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물 만조
둘희는 한기연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처음엔 트럭을 쫓는다고 생각했지만 목표물이 우회전해 눈앞에서 사라지자 둘희는 방파제 길로 핸들을 틀며 힘껏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체인이 롤러에서 빠져 털털거리지 않았다면 둘희는 그대로 도로를 따라 밤새 질주했을 것이다. 기름 묻은 손으로 자전거를 가로등 옆에 눕혀놓고서 둘희는 바다를 향해 등을 폈다. 하늘과 물 모두 먹빛이었다. 밀려오는 바닷물이 펄에 박힌 조개껍데기를 뒤집었고 얼어붙은 들판에선 찢긴 비닐이 음산하게 나부꼈다. 둘희는 둑을 따라 걸으며 다섯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봤다. 혹시라도 한기연이 차를 몰고 따라오지 않을까, 기대와 불안을 동전의 앞뒷면처럼 만지작거리며 어둑한 길의 소실점을 노려봤다. 둘희는 정신없이 밖으로 나오느라 휴대전화를 챙기지 못했고 얇은 카디건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집요하게 한 방향으로만 불어오는 갯바람에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부르트는 것 같았다. 얼얼해진 손등과 귓바퀴를 손으로 문지르며 눈물이 흐르는 뺨을 소매로 닦아냈다. 추워서 그런 거겠지, 너무 추우면 눈물이 나기도 하니까. 둘희는 자기 울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경적이 울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버스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는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겁니다.’
낮은 제방 위로 올라서며 둘희가 손을 흔들었다. 그 버스를 잡아타는 게 악몽에서 깨어날 마지막 기회라는 듯. 하지만 감속하던 버스는 둘희 앞에 다다라 검은 배기가스를 토해내며 빠르게 지나갔고, 둘희는 팔등으로 코를 틀어막은 채 바다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때 삵을 봤다. 황량한 개펄의 어귀, 연갈색 풀대 사이에서 유성처럼 번쩍이는 눈동자가 둘희를 쏘아보고 있었다. 멈칫하며 몸이 굳은 둘희는 순식간에 변색하며 빛나는 삵의 안광에 매혹되었다.
어쩜 저렇게 쏘아볼까. 쏘아보는 건…… 아름답구나. 눈이 아니라 별 같아. 대단한 섬광이야.
그 순간 둘희는 증오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박혔다. 생명체의 시력이 바로 그 증오에서 촉발됐음을 깨달았다. 잡아먹으려는 증오와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증오. 둘희도 눈자위에 힘을 주며 삵을 경계했으나 수풀에 포복한 야행성 짐승의 광채가 더 강렬했다. 그 미움이 너무도 찬란해서 둘희는 자신을 쏘아보는 삵의 증오를 감당할 수 있었다. 미움받는 먹잇감으로 사는 게 자신의 천공에 박힌 운명의 별자리 같았다. 삵은 사람을 먹을까. 먹어본 적 있을까. 없다면 지금 시도해볼 작정인가? 문득 지난여름 기암괴석으로 떨어져 죽었다던 사람이 생각났다. 죽은 이는 간조와 만조가 일곱 번 오가는 동안 갯바위에 널브러져 피를 흘렸고 한류의 바닷물이 그 따듯한 피를 게걸스럽게 핥아먹었다. 야생동물이 접근해 손가락 몇 마디와 눈알을 파먹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둘희는 지금 자신이 마주한 삵이 그 훼손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너는 사람을 먹어본 적 있는 삵이야. 또 시도할 수 있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삵이야. 멀리 해안가에서 폭죽 소리가 울리자 삵의 시선이 횡과 종으로 움직였다. 푸른 동공이 적색과 녹색으로 굴절하며 빛났고 그 빛의 춤사위에 둘희는 순간 황홀경에 빠졌다. 어리석게도 빛에 홀려 앞으로 손을 뻗던 둘희는 발을 헛디뎌 경사면 아래로 처박혔다. 짧은 비명 뒤에 상체를 일으켰을 때 삵은 온데간데없었다. 둘희는 벗겨진 구두를 찾으려 차가운 펄을 더듬었다. 바다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바다의 잔혹함을 무수히 통과했다고 자부했는데, 둘희는 이제껏 자신이 한 번도 펄에 빠진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본 적도 없었다. 하반신을 덮쳐오는 개펄의 냉기에 둘희는 절로 턱과 어깨가 떨렸다. 어둠과 손잡은 추위가 사방으로 좁은 벽을 둘러치며 조난된 자신을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둘희는 유일한 온기인 자신의 입김으로 손을 녹이며 머리카락 사이의 핀을 풀었다. 가발을 벗겨낸 다음 틀어올렸던 머리를 풀어헤치자 뜻밖에도 명료한 각성이 찾아들었다. 한기연이야. 한기연을 먹고 한기연의 혼에 씌어 날 저주하려고 따라온 삵이야. 둘희는 발을 절며 어둑한 해안도로를 걸었다.
고깃배가 그려진 식당 간판을 보자 둘희는 눈앞이 핑 돌 만큼 심한 허기를 느꼈다. 겨울 바다의 운치를 즐기러 온 여행자가 되어 식당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 뜨끈한 국수 면발을 삼키고 싶었다. 둘희는 김이 피어오르는 평지붕의 은색 환기통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식당 뒤편으로 갔다. 거기서부턴 포장하지 않은 흙길이었다. 새벽 나절에 내렸던 진눈깨비 때문인지 땅이 질퍽했고 걸음마다 구두 발자국이 찍혔다. 흡연자가 아니면서도 둘희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는데, 어쩌면 한기연이 내뿜는 연초 연기가 그리운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지도. 밭두렁을 따라 배추들이 보였다. 노랗게 시든 잎들이 벗어놓은 슬립처럼 이랑에 늘어져 있었다. 방향이 불분명한 어둠 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한적한 농가의 불빛들이 물기에 어른거렸다. 둘희는 다시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이대로 계속 가면 한기연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일탈을 멈추고 회사로 돌아가 엉망이 된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둘희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딸기 하우스의 반구형 지붕을 보며 제발 저곳에 을주의 트럭이 있기를, 을주가 저기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언제쯤이면 내가 저물녘 해변을 보며 당신과 당신의 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을주에게 털어놓은 다음 자신의 뻔뻔스러운 미련을 떨쳐내고 싶었다.
처음 둘희가 을주를 봤을 때 그녀는 개를 따라 어두운 개펄을 뛰고 있었다. 리시줄을 놓쳤는지 을주는 개를 따라잡으려고 두 팔을 풍차처럼 내저으며 달렸다. 그리고 며칠 뒤 둘희는 그때 봤던 그들의 소동이 남몰래 자기들끼리 약속한 산책의 형식이란 걸 알았다. 경계심이 많고 수줍음을 타는 개가 유일하게 자기의 최고 속력을 만끽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쪽에겐 마음을 여는 것 같다고, 을주가 둘희에게 말했다. 둘희는 고온에 달군 유리관을 핀셋으로 단숨에 구부려 조형한 듯한 개의 신체 곡선을 바라봤다. 아름답고 사려 깊은 개를 따라 하얗게 솟아오른 조개무덤을 걷기도 했다. 보폭과 걸을 때의 리듬으로 상냥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둘희는 개가 선사하는 네 발자국 운율에 안정감을 느꼈다. 다정한 산책자들과 걷기 위해 그들이 해변에 오는 시간에 맞춰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한기연과 마주쳤던 날은 노랗고 불그스름한 낙조가 마치 깨진 새알처럼 불길하게 바다로 가라앉던 때였다. 해변의 북쪽 길, 노송이 자란 군락 쪽에서 한기연이 다가왔다. 페피를 피해 지방으로 떠돌던 한기연이 이마에 손차양을 한 채 느릿하게 해변을 걷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멈칫하는 둘희에게 을주가 물었을 때 둘희는 ‘모른다’고 답하지 않았다. 단지 한기연에게 오해를 살까 두려워 가던 방향에서 몸을 틀어 그녀와 멀어졌을 뿐. 어리석게도 둘희는 한기연의 시야에서 자기의 모습을 지울 수 있다는 듯 캠핑촌의 피서객들 틈으로 도망쳤다. 그 이후로 둘희는 병적으로 그때 한기연과 자기 사이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행인들을 눈으로 더듬으며 그들이 하는 말이 자신에게 들리는지 확인했다. 한기연은 그때 내가 하는 말을 들었을까?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연인의 목소리를 좁고 구부러진 귓속의 달팽이관으로 모조리 빨아들였을까? 그날 석양빛은 오래된 상처의 고름처럼 누렇게 흘러내렸고, 휴가철의 태양빛은 모래밭과 공기 중의 습기를 빠르게 증발시켰다. 둘희는 그날의 풍경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 이런 대화를 꾸며냈다. ‘아는 사람이냐고요? 내 전부예요. 난 이만 가봐야겠어요. 저 사람이 날 기다려요.’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 잘못 꿴 말실수의 털실을 풀어낼 때면 둘희는 자신을 훑고 가던 강렬한 승리감까지 함께 달려나오는 것을 느꼈다. 한기연을 외면하며 등을 돌릴 때 둘희는 몸안에서 똬리를 트는 듯한 야릇한 흥분을 실감했다. 마침내 나도 한기연처럼 느끼게 된 걸까? 침대에서 한기연이 즐기던 게임을, 감상자의 위치에서 관조하던 시선을 이제 나도 즐기게 된 걸까?
잠자리에서 한기연은 둘희의 유두나 클리토리스를 혀로 잔뜩 몰아세운 다음 돌연 자극을 멈추고 연인의 몸을 내려다봤다. 마치 모래밭에 파놓은 물길로 바닷물이 들어차 흰 거품이 부글거리는 광경을 감상하듯. 한기연은 자신의 타액으로 반짝거리는 둘희의 몸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밤마다 둘희는 그 시선을 얼마나 바랐는지. 연인의 손을, 터치를, 자신의 내부를 깊숙이 꿰뚫는 격렬하면서도 섬세한 그녀의 오른손 동작을.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의 모든 애무는 시들었고 두 사람은 같은 침대를 공유하지 않았다. 둘희는 그 단절이 한기연의 오해 때문이라 여겼다. 섣부른 참견으로 한기연이 자신의 순정을 왜곡하지 않았다면 둘희는 영원토록 연인의 밀어와 손길에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어느 오후 한기연은 둘희에게 경구피임약을 복용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둘희는 당혹감에 웃음을 흘렸고, 자신이 피임약을 입에 댄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거라 말했다.
“그래도 알아둬. 콘돔이 더 편하겠지만, 네가 주도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무슨 뜻이에요?”
“뜻?”
되묻는 한기연의 얼굴은 악의 없이 차분했다. 둘희는 홍차와 함께 먹던 롤빵을 접시에 내려놓고서 한기연의 옷깃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랑 그러기라도 한단 말이에요? 남자랑?”
목덜미를 붙들린 한기연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넌 아직 어리고, 또……”
“또?”
둘희는 거의 입술이 닿을 듯 한기연의 얼굴을 가까이 잡아끌었다.
“예쁘니까. 사람들이 가만 내버려두질 않겠지.”
둘희는 자신의 콩트에 동참해주지 않는 한기연에게 김이 빠져 움켜쥔 손에 힘을 풀었다. 서로의 미래를 열어두는 한기연의 조언은 진지했다. 그 너그러움의 이면에 연인이 떠나갈까 두려운 불안이 자리하고 있단 걸 둘희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한 지 꼬박 십 년이었다. 아직도 확인해주어야 할까? 당신의 나이가 많아지고, 당신의 피부 탄력이 처지고, 당신의 머리숱이 휑해져도, 당신과 내가 영원히 동년배의 추억을 나눌 수 없어도, 내 사랑의 순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나는 당신이 쇠약해져 갓난아기처럼 내 손길을 갈구할 미래의 어느 때를 은밀하고도 기쁘게 꿈꾸고 있단 걸 다시금 선서하듯이 읊조려야 할까.
둘희는 애정의 충성도를 맹세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과 한기연이 딛고 선 땅이 단단하다고 믿었다. 한기연에게 거짓말을 해놓고도 그 속인 사실을 잊을 만큼 둘희는 오만하고 멍청했다. 페피와 자신이 가진 몇 번의 밀회를 한기연이 모를 거라 속단했다. 설령 한기연이 그 일을 안다 해도 둘희는 말 그대로 버선 속을 뒤집듯 한 귀퉁이도 빠짐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한기연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피임약이라니. 그건 한심할 정도로 노골적이면서도 비겁한 회피였다. 둘희는 자신을 단죄하는 한기연의 방식에 수치심을 느꼈다. 한기연은 임신의 위험이라는 빤하고 원시적인 무기로 둘희를 휘두르려 했고, 바닥을 기고 가시에 찔려가며 둘희가 기어이 통과하고자 애썼던 이해의 시간을 멸시하고 깔아뭉갰다. 대체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는 거예요? 내가 페피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하지만 둘희가 그 복잡한 심경을 풀어내려면 먼저 자기의 실수를 실토해야 했다. 둘희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한기연의 방어적인 태도는 둘희의 피해 의식이 더해져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구덩이를 만들었고 둘 사이의 온기를 급격하게 냉각시켰다. 누가 얼마나 더 견디고 있는지 저울질하기 시작하자 그간 아슬아슬하게 지켜온 관계의 평형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하우스 앞에 움츠려 앉은 둘희는 돌 끝으로 바닥에 깔린 넝마를 쪼았다. 개골창에서 들리는 낙수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 어둠을 향해 돌을 던지고는 금세 자신의 무릎 사이로 이마를 처박았다. 농장의 앞뜰에는 을주의 트럭이 없었다. 하우스의 지붕도 불빛 없이 적요했고, 토끼들이 사는 직사각형 우리에서 이따금 둔탁하게 나무틀을 떠미는 기척만 들렸다. 둘희는 또다시 막막함과 추위를 혼자서 견뎌야 했다. 어디에도 한기연을 잊게 해줄 피난처는 없는 듯했다. 바람이 불자 털로 뒤덮인 짐승들의 누릿한 배설물 냄새가 어른거렸다. 숨을 크게 쉬며 그 악취를 들이마시던 둘희는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 바닥에 깔린 석고보드를 퉁퉁 밟으며 하우스의 입구로 갔다. 어지러운 전기선으로 휘감긴 파이프 기둥을 잠시 올려다본 뒤 하우스의 문손잡이를 세게 잡아당겼다. 애꿎은 문틀을 발로 걷어차고, 먼지 낀 비닐에 뺨을 댄 채 안을 살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문틀에 덧댄 비닐을 손끝으로 파고들었다. 두꺼운 비닐은 손톱 힘만으론 좀체 뚫리지 않았다. 둘희는 컴컴한 하우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노란 컨테이너 상자 안을 뒤적였다. 그 안에 무기로 쓸 만한 쇠붙이가 있었다. 끝이 뭉툭하게 닳은 모종삽과 손잡이에 스프링이 달린 전정가위. 둘희는 가위를 집어들고 하우스의 측면으로 돌아갔다.
가윗날로 비뚤어진 직선을 수평으로 그으며 둘희가 하우스의 옆구리를 찢었다. 비닐을 뚫었으나 은박으로 된 단열재가 내부를 가로막고 있었다. 둘희는 구둣발로 단열재를 떠밀면서 자기가 침입할 개구멍을 만들었다. 찢긴 비닐의 틈을 벌리며 정수리를 들이밀었고,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딸기 잎을 뜯었다. 흡사 인형의 긴 머리칼을 붙잡고서 질질 끌고 가는 심술궂은 아이처럼 둘희는 딸기의 넝쿨을 손에 휘감은 채 녹색 부직포가 깔린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줄기 끝에 매달린 딸기를 와라락 떼어 바닥과 천장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그러다 손바닥에 짓이겨진 향긋한 과실을 보고는 무심코 입안에 넣었다. 둘희는 기다란 재배 장치 아래 웅크려 앉아 앙갚음하듯 딸기를 뜯어 허겁지겁 삼켰다.
“뭐하는 거예요?”
어느새 하우스의 입구로 들어선 을주가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위치를 올려 백열등 불을 켜자 오복이가 평상을 가로질러 자기의 지정석인 모퉁이에 앉았다. 딸기를 훔쳐먹던 둘희는 딸기 베드 아래에서 눈을 번뜩이며 숨을 쌕쌕거렸다. 산발한 머리에 온몸에 덕지덕지 진흙이 묻은 꼴이……
을주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이모, 응, 바빠? 바쁘다고? 나 하우스로 칼국수 두 그릇만 갖다줘. 아니, 곱빼기 말고 따로 두 그릇. 아, 몰라, 도깨비랑 먹을 거야. 내가 지금 못 가니까 그렇지. 도깨비라는데 경찰을 왜 불러. 아니, 무섭진 않아. 그럴 것 같아……”
을주가 까치발로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입자의 상태를 살폈다. 통화를 마친 다음 휴대전화를 쥐고 노래를 찾기 위해 스크롤을 내렸다. 이모에게 큰소리쳤지만 을주는 내심 가슴이 쫄밋거리고 긴장됐다. 약이 바짝 오른 도깨비가 자신에게 욕하고 손찌검해도 을주는 반푼이처럼 아무런 방어도 못할 것 같았다. 하우스에 들어서 둘희를 본 순간 을주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만큼 반가웠다. 그렇기에 더 겁이 났다. 농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불청객에게 따뜻한 국수를 먹이려는 건 누가 봐도 상당히 덜떨어진 행동이었다. 을주와 둘희 모두에게 진정제가 필요했다.
을주는 평상 위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서 온풍기 앞으로 갔다. 휴대전화에선 장엄한 트럼펫 연주와 함께 귀에 익은 전주가 흘러나왔다. 을주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서 새빨간 우체통처럼 생긴 기계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지이이잉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며 기계에 달린 팬이 빠르게 회전했다. 하우스 안에 애국가 1절이 울려퍼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을주는 평상 뒤의 캐비닛으로 걸어가 선반 위를 헤집었다. 그나마 보온성이 좋은 주유소 점퍼를 옆구리에 끼고서 입을 만한 하의를 찾았으나 세탁하려고 몽땅 집으로 가져가는 바람에 농장에 남아 있는 바지가 없었다. 을주는 잡동사니 상자에 쑤셔넣었던 도복 바지를 찾아 다른 쪽 옆구리에 끼고서 둘희가 있는 끝 쪽 라인으로 갔다.
“……일삼삼 일칠사 육이공. 마을금고, 오을주.”
둘희에게 옷더미를 내밀며 을주가 말했다.
“부치세요, 이백만원.”
시선을 떨군 채 중얼거린 을주는 둘희의 구두가 온통 진흙투성이인 걸 보고는 순간 무릎이 들썩였다. 둘희에게 자기의 양말과 신발을 내어주고 싶어 온몸이 굼지럭댔다.
“손해배상 하라는 겁니까? 우리 방송을 망쳐놓고?”
코웃음을 앞세우며 둘희가 쏘아붙였다.
“그쪽 방송 잘 끝났는데 뭘 그래요? 김시후가 스타킹 뒤집어쓰고 남은 라이브 시간 채웠어요. 지원금도 자기가 갖겠다던데.”
을주가 점퍼를 펼쳐 둘희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 둘희는 곧장 팔을 휘저으며 점퍼를 뿌리쳤고, 그 바람에 둘희의 팔꿈치와 을주의 앞니가 콩 하고 부딪쳤다. 잠시, 침묵과 어색함의 기류가 애국가 4절과 함께 하우스 안을 채웠다. 을주가 떨어진 옷을 집어 오들오들 떠는 도깨비에게 다시금 걸쳐주었으나 이번에도 도깨비는 인간의 가증스러운 호의 따윈 필요 없다는 듯 몸을 틀며 옷을 내팽개쳤다.
“병 주고 약 줍니까?”
“입술이 파래.”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개펄에서 굴렀어요? 설마 이 차림으로 여기까지 걸어온 거예요? 이 날씨에?”
그만큼 내가 보고 싶었냐는 말을 꿀꺽 삼키며 을주가 둘희 아래 몸을 움츠렸다. 점퍼의 밑단을 오므려 을주가 지퍼를 채우려 하자 둘희가 탁, 하고 손등을 밀쳐냈다. 을주는 연달아 날아드는 구박에도 여전히 마음이 들떠 있는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쿨적 콧물을 삼켰다. 얼뜨기…… 회사 팀장이면 뭐해, 순 바보라니까. 날 밝을 때 차 타고 오면 되지 뭐하러 두 시간 넘게 기다려. 을주가 오리걸음으로 재배 장치 아래를 통과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찢겨나간 필름이 바람에 들썩이며 하우스 안으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부상의 상태로 봐서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을주가 손뼘으로 상처의 가로세로 길이를 쟀다. 아무래도 예쁜 여자는 좀 사악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찢어놓으면 하우스의 전체 필름을 통째로 갈아야 한단 것도 모르면서. 농사를 지어봤어야 알지, 내년엔 농진청 빚이 더 많아지겠네.
긴장하면 평소보다 더 수다스러워지는 을주는 역시나 속으로만 구시렁대며 평상 쪽으로 갔다. 입구의 전구 하나만 켜져 있어 하우스 안이 전체적으로 어둑했다. 하지만 을주는 둘희가 환한 빛을 꺼릴 것 같아 일부러 다른 조명을 켜지 않았다. 습식 온풍기 덕에 실내에는 조금씩 온기가 돌았고, 휴대전화에선 자동 재생으로 국악 버전의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쩌렁쩌렁한 태평소 연주와 함께 야무진 목청의 소리꾼이 남산의 소나무에 경탄을 보내고 있었다.
“왜 도망갔습니까? 왜 우릴 속였어요? 상생 머니 받으면 수술하고 싶다고요?”
공구 벨트를 허리에 차는 을주에게 둘희가 따져 물었다. 을주는 둘희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지만 울컥하는 서운함을 누르지 못하고 오복이를 보며 작게 종알거렸다.
“아무데나 상생이래. 속이고 싶어서 속였어?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을주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사람 키만한 비닐롤을 바닥에 눕히고는 등을 구부려 총총걸음을 치면서 롤에 감겨 있는 비닐을 풀었다. 그렇게 숨이 가쁘도록 움직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하다고 그랬죠? 그때 오복이랑 같이 바닷가 걸을 때, 내가 왜 잠을 못 자느냐고 물으니까 불안해서 못 자는 것 같다고 했잖아요.”
운동화를 벗고 비닐 위에 올라선 을주가 구불텅한 비닐을 손으로 탁탁 펼치며 말했다. 아무래도 손이 더 필요할 것 같았지만 둘희에게 부탁하기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닐에선 파지직 정전기가 일어났고 위를 펼치면 아래가, 아래를 누르면 위가 오그라들며 을주의 손발을 바쁘게 했다.
“그래서 내가 찾아봤거든요. 불면증 치료, 숙면하는 법, 마음이 불안한 이유…… 그러다 알고리즘으로 어떤 명상 채널이 떴는데,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선불교나 수행자들 책을 읽어주는 거였어요. 목소리가 무슨 기계음처럼 ‘했다― 했는가― 아난다여― 수보리여―’ 그렇게 말끝을 내리면서 낭독하는 거였는데……”
을주가 마루를 걸레질하듯 부러진 곡괭이 자루를 앞세우고 엉덩이를 쳐든 자세로 쭈욱 비닐을 펼쳐나갔다. 반대편 모서리까지 도착해 허리를 세우고는 흘깃 둘희가 있는 쪽을 봤다. 딸기 베드에 가려 몸통은 보이지 않았지만 둘희의 흙 묻은 구두와 바닥에 나뒹구는 청록색 점퍼가 보였다. 도복 바지는 어느새 오복이가 평상으로 물고 가 자기 배 아래 깔고 있었다. 휴대전화에서 들려오는 어린이 합창단 버전의 애국가가 듣기 좋은지 오복이는 고박고박 졸고 있었다. 을주가 공구 벨트 주머니에서 도톰한 커터 칼을 뽑아들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어떤 스승이랑 제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느 날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말했대요.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불안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스승이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불안하지 않게 해주겠다’, 그래서 제자가……”
을주는 한 템포 말을 멈추고 칼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눈으로 가늠했다.
“제자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한참 뒤에 말하길……”
비닐 끝을 잡고 막 칼질을 시작하려던 을주가 얼굴을 들고 앞을 봤다. 둘희가 가까이 서 있었다.
“전화 좀 쓰겠습니다.”
가볍게 두 주먹을 움켜쥔 둘희가 해쓱한 낯빛으로 말했다.
“이거 도와주면요. 그리고 점퍼 입으면.”
잠시 후 을주가 세운 칼날이 둘희가 붙잡은 비닐 끄트머리까지 단번에 미끄러졌다. 할일을 마쳤다는 듯 벙벙한 점퍼를 입은 둘희가 손에서 비닐을 놓자 을주가 눈을 크게 떴다.
“붙이는 것도 도와줘야죠.”
두 사람은 식탁 유리를 옮기듯 비닐을 마주 들고서 보폭을 맞춰 하우스의 벽면으로 향했다. 을주가 찢긴 부위에 비닐을 갖다대자 둘희가 따라 했고, 둘희가 비닐의 평형을 맞추자 을주가 비닐에 공업용 스테이플러를 박았다. 타카! 타카, 타카! 비닐의 귀퉁이를 차례로 고정한 을주가 손바닥으로 비닐 막의 가운데를 주욱 쓸며 둘희에게 다가갔다. 을주는 둘희의 코앞에 멈춰 서서 어색하게 입술을 오므린 채 남아 있는 절단면의 모서리에 철심을 박았다. 이번에야말로 자기 몫의 할일을 전부 끝냈다는 듯 둘희가 말없이 딸기 베드를 따라 걸어나갔다. 을주는 비닐 위에 접착식 단열지를 꼼꼼하게 붙이고는 손끝으로 구석구석 더듬으며 수술이 잘 이뤄졌는지 살폈다. 그때 둘희가 저만치에서 다가왔다.
“잠금장치.”
간결한 어투와 함께 둘희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을주는 비스듬히 등을 돌리고 서서 액정에 암호 패턴을 그렸다.
“그래서 제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휴대전화를 받아들며 둘희가 물었다. 말투는 의문문이었으나 표정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 보였다. 아무려나 을주는 둘희의 질문에 반색하는 얼굴로 이야기의 결말을 풀었다.
“어디까지 말했죠?”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불안하지 않게 해주겠다.”
“응, 그래서 제자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이렇게 답했대요.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절 사이의 여백을 한껏 과장하며 을주가 말했다. 둘희는 무덤덤한 얼굴로 눈꺼풀을 깜박이며 마주선 을주를 빤히 봤다.
“끝입니까?”
둘희가 물었고, 을주는 뭔가 빠뜨린 게 있나 싶어 머릿속을 뒤적이다 다소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용건을 마친 둘희가 그대로 멀어져가자 을주는 배수를 끝내고 탈수 코스로 넘어간 통돌이 세탁기처럼 갑작스럽게 덜커덩거리며 속에 담아뒀던 말을 토해냈다.
“왜, 우릴, 모른 척해요? 오복이랑 나! 사람이 무슨 삼한사온도 아니고 그렇게 변덕스러워도 되는 거예요?”
이 모든 사달의 장본인은 바로 당신이라는 듯 을주가 목청을 높였다. 둘희는 대꾸도 없이 딸기향이 나는 좁은 통로를 허짓허짓 걸어갔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둘희는 가구 모서리에 옷이 걸려 실밥이 줄줄 풀리고 있음을 알아챈 사람처럼 뚝 하고 걸음을 멈췄다. 둘희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을주에게 되돌아갔다. 손에 들린 을주의 휴대전화가 수신음으로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둘희는 마치 배지를 보여주는 경찰처럼 휴대전화를 을주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모부’라는 수신자 이름이 화면에 찍혀 있었다. 을주가 검지를 뻗어 ‘거절’ 버튼을 옆으로 휙 재낀 다음 청문회를 이어갔다.
“말해보라고요. 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 일?”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잖아요.”
“힘들게 한다고요? 내가?”
졸지에 범인으로 몰린 억울한 목격자처럼 둘희가 자기 가슴을 손으로 짚으며 쇳소리를 냈다.
“아무 죄가 없다? 죄? 왜 그런 말을 함부로 씁니까?”
추호도 자신은 그 손쉬운 판단에 연루되고 싶지 않다는 듯 둘희가 눈망울을 크게 뜨며 자기 가슴을 손끝으로 내리눌렀다. 마치 맨손으로 살갗을 뚫어 자기의 심장을 꺼내려는 듯, 스스로 인신공양의 제물이자 제사장이 된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줬다. 을주는 둘희의 그런 과격한 반응에 멈칫했다. 너무 거세게 타올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불길 같았다.
“이모님 때문이에요? 이모님이 그 회사 대표예요?”
을주가 말하자 일순 둘희의 핏기 없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굳은 채 숨조차 내쉬지 않았다. 을주는 놀랐지만 자기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함께 해변을 산책할 때 둘희는 삼층집에서 이모와 같이 산다고 했다. 유난히 미세먼지가 자욱하고 볕이 뜨거웠던 여름날, 을주는 그 이모란 사람을 멀리서 얼핏 본 적도 있었다. 그때 둘희가 당황하며 황급히 피하는 걸 보면서 을주는 둘 사이가 껄끄럽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다 며칠 뒤에 옥녀산에서 벌어진 실족사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자극적인 가십들과 경찰이 추정하는 사망 날짜 그리고 툭하면 저렇게 눈시울이 빨개져 눈물이 고이는 이 여자…… 을주의 추리는 거기까지였다. 을주는 섣불리 논리적 인과를 이어갈 수 없었다. 둘희의 세계에는 자신이 다다를 수 없는 뿌연 미스터리와 공백이 있었고 을주는 그 안개 너머를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장막이 걷히고 난 뒤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풍경이 두려웠다.
“스스로 아주 떳떳하다고 여기죠?”
눈꼬리를 약하게 떨며 둘희가 말했다.
“내가요?”
이번에는 을주가 자기 가슴을 쿡 찌르며 되물었다. 서툰 연주자가 현에 활을 잘못 그어 음 이탈이 나는 것처럼 목소리가 갈라졌다. 을주는 상대가 잘못 짚은 심리 분석에 어리둥절했고 둘희의 얼굴에 비친 경멸감에 당혹스러웠다.
“살면서 제일 후회한 일이 뭐냐고 물었을 때, 후회할 시간에 딸기 한 그루를 더 심겠다고.”
둘희는 인터뷰 영상을 찍던 날을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을주는 즉흥적으로 답을 떠올리느라 자기가 뭐라고 떠드는지 몰랐고, 그 순간을 머릿속으로 재구성하는 지금도 자신의 정확한 답변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예기치 않게 도복 바지가 찢어졌고, 그래서 정돈된 말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아마 나는 당신이 우리 하우스에 와준 게 기뻐서 약간의 조증 상태였을 거라고……
“아니에요. 나는 인생의 주제가 후회인 사람이에요.”
기나긴 부연을 압축해 이야기의 반전을 만들듯 을주가 말했다. 하지만 그 반전은 스토리텔링이 부족했는지 듣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둘희는 희미하게 비웃음을 띠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이런 논쟁 따윈 다 무용하다는 듯 비관주의자의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어떤 비밀은 절대 반짝이지 못합니다. 어떤 고통은 고통을 지속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에요. 사람이 다 당신처럼 투명한 줄 압니까? 세상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아.”
듣기에 따라 칭찬일 수도 있었으나 을주는 그 말에 갈고리 수십 개가 박히듯 가슴이 저릿했다. 당장이라도 속옷까지 발가벗어 복합적이고 신랄한 모순에 가격당한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내보이고 싶었다. 을주는 둘희의 눈에 비친 자신이 한낱 얄팍한 권선징악의 모습에 그친 것 같아 허탈하고 서글펐다. 단 한 명의 무심한 시선. 그래, 이런 느낌이구나.
“그래서 다 같이 허우적대자는 거예요? 욕받이 통에서?”
을주는 그간 자신이 키워온 혼자만의 허상을 게워내듯 말했다.
“깨닫게 하는 겁니다. 누구나 욕받이가 될 수 있다고,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고.”
“왜 그래야 해요? 나는 그런 게, 역겨워요.”
실제로 을주는 둘희의 염세주의가 안타까웠고 옅은 구역감이 일었다. 하지만 자기의 말이 상대에게 어떤 타격을 입힐지는 예상하지 못해서 순간적으로 변하는 둘희의 안색에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희는 내부의 기둥 하나가 무너진 듯 입술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고, 그러다 이내 다 붕괴될 순 없다는 듯 어금니를 꽉 물었다.
“개한테 사람 물라고 훈련시키는 건 괜찮고?”
“물지는 않았어! 겁만 준 거지!”
“오복이는 당신 때문에 살인 개가 될 거야.”
“이 나쁜…… 악당 년아!”
분노에 점령당한 을주가 언성을 높이며 손에 든 커터 칼을 내던졌다. 하지만 칼집의 둥근 모서리가 둘희의 가슴팍에 날아가 부딪치자 을주는 당황해 곧장 사과했다. 화가 나 무심코 손을 뻗었을 뿐 자신이 칼을 든 줄 몰랐다고, 실수라고, 나도 똑같이 때리라고, 거의 무릎을 꿇는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둘희는 그런 을주를 쏘아보며 뒷걸음쳤다. 그러고는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 줄기에 달린 딸기들을 우두둑 떼어내 을주에게 던졌다. 을주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딸기를 멍멍한 눈으로 보다가 나뒹구는 아이들을 주워 괘씸한 과녁을 향해 내던졌고, 그사이 둘희가 새 인질들을 뜯어 을주에게 빨간 포탄을 날렸다. 그때 버튼이 잘못 눌렸는지 둘희의 점퍼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전화에서 다시금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국가대표 소프라노의 기교 어린 열창이 크나큰 볼륨으로 하우스 안을 채웠다. 그와 동시에 둘희는 을주가 총애하는 무농약 유기농 재배 베드로 걸어가 아이들의 모가지를 댕강댕강 꺾으며 농부의 가슴에 피멍을 만들었다. 이 전쟁을 지속할수록 심각한 피해는 자신이 입는다는 걸 자각한 을주가 손바닥을 펼쳐 항복을 선언했다.
“그만, 그만! 우리 밖에 나가서 얘기해요!”
그러나 둘희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양손 가득 딸기를 움켜쥐고서 당장이라도 상대의 뺨에 딸기씨를 박아주겠다는 듯 둘희가 성큼성큼 황새걸음으로 을주에게 다가갔다. 그다음 을주의 얼굴을 부여잡고서 사납게 입을 맞췄다. 문자 그대로 입술 박치기라는 표현이 알맞은, 일방적이고 파괴적인 스킨십이었다. 을주의 양볼을 부여잡은 둘희의 손에서 으깨진 딸기즙이 흘러내렸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성악가의 고음이 옥타브를 높이며 귀청을 때렸다. 맑디맑은 인간의 두음에 코러스를 넣듯 오복이가 하울링을 보탰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호흡이 틀어막힌 을주는 자기의 영혼 한 잎을 하우스의 천장으로 띄워보내 지금의 키스신을 내려다보게 했다. 아아, 나는 첫 키스인데, 여자랑 하는 건 처음인데…… 훗날 내가 이 장면을 떠올릴 때면 소프라노의 독창 애국가와 오복이의 하울링이 배경음악으로 깔리겠지. 아마도 그 회상의 색조는 로맨틱하게 눈이 내리는 흰색은 아닐 거야. 눈길에 와당탕 넘어지는 코믹 액션의 제설제 빛깔……
파하.
서로의 입술에서 놓여난 두 여자가 동시에 날숨을 터뜨렸다. 불시에 고백 공격을 받은 을주가 수줍게 시선을 떨어뜨렸고, 둘희는 손에 묻은 딸기즙을 혀끝으로 스윽 핥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디 가요! 칼국수 먹고 가!”
을주가 소리쳤으나 둘희는 걸음을 더욱 재촉하며 꽁무니를 뺐다. 청록색 주유소 점퍼에 엉덩이까지 파묻힌 둘희의 그 뒤태가 을주는 마음에 꼭 들었다. 당하고는 못 배긴다는 듯 을주가 도망자를 추격해 손목을 낚아채고는 기습 입맞춤을 되갚아주었다.
월. 오복이가 짧고 엄중하게 꾸짖었으나 이번에는 서로의 혀가 맞닿은 키스라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듀엣 춤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듯 을주가 둘희의 허리와 뒤통수를 손으로 받치며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고, 그 순간 양손에 묵직한 스뎅 쟁반을 든 이모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쟁반에 두 손이 붙들려 엉덩이로 하우스의 방풍막을 들이밀며 등장한 이모부는 을주의 상태를 보고는 그 자세 그대로 후진해 무대에서 퇴장했다. 어두침침한 하우스에는 애국가의 피날레가 잦아들었고, 콧등을 침으로 코팅한 오복이가 이모부를 향해 달려갔다. 반투명한 비닐문 밖으로 쫓겨난 방해꾼이 애햄, 하는 기침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나는 매생이국이야. 이모가 국수 반죽이 다 떨어졌대. 해물파전도 가져왔으니까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조카에게 하는 말인지, 조카의 지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투로 이모부가 들고 온 음식 메뉴를 설명했고, 을주와 둘희는 시뻘게진 얼굴로 각자의 입가를 닦아냈다. 접촉의 욕구를 충분히 해소하지 못했다는 듯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내쉬며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선정적인 감촉에 이어 더욱 파격적인 상황에 맞닥뜨린 을주는 사리 판단이 마비된 머릿속을 깨우려 자기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반면에 둘희는 구태여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날 필요가 없었다. 설핏 건너다본 평상 너머에 한기연이 서 있었으니까. 한기연은 해묵은 빚을 청산하러 온 사람처럼 덤덤한 얼굴로 연인의 배신을 관조하고 있었다. 둘희는 도움을 청하듯 을주를 봤지만 을주는 비닐 막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지금 내 눈에 한기연이 보인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둘희는 한기연에게서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둘희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한기연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그 맹목은 광증도 강박도 정신적 해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화롭고 간결한 마음의 평정이었다. 둘희는 혼자만의 선문답을 꾸며냈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불안하지 않게 해주겠다. 아니요, 불안은 저의 소명입니다. 제 마음은 저 사람에게 있습니다. 둘희는 멀찍이 물러서서 자신의 삶을 관람하고 상과 벌을 저울질하는 한기연에게 다가갔다. 사랑스럽고 낯익은 실루엣은 그대로였지만 어쩐 일인지 양손은 짐승의 이빨에 물어뜯긴 듯 살점이 너풀거렸다. 둘희는 연인에게 팔을 뻗었고, 그 손을 마주잡는 순간 마치 한기연을 처음 만나러 가기 위해 옥외 계단의 녹슨 난간을 붙잡던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