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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는 점차 거세어져서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곁에 령이 없었다. 계단에서 내려오는데 텐트 밖에 서 있는 령이 보였다. 령은 울타리 가까이 다가가 아마도 밤사이 불어났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내게는 뒷모습만 보였고 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가가서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애써 묻지 않았다. 령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서둘러 매트 위로 올라가 몸을 뉘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잤다.
다시 몸을 일으켜 본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비가 그친 뒤의 공기가 조금 깨끗하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 걸으니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갔을 때 5번 텐트에 가 있는 령이 보였다. 령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손뼉을 치며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내 나를 발견한 남자가 손짓했다. 이리 와요. 차나 한잔해요.
—저분은 여기 일주일째 묵고 계신대.
남자가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러 간 사이 령이 말했다. 그쵸? 하고 주방을 향해 외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몇 년 전 직장에서 잘리고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시골로 내려왔다고 했다. 작년에 다른 지역에서 섣불리 감자를 심었다가 망했어요. 요즘 날씨가 워낙 가늠하기 어렵잖아요. 전기포트의 물이 끓자 남자가 차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반바지를 입은 남자의 다리에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남자를 향한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주옥에는 왜 일주일씩이나 계세요?
그러자 령이 되물었다.
—너 주옥이 무슨 뜻인 줄 알아?
나는 며칠 전 이곳으로 올 때 보았던 이정표를 떠올렸다. ‘주옥’이라는 글씨 옆에 한자가 병기되어 있었는데…… 고개를 저었다.
붉을 주에 구슬 옥. 령이 말했다. 그런데 구슬 옥은 옥수수에서 가져온 글자래. 그쵸? 하고 령이 또다시 남자의 동의를 구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끄덕였다. 네, 옥수수의 옥도 구슬 옥 자를 쓰거든요.
—그런데요?
내가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령이 또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있잖아. 이 지역에는 붉은 옥수수라는 게 있는데, 그걸 먹으면 기분이 엄청 좋아지고 환각이 생긴대. 령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꼭 약 한 사람처럼.
—붉은 옥수수면 그냥 자색 옥수수 아니야? 시중에 많이 파는 거잖아.
아니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애매한 보랏빛이 아니라요. 핏빛처럼 붉어서 한눈에 보면 딱 알 수 있답니다. 야, 저거 범상치 않다, 하고요.
남자의 말에 따르면 붉은 옥수수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 옥수수를 먹은 사람은 잠시 동안 자신이 되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한순간을 본다고 했다. 누군가는 젊을 적 떠났던 광활한 설산을 보는가 하면, 누군가는 따듯한 우유병을 쥔 채 유아차에 실려 지나던 돌담길을, 누군가는 마지막 연인의 잠든 얼굴을 보게 된다고. 그런데 흥미로운 건요, 하고 남자는 말을 이었다. 대개는 본인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순간을 보게 된다는 거예요. 머릿속에 희미해져 그런 때가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한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죠.
그런데도 환각에서 깨어난 이들은 또다시 붉은 옥수수를 찾았다. 평생 그리워하는지도 몰랐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고 끝없이 반복하며 영원으로 붙잡아두고 싶어했다. 그렇게 붉은 옥수수를 한번 먹은 사람은 영영 먹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옥수수가 사람을 먹는 형국이죠. 항간에는 주옥의 주민들이 붉은 옥수수를 팔아 먹고산다는 소문이 있다고 남자는 덧붙였다.
—여기 주인분이 키운다던 옥수수밭 말이야. 그 밭이 주옥에서 붉은 옥수수를 제일 크게 재배하는 곳이래. 눈에 안 띄게 밭 한가운데 꽁꽁 숨겨뒀다나.
령이 말했다. 무슨 말인 줄 알아?
—그 씨만 훔치면 떼돈을 번다는 거야.
그러니까 남자는 그 씨를 훔치기 위해 글램핑장에 머무르며 밤마다 그 넓은 밭을 몰래 뒤지고 있단 소리였다.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십 년 전 주옥에 왔을 때도 듣지 못한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며칠 전 먹었던 옥수수를 떠올렸다. 첫날에 주인이 준 옥수수는 보라색이었다. 아닌가. 조금 더 붉은 색이었나. 확신할 수 없었다. 나중에 같이 가보기로 했어.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 령이 물었다. 너도 갈래?
—그걸 믿어?
입을 열었을 때 내 생각보다 목소리가 조금 더 격앙되어 나왔다. 령이 남자를 보았고 남자가 입을 샐쭉했다. 야,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령이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야.
—우스갯소리라고.
찻잎이 잔 속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먼저 그곳을 나왔다.
령이 텐트로 돌아온 건 캠핑장이 노란 조명으로 물든 뒤였다. 술을 좀 마셨다는 령은 예의 그 표정, 어디를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래 일정대로라면 내일 서울로 가야 했다. 날이 밝으면 어떻게 해서든 집에 가자. 사람을 부르든 택시를 부르든. 내 말에도 령은 멍하니 캠핑 의자에 앉아 먹구름만 보았다. 한참 후에 령이 입술을 끔뻑였다. 돌아갈 수 있을까. 내게 묻는 말이 아니라 혼자 하는 말 같았다. 꼭, 돌아가야 할까. 이내 령은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여기 남을게. 령은 해가 뜨면 자기를 두고 먼저 서울로 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홀로 2층으로 올라갔다.
말해줄 수 있었다. 우리는 돌아가야만 한다고, 지금 네가 느끼는 무기력은 그저 병 때문이며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이 맑아질 거라고. 령의 곁에 누워 령의 몸을 안고 속삭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뱉었다. 기다려. 약을 구해 올게.
로비에는 주인이 늘어진 러닝셔츠를 펄럭이며 부채질하고 있었다. 나는 근처에 약국이 있냐고 물었다.
—약국은 읍내에 있는데 주말이라서 문을 닫았을 건디……
이번에도 그가 수상하다는 듯 눈을 흘겼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럼 혹시 편의점에라도 데려다줄 수 있을까요? 매점과 나를 번갈아 보던 주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지프차는 오랫동안 환기를 하지 않았는지 쾨쾨한 냄새가 났다. 차가 읍내로 달리는 동안 뒷좌석에 앉은 나는 창문을 열었다. 차량 내부의 시계는 고장난 듯 같은 숫자에 붙박여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구슬픈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주옥에 왔던 날 보았던 옥수수밭을, 주옥이라고 적힌 이정표를, 하천이 흐르는 다리를 차례로 지나쳤다. 령을 위해 나가는 건데 령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읍내에 도착했을 때 도어벨이 유난히 크게 울리는 편의점에 들어섰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신경안정제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령을 위해 살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타이레놀과 포도맛 사탕뿐이었다. 주인의 차를 타고 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읍내로 나갈 때는 도착할 때까지 다섯 곡 정도를 들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노래를 틀지 않아서 남은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차내에 적막이 흘렀고 간혹 차가 방지 턱을 넘을 때 몸이 덜컹거렸다. 같은 길을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주옥이라고 적힌 이정표를 세번째로 지나쳤을 때였다. 산책을 좀 하겠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은 룸미러로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이 시간에? 속이 울렁거린다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다고 하자 주인은 군말 없이 나를 길 위에 떨어뜨리고 갔다.
차가 아주 사라진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길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흔한 개 한 마리도 없었다. 캄캄한 길 양쪽으로는 무엇이 심겨졌을지 모를 밭이 깔려 있었고 나뭇가지에 맺힌 굵은 빗방울이 버려진 철통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텐트에 홀로 있을 령을 생각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아픈 령, 앓는 령을 생각했다. 아래로 떨어지는, 아니 아니,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친구를 생각했다. 주방을 살피는 움직임, 서랍 속을 더듬는 손, 칼을 쥐는 여자를 생각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걷는 사람이 많았다. 시에도 소설에도. 그들은 걷고 있고 대개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외투를 맡길 세탁소로, 찻잔을 파는 시장과 검은 장례식장, 폭풍이 몰아치는 등대로. 그들은 그곳에 당도했던가? 좁은 골목과 가파른 언덕을 지나 헤매더라도 기어코 바라는 곳에 닿았던가? 되새기려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잠시 후 눈앞에 다리가 보였다. 다리 한가운데 분홍색 선캡을 쓴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가만히, 나를 보며 있었다. 내가 그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아주머니가 전단을 건넸다. ‘도움의 손길’. 가만히, 아주머니가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텐트로 돌아왔을 때 령은 자리에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5번 텐트에 가보았지만 주인 없는 모닥불만 타들어가고 있었다. 붉게 비치는 바닥에 버려진 옥수수 속대 위로 개미가 기어다녔다. 다시 캠핑장 밖으로 나갔을 때 바람이 휘몰아쳤다. 얼마간 걷자 령과 함께 보았던, 드넓은 옥수수밭이 보였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풀들이 솨- 소리 내었다. 그 앞에서 령의 이름을 외쳤다.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옥수수밭을 헤집고 들어갔다. 걸음을 내딛자마자 발이 쑥 빠졌다. 몇 시간 전 내린 비로 흙이 질었다. 발 하나를 내디딜 때마다 진창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걸어도 걸어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아서 자주 뒤를 돌아봤다. 솨아- 빽빽하게 늘어선 풀들 사이로 어느 때고 누군가 나타나 내 몸을 덮치거나 발목을 붙잡아 넘어뜨릴 것만 같았다. 힘을 준 다리가 저려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령이었다.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령이 물었다. 나는 답했다. 네가 텐트에 없어서 찾고 있었다고,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령이 말했다. 재연아, 나는 잠시 산책하고 온 거야. 너야말로 어디야?
—지금 옥수수밭인데……
아니. 령이 말허리를 잘랐다.
—뭐가 보여?
대답할 수 없었다. 주변은 온통 솨- 솨- 내 키를 훌쩍 넘는 옥수수 줄기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풀이 날카롭게 살갗을 스쳤다. 나는 주저앉아 말했다. 어두워. 더는 못 가겠어.
재연아, 하고 령이 나를 불렀다.
—너 길을 잃은 것 같아.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는 령의 목소리는 정말로 불안하게 들리지 않았다. 되레 의연하고 평온했다. 그건 내가 주옥에서 잊고 있던 령의 목소리, 십 년 전 령의 목소리였다.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봐. 전화 너머로 령이 말했다. 흙이 축축할 거야. 발이 더러워질 거고. 그래도 돼. 움직여. 거기서 나와. 낮은 자세로 등허리를 굽혀 자연을 탐구하던 학자. 발을 움직이며 자기가 본 것을 기록하던 모험가. 그때의 모습 그대로 령이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옥수수 줄기를 헤치며 한참을 걸었을 때 돌연히 시야가 넓어졌다. 밭 한가운데 떼로 베인 옥수수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쓰러져 있었고 조각조각 갈라진 구름 사이로 밤하늘이 쏟아졌다. 그 아래로 거대한 산이 보였다. 축축한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을 때 시야가 일렁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산이, 검은 숲이, 온몸으로 철썩이며 범람하고 있었다. 보여? 령이 한번 더 물었다. 차오르는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령, 파도가 몰려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