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이마치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몸무게를 쟀다

1. 라파트멍

 
이마치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몸무게를 쟀다. 그녀의 몸무게는 55킬로그램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보통 변함없이 그 몸무게를 유지했다. 그녀는 배우였다. 몸무게가 1킬로그램만 늘어나도 얼굴 윤곽이 바뀌고 전체적인 인상이 달라져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메라는 늘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었다. 그 앞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최소한의 항상성을 유지해야 했다. 스튜디오 조명 아래에서 찍은 사진과 길에서 무방비 상태로 찍은 사진이 같은 인물을 보여줘야 했다. 이마치는 아침마다 몸무게를 재고, 밥을 먹든지 굶든지 했다. 그것은 일종의 직업적 원칙이었다. 그녀가 예순 살이 되기 전까지는.
그날 아침 이마치는 평소대로 몸무게를 재고 깜짝 놀랐다. 59라는 숫자가 깜빡거리다가 사라졌다. 전날까지 분명 55킬로그램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몸무게가 늘 수도 있는 걸까? 그녀가 스스로에게 무한정 허용하는 음식은 매일 밤 마시는 와인뿐이었다. 이마치는 체중계에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숫자는 야속하게도 소수점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옆에 누군가 있다면 체중계가 고장난 게 아닌지 올라가보라고 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녀는 혼자 살았다. 
이마치는 오전 내내 물 한 잔만 마시고 스트레칭을 했다. 땀을 한껏 흘린 후 반신욕을 하러 욕조에 들어갔고, 그 안에서 설핏 잠이 들었다. 따뜻한 물이 서늘하게 변해버릴 즈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차게 식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욕조에서 나오는데 반대편 거울에 그녀의 알몸―작은 공이 들어 있는 천 주머니처럼 축 늘어진 유방과 쭈글쭈글한 배, 막대기 같은 두 팔과 다리―이 보였다. 그녀는 서둘러 샤워가운을 걸쳤다. 그날은 일주일에 하루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화장을 하다가 이마치는 한번 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다소 딱딱한 어조의 남자 목소리였다. 그녀는 눈썹을 그리다 말고 일어나 집안 곳곳을 살펴봤다. 이사온 지 한참이 지났지만, 방마다 정리되지 않은 상자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그녀는 그 상자 안에 누군가 숨어 있다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상상을 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될 테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사 직후부터였다. 처음에 이마치는 그 소리가 아랫집 화장실 배수관을 통해 들리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아랫집에 엄마와 두 딸, 여자들만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소리는 젊은 남자의 것이었다. 이십대 초반, 아니면 중반의 남자. 뭉개져 들리던 소리는 점차 분명하게 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이마치는 그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은 듯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3월이지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듯 쌀쌀한 날씨였다. 이마치는 집을 나오자마자 패딩점퍼를 입을 걸 후회했다. 병원 시간이 다 되어 도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금세 택시가 잡혔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마치씨 맞죠?”
백미러로 그녀를 흘금흘금 바라보던 택시 기사가 입을 열었다. 
“아까 길에서부터 알아봤어요. 제가 오랜 팬이거든요.”
이마치는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후, 선글라스를 찾아 가방을 뒤졌다.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글라스는 물론이고 늘 가지고 다니는 지갑, 휴대폰, 물병, 수첩, 손수건, 물티슈, 핸드크림까지 하나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언제 이 가방을 이렇게 탈탈 털어버렸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차로 십오 분 거리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고, 택시 기사는 곤란한 사정을 눈치챘다. 그는 본디 택시비를 받지 않을 작정이었다고, 대신 사인을 한 장 해주면 가문의 영광으로 알 거라고 했다. 그가 내민 것은 황당하게도 만원짜리 지폐였다. 
“여기다 사인을 하라고요?”
“그러면 늘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으니까요.”
“뭐, 안 될 것 없죠.”
이마치는 빳빳한 지폐 위에 둥글게 휘어지는 글씨체로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고맙습니다. 늘 이마치씨가 행복하시길 바라왔어요.”
이마치는 그제야 택시 기사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체격이 건장한 육십대의 남자였다. 아직 자신에게 힘이 남아 있음을 알고, 어지간한 이삼십대 남자들을 어린애처럼 여기는 터프가이. 그는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이마치도 고맙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삼십여 년간 사람들을 향해 지어 보였던 미소였다.  

 

병원 입구에서 이마치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펼쳐 후드처럼 얼굴에 둘러썼다. 남편이 결혼 전에 사줬던 에르메스 스카프였다. 노란색 마차와 체인, 장미가 그려진 그 스카프는 너무 화려해서 젊은 그녀에게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그 선물을 받았고, 옷장 속에 처박아둔 뒤 단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다. 남편은 십 년 전에 죽었다. 이마치는 얼마 전 이삿짐을 풀다가 그 스카프가 상표도 떼지 않은 채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카프는 놀라울 정도로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죽은 남편에게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그에 대해 일말의 감정을 느낀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의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스카프를 한번 가져와보겠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주치의는 증거물을 모으는 형사처럼 그녀가 언급하는 물건을 직접 가져오거나 사진을 찍어오게 했다. 만년필, 찻잔, 의자, 담요, 그녀의 이름이 실린 연극 팸플릿, 집 앞 화단과 거실 풍경, 베란다 섀시 사진까지 마치 그녀의 삶을 구석구석 스캔하려는 것 같았다. 글쎄, 이렇게 해서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아파트를 통째로 들어서 진료실 안에 옮겨줄 수도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의사는 눈부신 노란 머리를 흔들며 웃었고, 그렇게 해준다면 일이 아주 쉬워질 거라고 했다.  
“스카프 멋진데요.”
병원 1층 진료과에 있는 간호사가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주치의 선생님 개인 사정으로 오후 스케줄이 다 밀려났어요. 한 시간 이상 대기해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달리 어떤 수가 있으랴. 이마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 대기석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하나같이 어두운색의 옷을 입은 나이든 사람들 틈에 도드라지게 하얀색 환자복을 입은 어린아이가 눈에 띄었다.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민머리의 아이. 이마치는 그 또래 아이들에게 면역이 없었다.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눈길을 알아챈 아이가 부끄러운 듯 제 부모의 등뒤로 숨었다. 아픈 아이의 부모들은 누구보다 평안한 얼굴이었고, 이마치는 그것이 삶이 멈춰버린 자들의 얼굴임을 알았다.

 

삼 개월 전 그녀가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 의사는 최근 가장 큰 스트레스를 느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스트레스요?”
“불면, 소화불량, 어지럼증 같은 불편감 말입니다.”
“아, 그건 태어난 직후부터예요. 전 그때부터 알츠하이머였나보죠?” 
이마치는 빈정거리는 투로 되물었다. 뇌 의학 전문가라고 어렵게 소개받아 온 의사가 그녀 나이의 절반도 되어 보이지 않아 영 못마땅했다. 설상가상 의사 가운에 달린 명찰에는 ‘제제’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제제라니, 모든 게 어린애들 장난처럼 느껴졌다. 
“선생님. 저는 스트레스 같은 걸 이야기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이마치는 차가운 목소리로 제제를 향해 말했다.
“제 머릿속이 이상해요. 자꾸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헛소리가 들리고, 이제 헛것까지 보여요. 그래서 알츠하이머 검사까지 받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고요,”
“아무 이상이 없는 건 아니죠.”
제제가 그녀의 차트를 보면서 말을 막았다. 
“이전 병원에서 알츠하이머 전 단계 진단을 받으셨네요.”
“맞아요. 빌어먹을 전 단계요.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것으로는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제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말씀해보세요. 최근에 무슨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죠?”
모든 것은 ‘이사’로부터 시작되었다. 팔 년 전 이마치가 살던 아파트는 재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남편이 죽은 후 딸이 독립해서 나가고, 그녀 홀로 지내던 집이었다. 이마치는 공사 기간 동안 단출하게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재건축 공사가 이토록 오래 걸릴 줄 몰랐던 것이다. 건설사가 부도나고, 다시 다른 건설사가 채택되고, 건축설계가 처음부터 다시 들어가면서 애초에 삼 년 계획이었던 기간이 팔 년으로 늘어났다. 어쨌든 호텔생활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매일 깨끗한 침구와 돈만 내면 문 앞으로 오는 갖은 서비스들. 그녀는 일중독이었다. 쉬는 날이 없을 만큼 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조연이나 단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쓰러질 때까지 일하고, 앉은자리에서 짬짬이 수면을 보충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이마치의 딸은 그사이 지방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지역의 방송국 프로듀서로 취직해서 자리를 잡았다. 남편의 기일이나 명절이면 딸이 서울에 올라와 호텔 라운지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들은 대화가 많은 모녀는 아니었다. 주로 백화점에서 함께 쇼핑을 했고, 한두 끼 식사를 한 후 헤어졌다. 지난가을 이마치는 호텔 중식당에서 딸을 만나, 재건축 공사가 끝났다는 말을 전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아파트 말이야. 빠르면 12월부터 입주가 시작될 거래.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려고. 호텔생활도 이제 청산해야지.”
“그 집에 다시 들어가려고요?”
딸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엄마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데다 너무 시끄러운 동네예요.”
“어쩔 수 없잖니. 거기가 우리집인걸.”
“‘우리’집은 아니죠. 그 집은 진작 허물어졌잖아요. 전 차라리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마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가만히 딸을 바라보았다. 딸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장면만 먹었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보다 눈에 띄게 얼굴이 붓고 푸석푸석했다. 딸은 얼마 전 애인과 헤어진 눈치였다. 이마치는 그들이 같은 방송국 동료였다는 것과 몇 년간 동거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이 다섯 개나 있으니, 이참에 너도 집에 들어와. 서울의 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길 수도 있잖니.”
딸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이마치를 바라보았다. 
“전 서울에 안 돌아와요.”
“왜?”
“좋았던 기억이라곤 없으니까요.” 
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애도 안 돌아와요, 엄마.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이마치는 무릎에 놓인 냅킨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이마치였다. 그녀는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음에는 집에서 보자.” 
그들은 호텔 앞에서 헤어졌다. 뒤돌아 가는 딸의 막대기같이 마른 몸과 자루처럼 커다란 원피스, 느리게 걷는 걸음이 이마치의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는 딸의 이름을 불러 세우지 않았다. 잘 돌아가라고, 또 연락하자고 외치지 않았다. 새집에 들어와 같이 살아도 좋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딸이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안도했다. 그녀는 다시 누군가와 함께 살 자신이 없었다. 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체 왜 그 집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은 사람은 딸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알고 지낸 배우들, 작가들, 감독들, 오래전 그녀의 삶이 어떻게 부서졌는지 생생히 지켜본 사람들 모두 지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큰 집으로 이사하는 것을 말렸다. 청소며 정리며 모두 다 일이라고, 노후에 혼자 살 만한 안전한 맨션이나 오피스텔을 소개해주겠다고 나섰다. 아들 때문이죠.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마치가 그 집에 돌아가는 이유를 말하면 그제야 다들 기억을 떠올리고 아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마치의 아들은 이십일 년 전 실종되었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아이는 홀로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납치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지만, 심증뿐이었고 협박 전화 따위도 걸려오지 않았다. 이마치는 아들을 찾기 위해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가 볼거리의 전부인 시절이었다. 온 국민이 그녀의 비탄에 젖은 얼굴을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더이상 브라운관에서 볼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아들을 잃고 드라마에 나와 웃고 떠드는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여자는 없다고. 하지만 이마치는 계속했다. 일을 멈추면 온 식구가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 일을 계속했기 때문에, 상대 배우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깔깔거리며 웃고, 엄포를 놓고, 붙잡고 사정하는 연기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녀는 살아남아서, 아들을 기다렸다. 그 집에서 남편이 죽고, 딸이 떠난 뒤에도, 홀로 남아서 기다렸다. 아파트 재건축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같은 위치의 동으로 들어오는 조건을 걸 수 있었다. 그 일에는 이마치의 이름, 조합원들의 연민, 그리고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마치는 조작된 추첨에서 최상층을 받았다. 60층이라니 말만 들어도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나무 위의 집이라고 해도, 군말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삿날 이마치는 새벽부터 야외촬영이 있었다. 어차피 그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사부터 정리까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준다던 이삿짐센터 소장이 아침부터 난감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가구와 살림 대부분이 망가진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이마치는 팔 년 전 호텔로 갈 때 가구와 물건을 컨테이너 대여 업체에 넣어버렸다. 다시 꺼내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 몰랐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짐을 어떻게 싸고 보관해야 되는지 기초적인 상식이 없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녀는 연기 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곰팡이와 먼지, 습기의 공격에 부식되고 상해버린 물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 인부들에게 이마치는 도로 가져가서 전부 버려달라고 말했다. 단, 아들의 물건만 제외하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아들의 방만 정리해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이마치는 새집으로 돌아왔다. 라파트멍. 요즘은 어려운 이름의 아파트가 많다지만 어지간히 우스운 이름이라고 이마치는 생각했다. 아파트의 로고는 ㄷ자를 구십 도로 돌린 모양이었다. 지붕 있는 집의 모양. 단지 내 모든 조명이 밝혀 있었지만 인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공동 현관 앞에 입주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펄럭거렸다. 
아직 번호판의 비닐도 떼지 않은 엘리베이터는 그녀를 순식간에 60층으로 쏘아올렸다. 현기증을 느낀 그녀는 안전 바를 꽉 붙잡았다. 덜덜 떠는 노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의연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센서등이 켜졌고, 텅 빈 56평형 아파트가 그녀를 맞았다. 이마치는 제일 먼저 아들의 방을 찾았다. 인부들이 전부 들러붙어 총력을 기울인 덕분에 방은 최대한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새집 냄새와 쿰쿰한 곰팡냄새가 뒤엉켜 대번에 두통이 일었으나 이마치는 성큼성큼 그 방으로 들어섰다. 공룡이 그려진 낡은 침대보, 야구공들, 레고로 만든 배, 컬러 백과사전…… 이마치는 오랜만에 그것들을 마주했다. 아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끔은 그애가 뉴질랜드나 캐나다 같은 곳으로 유학을 떠난 것 같았다. 이 모든 고통, 실패, 유실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지금도 진행중이라는 사실이 놀라워 스스로 눈을 찌르고 싶었다. 
냉기가 흐르는 텅 빈 거실은 난방을 제일 세게 올려도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마치는 옷 상자를 뒤져서 모피코트를 꺼내 입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입지 않는, 발목까지 오는 풀 밍크 모피였다. 먼지와 담배 냄새가 났지만, 그 옷을 입자 겨우 몸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대리석 바닥에 가방을 베고 누워 잠이 들었고, 이상한 꿈을 꿨다. 대중목욕탕에 가는 꿈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탤런트가 된 이후 그녀는 대중목욕탕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탕 문을 열고 들어가 옷을 벗고, 세신사를 찾아갔다. 세신사는 아담한 체구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아주 작은 삼각팬티만 입고 있었다. 탱탱한 피부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한 줄기씩 흘러내렸다. 뒤늦게 이마치는 여자에게 손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여자의 긴 팔은 그 끝이 뭉툭했다. 이마치가 놀라지 않은 척 애를 쓰는 모습을 보고 여자가 웃었다. 어차피 때를 미는 데 손가락은 필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럴 수도. 이마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매끈한 침대에 누웠다. 여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몸을 숙였다. 그 여자의 벗은 두 가슴, 그 정점이 자신의 몸에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서늘함, 그 뾰족함. 이마치는 몸서리치며 잠에서 깼다. 모피코트 안이 땀으로 흥건했다. 이곳이 어딜까? 이마치는 순간 자기가 죽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줄 알았다. 낯선 천장, 낯선 공기, 낯선 어둠. 이윽고 그녀는 그곳이 새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이마치는 촬영장에서 대사 실수를 반복했다. 아들이 사랑하게 된 가난한 여자를 못마땅히 여기는 부호의 아내 역할이었는데, 중요한 장면에서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처럼 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말을 대체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결국 그날 촬영이 취소되었다. 이마치는 좀 쉬면 나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 장면을 겨우 찍고 넘어가면 그다음 장면에서 입이 굳어버렸다. 
“선생님 정말 왜 그러세요.”
젊은 여자 감독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왜인지 이마치도 몰랐다. 이사 후 매일 악몽을 꾸고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불면은 오히려 그녀에게 오래된 지병과도 같은 친구였다. 사나흘 밤을 꼬박 새우고 촬영을 할 때도 대사의 쉼표 하나 잊어버리지 않던 그녀였다. 그녀는 종일 작정하고 대본을 보았다. 보고, 또 보고, 다른 사람들의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보았다. 그러고도 현장에 가면 다시금 머릿속이 하얘졌다. 감독은 욕설을 뇌까리며 현장을 떠났다. 스태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이마치는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뇌 질환 권위자를 찾아갔다. 혈압을 재고, 뇌 사진을 찍고, 피를 뽑았다. 앞에서 그림 카드를 보면서 사물의 이름을 말하고, 오늘 날짜와 계절을 말하고, 집 주소를 말하고, 알파벳을 거꾸로 외어 보였다. 반나절이 걸린 검사 결과 그녀는 알츠하이머 전 단계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제가 알츠하이머라는 건가요,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는 건가요?”
머리카락도 수염도 하얗게 센 의사는 이마치가 아직 알츠하이머는 아니라고 했다. 뇌혈관의 지저분한 찌꺼기들이 눈에 띄지만 그것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검사 결과 어떤 수치도 알츠하이머 진단의 기준점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해마도 정상, 유전자 검사도 정상, 알츠하이머의 전조증상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런 해당사항이 없었다. 
“환자분 나이의 20퍼센트가 경도 인지장애, 즉 알츠하이머 전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 누군가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기도 하죠. 오 년, 십 년, 십오 년 후에요. 하지만 지금으로서 알 수 없어요. 단기 집중력이나 기억력은 같은 나이대에서 오히려 월등하게 높아 보입니다.”
의사는 뇌 영양제를 처방해주면서 잘 먹고 푹 쉬라는 말만 했다. 약을 먹으면 잠이 쏟아졌다. 끈적거리는 잠을 겨우 떨치고 일어날 때마다, 낯선 천장을 보고 놀랐다. 자신감이 떨어지면서 실수는 더욱 잦아졌다. 카메라 앞에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느낌, 그 느낌이 사라졌다. 결국 드라마에서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반 이상 진행된 작품이었는데 그녀의 녹화분을 통째로 들어내고 재촬영을 한다고 했다. 어디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건강상의 이유로 그녀가 은퇴의 수순을 밟는다는 기사가 났다. 딸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태프와 사이가 틀어져 손을 털고 물러난 거라고 둘러댔다. 딸은 그녀가 스스로 작품에서 하차한 일은 평생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들은 정해진 선을 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보여주지 않는 것은 보려 하지 않는다―을 지켰다. 
출연 예정이었던 작품의 캐스팅까지 줄줄이 취소되고 나자 이마치는 뭘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망연자실해졌다. 매니저 K라면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마, 라고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주문처럼 그녀에게 각인시킨 말이었다. 그녀가 강남의 룸살롱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웬 대기업 총수의 아기를 낳았다는 루머가 돌았을 때도, 시기하는 후배들을 악의적으로 밀어내고 매장시킨다는 낭설이 돌았을 때도 K는 일절 대응하지 않도록 했다.
숨을 죽이고 기다려. 그리고 다음 작품을 시작하는 거야. 백지에서 다시 쓰는 거지.
K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그는 지금의 그녀를 만든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그 모든 것과 함께 떠났다. 그후 그녀는 스스로 섭외와 스케줄 관리를 해왔다. 막연하지만 은퇴의 때를 점쳐보기도 했고, 커리어의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해야 할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때가 올 줄은 몰랐다. 일이 없는 삶은 상상해본 적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인정하는 유일한 순간은 배우로서의 순간이었다. 그 외의 삶은 모조리 실패했고,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는 일, 그 일이 그녀를 살게 했다. 일은 그녀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