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대망의 정금매(2)

학교에서 돌아와 청소를 시작했다. 웬일인지 보라는 없었다. 보라는 나보다도 훨씬 더 하우스에 진심이었다. 진짜 게스트하우스 운영자 같았다. 손님들이 입었던 잠옷과 사용한 수건은 물론 베개 커버까지 벗겨내 세탁기에 돌렸다. 생리대를 종류별로 꽉 채워 비치하고, 샴푸와 린스 등 목욕 용품이 충분한지 점검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오는 손님들을 위해 묶음으로 파는 모닝빵과 딸기잼을 사놓기도 했다. 아침에는 등교 준비로 바쁜 손님들을 쫓아다니며 그들의 손에 잼 바른 빵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빠릿빠릿 움직이는 보라를 보는 건 재밌었다. 소꿉놀이에 취한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먼저 손님들이 버리고 간 양말, 속옷, 스타킹을 수거하고 종류별로 나누어 지퍼백에 담았다. 그 안에는 내가 신었던 스타킹과 양말도 있었다. 찝찝한 기분이 들어 내 팬티는 안 넣었다. 얘들아 미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서랍장, 화장대, 행거를 갖다버리자 큰방에 최대 다섯 명까지 재울 수 있었다. 손님 한 명당 이만원. 매일 다섯 명씩, 그러니까 십만원을 꼬박꼬박 챙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손님은 있을 때는 있고 없을 때는 없었다. 많게 잡아 하루에 세 명이라고 치면 백팔십. 여기서 소모품비와 보라에게 주는 인건비를 빼면 한 달에 백만원도 못 버는 셈이었다. 다른 수를 써야 했다. 생활비나 찔끔 건지려고 모르는 여자애들 뒤치다꺼리하는 거 아니란 말이야. 밤마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미자 알바’ 따위를 검색했다. 새벽의 SNS에는 더럽고 추잡한 게시물들이 많이 올라왔다. 나는 거기서 두번째 사업 아이템을 발견했다. 럭키! 신었던 스타킹을 구한다는 변태성욕자들의 간절한 게시물을 보자, 손님들이 버리고 간 올 나간 스타킹이 반짝 떠올랐다. 재워주고 돈 받고 스타킹 얻고 또 돈 받고.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잖아. 일석이조 아니냐는 내 말에 보라는 일석삼조라고 했다. 손님으로 오는 애들 가운데 집에 못 들어가서 며칠 내내 같은 속옷 입는 애들 꽤 있어. 스타킹도 봐봐. 올만 안 나가면 다야? 하도 오래 신어서 보풀이 잔뜩 일어났는데 새것 공짜로 주면 걔네한테도 좋지. 띵동. 보라가 말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이미 간명한 계산이 섰다.

* 숙박비 2만원+2차 수익(스타킹 3만원, 양말 3만원, 팬티 5만원) 11만원=13만원

여기에 생리대나 새 스타킹, 양말, 팬티 비용을 뺀다고 하더라도 한 명당 십만원. 하루에 세 명씩 삼십 일이면 한 달에 구백. 이제야 좀 사업 같네. 삼 개월 바짝 하고 접는 거야. 생각보다 훨씬 큰 액수에 가슴이 뛰고 앞으로가 기대되었다.

보라는 내가 설거지, 청소기 돌리기, 욕실 청소까지 다 끝내고 방바닥에 누워 뻗자마자 돌아왔다. 두 손에는 쇼핑백 세 개, 검은색 비닐봉지가 두 개 들려 있었다. 뭘 또 샀어? 응, 워킹 홀리데이 가서 입을 옷. 봐봐. 보라는 축구 골대에서 오린 것 같은 천 쪼가리를 가슴에 얹고 말했다. 브라탑을 입고 그 위에 걸치는 거야. 섹시하고 자유롭지. 입은 것도 아니고 벗은 것도 아니고 좀 애매한 옷이네. 그게 포인트야. 저건 뭐야? 나는 비닐봉지를 눈으로 가리켰다. 보라는 위험한 웃음을 지으며 봉지에서 탕후루를 꺼내 건넸다. 나도 돈 한번 벌어보려고. 내가 재밌는 거 알아냈거든. 보라가 해준 이야기는 정도를 좀 넘은 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웃기긴 웃겼다. 보라는 신었던 스타킹을 사간 변태 고객 중 웬 얼간이 하나를 물었다. 그 인간이 탕후루를 내 앞으로 쑥 내미는데 뭔가 익숙한 얼굴인 거야. 주방이 더운지 뺨은 발그레하고 순박한 척 웃는 그 얼굴. 스타킹 받을 때랑 똑같더라. 탕후루 가게 점장인데 완전 마마보이야. 엄마한테 십 분에 한 번씩 전화 오거든. 보이는 좀 그렇지. 나이가 있으니까 마마가이네. 그래 마마가이 걔가 자기는 여자를 잘 모른다는 거야. 허구한 날 스타킹이나 비비적댄다는 거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말했지. 제가 알려줄까요? 으엑 역겨워. 금매야, 나 돈 모아서 너랑 진짜 게스트하우스 할 거야. 돈 모자라면 일 더 하고, 대출받고 그러면 오 년 안에는 열 수 있지 않을까? 보라는 탕후루 가게의 알바생으로 들어갔다. 큰 그림을 위해 자기 사업을 개시한 것이다.

 

Ⅱ 순진무구 만들기

탕후루는 너무 달았다. 보기만 해도 이가 아려올 정도였다. 물리니까 그만 가져오라고 했으나 보라는 맛있기만 하다면서 탕후루를 와그작 씹었다. 벌써 한 달이 흘렀다. 보라는 머리카락도 잘랐다가 붙이기를 반복하는 앤데, 이번 사업은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이었다. 안 질리니? 사탕 조각에 입안이 베이는 게 좋아. 따끔하고 달거든. 변태 같은 소리 마. 보라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너 윤재 좋아하지? 쉽게 자지는 마라. 나는 어물쩍 대답을 피했다. 사실 윤재와 이미 다섯 번 정도 잤다. 사귀자는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윤재는 잘생겼고 여전히 몸에서 좋은 향이 났는데 자고 나니까 뭔가 인간으로서의 정이 떨어져버렸다. 알몸으로 옆에 누워 있어도 두근거리지 않게 되었다. 섹스가 쉬워지니 남자라는 생물도, 모르는 애들을 손님으로 받아 재워주는 생활도, 인생도 쉽게 느껴졌다. 느낌일 뿐 인생은 사실 어렵겠지만, 쉽게 느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라는 슬슬 때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마마가이를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의 깍지 낀 손을 보고 있으니 속이 메스꺼웠다. 보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보라는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를 연발했다. 커피를 옷에 흘리고 입가에 생크림을 묻히는 식이었다. 마마가이는 귀엽다는 듯 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헛구역질이 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이번 건 진짜 위험했어. 보라는 순진무구를 연기하고 있었다. 때가 묻지 않고(속물이면 안 됨), 깨끗하고(섹스 경험 없고 성에 대해 잘 몰라야 함), 어리숙하며(유아 퇴행적 면모를 지녀야 함),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눈을 빛낼 수 있는(현실에 찌들지 않고 해맑음을 유지해야 함) 명랑한 소녀(숙녀는 안 됨). 마마가이는 엊그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만 같은 자신만만하고 느끼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요즘 가장 고민하는 건 뭐예요? 그냥 사는 거요. 아 인생과 미래. 가장 중요하죠. 마마가이는 인간관계와 인생 설계에 대한 조언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두 시간 정도 혼자 떠든 뒤 보라에게 신용카드를 주고 떠났다.

둘만 남자마자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눈물을 흘리며 카페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웃었다. 좀 잠잠해졌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다시 웃음이 쏟아졌다. 결국 다른 손님들의 불쾌한 눈초리를 피해 담배를 하나 피우러 나갔다 들어와야 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랑 마마가이랑 물건 직거래 때 만났잖아! 근데 순수한 척하는 게 먹혀? 그때 마스크 쓰고 나갔거든. 기억 못하는 거 같더라. 웃겨. 쟤는 허우적거리고 살다가 엄마 돈으로 가게 차린 거라면서 뭐 이렇게 인생에 대한 성찰이 깊냐. 웃기지? 우스워. 한심한 새끼. 우리 보라 사업 한번 똥꼬 빠지게 하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금매야. 사장님들이 알바생 구할 때 어떤 사람 뽑는 줄 알아? 똥꼬 빠지게 일할 것 같은 애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일할 사람 고르는 거야. 간절한 열망이 있는지 없는지 눈만 봐도 알아. 내 사업도 똑같아.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열망을 몸과 마음을 바쳐 보여주는 거야. 그러면 고객은 긴장을 풀어. 그리고 내게 마음과 돈을 주지. 보라의 주장을 듣고 있다가 깨달았다. 우리가 진정 원하고 바라던 것에서 더 멀어졌다는 것을. 인간으로서의 어떤 요소가 증발했다고 해야 할까. 내 소망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런 걸 잘도 깨우쳐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연애 사업은 보라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년 버전 순진무구 만들기라고 해야 할까. 엄마는 사랑을 있는 대로 다 꺼내어 상대에게 퍼부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또다시 똥꼬 빠지도록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구나. 열망과 간절함은 아르바이트나 사업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연애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할 따름이었다. 자식에게 주어야 할 사랑과 관심까지 모조리 긁어다가 남자한테 바쳤으니, 언니가 집을 왜 나갔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본 언니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인간 다쳤구나. 몸 마음 어딘가. 그건 엄마도 나도 보라도 마찬가지야. 사실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약간 찌그러진 채로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언니를 만나면 엄살 부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야. 다친 부분을 치료하거나 봉합하지는 못해도, 다친 채로 사는 방법은 가르쳐주어야지. 보통 이런 건 어른들이 알려주는 거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는 향긋하지만 씁쓸한 맛이 났다. 그래서 좋았다.

 

집으로 가는 내내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모조리 걷어찼다. 입이 가벼운 새끼들은 여자든 남자든 딱 질색이야. 보라에게 마마가이를 어떻게 벗겨먹을지에 대한 계획을 한참 듣고 있던 차였다. 윤재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집을 빌릴 수 있냐는 문의가 들어왔다고 했다. 이벤트 카페처럼 공간만 대여하고 어쩌고저쩌고 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자기도 이게 헛소리라는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최용철이 자기 여자친구한테 프러포즈하겠다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잖아. 최용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상황이 그려졌다. 양아치 새끼들한테 제대로 잡혔구먼. 그래도 안 돼. 안 그래도 많은 애들이 다양하게 드나드니까 윗집이든 아랫집이든 슬슬 이상하게 보는 눈치였다. 며칠 전부터는 체크인 시간을 통일해 다 같이 출입하고, 한번 입실하면 체크아웃 시간까지 외출을 금했다. 게다가 최용철 무리라니. 술판을 벌일지, 난교 파티를 열지 모를 애들이었다. 윤재는 이게 비밀 사업이라고 이름만 귀엽게 붙였을 뿐, 얼마나 큰일을 벌린 건지 가늠이 안 되는 건가. 걸리면 그냥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인생 시작부터 크게 한 획 긋고 갈 수도 있다. 짜증이 치솟았다. 얻어맞더라도 하우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어야지.

하지만 정말로 얻어맞아 엉망이 된 윤재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금세 누그러졌다. 이게 뭐야, 아휴 속상해. 사실 속상하진 않았는데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스스로 의문이 들다가 엄마의 말버릇이었다는 걸 기억해내고 기운이 빠졌다. 나는 윤재의 엄마가 되어주고 싶은 건가. 으, 역겨운 생각. 윤재는 내 말에 감동한 모양이었다. 상처 난 얼굴, 울상인 표정. 귀엽잖아. 키스하자. 윤재는 개처럼 기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다정하고 질척한 섹스였다. 만족스럽긴 했으나 전보다 정나미는 더 떨어졌다. 윤재는 그날 이후로 머리를 기대는 등 사소한 스킨십을 해왔고, 내가 어딜 가든 졸졸 따라다녔다. 귀찮아.

최용철은 정말로 자기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신의 가족이 되어달라는 절절한 고백은 철없고 징그러웠으나 조금은 감동스러웠다. 이벤트는 나의 관리 감독하에 최소한의 인원만 참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와 윤재는 이벤트 비용을 더 받고 촛불 백여 개와 장미꽃, 풍선을 준비해 집을 꾸몄다. 최용철이 미리 준 폴라로이드 사진도 벽에 잔뜩 매달았다. 윤재는 내게 반해버렸다. 최용철한테 이벤트 조건과 가격을 제시하는 모습이 강단 있어 보였다고 했다. 자존심을 다 버렸는지 시도 때도 없이 자자고 조르고, 몸을 밀착해 발기된 자지를 내게 비벼댔다. 짜증이 나 흘겨보면 발정난 강아지가 눈을 빛내며 사랑을 뿜어내고 있었다. 엄마는 이런 게 뭐가 좋다고 연애를 쉬지 않고 했을까. 엄마는 이별에 취약하긴 했으나 성격이 좋고 일을 잘했다. 패브릭 제품 영업, 캐셔, 펫숍 직원 등 어떤 일을 맡아도 재미를 붙였다. 체력도 대단했다. 일하느라 지칠 만도 한데 다녀와서는 저녁이든 새벽이든 화장을 고치고 남자를 만나러 갔다. 대단해 하여간. 엄마가 일하고 연애하느라 바쁠 동안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세상에는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긴 있었다. 도서관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했다. 지역 아동 센터에 가면 간식도 주고 문제집도 주었다. 저는 아동이 아닌데 또 왔어요. 센터 선생님은 이제 내가 보조 강사니까 애들 수학 좀 봐주라고 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카프리썬 음료와 빵을 먹었다. 엄마 말대로 나는 어디 가서도 잘 살 거야.

프러포즈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최용철은 대학에 가지 않고 삼촌 밑에서 일을 배우며 부자가 될 거라고 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베어링처럼 생긴 투박하고 촌스러운 반지를 어디서 잘도 구해왔다. 키스해! 키스해! 최용철의 친구들이 짠 듯이 외쳤다. 나는 소리지르지 말라고 팔을 흔들며 저지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이벤트가 끝나고 촛불을 일일이 입으로 불어 껐다. 집주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학생. 내가 많이 참았어… 학생 엄마는 연락도 계속 피하고…… 같이 사는 장소에서 너무들 하네… 저녁에 들른다고 엄마한테 전해줘.

 

저를 혼자 두지 않으려고 친구들이 많이 찾아와요. 너무 시끄럽지 않게 주의할게요. 엄마의 부고 소식을 전하자 집주인 아주머니는 찍소리도 못했다. 아무래도 엄마 잃은 애한테 화내기는 좀 그렇지. 내가 뭔 일을 벌이는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위기를 모면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불행이 찾아왔다. 집주인은 월세를 요구했다. 하지만 저희는 전세인데요? 집주인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난감함과 안쓰러움이 딱 절반씩 느껴졌다. 엄마가 급한 일이 있다고 월세로 전환했다는 것이었다. 학생, 이미 그렇게 한 지 몇 달도 더 됐어…… 갑자기 큰돈을 달라니까 당황스럽고 나도 힘들었어. 그런데 너무 급하다고 울며불며 얘기하니까 겨우 모아서 줬지 뭐. 그러니까 이 집은 이제 전셋집이 아니라 월셋집이고, 전세 보증금은 사라졌고, 나는 매달 월세를 내야 하는구나. 간명하네. 역시 우리 엄마 대단해. 집주인은 현관문을 열어둔 채로 서서 이체 내역과 함께 엄마와 나눈 문자를 보여주었다. 간간이 돌풍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잊고 있던 회오리가 가슴속에서 슬슬 몰아치려 하고 있었다.

요즘 불행의 회오리에 대하여 너무 방심하고 지냈구나. 회오리는 그러니까 소망의 결과물 같은 것이었다. 작은 불행은 바람을 일으켜 인생에 영향을 주려다가도 쉽게 사라졌다. 하지만 작은 불행에 이것저것 끼어들면 바람은 회오리가 되고 휘몰아치지. 언젠가 언니는 엄마가 회오리 인간이라고 했다. 작은 불행은 잘 해결해서 꺼트리면 돼. 근데 우리 엄마는 작은 것도 크게 키우는 사람이야. 크게 키우고 자기가 회오리 그 자체가 돼서 휘몰아친다고.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나는 언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알았다. 정신 못 차린다는 뜻이지 뭐. 엄마는 누가 봐도 건강하지 않은 남자를 사랑하고 그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걸로 모자라 돈을 꿔준다거나, 남들이 보면 왜 속는지 이해가 안 갈 만큼 같잖은 사기를 당했다. 언니는 우리가 그 회오리에 휩쓸리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맞아 동의해. 나도 알아. 근데 언니는 못 보는 것. 엄마는 그 안에서 살았다. 언니 말대로 엄마는 자식이 뭘 먹고 다니는지, 뭔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는지 살피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휘청이면서 나 키워줬잖아. 회오리 인간이라는 거 이상하고 짜증나고 양육자로서 실격이지만 엄마는 강인하고 불쌍해. 휘청이면서 일하고 연애하고 그렇게 살다가 갔잖아. 다 떠나서 이제 엄마 탓은 그만하고 싶었다.

내 연락을 받은 보라는 초콜릿 홀 케이크를 사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찾아 틀었다. 기분 꿀꿀할 때는 단맛에 찌들어버리는 거야. 나는 참지 않고 울면서 케이크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엄마가 밉지 않았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나는 왜 이럴 때조차도 엄마가 보고 싶어 죽겠는지. 케이크는 끝내줬다. 호텔에서 샀다더니 역시 비싼 게 최고. 맛있어. 엉엉. 기분좋아.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우리가 주기적으로 찾아보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보라가 말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보면 뭉게구름이 많이 나와. 해석 찾아봤는데 동심이나 성장을 의미한대. 그래서 특히 후반부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흰구름이 자주 등장하는 거래. 이번 사건으로 주인공들이 한층 자라났을 테니까. 일리 있어. 멋있다. 귀여워. 좋다. 응 진짜 좋아. 근데 동심과 성장은 너무 다르지 않나. 아니야, 같은 거야. 그래? 응 그래. 나는 악역이기만 한 악역이 안 나오는 게 좋아. 말도 안 되는 거 트집잡아서 주인공 인생 조져버리는 이상한 악역이 없잖아.

홀 케이크를 퍼먹으면서 보라는 계속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마마가이? 응. 슬슬 때가 되었다니까. 이제 준비 끝났어. 역겨운 연기 하는 것도 지쳤고. 무슨 준비? 보라는 웃었다. 잘 익은 열매를 바라보는 농부처럼. 금매야,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은 말이야. 작은 것부터 원하는 걸 들어주잖아? 그러면 그다음에는 먼저 것보다 조금 더 큰 걸 원해. 그러다가 원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바라게 되고 결국 선을 넘어. 그게 내 사업이야. 순간 보라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우리가 꿈꾸던 소망이 뭐였지. 소망은 사실 작은 망함이라는 뜻이었다. 원하는 게 무사히 이루어질 가능성은 작으니까, 소망을 품으면 절망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회오리 인간을 엄마로 둔 나는 알고 있지. 작게 망하고 또 망하고, 작은 망함이 모여서 이 지경이 되고 인생 전체가 망해버린다는 걸. 보라는 뭘 바라고 원하다가 어디까지 갈 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