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6월에 태어나서 준, 저는 3월에 태어나서 마치가 되었어요. 8월이나 10월에 태어난 자매가 있었다면 ‘오거스트’나 ‘옥토버’가 되었겠죠.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아기가 너무 예뻐서 병원 간호사들에게 바나나를 한 다발씩 돌렸대요. 그땐 바나나가 정말 귀한 시절이었거든요. 언니는 내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어요. 나보다 고작 네 살 많으면서, 그래봤자 다섯 살인 아이가 뭘 기억한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겼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마치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동두천 클럽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클럽을 이어받아 운영했죠. 어머니는 불행한 여자였어요. 누구라도 잠시만 같은 공간에 있으면, 그 여자가 얼마나 불행한지 느낄 수 있었어요. 같은 공기를 마시기만 해도 알 수 있었죠. 빚밖에 없는 클럽을 남기고 죽은 남편에 대한 원망, 평생을 떨쳐내지 못한 가난에 대한 피로, 단 한 번도 충족시키지 못한 애정에 대한 허기, 입 벌리고 자기만 기다리는 자식들에 대한 분노……”
이마치는 가라앉은 눈으로 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어머니가 죽기를 오랫동안 바랐어요. 열여덟 살에 집을 나온 후에도 해가 질 때면 어머니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맹렬히 빌었죠. 그 여자가 죽기를, 죽어 없어지기를요. 이슬람교도들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듯 매일매일 그쪽을 향해 기도했어요.”
“지금도 기도하시나요?”
“어머니는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혹시 어머니 사진 가진 거 있으세요?”
이마치는 제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자의 사진을 갖고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웃음 끝에 뭔가가 퍼뜩 떠올랐다. 동두천 신문에 났던 부고 기사였다. 기사를 쓴 사람은 이마치의 이부동생이었다. 어머니와 계부 사이에서 난 아들 제이슨. 지역 신문사의 기자가 된 그는 어머니의 부고 기사에 사진을 첨부했다. 여섯 살 이마치와 어머니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생일 케이크와 선물 상자 옆에 앉은 다정한 모녀 사진 밑에 ‘국민배우 이마치와 본지 기자 제이슨 리의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관련 기사가 쓰여 있었다. 이마치는 보자마자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사진과 기사를 내려주기를 요구했으나 담당자가 퇴사해서 빠른 처리가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
이마치는 휴대폰으로 그 부고 기사를 찾았다. 제제는 묘한 표정으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이마치는 어머니와 닮았다. 평생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거나, 누군가 지적하면 화를 냈으나, 둘을 보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또렷한 이목구비가 뭉개지고 희미한 인상만 남는 노년으로 접어들수록 그녀는 어머니와 비슷해졌다. 하지만 제제가 지적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기사에 언니분 이야기는 없네요.”
“언니는 열한 살에 죽었어요. 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집안의 금기였죠.”
“왜요?”
“죄책감 때문이죠. 금기란 그런 거잖아요.”
이마치가 언니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때, 제제는 손을 들어 막았다.
“그건 다음에 듣죠. 하루에 한 시간씩만. 그게 원칙이에요.”
그는 부고 기사의 사진을 프린트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마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사진은 편집된 것이었다. 그녀와 언니, 어머니 셋이 같이 찍은 사진에서 언니만 잘려나간 것이다. 잘 보면 작은 손이 이마치의 팔꿈치를 잡고 있었다. 선물 상자에 들어 있는 2층짜리 인형의 집도 언니 것이었다. 그날은 언니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날은 몰라도 그들 자매의 생일만은 잊지 않고 제대로 챙겼다. 고아로 자란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매해 생일마다 이마치와 언니는 평소에 꿈도 꿀 수 없는 값비싼 장난감과 원피스, 벨벳 구두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그 사진을 찍던 날 언니는 선물은 필요 없으니 학교 소풍을 허락해달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언니의 청을 단칼에 잘랐다. 소풍은 생일과 무관하고, 그날은 아침부터 자신이 집을 비울 계획이라 이마치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한마디 말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마치는 언니가 자신을 짐처럼 짊어진 것이 싫었다. 하지만 언니 없이 집에 혼자 있기는 더 싫었다. 그녀에게 언니는 늘 엄마 대신이었다. 네 살 많은 언니는 매일 그녀를 돌봐주었다. 순하고 화를 낼 줄 모르는 성격이라 늘 그녀에게 당했고, 어쩌다 토라져도 금세 마음을 풀고 그녀의 얼굴에 묻은 얼룩을 닦아주었다.
어머니는 미군 클럽을 운영하느라 매일 저녁부터 새벽까지 집을 비웠다. 아침이면 남은 안주를 싸 들고 집에 들어왔고, 술이 덜 깬 채 멍든 오렌지를 게걸스럽게 까먹은 뒤 방으로 잠을 자러 들어갔다. 당시 어머니는 자신보다 열 살 어린 미군 장교와 사귀고 있었다. 그가 전역하면서 이대로 관계가 끝나나 했지만, 다음해 어머니가 그를 쫓아 미국까지 따라가서 애인과의 관계를 정리시키고 한국에 데려왔다.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자매는 순옥이 이모라는 사람의 집에 맡겨졌다. 비슷한 처지의 고아들이 우글거리는 집이었다. 그 집에는 군대처럼 시간표와 규율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를 어기는 아이들은 밥을 굶기거나 내복 바람으로 내쫓는 일이 예사였다. 어리숙한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질을 당했다. 언니는 이마치를 대신해서 여러 번 매를 맞았다.
“하루는 언니와 제가 내복 바람으로 쫓겨났는데, 그날 날씨가 영하 십 도에 가까웠어요.”
일주일 뒤, 진료실에서 제제를 다시 만난 이마치는 언니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두천의 겨울은 물그릇을 잠시 밖에 내놓아도 얼어붙을 정도로 매서워요. 언니와 저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고 있었는데, 한 십 분 뒤에 그 집 불이 다 꺼지더라고요. 다들 잠을 자러 들어간 거예요. 바람이 불 때마다 살이 에이게 추운 밤이었어요. 언니가 제 손을 잡더니, 우리집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어머니와 살던 옛날 집이요.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은 가야 하는 거리였는데, 그 길을 그 겨울에 둘이서 걸어갔어요. 마주치는 어른들 누구 하나 겉옷도 입지 않은 어린애들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지 않더라고요.”
이마치는 언니의 주머니에서 나온 열쇠를 기억했다. 온갖 독촉장이 붙어 있던 검은 양철문은 그 열쇠로 쉽게 열렸다. 어머니가 정신없이 떠나면서 남긴 살림들, 흩어진 옷가지들과 더러운 그릇들, 낡은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놀라우리만치 집안이 훈훈했다.
“난방이 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아무튼 집이 정말 따뜻했어요. 찬장 가득 라면도 있었죠. 엄마는 라면을 신봉했거든요. 언니와 나는 버너를 찾아 라면을 끓여먹었어요. 절절 끓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달게 잤죠.”
“이모라는 사람이 찾아오진 않았나요?”
“아니요. 그 겨울이 지나도록 아무도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순옥이 이모도, 학교 선생님도, 집주인조차도요. 다들 우리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죠. 아니면 저 위의 누군가가 우리의 존재를 숨겨줬든지요.”
“그런데 언니는 왜 죽었죠?”
간결한 제제의 질문에 이마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언니는 그 겨울 내내 아팠어요. 순옥이 이모네는 감기나 폐렴을 앓는 아이들이 끊이지 않았어요. 위생상태가 엉망인데다 영양 공급도 좋지 않으니 아이들이 돌아가며 아팠죠. 언니는 온몸에 열이 펄펄 끓는 상태로 나를 데리고 그 길을 걸어온 거였어요.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언니를 간호하기엔 너무 어렸죠. 언니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어요. 어떤 날은 괜찮아 보였지만 또 다음날이면 까무룩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죠.”
이마치는 누워 있는 언니 옆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블록을 만들고 부수며 놀았다. 마지막에 언니는 심한 고열을 앓으며 붉은 열꽃까지 온몸에 번졌다. 언니의 숨이 멎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아침, 이마치는 그 아침을 기억했다. 언니의 발치에서 잠들었던 이마치는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언니가 죽었다는 것.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언니의 발―보풀이 잔뜩 일어난 겨울 양말을 신은―이었는데 그 발의 무엇이 달라 보였던 걸까. 어쨌든 이마치는 알았다. 언니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굳어 있었다.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작은 손으로 아무리 힘을 줘도 그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주 놀라운 것을 본 사람 같은 표정. 이마치는 두꺼운 이불로 언니의 얼굴을 덮었다.
마침내 누군가 집에 찾아온 것은 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순옥이 이모도, 학교 선생님도, 집주인도 아닌, 위층에 사는 대학생 오빠. 밤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그 오빠가 냄새를 참지 못하고 그들의 집에 찾아왔다. 문을 연 청년은 한 발 들어서지도 못하고 손으로 입을 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십 분 뒤 경찰이 도착했다. 옷장 구석에 숨어 있던 이마치는 뒤늦게 발견되었다. 그녀는 옷장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경찰들이 하얗게 질린 손을 옷장 벽에서 뜯어내다시피 해야 했다. 이마치는 영양실조에 오물 범벅이었고, 경찰이 뭐라 말을 시켜도 대답하지 않았다. 트라우마로 말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것이 당시 그녀를 진찰한 의사의 소견이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제제는 시뻘게진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정말……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목이 메는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인간적이고 보기 좋은데요.”
“엄청난 일을 겪으셨는데,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하시네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요. 꼭 전생의 일처럼 느껴진달까요. 그때의 감정도 생각도 까마득하기만 해요.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저는 다 늙어버린 아이가 되어 있었죠.”
“어머니는 언제 돌아오신 거죠?”
“제가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한 달도 되지 않아서요. 언니 소식을 들었던 거겠죠. 미국에서 패트릭과 결혼식을 올리고 곧 우리에게 돌아오려고 했는데 임신을 하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고 했어요. 초기 유산이 두려워서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고요. 어머니 당신이 고아원 출신이라 제가 그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단 하루도 더 견딜 수 없었대요.”
이마치는 피식 웃었다. “쭉 입을 다물고 지냈던 저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소리쳤어요. 언니가 죽었다고요. 그 여자는 슬픈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더니,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어요.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듯이 말이에요.”
어머니는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더이상 언니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머니와 패트릭은 미군 부대 안의 작은 레스토랑 운영권을 따냈다. 제이슨이 태어난 후, 그들은 기지촌에서 보기 드물게 번듯한 4인 가족을 이뤘다. 언니는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 되었다. 이마치는 언니의 사진이나 유품 한 점 가질 수 없었다.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제제가 언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이마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흰 종이와 크레파스를 받았을 때, 그녀는 두 팔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그려내지 못했다. 하얀 종이 위에 손을 하릴없이 움직이다 작은 점만 그리고 말았다.
“됐습니다. 여기까지 하죠. 힘들 텐데 너무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제는 다시 목이 메었다. 이마치는 다 큰 남자가 참 주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제제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연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마치는 원래 우는 남자들에게 약했다. 마지막으로 그녀 앞에서 울었던 남자는 K였다.
그다음주에 이마치는 K에 대해 이야기했다. K에 관해서라면 이마치는 수십 장의 그림도 그려낼 수 있었다. 수백 장의 사진도 보여줄 수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 행사장에서, 각종 시사회에서 함께 찍힌 사진이 한 무더기였다. 그중 대부분은 그들도 모르게 찍힌 사진들이었지만, 어쨌든 아이들과 찍은 것보다 그와 찍은 것이 더 많았다. 그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매니저 K는 업계에선 드물게 경찰 출신이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파출소에서 근무하던 그는 일 년 만에 퇴직하고 친한 친구의 소개로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연예 기획사에 취직했다.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그만둔 것은 박봉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만큼 가난한 부모와 형제들 때문이었다. 그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쇼 비즈니스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곧 이 일의 9할이 거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든 돌아가기엔 늦었고, 다른 사업을 기웃거리며 간신히 연예인 로드매니저 생활을 해나갔다. 그가 세번째로 맡은 배우가 이마치였다. 그전의 두 명은 각각 활동의 절정기에 결혼으로 커리어를 접었다. 그는 여자배우가 지구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들에 비해 이마치는 놀라우리만치 단순했다. 가리는 것이 없었다. 돈이 되고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K는 이마치가 김밥보다 라면을 좋아하고, 조수석에 타면 산길을 달려도 멀미를 안 하고, 낮잠을 자면 밤새 잠을 못 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사생활의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이마치의 결혼 소식도 회사를 통해서 들을 정도였다. 그만큼의 거리감이 늘 있었기에, K는 카드빚과 다단계 연체금으로 도산할 지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아무 담보 없이 큰돈을 내놓았을 때 무척 놀랐다. 그 돈이 아니었다면 K는 교도소에 가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 돈에 대해 늘 이마치에게 고마워했고, 몇 년 뒤 자기 소속사를 차려서 성공한 뒤 높은 이자를 더해 갚았다. 이마치는 그의 소속사 1호 배우였다. 사장이 직접 로드매니저 일을 한다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줄곧 그녀를 보좌했다. 이마치의 남편은 결혼 전부터 그들의 관계를 의심했다. 젊은 시절부터 낮과 밤을 함께 보냈고, 가장 많은 대화를 했고, 나중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남편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 일은 한참 뒤에야 일어났다. 그녀가 아들을 잃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 남편과는 친절한 타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
“아들이 사라졌을 때, 저는 도저히 카메라와 사람들 앞에 설 자신이 없었어요. 당시 개화기 배경의 사극을 찍고 있었는데, 저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사랑하는 게이샤 역할이었죠. 기모노를 입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분장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면서 실내가 기우뚱하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아이가 시궁창에 박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문득 차라리 그애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면 지금보다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 순간 저는 저도 모르게 눈앞의 거울을 향해서 돌진했어요. 거울에 머리를 짓찧는 저를 K가 붙잡았죠. 그는 저를 힘으로 제압하고, 꼼짝할 수 없게 끌어안고서, 소리 없이 울었어요. 기모노 위로 뜨거운 것이 뚝뚝 떨어졌죠. 붉은 천이 더 붉게 물들어가서 순간 피인가 했는데 눈물이었어요.”
이마치는 제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날 그가 저에게 선물을 하나 줬어요.”
“뭐였는데요?”
“권총이요. 촬영장에서 몰래 훔쳐온, 일본 순사의 것이었죠. 반질반질 윤이 나고, 제법 진짜 같아 보였지만 공포탄도 발사하지 못하는 가짜였어요. 하지만 뜻하는 바는 명확했죠. 원치 않으면 일을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여기서 그만해도 된다는 뜻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온 식구가 살기를 그만해야 될 지경이었어요. 남편의 사업 실패로 당시 저에게는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지경의 부채가 있었거든요. 거의 매일 채권자들에게 시달려야 했죠.”
“혹시 아직도 그 총 가지고 있나요? 직접 보고 싶은데.”
이마치는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모르겠어요, 어디로 갔는지.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 세월이 길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걸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네요.”
“어쨌든 그분 덕분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신 거군요.”
“네,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특히 저에게.”
이마치는 순순히 말했다.
“그래도 결국 사이가 멀어졌죠. 마지막에 그는 저를 나쁜 년이라고 욕하고 한국을 떠났어요. 벌써 오래전의 일이죠. 그러고도 상처받는 것은 그 자신이었어요.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거든요.”
“그분을 사랑하셨나요?”
이마치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제제를 바라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이마치는 미희와 종종 만나서 식사와 차를 함께했다. 미희는 늘 완벽하게 세팅된 C컬 헤어스타일에 파스텔톤 샤넬 투피스를 입었다. 알츠하이머가 취향까지 지우지는 않는가보다고 이마치는 생각했다. 항상 인형 같은 맞춤복을 입고 촬영장에 나타났던 이십대의 미희가 떠올랐다. 드라마 한 편을 찍고 스타덤에 올라 기업가와 결혼한 여자. 그 여자와 이마치 사이에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증 말고 별다른 공감대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할 얘기는 차고 넘쳤다. 삶이 순식간에 바뀌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경험은 흔치 않았으니까.
미희는 이 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어느 날 식당 예약을 하는데 갑자기 남편과 아이들의 이름이 생각 안 나더니, 중식 메뉴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이 안 나고, 저녁을 먹는 시간이 언제쯤인지 생각이 안 났다고. 그날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가 누군지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애들은 이제 다 독립해서 남편이랑 둘만 사는데, 어쩌다 그 사람 그림자만 봐도 그렇게 놀라는 거예요. 남편도 처음엔 어이없어하더니 나중엔 화를 내더라고요.”
미희는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이 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돈깨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 전부터 알음알음으로 유명해졌는데 처음 와보면 다들 의사가 너무 젊어 놀란다고, 그리고 다음에는 효과가 금세 나타나 놀란다고 했다. 미희 역시 치료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증상이 완화되었다고 했다. 적어도 집에 돌아온 남편을 보고 더이상 비명을 지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마치는 그 말을 듣고 희망을 가졌다. 그녀는 복귀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증상은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다. 제제는 이제 막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단계니 조급해하지 말고 치료에 대해 잊어버리라고 했다. 병원과 진료 외의 다른 것들로 일상을 채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일 집안에 있다보면 다른 누가 있다는 느낌, 환청과 환시에 시시각각 괴롭도록 시달려야 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의 허밍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원하는 게 뭐야?”
어느 날 그녀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순간 시야가 기우뚱하면서 바닥이 기울었다.
이 집에서 나가. 작게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라니? 이 집이 네 집이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 이 집은 내 집이 아니야. 남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당신 집도 아니지.
이마치는 코웃음을 쳤다.
“이 집은 내 집이야. 나를 내쫓으려면 군대를 데려와야 될걸?”
군대는 이미 여기 있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이마치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가 주춤주춤 일어나 와인을 가져왔다. 달리 할일이 없었다. 창밖은 새카만 허공이었다. 하늘에서 불빛이, 멀리 있는 건물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와인을 잔에 가득 따랐다. 그리고 그를―아니면 그녀를―향해 말했다.
“예전에 언니랑 그런 이야길 한 적 있지. 둘 중 누군가 한 사람이 죽어서 떠나면, 남은 사람의 수호신이 되어주기로. 죽은 사람의 입장에선 세상을 내려다보는 게 너무나 간단한 일일 테니까. 이를테면 복권의 당첨 숫자를 알려준다던가, 미리 있을 사고를 예견해준다거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거나 혹은 멀리하게 해준다던가 말이야. 나는 언니가 죽은 후에도 줄곧 내 옆에 있다고 믿었어. 그래서 배우 일이 이렇게 잘 풀린 거라고. 나보다 잘난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나만큼 배역이나 작품 운이 좋은 사람은 없었거든. 유령이든 천사든 수호신이든, 아무튼 언니가 내 옆에 있다고 믿었지. 이를테면 미국에서 캐스팅 제안이 왔을 때처럼 말이야.”
이마치는 와인을 마셨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또 한 잔을 따랐다. 발끝부터 퍼지는 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말을 이었다.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현지 코디네이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엘에이에 아주 유명한 사이킥이 있다고 말해줬어. 오디션 결과를 미리 알 수도 있다는 거였지.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가보겠느냐고 물어서 좋다고 했지. 사이킥 하우스라고 해서 무슨 귀신의 집 같은 곳인 줄 알았는데, 웬걸 카페나 레스토랑처럼 멀끔했어. 사이킥이라는 남자는 멕시코인이었는데, 나무를 통해 영혼을 부른다고 하더군. 방안에 아주 큰 나무, 살아 있는 나무가 있었어. 남자가 눈을 감고 잠시 집중하더니, 언니가 왔다고 하더라고.”
이마치는 그때 느낀 공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했다. 나뭇가지가 부르르 떨리더니, 한순간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졌다. 씨스터, 씨스터, 남자는 이마치를 보고 속삭였다. 씨스터, 돈 고 어웨이, 룩 앳 미, 씨스터. 여자처럼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이마치는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꼈다. 달음질치다시피 그 방에서 빠져나가 화장실을 찾았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소변을 보고, 손을 씻고, 거울을 봤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데 복도 끝에 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조용히 그곳으로 다가간 이마치는 벽에 매달린 남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작은 구멍과 끈과 막대기를 통해 옆방의 나무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것은 쇼였다. 쇼에 임하는 사람들 모두 진지했다. 그들은 프로였다. 다시 방으로 갔을 때는 어둑한 조명 사이로 실과 끈이 보였다.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속임수였다.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조악한 가짜였지만 나무만은 진짜였다. 성인 남자가 타고 올라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고, 사람들의 눈이 쏠릴 만큼 아름답고, 몇 가지 비밀은 숨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
“정말 살아 있는 나무였어. 그런 게 대단한 거지. 사람들을 속여보겠다고 그 큰 나무를 방안에 넣는 거 말이야.”
이마치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유령이든 귀신이든 천사든, 난 그런 거 믿지 않아. 죽으면 썩기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이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영적인 세계가 있는 거라면, 정민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 없잖아.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언니가 내게 귀띔이라도 해줬을 거 아니야. 나뭇가지를 흔들든, 발바닥을 간지럽히든, 변기 속 물을 솟구치게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야.”
이마치는 눈이 점점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포기해. 이 집은 내 거고, 그애가 오기 전에 난 안 나가.”
이마치는 자신이 점점 미쳐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건을 잃어버리고, 잠옷 바람으로 외출하고, 자신의 이름을 깜빡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망상과 대화하는 버릇까지 더해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마치는 정말 무료했다. 그녀의 삶을 채웠던 그 수많은 말들―대본의 대사들, 지문과 독백들―이 사라졌다. 그녀는 혼자서라도 떠들 수밖에 없었다. 망상 속 유령은 그녀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매주 성실하게 진료에 임했던 이마치는 중간에 딱 한 번 병원 예약을 취소했는데, 딸의 출산 때문이었다. 딸이 아이를 낳았다는 전화를 했을 때, 이마치는 그애가 고약한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딸은 임신 기간 내내 그 사실을 숨겼다. 워낙 마른 체형이라 임신 초중기에는 티가 거의 나지 않았고, 출산 직전이었던 설 명절에는 출장 운운한 거짓말로 집에 들르지 않았다. 딸은 혼자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았고, 조리원에서조차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는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마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는데, 마치 길에서 고양이를 데려왔다고 하듯 심상했다.
이마치는 조리원으로 당장 달려갔다. 산모복을 입고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딸을 보니 기가 막혔다. 딸은 지난해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기가 생겼고, 혼자 낳아 키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막달까지 일한 뒤 방송국에 사직서를 냈고, 모아놓은 돈으로 당분간 일이 년 정도 아이만 돌볼 작정이라고 했다.
“무슨 수로 아이를 키우려고? 다시 직장에 복귀할 수 있을 것 같니?”
“몸 좀 추스르면 빵집을 열어볼까 싶어요.”
“길 건너 하나씩 빵집이야.”
“사람들은 다 제가 만드는 빵이 맛있다고 해요.”
이마치는 한숨을 쉬었다.
“애아버지는 뭐라고 해?”
“그 친구는 이 일과 상관없어요. 헤어진 뒤에 임신 사실을 알았고, 우린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예요.”
“나한테는 왜 진작 말 안 했어?”
“축하받지 못할 것 같아서요.”
이마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작 알았다면 물론 아이를 낳지 않도록 설득했을 것이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일, 그게 어떤 일인지 아느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 막 눈을 뜬 아기, 깨끗이 씻겨 천에 싸맨 아기는 말도 못하게 예뻤다. 이마치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보았다. 아기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그녀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마치는 얼른 딸에게 아기를 건네주고 물러났다.
“얘 배고픈가보다.”
이마치는 그날 오전 조리원에서 퇴소 절차를 밟고, 딸의 집으로 갔다. 16평짜리 아파트가 살뜰하게 아기용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가 그 집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딸이 초대한 적도 없고, 그녀가 그러길 바란 적도 없었다. 아파트를 다 돌아보기도 전에 딸이 진작 예약해뒀다는 산후도우미가 도착했다. 여자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기를 맡았다. 자기는 손자가 넷이나 된다고, 며느리 네 명의 산후조리를 직접 해줬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던 그 여자는 과연 손이 빠르고 야무졌다. 아기를 업은 채 미역국을 끓이고, 젖병을 삶고, 먼지 한 톨 없는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딸은 끝도 없이 잠을 잤고, 이마치는 무료했다. 여자는 아기에게 온갖 이야기를 하고, 자장가를 불러주고, 똑딱 똑딱, 입으로 소리를 내며 놀아줬다. 이마치는 멀찌감치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산후도우미가 가까이 와서 아기 예쁜 짓을 하는 것 좀 보라고 해도 손을 내저었다.
다음날 아침 이마치는 근방의 유명한 빵집에 가서 빵을 한가득 사 왔다. 산후도우미는 젖 물리는 산모에게 이런 걸 먹이면 되겠느냐고 중얼거렸다. 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가 짐을 싸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난 자리만 차지하지 별 도움도 안 되잖니. 좁은 집에서 복닥거리는 것도 서로 피곤하고. 이쯤에서 내가 가주는 게 맞아.”
딸이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것은 집을 나서기 전에 이마치가 돈이 든 봉투를 건넸을 때였다. 딸은 끝끝내 받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이마치가 포기했고, 대신 산후도우미에게 봉투를 줬다. 도우미는 얼른 받아들었다.
“너무 누워만 있지 마라. 자꾸 움직여야 부기도 빠지고 활력이 생겨.”
“알아서 할게요.”
딸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날 이마치는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탔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결국 낯선 곳에 내려 다시 시외버스 터미널을 찾아가야 했어요.”
한 주 건너 병원에서 제제를 다시 만난 이마치가 말했다.
“터미널이 건물 안에 있는 걸 모르고 한참을 헤맸어요. 가방 무게가 어마어마해서, 들어올리고 내릴 때마다 죽을 지경이었죠. 일주일 이상 내려가 있을 작정으로 짐을 쌌거든요.”
“그런데 왜 이틀 만에 돌아오셨어요?”
“모르겠어요. 그냥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애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어요.”
“따님 말씀이신가요?”
“아기요. 전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마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날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푸는데, 거기서 뭐가 나온 줄 아세요?”
여성용 지갑이었다. 빨간색 퀼팅 반지갑. 그 안에는 얼마 되지 않는 현금과 카드, 그리고 딸의 집에 있던 산후도우미의 사진―네 명의 손자, 네 명의 아들과 찍은―들이 있었다. 이마치는 한심한 장물을 바라보는 도둑처럼 그것을 열없이 내려다보았다. 대체 언제 가방에 집어넣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왜 본인이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제제가 물었다.
“도우미분이 실수로 지갑을 잘못 뒀을 수도 있고, 어디서 가방으로 잘못 흘러들어갔을 수도 있잖아요.”
“도둑질이 처음이 아니니까요.”
이마치는 선선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사실이에요. 극단생활을 할 때, 저는 주말마다 백화점에서 일했는데, 그곳에서 종종 손님들의 돈과 지갑을 훔쳤어요. 지금처럼 카드 결제 따위로 오가는 돈이 기록되는 시절이 아니었죠. 장사가 잘되는 점포에서는 종일 돈을 자루에 가득 담을 정도였어요. 거기서 얼마씩 슬쩍하는 건 일도 아니었죠. 손님들이 물건을 살피느라 잠깐씩 내려놓는 고급 핸드백에서 지갑을 몰래 꺼내는 일도요. 저는 정말 도둑질에 소질이 있었어요. 재빠르게, 잠잠하게, 공기처럼 움직였죠. 한 번도 들키지 않았고, 의심을 받은 적도 없어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내 형편에 과한 옷들을 사 입고 다녔어요.”
“백화점에서요?”
“네, 백화점에서 훔친 돈으로 백화점에서요. 정말 신바람나게 일했는데, 얼마 뒤 홍보 관리자 눈에 띄어서 엘리베이터 안내양 일을 하게 됐죠. 예쁜 옷을 입고 돈도 더 받는다고, 다들 제가 승진이라도 한 것처럼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도둑질을 못하니 아무 재미가 없더라고요. 남자들이 걸핏하면 손을 대고 추근대는 것도 지겨웠고요. 그래서 몇 달 못하고 그만뒀어요. 백화점을 나온 뒤로는 도둑질도 그만뒀어요. 그후 드라마 출연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돈을, 정말 큰돈을 벌기도 했고요.”
제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셨어요?”
“아뇨. 놀라지 않았어요. 저는 이마치씨를 판단하지 않아요. 심판하지 않아요. 그건 제 권한 밖의 일이죠.”
“제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요?”
제제는 말없이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이마치는 의사의 검은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해서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도둑질 정도는 괜찮겠죠.”
제제는 유난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차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날은 그들의 집중 상담 12회 차가 끝나는 날이었다. 하지만 지난주에 빠진 한 회를 보충하기 위해서 한 주 더 만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마치는 동의했다. 다음주 진료일이 자신의 생일인 줄 몰랐고, 알았대도 선약 따윈 없었으니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생일을 기념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 마음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그녀를 떠났다. 육십 세의 이마치는 오롯이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