령은 어느새 창백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약. 약 좀 가져다줘.
주방 테이블에 남아 있던 약 봉투를 뜯어 령에게 건넸다. 령은 물도 없이 알약을 삼켰다. 잠시 후 령을 부축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낡은 계단이 삐거덕댔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난 이제 너밖에 없어. 평소처럼 울먹이는 령을 달래 재우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거의 손대지 않은 고기가 바짝 타들어 있었다.
음식물을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글램핑장을 한 바퀴 돌았다. 중앙에 있는 작은 풀장을 기준으로 양쪽에 다섯 개씩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손님이 없는 텐트들은 불이 꺼진 채 모두 지퍼로 굳게 잠겨 있었고 그래서인지 꼭 폐가를 지나는 것 같았다. 이만 돌아가려고 하는데 헤이, 하고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풀장 건너편에 있는 5번 텐트였다. 분명 조금 전 지나친 곳인데 사람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캠핑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오늘 왔어요? 풀장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인지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울렸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그렇다고 외쳤다.
—그럼 옥수수도 먹었어요?
—네. 맛있더라고요.
—무슨 색이었어요?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그냥…… 보랏빛이요? 내 말에 남자는 아…… 하고 말을 흐렸다. 할말이 더 있어 보였는데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꾸벅이고는 텐트로 돌아왔다. 밤은 선선했지만 습도가 높아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눅눅한 여름 이불을 덮고 령의 옆에 누웠다. 령이 내뱉는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다시 밖으로 나간 나는 캠핑 의자에 앉아 잠을 청하려고 애썼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울타리 너머로 뿌연 물안개가 새벽 공기를 밀어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 / /
이튿날 오후에 령이 수영을 하자고 했다. 커피를 내릴 때 천둥이 치기에 한바탕 비가 쏟아질까 했지만 회색 하늘은 울 듯 말 듯한 얼굴로 인상만 구기고 있었다. 기왕이면 맑을 때 하는 게 좋지 않아? 내가 물었다. 실은 몸이 처져서 괜스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캠핑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마감할 원고나 생각하고 싶었다.
—비 안 올 것 같은데?
하늘을 올려다보던 령이 담담히 말했다. 지리 선생님은 그런 것도 보여? 내 물음에 령은 짧게 대꾸했다. 그냥 느낌이 그래.
풀장을 발견한 령은 재빨리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낮에 본 풀장은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어떤 부분은 시멘트 바닥이 훤히 드러나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도 령은 헤엄을 잘만 쳤다.
—안 추워?
—하나도 안 추워. 딱 좋아.
령이 배영을 하며 말했다. 령의 하얀 미소가 수면 위에 둥둥 떠다녔다. 나는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발목까지만 물을 담갔다. 예상보다 차가운 물에 머리칼이 쭈뼛 섰다. 령이 홀로 물놀이하는 동안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이번에 평론을 쓸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읽히지 않았다. 물론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책을 펼치면 내가 문장을 읽고 있다기보다는 문장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는 느낌이 반복해서 들었다. 반년 동안 번번이 청탁을 거절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바빠? 안 들어올 거야? 물속에서 령이 외쳤다.
—바쁘세요?
그 사람도 내게 비슷한 말을 했다. 재작년, 내가 2년 차에 접어들고 지금보다 의욕이 있던 해의 어느 송년회 자리에서였다. 자꾸 나가길래요. 그의 말이 의아했는데 줄곧 자리를 지키다가 처음 담배를 피우러 나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잡고 있던 가게 문을 닫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글 잘 읽었어요.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평론가였는데, 지면에서 보아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초면이었다. 나는 늘 그렇듯 반신반의하며 고개만 꾸벅였다. 겨울 코트에 손을 넣은 채 우리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고 하얗게 서리 낀 창 너머로 동료들이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기에 저리 즐거울까 궁금할 때쯤 부러워요, 하고 작게 목소리가 들렸는데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는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내게 그가 덧붙였다. 다 글러 먹었어요.
그는 이내 담배를 비벼 끄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남아 그가 웃으며 자연스럽게 무리에 합류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후로 그를 만난 적도 지면에서 이름을 본 적도 없고 이제는 얼굴조차 가물거렸다. 그런데도 그의 목소리만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책을 펼칠 때, 쓰기를 머뭇거릴 때, 관습적으로 작품의 줄거리만 줄줄 옮기고 있는 스스로에게 진저리치며 모두 엎어버릴 때면 나는 어느새 그 겨울 그 골목으로 돌아가 그의 말을 되감고 있었다. 끔뻑이는 입술. 희뿌연 창 너머 보이지 않는 그의 표정을 짐작하면서.
책을 보는 틈틈이 령은 발장구를 치며 물방울을 튀겼다. 들어와. 같이 놀자. 갑작스레 주먹으로 수면을 쿵 내리칠 때는 책 모서리가 젖기도 했다. 수면 위로는 시멘트 가루인지 흙가루인지 모를 불순물이 떠다녔고 나는 수영할 줄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들어가지 않았다. 령은 팔을 크게 휘저으며 헤엄을 쳤다. 령이 움직이는 만큼 물결이 밀려와 내 발목까지 찰랑였다. 령이 반대편으로 멀어지는 동안 한곳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남자를 마주했던 5번 텐트가 눈앞에 있었다. 텐트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열리지 않았다.
물놀이를 마친 우리는 샤워하기 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부터 먹기로 했다. 나부터 텐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대학 시절 답사를 포함하여 일본과 대만까지 여러 여행을 함께했지만 한 번도 친구들 앞에서 맨몸을 보인 적이 없었다. 후쿠오카에서 령과 현주가 온천에 갈 때도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고, 외출 전에는 꼭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내 알몸을, 허벅지 안쪽에 있는 튼살과 가슴 주변에 난 붉은 반점을 상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대 또한 내게 알몸을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품이 큰 티셔츠로 갈아입은 뒤 텐트 밖에서 령을 기다렸다. 울타리 너머로 얕은 강이 흘렀고 한참이 지나도 령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 멀었어? 물어도 답이 없었다. 안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함부로 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조금 어정쩡한 자세로 옷을 갈아입는 령과 마주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저 반복적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텐트 안을 상상해보았다. 물에 젖은 수영복은 무겁고 살갗에 달라붙어 잘 떼어지지 않는다. 모노키니라서 더 어려울 테다. 겨우 팔 부분을 벗은 령은 수영복을 돌돌 말아 가슴께까지 내리지만 이내 엉덩이에 걸리고 만다. 낑낑대며 애를 쓰던 령은 타월을 쥐고 몸의 물기를 충분히 닦아낸다. 이제 다리 한쪽을 빼고, 또 한쪽을…… 그때 령이 비명을 질렀다.
지퍼를 열었을 때 개수대 앞에 령이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아 있었다. 허물처럼 널브러진 수영복을 등지고 타월로 반쯤 가린 하얀 몸이 보였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재연아, 재연아. 령이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약이 없어. 하나도 없어.
하늘은 요지부동이었다. 차라리 비라도 쏟아지면 시원했겠지만 곰팡이 핀 천장처럼 먹구름은 짙은 색으로 번져만 갔다. 후덥지근한 기운에도 령은 몸을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 왜지? 분명 4일 치를 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왜 없지? 왜, 왜, 하고 되물으며 끊임없이 이유를 찾고자 했다.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는 약이었는데 당장 서울로 돌아가기에는 령이 운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나는 면허가 없었다. 령에게 따듯한 음료라도 먹일 요량으로 로비의 매점을 찾았다. 마실 거라곤 냉장고 속 술밖에 없었다. 소주와 땅콩을 고르며 주인에게 혹시 근처에 정신과 병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장부를 작성하던 주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과? 촌 동네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는 의심쩍은 투로 물었다.
—어디 안 좋아?
나는 아니라며 두 손을 내젓고는 모닥불을 붙이게 장작이나 달라고 했다. 지나치게 부정했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캠핑장에는 어제처럼 노란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풀장을 지나는 길에 인기척이 들렸다. 5번 텐트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나무 뒤로 숨어 그쪽을 훔쳐보았다. 텐트에서 나온 남자가 선글라스를 낀 채로 운동화 끈을 동여매는 중이었다. 이내 남자는 터벅터벅 걸어 캠핑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깨에 걸친 커다란 백팩에는 마른 진흙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습한 날씨 탓에 불은 잘 붙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시도 끝에 마침내 불씨가 보일 때 장작을 던졌다. 불꽃이 한순간 커지더니 춤추듯 휘날렸다. 내내 손톱을 물어뜯던 령은 종이컵에 담긴 술을 마신 뒤에야 길게 숨을 뱉었다. 날이 밝으면 서울로 돌아가자는 말에 령은 고개를 저었다.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간만에 같이하는 여행이잖아.
—어떻게든 참아볼게.
령이 눈가를 비비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런 게 참는다고 되니…… 나는 차오르는 말을 삼키고는 손을 놀려 휴대폰으로 령이 복용하는 약에 대해 찾아보았다. 단약 부작용: 호흡곤란, 불면증, 구토. 약 복용 전보다 우울 증상이 심해질 수 있음.
—그래도 먼저 자지 마.
령이 말했다. 죽을지도 몰라.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는 또다시 우리가 나눈 통화 속에서의 묵은 레퍼토리가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려도 도시 밖으로 달려 멀리 도망쳐도 왜 결국 죽는다는 말로 회귀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수십 번의 통화에서 늘 그랬듯 나는 그런 말들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령이 무서웠지만 무섭다고 말하지 못했다. 네가 왜 죽어, 말할 뿐이었다. 령은 집에서 잠을 잘 때 자물쇠로 안방을 잠근다고 했다. 충동적으로 주방으로 달려가 식칼을 쥐게 될까봐 두려워서라고 했다.
—너도 있어?
령이 물었다. 다 놓고 싶었던 적, 있어?
강물 바람 속에서 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명징한 단어 안에 가둘 수 없어 쓰지 못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열다섯. 버릇처럼 올려다보던 형광등 줄. 팔목에 새겨진 붉은 자해 자국. 체크무늬 하복. 더운 여름에도 꼭 챙기던 회색 카디건…… 토막 난 장면들을 뒤로하며 응, 이라고만 답했다. 불씨가 작게 사그라졌다.
—왜?
왜, 라니.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기억을 되감지 않은 탓이었다. 먹고 싶지 않았다. 그게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먹는 족족 토해냈고 그동안에도 키는 징그럽게 자라났다. 몸무게는 30킬로그램 초반까지 떨어졌고 한 손으로 팔뚝을 쥐어도 공간이 한참을 남았다. 같은 반 친구도 처음 보는 애도 기묘한 짐승을 보듯 나를 봤다. 학교 복도를 걸으면 뒤쪽에서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애는 수군거렸고 어떤 애는 사냥꾼처럼 때를 노리다가 돌연히 발목을 붙잡았다. 소리를 지르면 걔는 감탄하듯 말했다. 너 정말 말랐구나. 걸을 때마다 뒤돌아보던 몸짓.
그게,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꺼진 줄 알았던 불길이 이내 되살아났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흔들리며 소리 냈다. 다 지난 일이야. 나는 말했다. 타닥타닥. 이제는 괜찮아졌어. 타닥타닥.
그날 새벽 머리 위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죽은 새나 다른 짐승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나는 잠결에 허리를 세우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텐트 천장은 내려앉은 흔적 없이 판판했다. 오른쪽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빛이 눈에 익으면서 가로등 옆 나부끼는 버드나무 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툭. 툭.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이 텐트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얼른 서울로 돌아가야 해. 연달아 내리꽂히는 빗소리가 말하는 듯했고 천천히, 옆에서 잠들어 있는 령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내려와 주방 개수대 아래 서랍을 열어보았다. 캠핑용 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시 침대 위로 올라온 나는 령의 두 손을 펼쳤다.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은 손을 확인한 후에야 몸을 뉘었다. 잠기운이 몰려올 때마다 령의 숨소리와 함께 빗소리가 머릿속을 찌르듯이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