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숲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령이 말했다.
요즘 들어 령은 부쩍 혼자 차를 타고 여행을 다녔다. 예전에는 학교와 집만 오갔는데 현주가 잠적하고 나서는 서울 밖으로 곧잘 떠난다고 했다. 시작은 이러했다.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마치고 퇴근하던 어느 늦은 밤, 령은 평소와 같이 음악을 들으며 텅 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플레이리스트의 마지막 곡으로 맨 아이 트러스트가 나왔고 그 말은 곧 집이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음악이 잦아들고 정적이 찾아올 즈음 령은 셀프 주유소에 딸린 햄버거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허기가 진 건 아니었다. 손톱만큼 열어둔 창 틈새로 주유소의 기름냄새가 흘러들었고 운전대에 팔을 포갠 채 기대어 있으면 그 상태로 평안히 작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든, 무엇이든. 머지않아 고개를 들자 까만 앞 유리창에 하나둘 빗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령은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 다시 보니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창을 통과하지 못한 빗방울이 유리 위에 툭, 점을 찍고 길게 미끄러졌다. 그때였어. 령이 중얼거렸다. 운전대를 꺾어 다른 도시로 향한 건.
그날 인천 앞바다가 보이는 주차장에 차를 댄 령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이 부서져 있음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음을 받아들였다. 두번째부터는 순조로웠다. 주로 금요일 밤에 고속도로를 탄 차는 공주로, 여수로, 부산과 울산으로 밤새 달렸고 령은 그곳에서 주말 동안 머물렀다. 집에 들르지 않고 월요일 새벽에 곧바로 학교로 출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령의 차 뒷좌석에는 베개와 스팀다리미, 새틴 블라우스와 슬랙스 따위의 출근복들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차 안에서 과자 하나 먹기도 꺼릴 정도로 깔끔했던 령이기에 다소 낯선 광경이었다.
—사람은 기동력이 있어야 해.
운전대를 두드리며 령이 말했다. 내 힘으로 차체를 움직여서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어서 령은 여행을 다니며 사로잡힌 풍경들, 한탄강에 곧게 뻗은 주상절리의 아름다움이나 와인을 마시며 바라본 서해안의 일몰에 대해 얘기했다. 령의 사정을 잘 아는 내게는 그런 얘기들이 일종의 자기최면으로 들렸다. 난 이렇게 우울증을 극복해가고 있어, 혼자서도 충분히 잘 지내는 중이야, 라고 말이다.
령의 말 가운데는 지난 통화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많았다. 특히 여수의 술집에서 만난 남자애 얘기는 이미 서너 번은 들은 듯했다. 남자애의 긴 속눈썹에서 시작하는 그 얘기는 다음날 아침 호텔 장면으로 끝난다. 령이 잠든 사이 남자애는 일언반구 없이 미니바에서 위스키만 챙겨 떠났다고 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익숙한 말들을 흘려들으며 창밖을 보았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이 지났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대학원 연구실에 머물러 있었다. 책상에 쌓여 있는 평론과 참고 자료 더미…… 마감까지는 열흘이 남은 참이었고 원고는 빨간 펜으로 갈긴 메모로 어지러웠다. 물웅덩이를 밟은 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누런 흙탕물 몇 방울이 차창까지 튀어올랐다.
—그래도 여기는 남겨뒀지.
너랑 꼭 오고 싶었으니까. 령은 이제 너희라고 하지 않고 너, 라고 말했다. 정적 속에서 차가 하천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주옥朱玉’이라고 적힌 이정표를 지났다. 납빛 먹구름이 내려앉을 듯 낮게 머리 위를 메우고 있었다. 그 아래 드넓게 펼쳐진 옥수수밭을 보며 령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얘기는 뭐야?
—뭐?
—숲이 어쩌고 말했잖아.
령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숲?
/ / /
지난봄부터 령은 건망증이 심해졌다. 냉장고 앞에서 꺼내려던 반찬을 잊어버리는 건 예사라고 하더라도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방금 뱉은 말이 기억이 안 날 때도 많다고 했다. 아무래도 우울증 탓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연초에 현주가 사라진 후 령이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게 그즈음이었으니까.
십 년 전 주옥에 왔을 때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지리교육과에서는 분기마다 지방으로 현장 답사를 가곤 했다. 1학년 봄에 떠난 첫 답사에서 나와 령, 현주가 속한 B조는 강원도 일대를 돌았다. B조에 1학년은 우리 셋뿐이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선배들 틈에 낀 우리는 사흘간 평창의 광천선굴과 삼척의 미인폭포, 정선을 돌며 부쩍 가까워졌다. 십 년이 흐른 지금, 석회동굴이 만들어진 원리라든가 미인폭포의 물빛이 에메랄드색을 띠는 이유에 대해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풍경들을 응시하던 령의 옆모습만큼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밤마다 벌어지는 술자리로 모두가 비몽사몽인 채 산을 오르고 바위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에도 령만큼은 꼿꼿한 자세로 협곡의 형태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옆구리에는 늘 큼지막한 노트를 끼고 다녔는데 샛노란 색이어서 나비 모양으로 펼쳐 들 때면 멀리서도 눈이 갔다. 주옥에서 묵던 마지막 밤, 노트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령은 멋쩍게 웃으며 노트를 꺼내 보였다. 거기에는 각종 지리학 도서와 논문 사이트에서 스크랩한 사진과 정보들로 빼곡했다. 자신이 알아온 정보와 눈앞에 있는 자연을 비교하면 새로 보이는 게 있다고 령은 말했다.
대학 진학이 개인의 의지라기보다 의무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전공보다는 학교 간판이 중요하다고 교육받았고 나 또한 별다른 꿈 없이 성적에 맞추어 입학했다. 대학 졸업은 취업을 위한 관문일 뿐이었고 누구도 ‘학사’라는 단어에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시기에 나는 노란 노트를 보며 학자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학자가 무언가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령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강원도 답사 이후로 현주를 포함해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특히 현주는 우리를 끝없이 바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공부밖에 모르던 령이나 내향적인 나와 달리 현주는 틈만 나면 나가서 놀자고 제안했다. 돌이켜보면 록 페스티벌에서 땀이 나도록 뛴 것도 제주도 답사 때 밤마다 숙소에서 빠져나와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린 것도 모두 현주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주옥이나 갈까, 하고 처음 입을 연 사람도 현주였다. 내가 돌연히 국문과로 전과하겠다고 선언한 2학년 가을, 우리는 선유도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강에 오리 배가 떠가는 걸 보고 있었다. 투명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오리 배 세 대가 줄지어 나아가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어긋났다. 뜻밖의 제안에 령과 나는 일제히 현주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만난 지 십 년이 되는 해에 주옥에서 보자고. 서로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얼마 전 령이 주옥으로 캠핑을 가자고 했을 때 나는 그 약속을 떠올렸다. 어쩌면 령은 현주를 주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하는지도 몰랐다. 현주가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령은 그랬다. 누구에게든 쉽게 정을 주고 쉬이 믿음을 거두지 못했다. 나는 그게 령이 수렁에 빠지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약속을 지키기보다도 령과 함께 있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삼십대에 들어서고 서로의 상황이 바빠지면서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대학원을 다니며 평론 활동을 병행하느라 겨를이 없었고, 고등학교 지리 교사인 령은 3학년 담임을 맡아 야근이 잦았다. 대학원이 종강하고 고등학교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나서야 우리는 모처럼 쉬는 기간이 겹치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까지도 원고가 풀리지 않았지만 여행을 무를 수는 없었다. 령이 죽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령은 깊은 밤 전화를 걸어 말하곤 했다. 죽고 싶다고. 이리로 와줄 수 없냐고. 그럴 때 나는 차분히,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거라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빤한 말들로 령을 달래고는 다시 책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번에 마감할 원고는 작고 문인 특집에 실을 작가론이었다. 아프다, 병, 앓고, 떨어지는…… 소설에서 특정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내 시선은 휴대폰 쪽으로 향했다.
글램핑장에 들어서자 주인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발그레한 볼이 잘 닦인 사과처럼 반짝이는 아저씨였다. 우리가 3박 4일 일정으로 예약한 8번 텐트는 복층 구조였다. 주방이 있는 아래층을 지나 짧고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오르면 다락방처럼 아담한 공간에 매트리스와 침구가 깔려 있었다. 텐트 밖으로 나오면 널찍한 데크 위 화로대와 캠핑 의자가 놓인 전실 너머로 산골짜기를 따라 강이 굽이쳐 흘렀다. 전망이 좋다고 하여 오만원을 더 주고 예약한 객실이었는데 오늘은 날이 흐렸다. 십 년 전 숙소에서 보았던 풍경은 어땠더라. 오랜 기억을 더듬는 사이 령이 내뱉었다. 감입곡류 하천이네. 그러자 주인이 서글서글 웃으며 대꾸했다.
—오메, 우째 여기 사람보다 잘 안대?
요 며칠 비가 자주 와서 좀 우중충해. 원래는 더 예쁜데. 며칠 전 폭우로 기존 예약자들이 모조리 취소했다고 주인은 투덜댔다. 뭉근한 더위 속 예고 없는 소나기가 잦은 7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수기인데도 캠핑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좋지? 주인이 물어서 우스갯소리로 답했다.
—네, 주옥같네요.
주인은 이내 웰컴 푸드라며 자색 옥수수 두 개를 건네주고 갔다. 숙소 앞에서 보았던 옥수수밭에서 직접 기른 것이라고 했다. 사람 키보다 높이 자라나 떼로 흔들리던 옥수수 줄기들이 떠올랐다. 크기가 제멋대로긴 해도 맛은 좋아. 주인의 말대로 알이 고르지는 않았지만 달고 찰졌다. 옥수수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재잘대며 먹는 내게 령은 입맛이 없다며 본인 것도 먹기 좋게 떼어 내주었다. 옥수수 안쪽으로 포크를 깊숙이 밀어넣자 보라색 알갱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자나팜, 인데놀, 스리반…… 매번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요즘에는 이렇게 복용하고 있어. 저녁을 먹기 전 령은 약 봉투를 보여주었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취침 전에 한 번. 령이 웃으며 말했다. 유쾌하게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 같았다.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맥주와 돼지 목살을 꺼냈다. 오는 길에 들른 읍내 마트에서 산 것이었다. 한 끼로 고기 사백 그램이면 충분하다고 해도 령은 기어코 한 근짜리 팩을 담았다. 내가 보기 싫게 야위었다며 더 먹어야 한다고 했다.
불판에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령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근래 통화에서 울먹거리던 모습은 다행히 찾을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대학 시절로 돌아가 지금 돌이켜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을 되짚었다. 이를테면 어느 선배가 본인의 험담을 전해들었다는 이유로 이른 새벽 후배들을 암실로 집합시키던 일이나, 쓰러질 때까지 술을 강요하던 관례. 예복협, 일명 예비역 복학생 협의회에서 이루어진다는 학대에 대한 소문들을. 그런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모종의 우월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저속한 집단에 물들지 않았다며 점잖이 서로를 추켜세우고 싶었는지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다녔던 골목과 술집, 답사에는 매 순간 현주가 있었고 우리는 지뢰 찾기 게임처럼 기억 속에서 현주를 마주할 기미가 보이면 빠르게 주제를 바꾸어가며 그 이름을 피해 다녔다. 일베 네임드였던 동기가 임용에 합격했다는 소식부터 한 교수의 고약한 술버릇 얘기까지 마친 우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령이 다시 입을 연 건 맥주 캔을 비워갈 무렵이었다. 령은 얼마 전 후배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고 했다. 그 후배는 우리보다 세 살이 어린데 2학년 2학기에 전과한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나이에 벌써? 식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중얼댔다.
—못 할 게 뭐 있나.
령이 말했다. 아마 현주가 있었다면 맞장구쳤을 것이다. 야, 난 내일도 가능해. 령과 현주는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어했다. 3학년이 되어서 령은 동거중이던 학과 선배와 헤어지고 얼마 가지 않아 현주와 살기 시작했다. 내가 국문과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모두 포기하는 동안 둘은 매일 일상을 함께했다. 지리교육과에서도 꾸준히 답사를 갔다. 공강 시간이 맞아 이따금 만날 때 두 사람은 답사 사진을 보여주었다. 대나무 숲에서, 녹차밭 앞에서, 이리저리 바뀌는 풍경 속에서 둘은 항상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집에 놀러갔을 때 현주는 삼 년째 임용을 준비중이었다. 내가 왔다는 말에도 현주는 방문을 열 생각을 않았다. 령은 예민한 시기여서 그렇다며 저녁은 둘만 나가서 먹자고 했다. 그러고는 현주를 위해 빠르게 계란말이를 구웠다. 매일 출퇴근하면서도 집안일을 도맡고 있다는 령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좀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맹목적으로 현주를 챙기는 령도, 철없이 챙김을 받는 현주도. 알아서 먹겠지. 네가 엄마도 아니고. 계란을 돌돌 마는 령의 곁에서 부러 큰소리를 냈다. 집을 나설 때 현주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미안해서 그래. 잠시 후 들어간 덮밥집에서 령은 얘기했다. 초수로 합격해서 먼저 교사가 된 게 미안해서 더 챙겨주게 된다고. 덮밥 위에는 달걀노른자가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친구 좋은 게 뭐니. 령의 말을 들으며 젓가락으로 달걀을 터뜨렸다.
나무 바닥에 노란빛이 쏟아져들어왔다. 밤이 되면서 데크 위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캔맥주를 새로 따면서 령은 말했다.
—네가 갑자기 평론 쓴다고 해서 놀랐잖아.
—비평 수업을 들은 게 문제였지.
—왜?
—거기서 교수가 그랬거든. 불운하게도 평론가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누군가에게 타고났다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 네가 보는 눈이 있긴 하지.
령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그때 네 말을 들어야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묻자 령은 대꾸했다. 우리 첫 답사 때, 왜, 정선에서 광부 체험한다고 인차를 타고 갱도로 들어갈 때 말이야. 그때 네가 귓속말했어. 현주 쟤 싸하다고.
기억나지 않았다. 속도 없이 현주를 보살피는 령을 볼 때마다 답답하긴 했어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내가 현주에게 실망한 건 그보다 훨씬 이후였다. 현주는 네 번의 도전 끝에 임용을 포기하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간제도 구하지 않고 OTT로 서바이벌 예능만 돌려보더니 작년 초겨울에는 본가에 내려갔다. 어머니가 대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한 것도 그때였다. 이후에 해가 바뀌도록 연락이 없는 현주를 보러 령과 본가에 찾아간 날, 현주의 어머니가 건강한 낯빛으로 우리를 반긴 날, 모든 게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된 날, 그날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는 승강장에서 령은 주저앉아 말했다. 현주가 어머니의 항암 치료를 명목으로 돈을 빌려갔다고.
나는 령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어떤 확인도 없이 큰돈을 건네준 령의 선의가 순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번은 참다못해 물었다. 암만 항암 치료여도 한 달 동안 천만원씩 세 번을 빌려가는데 수상하지 않았냐고. 령은 말했다. 야, 난 얼마나 드는지 몰랐지. 우리 아빠는 사고였잖아. 대학교 4학년 때 령의 아버지는 빗길에서 배달 오토바이를 몰다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에서 현주와 나는 형제가 없는 령의 곁을 사흘 내내 지키며 일손을 도왔다.
령은 현주에게 악의가 없었다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다시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점점이 번져가는 의구심이 령의 내면을 좀먹기 시작했다. 령은 틈만 나면 내게 연락했다. 우리 십 년이야. 같이 산 지는 칠 년이 넘었고. 가족이나 다를 게 없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 현주에게 물을 것들을 내게 따져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