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시간이 지날수록 진료 대기석의 사람들은 늘어났다

3. 누전

 
시간이 지날수록 진료 대기석의 사람들은 늘어났다. 이마치는 두 시간을 꼬박 기다린 끝에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간호사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상황이 그대로라는 뜻이었다. 
“혹시 의사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이마치가 보기엔 간호사도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좀더 기다려보시겠어요? 아니면 진료를 다음주로 미루시겠어요?”
“좀 걷고 있을게요. 혹시라도 선생님이 오시면 연락 주세요.”
이마치는 혼잡한 1층에 비해 한층 조용한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자 양쪽으로 복도가 갈라졌고, VR 진료실이라고 쓰인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제제는 그녀가 곧 VR 치료를 받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정확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그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곧 알게 될 거라고만 했다. 이마치는 문에 달린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너 평 정도 되는 방에 안락의자와 협탁이 놓여 있었다. 크림색 리클라이너식 안락의자는 한눈에도 편안해 보였다. 협탁 위에는 VR 체험을 위한 고글이 있었다. 그리고 화병에 담긴 노란 튤립 한 송이. 그것은 꼭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노란색이었다. 이마치는 뭔가에 이끌린 사람처럼 문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려, 그녀를 받아들였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호기심에 고글을 써보았다. 색안경인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캄캄하기만 했다. 순간 바닥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천둥이 울렸다. 눈앞에서 하얀빛이 번쩍였고, 노란색 나비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대한 건물이 솟아올랐다. 이마치는 깜짝 놀라 고글을 벗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단발머리 여자의사가 들어왔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문이 안 잠겨 있길래……”
이마치는 변명을 중얼거리며 허둥지둥 그곳에서 나왔다. 
1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간호사에게 다음주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바깥으로 나선 이마치는 빗속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병원 입구 택시 승강장에 서 있던 차에 오른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까 올 때 탔던 택시, 그 기사였다. 순간 경계심이 들었으나 줄지어 있던 차를 사람들이 온 순서대로 탄 것이니 우연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기사도 그녀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근방에서 손님들 태우고 계속 돌다가 혹시나 하고 와봤는데 제가 오늘 운수대통이네요.”
기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마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병원에 꽤 오래 계셨네요. 어디가 아프세요?”
이마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터프가이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후 뒷좌석으로 뭔가를 건넸다. 깨끗한 거즈 수건이었다. 
“비를 맞으신 것 같아서요. 좀 닦으세요.”
“감사합니다.”
이마치는 그제야 자신이 흠뻑 젖은 몰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 옆자리 등받이 위에 작은 가방 있죠? 그 안에 종이컵이랑 보온병이 있을 겁니다. 따뜻한 물이에요. 살살 갈 테니 그걸 좀 따라서 마셔보세요.”
따뜻한 물을 마시자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이마치는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때 택시는 이미 아파트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기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앞을 보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그는 이내 이마치가 깬 것을 알아차리고 명랑하게 물었다. 
“다 왔습니다.”
이마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병원에서 누구에게라도 돈을 빌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같이 올라가시겠어요? 택시비 드릴게요.”
“돈 대신 아까 사인을 받았잖아요.”그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려서 이마치가 앉은 뒷좌석의 문을 열어줬다. 그가 받쳐주는 우산을 그녀는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우산은 제 선물입니다. 생일 선물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비를 맞으며 뛰어가 운전석에 올랐다. 택시는 금세 떠났다.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이마치는 택시가 떠나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아파트 공동 현관에는 전에 못 본 새로운 문이 달려 있었다. 음각으로 복잡한 그림을 새겨넣은 유리문이었다. 이마치는 그 앞에 서서 무슨 그림인지 들여다보았다.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 말고는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다시금 번개가 쳤다. 유리문에 반사된 빛이 눈부셔 이마치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마치는 편지함에서 우편물을 꺼내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세 대나 되는 엘리베이터의 표시등에 ‘점검중’ 불이 들어와 있었다. 오름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먹통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빈 가방만 들고 나온 날이었다. 휴대폰이 있어도 관리사무실이니 경비실이니 하는 곳의 연락처를 찾을 생각을 못했을 테지만. 그때 누군가가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얼룩이 묻어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의 키 큰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그는 그녀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이마치는 그를 향해 다가가서 외쳤다.
“저 말씀 좀 물을게요!”
우뚝 멈춰 선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녀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눈을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남자의 눈동자가 빛났다. “저 부르셨어요?”
남자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베이터가 운행을 멈췄어요.”
이마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언제 정상화될지, 혹시 아세요?”
“아마 누전이라서 그럴 거예요. 고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어요. 이 앞에서 밤을 새울 게 아니라면 걸어서 올라가세요.”
이마치는 난감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전 60층에 살아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막상 올라가보면 별거 아니에요. 쉬엄쉬엄 올라가보세요.”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는 성큼성큼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마치는 황당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갔다. 이제 표시등의 ‘점검중’ 글자도 사라져버렸다. 한참을 더 기다리다, 마침내 지친 이마치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한 층을 올라가는 데는 긴 계단을 한 번, 짧은 계단을 두 번 지나가야 했다. 남자의 말처럼 계단을 오르는 일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아직 쓸 만한 나이인지도 몰랐다. 사실 겉모습으로만 보면 그녀를 육십 세라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컨디션이 좋고 화장이 잘된 날은 사십대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3층까지 올랐다. 하지만 곧 숨이 가빠오고 다리 근육이 뭉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킬리만자로가 떠올랐다. 이마치는 이십여 년 전 산악 영화 출연을 준비하면서 단합의 뜻도 다질 겸 스태프 및 주조연 배우들과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산 등반을 한 적이 있었다. 열일곱 명의 원정대 중에는 대학 산악회 출신부터 시작해 스포츠 애호가도 여럿이었지만 최종 정상에 오른 사람은 이마치 한 명뿐이었다. 고산증으로 얼굴이 파랗게 질려 포기하고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 뒤에서 이마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을 올랐다. 비록 영화는 투자 실패로 무산되었지만 그때 그녀는 삶의 큰 가르침을 하나 얻었다. 불가능하리만치 먼 길을 갈 때는 절대로 목표지점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앞을 봐서도, 위를 봐서도 안 된다. 시선은 아래로, 발끝만 보면서 걷는 것이다. 이마치는 자신의 짐을 들고 옆에서 걷던 셰르파 소년에게서 그 비결을 배웠다. 산더미 같은 짐을 지고 맨발에 슬리퍼로 설산을 가로지르던 소년. 절대로 앞을 보지 않던 소년. 이마치는 그 소년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고개를 숙이고 느리게 전진했다. 힘들 때마다 계단에 앉아서 쉬기도 했다. 한없이 느리게 올라 마침내 30층을 통과했을 때 어떤 여자아이가 계단을 뛰어내려가면서 그녀의 어깨를 살짝 쳤다. 교복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애였다. 이마치는 이상한 기시감에 여자애를 흘긋 바라보았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숨이 가빠 고통스러운 느낌이 밀려왔다가 또 밀려가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60층에 도착했을 때 다리에는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복도를 지나 문 앞에 섰는데, 환한 빛무리가 웅덩이처럼 바닥에 고여 있는 게 보였다. 이마치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이 열려 그리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구름 사이로 해가 비쳤다. 비가 그친 것이다. 이마치는 자신의 집 바로 위에 옥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올라갈 생각도 해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열린 문을 보자 어쩐지 끌리는 마음이 들었다. 옥상까지는 단 일곱 개의 계단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옥상에는 공사 자재와 페기물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 페인트가 흐른 자국이 선명했다. 최고급 신축 아파트의 옥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탁 트인 개방감과 60층 아래 까마득한 도시의 풍경, 비 그친 뒤의 신선한 공기가 좋아서 이마치는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땀이 식을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해. 다들 김대표 어디 갔냐고 나한테 묻는단 말이야. 내가 뭐라고 하겠어?”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통화하며 옥상 문으로 들어섰다. 이마치는 여자를 흘긋 바라보았다. 큰 키에 검은 블레이저 셋업을 입은 여자는 어딘지 낯이 익었다.  
“이거 확인하면 전화해. 어린애처럼 숨지 말고, 할말 있으면 만나서 하자고.”
여자는 전화를 끊고,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를 길게 빨고 연기를 내쉬면서 주변을 돌아본 여자는 그제야 이마치의 존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여자는 담배를 서둘러 바닥에 비벼 껐다. 그리고 냄새를 없애려는 듯 두 손을 휘휘 내젓더니 이마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해요, 계신지 몰랐네요.”
“괜찮아요.”
여자는 미소 지었고, 이마치는 그 순간 여자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옥상에 사람 있는 거 처음 봐요. 전 여기 종종 올라오거든요.”  
여자는 방수천을 덮어놓은 공사 자재 위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이 이상하네요. 흐렸다 갰다…… 아까 화장터에서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저는 지금 장례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어머니가 죽었거든요.” 
이마치는 입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여자는 이마치를 흘긋 보았다. 
“어머니라고 말하니까 이상하네요. 전 어렸을 때도 그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거든요. 열아홉에 집을 나와서는 한번 만나지도 않고 살았죠. 어머니 쪽에서도 날 찾지 않았고요. 죽기 직전에, 돈이 필요해져서야 연락이 왔죠.”
이마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공기가 희박한 것처럼 느껴졌고, 현기증이 일었다. 여자는 이마치와 상관없이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다. 
“다시 만나고 삼 개월 만에 그 여자는 죽었어요. 화장터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걸 보고 놀랐어요. 다들 여기저기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누군가의 시체를 태우려고요. 저도 거기서 기다렸는데, 기다려서 끝까지 보고 싶었는데 기자들이 와서 사진을 찍어대는 바람에 더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벨이 울렸다. 여자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응답하지 않고 꺼버렸다. 여자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마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비밀로 해주세요. 이런 얘기는…… 아파트 살면서 이웃이랑 대화를 나눠본 건 처음이에요. 제가 오늘 좀 이상하네요. 며칠 잠을 못 자서 제정신이 아닌가봐요.”
여자는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바로 폈다.
“몇 층 사세요?”
빤히 자신을 보는 시선에 이마치는 겨우 60층, 이라고 대답했다. 
“전 43층 살아요.”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고생하셨겠어요. 계단을 올라올 때, 앞을 보지 말고 발끝을 보면서 걸으세요. 아주 높은 곳에 오를 땐 그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럼 저 먼저 갈게요.” 
여자가 떠난 뒤에도 이마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마치는 여자가 사라진 철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마치는 그 여자를 알았다. 잠자리 모양 선글라스를 낀 여자, 그 여자는 바로 이마치였다. 마흔세 살의 이마치. 

 

그해 그녀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한 사람은 이부동생 제이슨이었다. 이십여 년 만에 전화를 건 동생은 그녀를 스스럼없이 누나, 라고 불렀다. 아버지인 패트릭 대령은 오래전에 그들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미국으로, 원래의 약혼녀에게 돌아갔다. 이후 레스토랑 운영권을 반납한 어머니는 날품을 팔아 근근이 살았다. 제이슨은 자신이 지역 신문사의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몰랐다는 이마치에게 동생은 다소 낙심한 목소리로 전화를 건 목적을 말했다.
“되도록이면 끝까지 누나 앞에는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알다시피 기자 월급이란 게 빤하잖아. 도움이 필요해.”
도움이란 물론 돈이었다. 어머니의 뇌종양 수술비가 필요했다. 수술을 해도 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보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이마치는 제이슨이 부르는 액수대로 돈을 부쳤고, 동두천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사십대였던 어머니는 형편없이 늙은 노파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탁하고 희미한 눈으로 이마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를 보는 건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마치는 그후 삼 개월 내내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십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머물렀다. 와인을 마시면서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이마치의 생일 이틀 전날 죽었다. 임종 소식을 알리는 제이슨에게 이마치는 자신이 그 여자와 무관하다고 일별했다. 장례를 함께 치르지도 않았다. 화장터에 몰래 따라갔던 것은 끝까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몸이 불타는 것, 재로 변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제이슨의 동료 기자들이 알아보는 바람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화장터, 천막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 43층 여자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이마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모든 게 장난이나 꿈이 아니라면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한때는 그녀도 날렵하고 가볍게 몸을 날리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육십 세였다. 무겁고 둔한 몸은 어기적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그녀는 쉬지 않고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43층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좀전의 여자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여자는 부인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었다. 이마치는 숨을 헐떡거리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혹시……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이마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집에 문이 잠겼는데, 비밀번호가 생각 안 나서요.”
이마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더듬더듬 말했다.
“네, 그럼요. 들어오세요.”
여자는 선뜻 이마치를 집안에 들였다. 이마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실 바닥에 깔린 낡은 카펫, 시든 화분, 먼지를 뒤집어쓴 크리스마스트리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물 좀 드릴까요? 땀을 엄청 흘리셨어요.”
“네? 아니요, 괜찮아요.”
반소매 원피스로 갈아입은 여자의 야윈 몸 군데군데 퍼렇게 비치는 멍과 피부가 쓸린 붉은 자국이 보였다. 여자는 이마치를 거실로 안내했다. 복도 끝의 방문이 빼꼼 열리더니 누군가 얼굴을 내밀고 이쪽을 봤다. 교복을 입은 딸아이. 열세 살 남짓, 아직은 아이의 볼살이 통통하던 시절이었다. 
“누구세요?”
딸아이는 43층 여자를 향해 물었다. 
“60층 사는 할머니셔. 인사드려.”
이마치는 열세 살 딸의 눈길이 자신을 위아래로 천천히 살펴보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부스스한 긴 머리카락, 동그란 안경을 낀 얼굴. 아이는 대학에 가면서 저 안경을 벗었다. 
“얘, 제대로 인사하고 들어가야지.”
무심히 이마치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를 43층 여자가 다시 불러 세웠다. 꽤 권위 있는 체하려 했으나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아이는 다만 귀찮다는 듯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죄송해요, 애가 아직 어려서.”
“애들이 다 그렇죠.”
안방에서 휴대폰 벨이 울리자 여자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볼일이 있어서요. 여기 이 전화기를 쓰시면 돼요.”
여자는 이마치에게 협탁 위 전화기를 가리켜 보인 후,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마치는 눈에 익은 오래된 다이얼식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그 옆에는 펼쳐진 빨래 건조대에 듬성듬성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청바지와 셔츠, 양말들. 이마치는 손을 내밀어 만져보았다. 옷은 딱딱할 만큼 바짝 말라 있었다. 
그녀가 마흔셋이라면 아들이 실종된 지 사 년이 지난 뒤였다. 그사이 이 집은 증거가 사라지면 안 되는 범죄 현장 같은 곳으로 변했다. 집안의 모든 것이 무서운 속도로 낡아갔으나 아무도 망가진 것을 고치거나 새것을 사들이지 않았다. 남편은 아들을 찾는다고 전국으로 떠돌았고, 딸은 친구들과 밖으로만 나돌았고, 이마치는 돈을 버느라 바빴다. 소파 위에 <병원 24시> 대본이 쌓여 있었다. 이마치는 당시 의학 드라마의 간호부장 역할을 맡았고, 의사보다 더 능력 있는 여자 간호사라는 설정에 따라 출연진들 중 가장 많은 의학용어를 외워야 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민낯에 가까운 화장을 했고, 바지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를 연기했다. 젊은 시절 풋풋했던 아름다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움푹 꺼진 뺨에 형형히 빛나는 눈만 보였다. 
사십대가 넘어서면 여자배우는 두 종류로 나뉜다. 자신이 아직 청춘인 줄 아는 축과 벌써 노인인 줄 아는 축. 이마치는 전자를 비웃는 후자였다. 젊어 보이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이든 사람처럼 행동했다. 돈벌이에는 그편이 훨씬 낫기도 했다. 
“바보같이 굴지 마, 제발. 이게 무슨 짓이야?”
방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바라는 거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달라지길 바라지 않는다고.”
이마치는 가만히 서서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들어보려 애썼지만 헛일이었다. 한참 뒤 여자는 한숨 쉬듯 말했다. 
“좋아. 끝내. 그런데 우리가 시작한 적이나 있었던가? 말해봐, 대체 뭐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누구와 통화하는지 알 것 같았다. K였다. 그는 그날 종일 연락이 닿지 않다가 저녁이 다 되어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그들이 끝났다고 말했다. 그들의 지난한 세월, 그 모든 사업과 계약과 친구로서의 신의, 모든 게 끝이라고. 그는 더이상 그녀와 쥐새끼처럼 붙어먹으며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래, 그들은 한동안 쥐새끼처럼 붙어먹었다. 이틀간 집을 비운 이유도 어머니의 장례 때문이 아니라 K와의 야합 때문이었다. 그 모든 일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마치가 어머니를 보러 동두천에 다녀온 뒤, 그 여자가 쇠꼬챙이처럼 마른 몸에 민머리를 하고 누운 모습을 보고 난 뒤, 누렇게 뜬 눈의 여자가 검은 입술로 힘겹게 숨을 몰아쉴 때마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참을 수 없는 부패의 냄새를 맡고 난 뒤. 이마치는 K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불현듯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섹스를 했다. 그들은 당황했다. 이토록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다 늙어서 늘어진 몸뚱어리로,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다. 긴 세월 그들은 동료였고 친구였다. 그것을 망치고, 시험에 들게 하고, 대체할 만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 섹스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K는 놀라울 만큼 서툴렀다. 이마치는 십대 시절 처음 남자와 잤을 때도 그만큼 허둥대지 않았다. 그들은 시트가 다 젖도록 땀을 흘렸다. 기진맥진 옷을 꿰입으며 이마치는 그 일을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삶에서 벌어진 수많은 불상사처럼 없던 일로 치자고. 하지만 그 일은 그녀가 동두천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관전했던 삼 개월간 매주 혹은 격주 되풀이되었다. 이마치는 마른 입속에 쓴맛만 남을 때까지 K를 몰아붙였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감각이 마비되는 것. 고통으로 얼얼해지는 것. 수치심으로 하얗게 산화되는 것. 그는 그녀에게 여러 번 경고했다. 이런 식으로는 계속할 수 없다고, 자기 자신이 쓰레기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날, 그날도 이마치는 K를 찾아갔다. 그는 전에 없이 관계를 길게 끌었고, 다 끝난 후 그녀에게 떠나자고 말했다. 다른 나라로, 아주 먼 곳으로. 다시는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아도 되도록 자신이 모든 것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사랑했다고, 처음부터 대책 없이 사랑했다는 말도 했다. 마치 그들이 스무 살이나 되는 것처럼. 이마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K가 물었고, 이마치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들은 끝났다. 

 

43층 여자가 방에서 나왔을 때, 이마치는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인 것을 보았다. 아마 K의 말을 곱씹으며 그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떠나겠다는 그의 말이 허풍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마치는 여자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는 정말 그녀를 떠날 거라고. 이미 모든 걸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앞으로 한참 더 바닥으로 내려가야 할 거라고. 그녀는 이제 어떤 대본이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역할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돈벌이만 되는 연기를 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녀가 그토록 경멸했던 심술맞은 선배들의 행렬에 줄맞추어 걷게 될 것이다. 그게 싫었다면 K를 내버려뒀어야 했다. 그가 그녀를 다정히 안고 싶어했을 때, 그 팔에 자신을 내맡겼어야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마흔세 살에 그녀는 이미 백스물두 살 노파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기만은 한시도 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면을 쓰는 일로 돈을 벌었다. 매일 가면을 벗을 틈도 없이 바빴고, 그 안에서 진짜 얼굴 가죽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지 오래였다.  
“통화는 하셨어요?”
43층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마치에게 물었다. 
“네, 고마워요.”
이마치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아까 옥상에서 만났잖아요?”
“아뇨 그보다 전에요. 저 좀 보세요. 정말 모르겠어요?”
여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마치를 보더니 가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어 보일 수 있는 미소,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전에 재빨리 빠져나가는 미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이제 그만 가보셔야죠? 저도 이제 아이랑 저녁 먹을 시간이라서요.”

 

이마치는 집에서 나와 다시금 호수를 확인했다. 4301호. 그 집은 과거에 그녀가 살았던 집과 똑같았다. 부엌 찬장의 색깔까지 그대로였다. 게다가 딸아이, 열세 살인 그 아이도 집에 있었다. 여기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마치는 주저앉지 않으려고 벽을 짚고 섰다. 
“괜찮으세요?”
그때 누군가 아래층에서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마치는 고개를 빼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1층에서 봤던, 앞머리가 눈을 다 덮은 청년이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이 아파트에 또다른 내가 살아요.”
이마치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 우리 저 밑에서 만났잖아요.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얘기해준 대로 계단으로 겨우 올라왔어요. 꼭대기층에 도착해서 보니 옥상 문이 열렸더라고요. 옥상 문이 열린 것을 처음 봐서 그곳에 나가봤죠. 거기서 43층에 사는 여자를 만났어요. 어쩐지 낯이 익었는데, 가만 보니 바로 나였어요. 마흔세 살의 나 말이에요.”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그 여자 집까지 쫓아가봤어요. 바로 이 집이요! 이 집은 내 집이에요. 누렇게 변색된 마티스의 복제화, 베란다의 죽은 화분들, 깨지거나 짝이 맞지 않는 그릇들까지 전부 십칠 년 전에 내가 살던 집이라고요. 여자가 살짝 문을 열었을 때, 안방 베란다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까지 똑같았어요. 하수구에서 늘 악취가 올라오는 게 그 방의 고질적인 문제였거든요.”
이마치는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했다. 
“내 말 못 믿는 거 같은데. 난 미치지 않았어요.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고 병원비로만 수천만원을 쓰고 있다고요. 오늘은 내 생일이에요. 아침부터 정말 이상한 하루였어요. 몸무게는 하루 사이 4킬로그램이 늘었고, 텅 빈 가방을 들고 외출한데다, 그 대가로 만원짜리 지폐에다 사인을 해야 했죠. 그리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파트에 나의 도플갱어가 있는 거예요. 이해가 돼요?”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요.” 
이마치는 말을 멈추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이마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죠? 내가 정말 미친 건가요? 당신은 누구예요?” 
“전 토끼굴 속의 토끼죠.”
“뭐라고요?”
“제 이름은 노아예요. 그리고 여긴 당신의 기억 속 집이죠. 특별히 집에 관한 기억이 모여 있는 곳이요. 나는 이곳의 관리자예요.”
이마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이곳엔 수많은 당신이 있지만, 전부 당신이라는 존재의 허상일 뿐이에요. 거울에 비친 상과 같죠. 그러니까 도플갱어 어쩌고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유일하고 고유해요.” 
“기억 속 집이라고?”
이마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네, 맞아요. 당신은 지금 당신의 의식 속에 있는 거예요. 자기 꼬리를 먹고 있는 도마뱀처럼요. 당신 자신을 소화시키고 있는 거죠.”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혹시 이거 지금 촬영중인가요? 환갑 기념 몰래카메라 같은 거?”
이마치는 천장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처음으로 웃었다. 
“은퇴한 원로 여자배우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걸 누가 TV에서 보고 싶어한다고요. 늙은 택시 기사 같은 골수팬을 제외하고요.”
이마치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네.”
“난 당신의 일부예요. 아마 당신보다 내가 더 당신을 잘 알 걸요?”
그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까 1층에서 당신을 봤을 때부터 뭔가 잘못된 줄 알았어요. 당신이 입주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거든요. 아마 누전 때문일 거예요. 그래도 이런 일은…… 정말 신기하네요.”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성적인 생각은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남자는 미친 사람이거나 스토커일 것이다. 이마치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공황을 이겨내고 출입구로 달려갔다. 그는 그녀를 쫓아오지 않고 다만 그 자리에 서서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여기 계단이 무척 가팔라요!”
얼마나 아래로 내려갔을까. 방화문 앞에 기대놓은 자전거와 씽씽카 따위가 보였다. 모두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그녀의 딸과 아들이 타고 다니던 것들. 분홍색 핸들과 파란색 바람개비, 비상벨, 그리고 어느 집에선가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 
“당신은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해? 오다가다 쉬는 곳? 당신이 떠나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당신만을 기다리지. 집안에 갇힌 애완견처럼 말이야.”
“더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어. 나도 꿈이 있었단 말이야. 당신한테 먹히기 전에, 잠식당하기 전에……”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해. 도우미 아줌마랑 선생님이 아니라.”

그녀의 눈에 쌍둥이 유아차가 들어온 바로 그 순간, 발목이 기묘한 모양새로 꺾이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이마치는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발이 무섭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보려고 했다가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주저앉았다. 퉁퉁 부은 발이 그녀의 무게를 받쳐주지 못했다. 그녀는 한 발도 더 내디딜 수 없었다. 
“도와주세요!”
이마치는 있는 힘껏 외쳤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이렇게 된 김에 차라리 누구라도 집에서 나와주기를, 분신이든지 악령이든지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와보지 않았다. 발목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마치는 바닥의 냉기를 느끼며 신음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쌍둥이 유아차를 보았다. 그건 그 자리에 있었다. 두 살 터울 아이들을 태우고 다녔던 것. 유아차라기보다 수레에 가까운 크기의 쌍둥이 유아차를 끌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가와 한두 마디씩 했다. 큰애는 유아차에 태우고 다닐 때가 지나지 않았느냐는 말부터 아기들은 꼭 양말을 신겨야 된다는 말, 너무 덥게 혹은 너무 춥게 입혔다는 말, 누구의 아이냐는 말까지. 그녀는 거대한 자신의 자아를 밖으로 전시하고 다니는 기분이었고, 누군가 아이에 대해 충고할 때마다 그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거기 계세요?”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노아. 그는 위층에서 이마치를 심란하게 내려다보더니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넘어지신 거예요?”
“도와줘.”
이마치는 신음하듯 말했다. 누군가 와줬다는 것에 너무나 안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노아는 몸을 굽히고 이마치의 다리를 살펴봤다. 
“그러게 계단이 가파르다고 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네.” 
이마치는 한탄하듯 헛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그보다 어떻게 여기서 나가야 될지 물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는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말이야?”
“이 건물은 폐쇄된 곳이에요. 1층 문을 통해서는 나갈 수 없죠. 집집마다 자리잡은 기억이 사라질 때, 집안에서 외부로 통하는 통로가 열려요. 문제는 그게 언제 어느 집에서 열릴지 모른다는 거죠.”
“보다시피 난 다리를 다쳐서 꼼짝도 못해. 엘리베이터는 고장이고.”
“제가 도와드릴게요.”
“왜?”
“이곳 관리인이니까요.”
노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머뭇대다가 덧붙였다. 
“게다가 당신은 이곳에서 신이나 다름없어요. 신을 돕는 건 기쁜 일이죠.”
그는 팔을 내밀었다. 이마치는 그 팔을 잡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43층과 옥상에 가보죠. 그곳에서 뭔가 찾을 수 있을지 몰라요.”
그들은 계단을 오르면서 집마다 문을 열어보았다. 벨을 누르기도 했다. 하지만 응답을 하는 집은 한 군데도 없었다. 누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방금 전 이마치가 들어갔던 43층도 마찬가지였다. 이마치는 그 집의 문에 귀를 대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때는 이 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노아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기억이라곤 순간의 것들뿐이에요. 맥락도 없는 조각조각의 기억들요. 빈집이 더 많은 것도 이해가 되죠.”

 

이윽고 도착한 옥상은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어수선했던 공사 폐기물들은 싹 사라졌고, 페인트가 흐른 자국 역시 보이지 않았다. 잘 관리된 화단에는 꽃이 피어 있고 작은 소나무들도 심겨 있었다. 이마치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뭐지? 아까와는 다른데……”
“당신이 산 집의 수많은 옥상 중에 하나겠죠.”
이마치는 그것이 결혼해서 처음 입주했던 아파트의 옥상 풍경임을 뒤늦게 알아보았다. 입주민들이 날짜를 정해놓고 관리하던 화단이었다. 이마치는 남편과 함께 텃밭에 토마토며 오이 모종을 심어봤지만 한 달도 안 되어 죽어버렸다. 아파트가 흔치 않던 시대였다. 젊은 사람들은 고층 아파트에 입주했다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이마치는 새로 만난 이웃과 잘 지내보고 싶었다. 이사 떡도 돌렸고, 반상회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래도 친구를 사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나타나면 수군거리다가도 말을 뚝 멈췄다. 그 아파트에서는 딸을 낳고 얼마 안 되어 이사했다. 
비현실적으로 푸른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던 이마치는 문득 그곳에서 빛나는 뭔가를 알아챘다. 유리에 반사되는 빛이었다. 허공이 하늘색 둥근 돔으로 가려져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가짜군.”
“왜곡이죠. 정확히 말하면.”
노아가 끼어들었다. 
“모든 기억은 왜곡이에요.”
이마치는 허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통로 같은 건 없어.”
“그러네요.”
“이제 이 건물 안 집들을 모조리 열고 들어가봐야 되는 건가?”
“곧 밤이 될 텐데 그렇게 마음대로 들쑤시고 다닐 순 없어요.”
“낮과 밤이 있다고?”
“그럼 무슨 공장 벨트컨베이어처럼 밤낮없이 돌아가는 건 줄 알았어요? 밤이 되면 모든 문이 잠기고, 사람들은 잠들어요. 그사이 기억의 재배열이 일어나죠. 사라질 것들과 남을 것들이 정해지는 거예요.”
이마치는 사과나무 분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배고파. 생일인데 아직 한 끼도 못 먹었어.”
“생일 축하드려요.”
노아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원칙상 이곳에서는 생존을 위한 섭식이 필요하지 않아요.”
이마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하는구먼. 난 늙은이야. 어차피 밤새 아무데도 못 간다면 내 집으로 내려가야겠어. 뭐라도 먹고 좀 눕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그만 녹아버리고 말 거야.”
이마치는 노아를 이끌고 바로 아래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갔다. 기세 좋게 왔지만, 벨을 눌러보기로 하고 기다리는 잠시 동안 몹시 긴장했다. 만약 안에서 그녀와 똑같은 모습의 또다른 그녀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둘 중 한 사람은 녹아 사라져버릴지도 몰랐다. 
다행히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로소 이마치는 평소처럼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은 아침에 나갔던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거실의 시계는 그녀가 집을 나갔던 바로 그때, 12시 45분에 멈춰 있었다. 이마치는 늘 하던 대로 집에 들어와 겉옷을 벗고 가방과 우편물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들어오지 뭐 하고 있어?”
우두커니 서 있던 노아는 그제야 그는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들어와본 건 처음이에요. 물론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요. 그래도 직접 들어와보는 건 다르네요.”
“뭐가 어떻게 다른데?”
“따뜻해요.”
뜻밖의 말에 이마치는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따뜻하네요, 정말로.”
이마치는 그제야 그가 비에 젖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옷을 갈아입겠느냐고 묻자,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옷상자를 뒤져 남성용 트레이닝복을 찾았다. 죽은 남편 것이었는데, 그에게 놀랍도록 잘 맞았다. 이마치는 잠시 그의 긴 앞머리를 걷어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얼룩덜룩한 작업복을 벗은 그는 좀더 어려 보였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부엌 가득 모아둔 것은 라면과 통조림뿐이었다. 이마치는 한 계절을 버티고도 남을 비상식량을 마치 전쟁을 대비하듯 쌓아두고 살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관상용이지, 열량이 높은 인스턴트를 실제로 먹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몸무게가 4킬로그램이 늘어난 경우라면 더욱더. 하지만 그녀는 전에 없이 급박한 허기를 느꼈다. 이마치는 펄펄 끓는 라면을 식탁 위에 냄비째 올리고, 청년을 불렀다. 그는 선뜻 그녀의 옆에서 라면을 먹었다. 정신없이 먹느라 그가 자신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그녀처럼 왼손에 젓가락을 쥐고, 면발을 후후 불어가면서, 김치를 두 개씩 올려 먹었다.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먹기만 했다. 허겁지겁 다 먹고 나자 땀이 났다. 갑자기 온몸이 불덩이로 변한 것 같았다. 이마치는 베란다로 나가서 문을 활짝 열었다. 창밖은 그녀가 봐왔던 도시의 풍경이 아니었다. 빌딩과 사람들 대신 푸른 잔디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잘 관리된 잔디가 아니라 이리저리 제멋대로 자란 거친 풀이었다. 이마치는 어딘지 익숙한 그 풍경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 
“밤이라더니 왜 이렇게 환한 거야?”
바로 그때 불이 꺼지듯 한순간 주위가 어두워졌다. 
“방금 봤어?”
“뭐가요?”
“내가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어두워졌잖아.”
“마침 해가 지는 그 시간이 되었나보죠.”
식탁에 앉아 있던 노아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이마치의 우편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건 누가 보낸 거예요?”
이마치는 그에게서 엽서를 받아들었다. 엽서에는 주소도 소인도 없었다. 

 

어제는 당신이 나오는 꿈을 꿨어. 
당신은 황금색 베르사체 드레스를 입고 아주 멋진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지. 
그런데 피아노에서 자꾸 고양이 소리가 나는 거야.
내가 무대로 뛰어올라가서 피아노 뚜껑을 열어젖혔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결국 우리 둘 다 우스운 꼴이 된 거야. 창피를 당해도 당신과 함께라 좋더군.
당신 꿈을 꾼 건 참 오랜만이었어. 
난 매일 아침 공원을 삼십 분 달리고, air라는 카페에서 빵을 먹고 커피를 마셔. 커피맛은 끝내주지만, 빵맛은 별로인 카페야. 그래도 손님이 종일 많지.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야. 
인생이란 그런 것 같아.

 

이마치는 엽서를 훑어보고 그에게 돌려주었다. 
“모르겠어.”
대단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는 연예인이었고, 종종 팬레터를 받았으니까.
“중요한가?”
“중요하죠. 이 건물에 있는 모든 게 중요해요.” 
노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치씨의 인생이잖아요.”
사방이 캄캄해진 것을 보니 견딜 수 없이 고단해졌다.
“난 이제 좀 쉬어야겠어.”
“그럼 전 나가볼게요.”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갈 데가 있어? 관리인의 집 같은 곳이 있나?”
“전 복도를 돌아다녀요. 낮이고 밤이고.”
이마치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관리인 대접이 너무 박하네. 괜찮다면 여기서 자고 가.”
이마치는 진작 이 집에 손님방을 만들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잠자리를 마련하려고 보니 영 마땅치가 않았다. 침대가 있는 방은 이마치와 아들의 방 두 개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아들의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이 방이 제일 깨끗해. 내가 유일하게 청소하는 방이거든.”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거실이나 베란다에 있어도 괜찮아요.”
“무슨 소리, 이 집에 온 첫 손님인데.”  
노아는 방안의 물건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장난감과 책, 옷걸이에 걸린 점퍼. 그 모든 것이 시간에 박제된 채로 그곳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조용히 둘러보더니, 이마치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죠?”
그는 정말 그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말요? 왜?”
“꿈은 반대라고 하니까. 이건 꿈이고 나는 곧 깰 텐데, 여기서 잠깐 보고 그애를 다시 못 본다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이건 꿈이 아니에요. 과거죠.”
노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인 과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