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맑은 하늘의 회오리
순조로운 나날이었다. 손님은 하루에 서너 명씩 꾸준하게 찾아왔다. 양말, 스타킹, 팬티도 잘 팔렸다. 집에 못 들어가는 애들과 변태성욕자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존재한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자주 찾아오는 애들은 라면이나 반찬을 가져오기도 했다. 윤재와는 이상한 관계를 끝장냈다.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못 견딜 만큼 징그러웠다. 진지한 관계를 맺거나 달콤한 사랑을 지저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각자 잘 살자고 말하며 쫓아냈을 때 윤재는 울었다. 왜 진심인 척 질질 짜고 난리야. 지도 마찬가지면서. 단순한 해프닝일 뿐이다. 보라는 마마가이와 연을 끊은 모양이었다. 사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돌아온 밤에 혼자서 초콜릿 홀 케이크와 싸구려 와인 세 병을 해치웠다. 성공했다면서 왜 눈물을 보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에는 부작용이 따르는구나. 지겨워. 나는 휘청이는 보라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뜯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큰돈이긴 한 것 같았다. 금매야, 이 돈 월세에 보탤게. 너 원룸 구할 때 보증금도 보탤게. 대신 나랑 나중에 게스트하우스 하는 거다? 응? 나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하지만 지금의 보라는 내가 알던 보라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돈을 받고 싶지도, 보라의 몸과 마음을 뒤치다꺼리하며 살 생각도 없었다.
언니가 돌아오기까지 이 주도 남지 않았다. 내 사업도 슬슬 마무리지어야 했다. 언니는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자매가 함께 힘을 내며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건 언니 네 생각이지. 우리가 가족이 아니게 된 지는 한참 지났는걸. 한 일 년 정도만 함께 살 생각이었다. 그후에는 이 집의 전세 보증금을 갖고 튀려고 했다. 나도 언니를 버려보고 싶었다. 보증금이 사라졌으니 계획은 무산되었다. 짜증나. 그래도 스타킹 팔아서 번 돈이 꽤 모였다. 여차하면 이걸로 혼자 살지 뭐. 나는 어디 가서도 잘 살 애니까.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밖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술에 떡이 된 아저씨들의 고성방가가 들려오는 건 이 집의 익숙한 특징이었다. 보통 팔 분 이내에 유흥 주점이 몰려 있는 골목을 다 지나갔는데 오늘따라 소음이 길었다. 큰방에서 자던 손님 중 하나가 나를 불러냈다. 좀 나가봐. 이러다 다 걸리겠어. 나는 이어플러그를 뽑았다. 금매, 썅년, 202호, 사랑 등등. 윤재가 술에 취해 내 인생을 망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누가 따라오거나 지켜보는 느낌이 들더라니. 어린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시끄럽고 귀찮은 애인 줄은 몰랐다. 안 들리는 척 내버려두기에는 건물 이름이나 호수를 너무 명확하게 외치고 있었다. 나는 잠옷 위에 후드 집업을 걸쳤다.
온 이웃들이 밖으로 나와 잔소리와 야유를 퍼부었다. 어린 애새끼들이 낮이고 밤이고 몰려다니면서 건물 뒤편에서 담배 피우고 어쩌고 고함치는 걸 보니 여태껏 참았던 불만이 터진 듯했다. 근처에 산다던 집주인 아주머니도 소환됐다. 집주인은 화를 참는 얼굴로 이웃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나는 윤재를 집안에 빠르게 처넣었다. 집주인은 쉬이 물러가지 않았다. 불길함을 느낀 손님들이 집안에서 다 같이 쏟아져나와 밤의 골목으로 흩어졌다. 이건 어른이 해결해야 할 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경찰서 가서 얘기하거나. 집주인은 보기보다 이성적이었다. 이성적인 어른의 얼굴은 정말 무서워! 대충 둘러댈 수도 없으니까. 경찰서에 가면 끝이야. 지역 아동 센터 선생님이 잠시 떠올랐으나 도저히 이딴 일로 부를 수는 없었다.
명함 안 버리고 잘 갖고 있었네. 아저씨는 캔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경찰서에 끌려갈 뻔한 순간 아저씨의 깨끗한 셔츠 깃이 떠올랐다. 아저씨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알아서 일을 다 처리해주었다. 집주인한테는 자신을 삼촌이라고 소개했다.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돌보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아저씨의 어른스러운 옷차림과 예의 있고 텅 빈 대사가 마음에 들었다. 윤재는 아저씨를 보자마자 알아서 집을 나갔다. 어린 남자애들은 어른 남자를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걸까. 집안은 고요했다. 잠깐만 나누려던 이야기가 꽤 길어졌다. 아저씨는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현관 입구 바닥에 엉덩이만 걸터앉아 말을 이어나갔다. 역시나 엄마의 동창이 아닌 옛 연인이었다. 진지하게 사귀었어. 결혼을 생각했을 만큼. 교제하지 않았을 때도 친구로서 종종 만났어. 금매 네가 아기였을 때 같이 보기도 했지. 아저씨가 해준 이야기 중에는 예상치 못한 게 많았다. 불행하고 역한 줄만 알았던 엄마의 연애가 꽤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었네. 아저씨는 엄마와의 추억을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꺼냈다. 사소하지만 사랑스러웠던 일화가 천천히 그려졌다. 나는 정말요? 진짜 그랬어요? 같은 물음을 던지며, 나도 모르게 아저씨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여서 조금 부끄러웠다.
밀키트, 우유처럼 간단한 식료품이 종종 집으로 배달되었다. 고민하다가 아저씨한테 문자를 보냈다. 끼니 거르지 말고 몸 건강 잘 챙기라는 답장이 왔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면 대형 마트 쇼핑백이 덩그러니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윤재가 술 먹고 난동 부린 이후 게스트하우스 사업을 접었다. 여자애들이랑 떡볶이 만들어 먹었을 때 재밌었는데. 먹을거리가 쌓였으나 이제 함께 나누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 식료품 대부분이 냉장고에서 썩어갔다. 그래도 내 끼니를 신경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 보라와 나는 조용히 누워서 각종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를 보았다. 소리를 크게 키워도 집안은 왠지 고요했다. 수다쟁이였던 보라가 말이 없어진 이유는 제 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가 빙빙 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라는 잠들고 나만 깨어 있는 새벽이었다. 언니와 함께 꾸역꾸역 사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는 것일까.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그렇겠지. 그게 몇 년이나 될까. 언니는 엄지손톱만한 월급을, 나는 새끼손톱만한 알바비를 열심히 모으다가 언제쯤 그럴듯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인생은 뭘까. 역시 새벽은 위험해. 해가 진 이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말아야 했다. 현관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새벽에 마트 배달일 리는 없었다. 아저씨에게 말해야 했다. 무엇을? 먹을 것 좀 그만 보내라고? 동정은 필요 없다고?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마마가이는 열린 문짝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문고리를 힘주어 당겼지만 어림도 없었다. 걔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아까 들어가는 거 지켜봤어. 좀 불러줘. 대답 없이 현관문을 붙잡고 한참을 씨름했다. 마마가이는 나와 눈높이가 같을 정도로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이었다. 보라와 우스갯소리를 한 적 있었다. 한 대 치면 쓰러질 것 같지 않냐? 비리비리해서. 그 비리비리한 놈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욕을 뱉거나 때리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난 오금이 저렸다. 이따위 찐따조차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게 억울했다.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들어오지 마. 불러올 테니까 이 앞에 서 있어요.
너희 엄마가 금매 너 가졌을 때 되게 행복해했어. 가장 좋은 이름을 주겠다고 아는 목사님, 스님 다 찾아뵙고 작명소도 갔어. 다 마음에 안 드는지 결국 직접 지었더라. 너희 아빠 되는 사람이랑 온종일 머리 싸매고 고민했대. 각자 꾸었던 태몽을 되새기면서. 아저씨한테 내 이름에 대해 들었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처럼 심장이 뛰기도 했다. 하지만 이름만 고심해서 지으면 뭐해. 하필 지금 이 얘기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나는 내 이름이 싫어졌다. 아빠는 엄마에게 새 인생의 시작이었다. 갑자기 생기긴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엄마에게 놓쳐서는 안 될 기회이자 소망 그 자체였다. 엄마가 바라는 것, 그리고 작은 절망의 시작. 하늘에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 채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엄마의 작은 절망은 이만큼이나 커서 대망에 가까워졌습니다.
내 생각보다도 보라는 간이 큰 애였다. 목돈을 받아낸 것이 두 사람의 끝인 줄 알았는데, 그 이후에도 보라의 사업은 이어지고 있었다. 마마가이는 현관문을 붙잡고 오늘은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며 기어코 보라를 불러냈다. 네가 나 협박한 거 다 녹음해놨어. 이게 마지막이야. 돈을 다달이 계속 보낼 수는 없어. 미성년자인 거 몰랐고 나는 너 진심으로 좋아했어. 평생 네 연금 복권으로 살 수는 없다고. 마마가이는 돈봉투 두 개를 꺼내 보라와 내 앞에 던졌다. 나한테는 왜 주는 거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마마가이가 말했다. 입조심하라고. 내가 네 집이랑 학교 다 알고 있다는 거 기억하고. 나는 억지로 받은 돈봉투를 열어보았다. 겨우 십만원 들어 있었다.
집주인은 가끔 자기 딸을 보내서 나를 감시했다. 그 언니는 올 때마다 목을 쭉 빼고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과잠은 왜 입고 다니는지. 멋있는 줄 아나. 대학생이라는 티를 내고 싶어 안달난 똥강아지 같았다. 이번에도 엄마가 주라고 했다면서 즉석밥 몇 개와 반찬이 담긴 도시락통을 내밀었다. 재수없어. 부탁하지도 않은 걸 주는 건 실례라고요. 나는 마마가이가 주었던 돈봉투를 가져와 똥강아지 대학생의 멋진 과잠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수고비예요. 나는 집주인 딸이 코웃음 치는 사이 문을 닫아버렸다. 비닐봉지에 담긴 것들을 통째로 냉장고에 처박았다. 나무 심기 행사에 가기 위해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민둥산에 묘목을 심으면 밥도 주고 간식도 준다고 했다. 밥도 밥이지만 무엇보다 센터 선생님이 추천한 거니까. 지금까지 이모저모 받은 도움이 많으니 은혜를 갚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가는 길에 보니 마마가이가 운영하던 탕후루 가게는 망한 모양이었다. 간판만 그대로일 뿐 내부는 이미 철거가 진행되었다. 콘크리트 벽과 바닥이 휑했다. 마마가이는 돈 많은 엄마를 두었으니 금방 다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이 신던 스타킹으로 눈물을 닦으며 자기 위로 조금 하다가 언제 넘어졌냐는 듯 일어서겠지.
두 해 전 산불이 휩쓸고 갔다던 민둥산은 주변의 다른 산과는 달리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먼저 왔다 간 봉사자들이 심어놓은 나무들은 하나같이 조그매 귀여웠다. 워낙 작은 산이라 큰 피해는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사람들이 모이고 같은 뜻을 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어쩌고저쩌고. 활동 전 갑작스러운 연사가 시작되었다. 번들거리는 면상 때깔을 보아하니 지역사회에 크게 이바지하는 높으신 분 같았다. 빨리 주먹밥이나 얻어먹고 싶어. 주린 배를 달래며 바람 쐬러 다녀오자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저씨는 종종 연락을 해왔다. 나의 순진무구가 잘 먹힌 모양이었다. 딸뻘 되는 애 앞에서 수줍은 듯 웃을 때부터 알아챘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구나. 나는 보라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작은 것부터 원하는 걸 들어주잖아? 그러면 그다음에는 먼저 것보다 조금 더 큰 걸 원해. 그러다가 원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바라게 되고 결국 선을 넘어. 몇 번 통화를 하고, 차를 마시고, 웃긴 이야기를 나누고. 교복을 입고 만나면 아저씨의 표정이 더 밝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아저씨는 종종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왔다. 아직은 없다고 했지만 필요한 거야 많죠. 기대하세요. 하지만 나는 보라와 달라. 조심성이 꽤 많고,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같잖은 악역과 달리 현실의 악역은 치밀하다는 걸 알고 있다. 언제라도 가면을 벗고 내 몸을 먹으려고 달라붙을지 모른다는 걸 잊지 않아. 아저씨가 선을 넘도록 두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어디까지가 선이지?
나무 심기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땅은 척박하고 삽은 너무 오래되어 손잡이에서 나무 썩은 냄새가 났다. 원래는 물건을 옮기며 조금 깔짝거리다가 빠져나와 집에 갈 계획이었다.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말을 걸었다. 우리집에 손님으로 찾아와 머물렀던 여자애였다. 우리는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내 눈빛을 읽은 여자애가 턱으로 한 부부를 가리켰다. 힘차게 삽질하는 남자와 그의 땀을 닦아주는 여자. 어화둥둥 예쁘다며 묘목을 쓰다듬는 부부의 손길이 부드러워 보였다.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나와 얘기하고 있는 여자애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어색한 목례를 건넸다. 의외였다. 그냥 한 번 자고 간 것도 아니고 얼굴을 기억할 만큼 종종 오던 애였다. 저 두 사람이 정말 부부가 맞을까? 아, 술이 들어가면 달라지나? 여러 추측이 떠올랐으나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여자애가 찝찝하게 웃어서 나도 비슷한 미소로 화답했을 뿐.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우리는 이름도 묻지 않고 얘, 너 같은 호칭으로 서로를 불렀다. 걔는 잘 지내? 항상 너랑 같이 있던 다른 애. 걔가 아침으로 주던 모닝빵 맛있었는데.
보라는 떠났다. 마마가이가 다녀간 이후 사이가 급격하게 서먹해졌다. 보라의 주장에 따르면 내가 자기한테 거리를 둔다고 했다. 윤재한테 그랬던 것처럼. 자기를 유치하고 더럽게 보고 있는 거 다 안다고. 하지만 괜찮다고. 그런 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맞기는 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보라는 빨리 성인이 되고 싶어했다. 우리가 같이 이것저것 꾸려가기를 바랐다. 나는 보라의 말들이 부담스러웠다. 연락해줘. 미래에서 기다릴게. 보라는 우리가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의 대사를 장난스럽게 따라 했다. 그 장난스러움이 너무나 진심으로 느껴져서 무서웠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 보라야 나 기다리지 마. 어른이 되기를,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바라지 마. 바라고 원하는 거 하지 마. 우리 같은 애들이 소망을 품으면, 그 작은 것들이 하나씩 모여서 이상한 절망으로 휘몰아칠 거야.
눈앞에서 작은 회오리가 일었다. 내가 흠칫 놀라자 여자애는 뭘 그렇게 놀라냐며 웃었다. 학교 운동장에서도 가끔 보인다고, 회오리바람은 민둥산이나 운동장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생긴다고 했다. 나는 회오리가 싫어. 자연발생인데 네가 싫고 말고 할 건가 싶어. 그냥 싫다고. 그러면 괜히 시비 털거나 폰질할 시간에 나무 열심히 심으면 되겠네. 땅에 존나 이것저것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면 안 생길 테니까. 이미 생긴 건 어떡해. 뭐. 이미 생겨나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회오리는 어떡하냐고. 징징거리지 말고 봐봐. 여자애는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회오리를 가리켰다. 땅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던 작은 회오리바람은 키가 조금 커지다가 없어졌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공중에서 낙엽 몇 개가 빙빙 돌았다. 내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자 여자애가 말했다. 원래 회오리는 땅에서 하늘 쪽으로 휘말아 올라가는 거야. 그러면 어떡해? 뭘 어떡해. 아쉬우면 잘 가라고 굿바이 키스라도 날려주든가. 어차피 날아가다가 흩어져서 없어질 건데. 그렇구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애는 어이가 없네, 왜 저래 따위의 말을 읊조리다가 떠났다. 네 친구한테 아침 챙겨줘서 고마웠다고나 전해줘. 그리고 너 이상한 데 화풀이하지 마. 재수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걷다가도 몇 번이나 멈추어 섰다.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청바지와 운동화는 지저분했고, 머리카락에서 흙냄새가 났다. 보라를 떠올리면 마마가이의 순박한 듯 추한 얼굴이 따라왔다. 그 위에 아저씨의 얼굴이 겹치고, 그다음에는 아저씨의 손을 꼭 잡은 엄마가 자동으로 그려졌다. 언니는 엄마가 회오리 인간이라고 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엄마는 민둥산이야. 허허벌판이야. 나 또한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명해서 놀랍지도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집 앞에는 윤재가 서 있었다. 갈 곳이 없어. 어디서 또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다 터져 있었다. 최용철? 윤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더이상 대화하지 않고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집주인이 챙겨준 밥과 반찬을 데워 윤재와 나누어 먹었다. 내일 우리 언니 오기로 했어. 이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산대. 나는 센터 선생님에게 윤재의 연락처를 보내놓고 핸드폰을 꺼두었다. 보라가 아침에 잼 발라준 빵 맛있었지? 편의점 떡볶이에 소시지랑 치즈 넣은 야식도 맛있었지? 손님들이 가져온 반찬 다 넣어서 만든 비빔밥도 맛있었지? 윤재는 내가 하는 질문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