하나씩 잃어갔어요. 엄마는 정신이 돌아올 때면 당신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나는 알아보겠다고만 대답하고는 당신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때뿐이니까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센터 직원은 노트북에 있는 모든 데이터를 백업해두고 앞으로 중요한 작업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했어요. 어느 날 돌연 전원이 켜지지 않을 수도 있는 노트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나의 학창시절이 어땠는지 물어봤었지요. 나는 수업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졸지도 않는 학생이었어요. 다만 편지를 썼습니다. 옆자리 친구에게,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빠라고 상상되는 인물에게. 너무 가까워서 멀리 있어서 혹은 알지 못해서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적었지요. 보내지 못한 편지와, 상대방이 보내온 답장을 오랜만에 꺼내볼 때마다 창피해졌어요. 나는 왜 그런 마음들을 굳이 편지지에 적으려고 했던 걸까요. 그때는 정성껏 옮겨 적었지만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 유치한 시구절에 대해서도 생각했지요. 당시에는 마음을 움직였던 문장들이 지금은 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지 궁금해하면서.
당신은 내가 편지를 썼던 사람 중에 아마도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일 겁니다.
마이라, 당신은 지금 어디쯤 있습니까?
형지는 여기까지 쓰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스름이 밀려오는 광장에 깃발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을 기점으로 펼쳐지는 커다란 부채꼴 모양의 광장이었다. 충청도 이남에 있는 공주시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이 광장을 지나야 한다.
형지에게 기억이랄 것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부터 엄마는 만두를 팔았다. 언제나 엄마와 형지 둘뿐이었다. 만둣가게는 광장 입구에 자리잡고 있었고, 형지와 엄마는 가게 2층에서 살았다. 지금처럼 창밖을 내다보면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볼 수 있었다. 창문을 닫아도 들리는 기차와 버스 소리, 택시 기사들이 호객하는 소리, 떠나거나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 광장의 소음 속에서 형지는 자랐다.
형지는 노트북을 잠시 바라보다가 전원을 끄고는 도라지 꿀차를 담은 보온병과 방석을 챙겨 가게로 내려갔다. 영업을 중단한 가게 안은 어수선하고 음산하기까지 했다. 가게는 내놨지만 아직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업소용 냉동고를 버릇처럼 열었다. 엄마가 틈틈이 물건들을 정리해둔 덕분에 처리할 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한 큰 짐은 무슨 생각으로 빚은 건지 언제 빚은 건지 모를, 수백 개가 넘는 만두였다. 채소와 고기를 잔뜩 넣은 왕만두와 설날 연휴에 떡국용으로 인기가 많았던 김치만두가 잘 포장된 채로 냉동고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형지는 아침마다 만두를 몇 개씩 꺼내 쪄놓고 배고플 때마다 집어먹는 것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가게 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만둣가게 앞에 놓인 커다란 찜기는 비닐로 덮여 있었다. 성자 손만두. 류성자, 엄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언제 다시 덧칠했는지 낡은 간판 위에 빨간 궁서체로 적은 글씨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지난겨울 엄마의 간병을 위해 형지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는 일은 당연해져 있었다. 요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씩 집에 들를 때마다 집회 행렬과 마주쳤다. 형지가 광장에 합류한 건 상을 치르고 난 이후였다. 발인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이 든 형지는 어둠 속에서 구호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그때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야 했던 이유가 모두 해결되어 사라진 뒤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녁마다 버릇처럼 역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수가 줄어들 줄 알았는데,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항상 부채꼴 모양의 광장에 꼭 맞게 찰 정도로만 모였다. 왜? 아직도? 라는 의문을 가진 채 형지는 그날 밤 옷을 대강 걸치고 깃발들이 모여 있는 그곳으로 갔다. 그렇게 매일 저녁 광장으로 나가기 시작한 지 일주일째였다. 광장에 도착하면 형지는 깃발들 사이를 걷다가 그나마 괜찮은 문구를 가진 깃발 앞에 자리잡았다. 아직까지 완전하게 마음에 드는 문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대한 어중간하게, 어느 깃발과도 가까워지지 않게 위치하려고 애썼다.
형지는 등을 돌려 걸었다. 삼월 초순의 이른 봄바람에 손이 시렸다. 핫팩 하나를 꺼내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뜨끈한 온기가 조금씩 번졌다. 걸음을 멈춘 건 어릴 때 엄마와 함께 다니던 성당 앞이었다. 그사이 리모델링을 해서 내관은 깔끔해졌지만, 오래된 십자가와 성모상은 그대로였다. 가만히 올려다보면 괜스레 쓸쓸한 마음이 들곤 했던 마리아와 요셉, 예수가 함께 그려져 있는 성가정 그림도. 형지는 고해소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성호를 긋자 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를 고백하십시오.
형지는 침묵을 지켰다. 삼 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십시오.
사제는 별다른 죄를 고하지 않았는데도 형지의 죄를 사해줬다. 그러고는 묵주 기도 오 단이라든가, 평일 미사라든가, 주의 기도를 올리거나 성경 말씀을 읽으라는 보속을 줬다. 그런 기도로 죄를 씻을 수 있나? 자신도 모르는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이 가능한 걸까. 형지는 의문했다. 그러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간 광장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형지는 깃발들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찬찬히 문구들을 살피던 중에 홀로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대부분의 사람처럼 검은 패딩 차림이었다. 형지는 섬처럼 외따로 서 있는 사람들을 선호했다. 구호도 외치지 않고 노래도 따라 부르지 않고 조용히 서 있는 사람들. 물결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곁이 편했다. 여자는 하얀 천에 검은 매직으로 글씨를 휘갈겨 적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천이 바람에 접혀서 ‘고양이’와 ‘사람들’이라는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일 거라 유추하며 형지는 여자 옆에 다가섰다. 여자가 놀라더니 형지를 살짝 밀었다.
조심해요. 고양이 꼬리를 밟을 뻔했어요.
놀란 형지가 발밑을 살폈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리번거리던 형지는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면서 완전히 펼쳐진 깃발 위의 글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양이 유령과 함께 사는 사람들.
그제야 형지는 여자 주변에만 결계가 쳐진 것처럼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 서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는 것도.
이제는 괜찮아요. 지금은 제 오른쪽 어깨 위에 앉아 있어요.
여자는 천연덕스럽게 웃더니 형지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형지는 미안하다고 말한 뒤 멀어지려 했지만 인파에 떠밀려 여자와 더 가까이 붙어야 했다. 여자는 킁킁거리더니 말했다.
좋아하는 냄새가 나네요.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건지 물으려 했으나 높아진 구호와 노랫소리에 형지의 말이 묻혀버렸다.
*
어제도 마음에 드는 깃발을 만나지 못했어요. 다만 이상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엄마의 만둣가게 단골이었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영업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묻길래, 엄마가 좀 긴 여행을 떠났다고 얼버무렸죠. 엄마가 빚던 만두를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마치 빵 같다고 했었죠. 당신과 당신의 남편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 넷과 나눠 먹었고요. 처음부터 엄마의 만두가 컸던 건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해를 거듭할수록 엄마는 만두를 점점 더 크게 빚었어요. 하나만 먹어도 배부를 만큼. 한 개에 오백원. 가격은 한 번도 올리지 않았죠. 그거 하나로 한 끼를 때우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어요. 노숙자나 택배기사, 호박이며 마늘을 다듬어 팔던 장사치들, 그리고 여행하는 사람들. 어제 예나에게서는 그들에게 나던 냄새가 났어요. 바람과 햇볕을 피할 수 없는 거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나는 냄새. 거기에 만두 냄새까지 함께 어우러져 있었죠. 그래요, 예나. 어쩌다 보니 통성명까지 해버렸어요. 오늘은 깃발을 잘 고를 생각이에요. 그래도 불안합니다. 또 예나와 마주칠까봐.
마이라, 당신도 엄마의 문제 해결 방식을 알고 있죠? 엄마는 이런 곤란한 상황이 닥치면 기도를 했습니다. 어제보다 만두 크기가 작아진 것 같다며 따지던 손님이라든가 언젠가는 자기 아들에게 물려줄 가게라며 장사가 잘되는지 감시하던 집주인, 중학생 때 만두 냄새가 난다며 나를 따돌렸던 무리와 술을 마시면 욕설과 손찌검을 서슴지 않던 내 약혼자와 매일같이 야근시키던 상사를 위해서. 그 사람들이 잘되기를 기도했죠. 왜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나를, 우리를 괴롭힌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걸까 항상 못마땅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진상 손님은 이직에 성공해서 서울로 떠났고, 집주인은 로또에 당첨됐다며 헐값에 가게를 넘겼고, 나를 괴롭히던 무리는 우두머리 격이던 아이가 아이돌 연습생으로 뽑히면서 흩어졌고, 약혼자는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떠났고 상사는 나보다 실력이 좋은 직원을 찾았습니다. 나도 엄마의 방법을 써봐야겠습니다. 예나가 부디 광장을 더이상 찾을 일이 없기를, 삐삐와 함께 보낼 따뜻한 방을 찾기를 바라면서요. 맞아요. 고양이 이름까지도 알아버렸습니다.
여느 때처럼 고해소에 들렀다가 광장으로 들어서던 형지는 예나가 깃발을 펄럭이며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기도가 통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실망했다. 어느새 닷새째였다. 예나가 당연하다는 듯 옆자리를 가리켰고 형지는 방석을 깔고 앉았다.
지금은 어디쯤 있나요?
형지는 자포자기한 듯 물었다. 예나는 때때로 자신의 왼쪽 어깨나 발끝 혹은 무릎 위를 가리키고는 했다. 오늘은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둘째 주 수요일은 찜질방에서 자는 날이에요. 한 달에 한 번은 목욕하거든요.
형지가 묻지도 않았는데 예나가 말했다. 이럴 때는 멀쩡해 보였다. 그럼 다른 날에는 어디에서 자느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고양이 이름이 왜 삐삐인지를 물었다. 형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삐삐를 떠올렸다. 빼빼 마르고, 주근깨가 많고, 붉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아이. 아닌가, 빨간 머리 앤과 헷갈리는 걸까. 둘 다 고아였던가. 가족이 없었나. 말과 원숭이와 살았던 쪽은 누구였지. 형지의 말에 예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좋아하는 포켓몬을 닮았거든요.
형지는 휴대폰으로 포켓몬 삐삐를 검색해보았다.
뚱뚱했나봐요.
예나가 주의를 줬다.
쉿, 듣겠어요.
예나는 삐삐를 걱정했지만 형지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둘의 대화를 들었을까봐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예나는 자신보다 더 어린 것 같았다.
저녁 시간이 지나자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들어왔다. 형지는 버릇처럼 깃발들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깃발들은 전세금 반환이나 고용안정, 임금 인상 같은 구체적인 소망을 적은 것과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며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들로 나뉘었다. 예나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그전에 형지는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부터가 궁금했다.
왜 여기로 오게 되는 걸까요.
형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예나가 대답했다.
나는 늘 여기 있었어요.
집회는 언젠가부터 광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간간이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따라 불렀지만 거기에 더해 조용히 깃발을 펄럭이며 한 차례 행진하는 형태로 변했다. 인파가 부채꼴 광장을 채우면 다 같이 일어나서 행진을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다시 광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하나둘 집으로 떠나 어느새 수가 줄어들었다. 어제는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노란 깃발들이 펄럭이는 공산성까지 걸어갔다. 산책하는 것 같기도 했고 가이드와 함께 여행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왕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왕의 무덤이 있어 공주를 찾는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가는 장소였다.
요즘은 저걸 사 먹어요.
예나가 반가워하며 가리킨 방향에는 붕어빵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아직도 붕어빵을 파는군요.
바람이 차니까. 괜찮을 거예요, 당분간은.
형지의 말에 불안한 얼굴로 예나가 대답했다. 형지는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찜통 앞에 서 있던 엄마를 떠올렸다. 옆에는 항상 전단이 놓여 있었는데, 손님들에게 만두와 함께 건네지곤 했다. 엄마가 직접 만든 그 전단에는 성경에서 베낀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받자마자 구겨버렸지만 엄마는 그래도 지치지 않았다. 형지가 예나에게서 느낀 기시감, 그건 어쩌면 엄마와 닮은 눈빛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이 지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