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물 간조
오후가 되자 안개가 걷히며 남쪽 곶부터 투명한 겨울빛이 떠올랐다. 차고 맑은 바람이 구름을 흩뜨렸고 바닷물을 돌돌 굴리며 먼바다로 썰물을 끌어갔다. 유난히 석양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트럭에 앉아 창턱에 팔을 걸친 을주는 아이의 홍조처럼 동그랗게 일렁이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언덕배기의 적송과 마른 참억새가 바람에 사락거리며 기분좋은 마찰음을 냈다. 숨을 들이마시면 짙은 솔향이 화하게 스며들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너희는 고작 그런 짓을 벌이다니! 해안선을 따라 떼 지어 움직이는 갈매기들이 을주를 향해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을주는 이런 배경과 이런 색조 아래에서 오복이와 한가로이 모래사장을 걷고 싶었다.
“그쪽 창문 좀 닫아줄래요?”
보조석 아래 몸을 옴츠린 시후가 말했다. 시후는 을주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카메라의 기울기는 괜찮은지, 조명 각도는 알맞은지 촬영 세팅을 점검했다. 트럭 앞유리에는 빨판으로 고정한 카메라 거치대가 붙어 있었고 운전석 선바이저에는 조도가 높은 미니 조명이 붙어 있었다. 리허설 겸 카메라 테스트를 할 때 시후는 출연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며 버스 하차벨같이 생긴 동그란 스팟 조명을 대시보드와 차창에 붙였다 떼길 반복했다. 강선생의 말에 따르면 시후는 촬영 용품을 마련하기 위해 새벽까지 서울의 인쇄소와 전자상가를 오가며 고생했다고 했다. 을주는 귀 뒤에 가는 드라이버를 꽂고서 바지런히 오가는 시후를 보며 하마터면 고맙다는 말이 나올 뻔했다. 누가 골똘히 정성을 쏟는 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초점이 흐려지는 게 을주의 약점이었다. 이 자식은 이걸 정말 노동이라고 여기나? 을주는 묘하게 짠한 기운을 풍기는 시후의 거북목을 보다가 괜스레 목을 흠흠 가다듬었다. 시후가 손을 들어 짐칸에 있는 강선생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런 다음 사무실에 있는 둘희와 통화하며 흡사 베테랑 촬영감독처럼 말했다.
“팀장님, 그림 괜찮죠?”
오늘 방송에서 시후와 강선생은 트럭 화물칸에 머물며 현장을 지켜보기로 했다. 사무실에 있는 둘희는 인터뷰 영상의 송출과 채팅창 관리를 맡았다. 여러모로 잔손이 많이 가고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힘든 라이브였다. 다행히 기온은 영하 밑으로 크게 떨어지진 않았지만 일몰 후에 바닷바람은 여전히 변덕스럽고 매서웠다. 강선생과 시후는 두툼한 점퍼를 입고서 물방개 수조와 로또 게임판 곁에 움츠리고 있어야 했다. 을주 역시 트럭 백미러로 불 켜진 편의점 간판을 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라이브 시작 오 분 전!”
짐칸에 있는 강선생이 뒤쪽 창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시후는 마지막으로 차문을 닫기 전 오복이를 힐끔 봤다. 시후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번지자 을주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운전석의 창문 버튼을 검지로 세게 잡아당겼다.
약속 시각에 맞춰 언덕으로 온 을주는 시후가 건넨 어깨띠를 보고 화가 났다. 분노가 총알처럼 관자놀이를 꿰뚫는 기분이었다. 을주는 자신이 방송에서 머리띠를 두른다는 건 알았지만 오복이까지 욕받이 띠를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촌스러운 유광 남색 띠에는 소름 끼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미친 거냐고, 가나다만 쓰면 다 말인 줄 아느냐고 을주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사전 협의도 없이 노출 신을 찍어야 한다며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는 세트장의 여배우가 된 심정이었다. 방송이고 뭐고 이 개탄스러운 현실을 모조리 통통배에 태워 다른 차원의 우주로 내쫓고 싶었다. 을주는 모멸감으로 등에 난 솜털이 오스스 곤두섰고 아직 방송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옅은 구토감이 올라왔다.
라이브 오십 분 전, 을주는 시후와 강선생 그리고 사무실에 있는 둘희에게 일제히 공지했다. 정식으로 오복이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오늘은 물론이고 내후년 이맘때까지 사납고 험한 악운에 시달리게 될 거라고. 가뭄에 말라붙은 논두렁처럼 을주 안의 인의예지가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연장자인 강선생이 허리를 굽히며 순순히 자기의 요구를 이행하자 을주는 속으로 좀 움찔했다. 사무실에 있던 둘희도 밖으로 나와 자기들의 생각이 짧았다며 상황을 해명했다. 그러나 정작 을주의 야수성을 열어젖힌 시후는 양쪽 입술 끝을 늘어뜨린 채 사과하지 않고 버텼다. 으레 해온 일에 법석을 떤다는 듯 시후는 짝다리로 서서 눈머리만 비볐다. 을주는 자신의 우발적 폭행을 막기 위해 입술에 침을 바른 다음 냉랭하게 말했다.
“한 사람은 입이 없나봐?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그거? 충무로 하나컴인쇄.”
시후가 천연스럽게 대꾸하자 둘희와 강선생이 맥빠진 얼굴로 동료를 봤다. 억울하다는 듯 시후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럼, 사람 무는 개를 그냥 둬요?”
방송 사십 분 전, 을주가 팔을 감아 돌리며 트럭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병원에 들렀다가 파출소로 향해야 할 듯싶었다.
“사람이 개를 때리면? 그것도 안락사시켜야겠네?”
을주가 쏘아붙이자 시후도 가슴께를 펴며 맞섰다.
“시켜야지. 난 사형제도 찬성이야. 중국은 미성년자 성폭행범은 선고 즉시 사형이야.”
“뭔 소리야?”
“범죄는 나쁘지!”
욱하고 토기가 올라오듯 시후가 소리쳤다. 을주는 시후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뻗대기만 하는 적반하장의 태도가 아니꼬워 을주가 팔을 걷어붙이며 눈동자를 부라리자 시후도 면도한 지 오래된 거뭇한 턱을 들이밀었다. 원경에서 두 사람을 찍으면 마치 작별을 아쉬워하는 한 쌍의 남녀처럼 보였을 터였다. 을주가 자신의 선수 경력을 상기시키듯 발목을 돌리며 빈정거렸다.
“어떻게, 상하이까지 헤엄쳐 가볼래?”
건들대는 태도로는 시후도 뒤지지 않았다.
“뻗어, 뻗어, 오랜만에 여자 다리 좀 만져보자.”
“하…… 입냄새.”
“으, 코에 블랙헤드……”
“이게 진짜, 너 우리 오복이 송곳니 무섭다?”
“차하, 들었어요? 개 위에 사람 있네, 개 위에 사람 있어!”
시후가 머리에 쓴 비니를 아래로 잡아당기며 강선생을 봤다. 어찌나 눈을 크게 뜨는지 강선생은 시후의 외꺼풀 눈이 그렇게 커다래질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시후는 개만도 못한 자신의 인권을 한탄했으나 격한 감정으로 말이 헛나왔고 사람들도 그 오류를 인지하지 못했다. 강선생은 시후의 등을 두들기며 슬며시 을주와의 거리를 떼어놓았다. 그러나 을주와 시후는 더 강한 자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다. 둘희는 편두통이 심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봤다. 그때 빵 하고 경적이 울리듯 왕 하고 개가 짖었다. 을주가 트럭에 있는 오복이를 돌아봤다.
싸우지 마. 소리치지 마. 을주야, 그만해!
오복이가 목을 길게 빼며 우렁우렁 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을주가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봐주지 말래.”
“사기치네, 싸우지 말라잖아.”
을주가 흠칫하며 시후의 전신을 훑었다.
“개 키우냐?”
“키웠다, 구 년. 내 동생이었다.”
검지로 자기 뺨을 짚으며 시후가 다시금 턱을 쭉 내밀었다. 때가 낀 손톱 옆으로 말린 꽃잎 하나가 스며든 듯한 불그죽죽한 흉터가 보였다. 시후는 그 상처가 개에게 물린 자국이라 했다. 중학생 때 같이 살던 진돌이란 개에게 물렸는데, 어른들은 사람 문 개를 가만 놔두면 안 된다고 했지만 자기는 끝까지 개를 보호했다고. 내가 물어서 그래요, 내가 먼저 그랬어요, 그렇게 진돌이를 두둔하며 지켜줬다고 했다.
그래서, 너 지금 우리 오복이한테 복수하려는 거야?
그렇게 물으려던 을주는 순간 눈빛이 멍해진 시후를 보며 말을 삼켰다. 마치 당시의 당혹감과 통증이 후유증처럼 올라오는 듯 시후가 목울대를 꿀렁이며 숨을 크게 토했다. 뭐라 뭐라 웅얼거렸는데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네가…… 왜 물었는데?”
을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장난친 거야. 귀를 물었는데 놀랐나봐.”
돌연 목소리가 두 톤 정도 낮아진 시후가 말했다. 그러고는 자책과 그리움을 고아 만든 뜨거운 국물을 삼키듯 미간을 구기며 손에 든 어깨띠를 쥐어뜯었다. 또 한번 오복이가 왕 하고 짖었고, 을주는 편의점의 고모부를 경계하며 언덕 아래를 돌아봤다. 강선생이 부드럽게 시후의 팔에 팔짱을 끼고서 을주와 먼 쪽으로 끌어당겼다. 주춤거리며 걸음을 떼던 시후가 뒤늦게 자기의 의도를 설명했다. 이 정도 욕에 발끈하면 실전에서 바로 무너진다고, 초장부터 세게 나가야 개한테 함부로 못한다고. 그러고는 울컥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나도 이런 거 해주고 싶지. 근데 그게 맞냐고.”
머쓱함을 숨기려 시후가 또다시 짝짝이 눈을 크게 떴다. 땀으로 젖은 손바닥 위에는 개나리색 나비넥타이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 친구와는 어렵겠네. 을주는 검은 고무줄이 달린 나비 모양 타이를 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노래와 감동적인 영화로 빙고 게임을 하면 시후와 자신은 영원히 공통 목록을 찾지 못할 것이다. 도무지 취향이 안 맞았고 색감을 고르는 안목이 판이했다. 도베르만 성견한테 병아리 노랑이 어울려? 그러나 다른 이의 투박한 진심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초점이 흐려지는 을주는 설레는 표정으로 오복이의 목에 타이를 걸어주는 시후를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방송 이십오 분 전, 을주가 트럭에 올랐다. 한바탕 전초전을 치른 뒤 홀가분해진 그들은 각자 맡은 자리로 돌아갔다. 을주가 오복이의 목덜미를 보지 않으려 트럭 보닛에 시선을 고정했다. 해와 구름이 빠르게 엇갈리며 푸른 강판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을주는 회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줄 알면서도 부러진 식물의 줄기 옆에 막대를 꽂아 끈으로 묶어주듯 자기의 이마에 붉은 머리띠를 동여맸다.
on air 오늘의 욕받이가 개와 함께 트럭 좌석에 앉아 있다. 욕받이는 빨간 바탕에 흰색 글자가 적힌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다. ‘페미는 정신병이다’. 실시간 채팅창이 뜨겁다. 이전과는 다른 욕받이 명찰과 촬영 콘셉트에 시청자들이 흥분한다. 방송 화면 상단에는 욕받이의 나이와 직업, 가족관계, 신체적 특징이 간략하게 기재돼 있다. 물끄러미 채팅창을 보던 욕받이가 옆자리로 손을 뻗어 작은 화분을 들어올린다. 화분에는 딸기 묘목이 심겨 있고 긴 덩굴줄기에는 앙증맞은 딸기가 조랑조랑 열려 있다. 욕받이가 통통한 뺨에 보조개를 만들며 빙긋 웃는다. “딸기는 열매뿐 아니라 잎이랑 줄기도 전부 딸기예요.” 욕받이가 화분을 높이 들고 입을 벙긋거리며 열매를 따먹는다. 마치 운동회 때 실 끝에 달린 쿠키를 따먹는 모습 같다.
어우야 무슨 짓이야??
화면에서 용달 구린내
투엑스라지님아 어금니 보철 다 보여요
페미랑은 절데 엮이믄 안된다~ 아악 도망가~ 그뿐이다
손가락은 d졌니?
딸기가 더러워보이긴 처음이다
페미 정신병× 네가 정신병○
연예인 300억 빌딩 기사 보다가 이거 보니까 좀 살겠네
66세 공직 은퇴 아줌마‥ 나 또한‥ 조실부모한 슬픔‥ 아무‥ 상관없는 일에도 시댁에선 가정교육 운운!! ‥ 설움 삼키며 인성‥예의‥실력 더 갖추려 평생 노력‥
왘 봉생충 영화 느낌... 심지어 딸기가 덜 익었어
또다른 화면에선 인터뷰 영상이 나온다. 딸기 하우스의 반원형 지붕으로 환한 햇살이 내리쬔다. 욕받이가 허리 높이의 재배 장치를 따라 걸으며 잘 여문 딸기를 딴다. 짧은 인서트 화면이 끝나고, 널찍한 평상에 앉은 욕받이가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하의는 청바지를, 상의는 태권도복을 입고 있다.
인터뷰 여기가 내 일터예요. 보시다시피 초록이 많죠? 지금 한창 수확철인데, 올해는 현장체험을 늘렸어요. 주로 어린이나 가족 단위 손님이 와요. 내일은 복지재단에서 일곱 명이 예약돼 있어요. 돈은 크게 안 되는데, 사람들한테 자연을 느끼게 해주면 좋죠. 밖에 있는 염소랑 토끼 봤어요? 흑염소 봤어요? 내년에는 닭이랑 오리도 키울 거예요. 오복딸기를 기반으로 오복농장을 만드는 게 내 꿈이에요.
사무실에서 영상을 보는 둘희는 인터뷰를 촬영할 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그날 위아래로 괴이하게 옷을 입은 을주는 어딘가 광기 어린 신비주의자 같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야릇하게 상기돼 있었고, 흡사 기적의 현장을 안내하듯 뒤엉킨 넝쿨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둘희를 비롯한 직원들에게 평상에 누워보라고 권하더니 흙의 방선균 냄새를 맡아보라는 둥, 뿌리가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는 둥 사이비 신도 같은 말을 했다. 인터뷰 도중엔 허공으로 손을 뻗어 날벌레를 잡는가 하면 개를 불러 자기 무릎에 앉혔다. 전체적으로 다소 산만하긴 했으나 다행히 인터뷰의 민감한 질문들을 피하지는 않았다. 농장에 관해 말할 땐 자기 생활에 믿음을 가진 사람의 여유가 풍겼다. 위엄이랄까. 쉽게 망가뜨릴 수 없는 내면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영민한 눈으로 숨을 헐떡이는 개에게도 그런 우아함이 있었다. 둘희는 검고 부드럽고 강인해 보이는 개의 몸을 신중하게 눈에 담았다. 카메라 렌즈가 개의 호박색 눈동자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on air 태평한 얼굴의 욕받이가 투명한 그릇에 담긴 딸기를 하나씩 집어먹는다. 봉긋한 딸기 끝에 슈거파우더를 톡톡 뿌려 먹고, 튜브에 담긴 꿀을 딸기 위에 쭈욱 짜서 먹고, 싱그러운 빨간색 딸기 위에 새하얀 휘핑크림을 치이익 뿌려 먹는다. 채팅창에서 휘핑크림만 따로 먹어달라는 요구가 나온다. 욕받이가 입을 크게 벌려 치이익 휘핑크림을 입안에 뿌린다. 그런 다음 옆에 앉은 개를 본다. 기다렸다는 듯 개가 입을 크게 벌린다. 치이익 크림을 조금 뿌려주자 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쩝쩝거린다. 다음 순서는 딸기케이크. 욕받이가 동그랗고 묵직한 케이크를 들어올리며 불규칙한 치열이 보이도록 활짝 웃는다. 짙은 초콜릿 시트 사이사이에 윤기 흐르는 딸기가 빼곡하게 올려져 있다. 욕받이가 케이크 맨 위층에 얹은 딸기를 집어 개에게 휘익 던진다. 민첩한 동작으로 개가 단숨에 받아먹는다. 마이크를 통해 개의 씹는 소리가 들린다. 욕받이가 빵칼로 케이크를 자른 다음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와앙 베어먹는다. 약 이십 초 만에 한 조각을 해치운다. 또다시 반으로 자른 딸기 조각을 들고 포물선을 그리며 개에게 훌렁 던지자 개가 능숙하게 받아먹는다. 채팅창에선 사냥에 실패한 개와 원시인이 동굴로 돌아가 야생 딸기로 허기를 채우는 모습 같다고 말한다. 그걸 본 욕받이가 눈주름을 가득 만들며 호탕하게 웃는다. 욕받이는 채팅창에 올라오는 말에 실시간으로 반응한다. 누군가 발음 좋고 성량이 풍부한 희극배우 같다고 하자 금세 낯빛이 빨개진다. 저속한 욕설도 이어진다. 가족관계와 몸매에 관한 험담이 페미니즘과 뒤섞여 비속어로 쏟아진다. 욕받이는 몸을 숙인 채 좌석 아래를 주섬주섬 더듬더니 흰 우유와 딸기청을 들어올린다. 티스푼으로 딸기청을 떠서 우유가 담긴 컵에 넣고 빙빙 휘젓는다. 수제 딸기우유를 꿀꺽거리는 욕받이의 목 넘김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한편, 트럭 화물칸에서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린 채 투덜대던 시후가 자기의 명치께를 주먹으로 친다.
“팀장님 지금 졸아요?”
벌써 십 분째 바뀌지 않는 상생지원금 문구에 시후는 떡을 먹다 체한 듯 속이 갑갑하다. 시후의 과장된 몸짓에도 강선생은 팔짱을 낀 채 요지부동으로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삼각뿔 모양의 텐트 천이 앞뒤로 너풀거린다. 어두침침하고 바람이 세게 불지만, 방한 텐트 덕분에 춥지는 않다. 외려 시후는 열이 올라 점퍼의 지퍼를 주욱 내린다. 을주가 신이 난 얼굴로 케이크를 먹을 땐 이마를 긁적이며 구시렁댄다.
“저건 너무 예쁘지 않아요? 오브제가 너무 예쁘잖아.”
한때 시네필이었던 취미 경력을 살려 전문용어를 내뱉은 시후는 썩어빠진 부르주아의 상징인 양 사치스러운 초콜릿케이크를 노려본다. 저건 방송 콘셉트와 맞지 않는다고, 다른 출연자들과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쉽게 먹을 수 있고 비싸지 않은 서민 음식, 적당히 자극적이면서도 먹기 편한 메뉴를 준비하는 게 방송의 원칙이다. 그런데 둘희는 평소답지 않게 음식 메뉴를 바꾸더니 자기가 직접 소품을 챙겼다. 단골 빵집에 전화해 까다롭게 케이크를 주문했고, 자전거를 타고 직접 가서 케이크를 받아왔다. 텐트 역시 둘희가 가져온 것이었다. 전날 회의에서 둘희는 자신이 트럭 화물칸에 있겠다고 말했다. 시후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시후는 트럭 짐칸에 쪼그려앉아 고생할 마음이 없었다. 채팅창을 관리하는 건 시후의 일이었으므로 시후가 인터넷 속도가 안정적인 사무실에 있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강선생이 월권을 휘두르며 시후와 둘희의 역할을 뒤바꿨다. 추운 밤에 여자를 트럭에 놔둘 수 없다나? 시후는 강선생의 똥폼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둘희가 아무리 설득하고 고집을 피워도 강선생은 입을 꾹 다문 채 또 요지부동이었다. 어떨 땐 강선생이 팀장인 둘희보다 권력이 더 세 보였다. 대체 팀장님이 무슨 욕을 볼 줄 안다고! 느닷없이 야외 근무를 하게 된 시후는 대표님이 계신 삼층으로 뛰어가 신문고를 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둘희는 벌써 몇 마리째 펄펄 뛰는 활어를 다 놓치고 있었다.
딱 페미하게 생기셨는데? 또또또 개 키우는 한녀야? 저도 장애인입니다, 결정장애. 도태 지방러=한1남미새. 고아면 장모리스크는 없겠네? 오늘 먹방은 딸기 먹은 개고기다!
지원금을 끌어모을 쌍끌이 저인망은 팽개치고 둘희는 구멍난 뜰채로 피라미만 건져냈다. 둘희가 상단에 고정한 문구는 욕도 아니었다. 복스럽게 잘 먹는다는 게 덕담이지 욕인가? ‘옵니다, 뚱보의 시대는 와요’가 욕이냐고. 시후는 하나같이 프로페셔널이 떨어지는 동료들 틈에서 자기의 재능이 질식해가는 현실이 원통했다.
인터뷰 [자막] 손에 관해 말해본다면?
태어날 때부터 그랬대요. 엄마는 아기 때 수술해주려고 했는데 아빠가 반대했어요. 여자 몸에 칼 대면 안 된다고. 엄마가 성질이 나서 나랑 언니랑 데리고 집을 나가려고 하니까, 아빠가 나갈 거면 이혼 도장 찍고 가라고, 그래서 엄마가 화딱지가 나서 내가 왜 나가냐고 네가 나가라고, 아빠는 내 집에서 내가 왜 나가냐고 너도 나가지 말라고…… 아무튼 그 얘기만 나오면 짐을 쌌다 풀었다 하도 싸우니까 엄마가 지겨워서 혼자 몰래 병원 예약하고 수술 날짜를 잡았대요. 그걸 알고 아빠가 술이 떡이 돼서 죽은 고모 얘길 엉엉 울면서 했대요. 아빠가 열몇 살 때 고모가 태어났는데, 아기가 울음도 크게 못 울고 목에서 쉰 소리가 나고 가래가 끓고 해서 [자막] (긴 얘기/편집) ……그래서 할머니가 할아버지 몰래 동네 사람들한테 돈을 꿔서 읍내 큰 병원에서 아기 목 수술을 받았는데, 며칠 뒤에 패혈증으로 죽었대요. 할아버지가 왜 가시나 몸에 칼을 대느냐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멀쩡한 애를 죽였다고 집이 또 난장판이 됐대요. 그때 아빠가 열세 살인가 열네 살이었는데, 아빠는 그때부터 어디 가서 자기는 3남 2녀가 아니라 3남 3녀라고 했대요. 둘째 여동생이 아기 때 죽었지만 그애도 자기 형제라서 꼭 여자 형제가 셋이라고. [자막] (긴 얘기/편집) ……그래서 우선 애가 클 때까지 기다리자고, 애가 커서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고, 그렇게 결론이 났대요.
[자막] 장애와 불우한 환경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나?
on air 케이크에 이어 말랑한 딸기찹쌀떡을 우물거리던 욕받이가 카메라를 보며 소리친다. “어? 다음 질문 있는데? 내가 왜 수술 안 했는지 말했는데?” 욕받이가 카메라를 향해 작전 타임의 수신호를 보내듯 양손으로 T자를 만든다. “스톱 스톱, 영상 멈춰봐요.”
사무실의 둘희가 심판이 부는 휘슬을 들은 듯 인터뷰 영상을 멈춘다. 일시 멈춤 버튼을 누르고도 둘희는 방금 자신이 뭘 했는지 어리둥절하다. 머릿속에서 앞니가 커다란 당나귀가 푸르르푸르르 울며 날뛰듯 정신이 사납다. 이제껏 출연자가 영상 송출을 좌지우지한 적은 없었다. 회사 단톡방에 시후의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온다. ‘팀장님, 그냥 계속 틀어요!’ 둘희는 마우스에 손을 얹은 채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갈등한다. 화면 속 을주가 입가를 탁탁 털고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질문하고 답을 했으면 사람들한테 보여줘야지, 이렇게 끝내면 오해하잖아요.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내가 크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고 합의를 봤는데, 내가 어떻게 했게?”
디저트를 먹는데 왜 밑반찬 냄새가 나지??
아고.야. 불쌍.타!~~ 장애.아이.쯔쯔~
턱살공주님 지금 당쇼크 왔음
수술을 안 했으니까 니 족발이 그 모양이겠지?
망한 집구석 특: 아랍상 애비+무식+여혐+흙=미친세계관
@@@오늘 제 27살 생일인데 힘내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팩트> 비만은 자기탓임
고모는 의료사고였던거네ㅠ 슬프다ㅠ 가족사 더 풀어줘
지금 혐오 댓글 쓰는 인간들 옆에 국적 표시해야 함
딸기 홍보하려고 나온건데 사람들 순진하다
인생살면서,,,명심해라꼭,,,가족도때론,,,짐이고형벌,,,청춘친구들,,,호주네뭐네,,,다른선진국,,,탓하지마라,,,공/수래공/수거,,,감동문구퍼가기☞
페미나치의 2016 강남역 폭동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개~~말고 머슴아시끼 만나 인연~~ 맺기를.^^*
on air 게슴츠레한 눈으로 채팅창을 보던 욕받이가 무의식적으로 개에게 손을 뻗어 등을 쓰다듬는다. “안 궁금한가보네? 내가 말하고 싶으니까 그냥 할게. 나는 이게 내 손이라서 좋아. 어릴 때 친구랑 약속하면 새끼손가락을 걸잖아. 나는 진짜 비밀을 말할 땐 새끼손가락을 건 다음 애끼를 문질렀어. 그럼 비밀은 더 깊어지고 내 손은 반짝이는 거지.” 욕받이가 손을 들고 동요 <작은 별>의 율동을 하듯 손목을 뱅글뱅글 돌린다. “앵벌이? 내가 앵벌이면 지원금 좀 클릭해봐. 오백원씩 모아서 재벌 되게. 아냐, 난 피아노도 치고 바이올린도 했어. 우리 아빠가 허세가 좀 있어서 학원 많이 다녔어. 뼈? 어, 애끼손가락도 뼈가 있긴 한데, 얇고 가늘어.” 그때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긴 듯 욕받이의 시선이 흔들리더니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알았어요, 끝. 인터뷰 틀어요.”
트럭 앞에서 팔을 휘젓던 시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어이없고 성질이 난 얼굴로 을주를 쏘아보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거친 말을 내뱉는다. 20:34. 을주는 대시보드 위에 놓인 전자시계의 초록색 숫자를 확인한다. 딸기케이크만 몇 입 먹고 끝내려 했는데 생각보다 크림이 달아서 이성을 놨다. 을주는 손끝에 스며든 과육의 향기를 맡으며 오늘 자신이 세운 원칙을 어기지 않았는지 되짚는다. 사과하지 않을 것, 욕하지 않을 것, 굴욕도 거만함도 없이 나 자신의 품위를 지킬 것, 감정을 숨기지 않을 것, 책임질 수 있는 데까지 책임진 다음 트럭을 몰고 튈 것.
막상 마주하고 나니 그다지 복잡할 것도 움츠릴 것도 없었다. 을주는 전에 없이 머릿속이 총총했고 곁에 있는 오복이도 점잖았다. 편집을 당한 손가락 얘기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말했다. 하우스에서 그 질문에 답할 때 을주는 이상한 고양감을 느꼈다. 꼬깃꼬깃 접혀 있던 을주의 자존감이 펴지면서 여름날 배추흰나비처럼 팔랑거렸다.
이게 나야, 이게 내 모습이야. 당신들은 이런 나를 받아들여야 해, 있는 그대로. 아무 조건도 선택지도 없어. 공기처럼 들이마시고 계절처럼 받아들여.
을주는 누군가에게 한 번도 이런 요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에게도, 가까웠던 친구에게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소리 내어 말해본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니 그간 자신이 겉으로 내보인 당찬 태도는 그만큼 내면이 연약하다는 방증인 것 같았다.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늙어버린 아이처럼 자신의 넉살과 과한 예의범절은 지나친 사회화의 부작용일지 몰랐다. 누가 공격하기도 전에 가슴을 풀어헤치며 약점을 폭로했을 뿐, 을주는 인정받고 싶다는 자신의 어리숙한 감정은 꼭꼭 숨겨뒀다. 불시에 들이닥친 불행의 칼날을 피하기에 급급해서 그 불운이 난도질하는 자신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뻗어가는 길인지 헤아려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을주는 그 모든 일을 불운이라 여겼다. 자신의 손과 가족의 사고 그리고 스무 살이 넘어 깨달은 성적 지향성까지. 을주는 무작위로 섞은 카드에서 모두가 원하는 에이스나 다이아몬드가 아닌 우중충한 클로버를 뽑은 것처럼 선택할 수 없는 우연의 확률에서 자신은 늘 불운하다고 자조했다.
하지만 그날 하우스의 평상에 앉아 자신에 관해 말할 때 을주는 입안에서 나오는 말들이 빛 속에 부유하는 과즙의 향처럼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묵직한 닻처럼 마음의 중심이 그 순간에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일군 땅과 매일매일 반복했던 노동의 시간이 든든하게 을주의 뒤를 받쳐주었다. 을주는 의외의 떳떳함이 샘솟았고 어린애 생떼 같은 자기애가 쏟아졌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수용해달라고, 카메라를 보며 고집스럽게 청했다. 그저 받아들여달라고, 내가 그러할 테니 당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이자 세상의 모습이라고.
욕받이로 나서지 않았다면 깨우치지 못했을 이상향이었다. 을주는 삶의 전환점이 될 그 순간에 둘희가 함께 있다는 것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카메라 뒤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둘희가 자신에게 당도한 그 변화의 낌새를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수백이든 수천이든 익명의 사람들이 떠드는 말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할 테지만, 단 한 사람의 무심한 시선에는 치명상을 입으리란 걸 을주는 진작 예감했다.
on air “타임, 타임.” 기다란 티스푼으로 컵 바닥에 남은 딸기청을 긁어먹던 욕받이가 또다시 카메라를 향해 수신호를 보낸다. 인터뷰 영상에선 ‘극단적 여성주의의 폐해는?’이란 질문이 자막으로 나오고 있다. 욕받이가 꿀로 반짝거리는 티스푼을 움켜쥐고서 괄괄하게 말한다. “야, 페미 좀 그만 괴롭혀. 지금 내가 페미가 아니란 걸 왜 증명해야 되는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야? 지금부터 내가 좀 직설적으로 말할게. 내가 보기엔 페미니 586이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욕받이가 난시가 심한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채팅창에 올라온 말들을 읽는다. “……뭐 언제는 직설적이 아니었……” 욕받이가 등을 펴고 다시 카메라를 본다. “그래, 나는 피해자 시늉은 안 할 거야. 너희도 내 앞에서 가해자 못해. 너희가 나한테 아무리 욕해도 나한테는 안 들려요, 안 들려요……” 욕받이가 자기 얼굴에 꽃받침을 하며 잔망스럽게 손을 흔든다. “아니, 조실부모한 아주머님, 은퇴하셨으면 취미활동 즐기면서 편하게 사시지 왜 자꾸 여기서 시댁 식구 흉을 보세요…… 시누이가…… 시누이가 인격 모독을 했어요?” 모가지를 쭉 빼고 구두점이 많은 문장을 읽어가던 욕받이가 짧은 한숨을 토한다. 조갈이 나는 듯 휘핑크림 스프레이를 들고 입안에 치이익 뿌린다. 엎드려 있던 개가 자기도 달라는 듯 입맛을 다시자 욕받이가 “안 돼”라고 두 음절을 또박또박 발음하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개껌 하나를 꺼낸다. “시누이랑 안 보고 산 지 이십 년이면 길 가다 마주쳐도 못 알아볼 판인데 왜 자꾸 구박받은 걸 되새기세요. 가만 보니까 다들 상상 속 허깨비랑 싸우고들 계셔. 내 손가락이 몇 개인지, 내가 개를 키우는지 소를 키우는지는 상관없어. 문제는 누굴 미워하고 싶은 자기 마음이야. 그래, 미워할 수 있지. 근데 미우면 좀 구체적으로 미워하란 말이야. 다른 사람 말에 휘둘리지 말고 우르르 몰려가지 말고. 어떤 사람이 애를 셋 낳았다고 당신들한테 욕을 들을 이유가 있어요? 그 여자가 셋을 낳았는지 넷을 낳았는지 확인해봤냐고. 당신들은 진짜 내 모습을 미워하는 게 아니야. 그냥 ‘페미’라는 이름표에 화풀이하고 싶은 거야. 이 방송이 마음껏 욕하라고 판을 깔아주니까 옳다구나 돌팔매질을 하는데……” 욕받이가 숨을 참고 잠수하듯 눈을 깜박이며 채팅창의 글을 읽는다. 입술을 모으고 콧잔등을 찌푸리다가 얼마 못 참고 비속어의 홍수 속에서 고개를 쳐든다. “내가 한 가지만 말해줄게요. 이거 다 거짓말이야. 난 페미 아냐. 페미 맞는데, 페미로 신청한 거 아니라고. 장애랑 고아랑 청년 빚쟁이로 했어. 근데 페미가 됐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이 방송은 가짜라고. 가짜로 역할을 주고 연기하게 하는 거야. 당신들 돈 뜯어내려고. 여기 나왔던 업소녀가 정말 업소녀야? 정말 업소녀면 또 어쩔 건데. 세상일이 그렇게 딸기 따듯 간단한 줄 알아요? 딸기 따는 데도 기술이랑 훈련이 필요하다고. 눈에 보이는 걸 왜 다 믿어요? 뭐? 좌표 찍으라고? 그래, 여기가 어딘지 가르쳐줄까?” 그때 차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카메라 렌즈를 옆으로 돌린다. 좌석에 엎드린 개가 뼈다귀 모양의 껌을 울겅울겅 깨무는 모습이 화면에 나온다. 채팅창에선 욕받이를 비춰달라고 아우성친다. 몇 초의 정적. 평화롭게 소가죽 가공품에 잇자국을 내던 개가 불시에 말초신경이 자극받은 듯 귀를 움찔하며 고개를 든다. “소금!” 욕받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순간 개가 좌석 시트를 긁으며 바둑돌 수십 개가 촤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내더니 상체를 수그려 공격 자세를 취한다.
강선생은 사납게 들썩이는 개의 입술에 놀라 차 안에서 몸을 뺀다.
“죄송해요, 물러서세요.”
건조한 목소리로 경고한 을주가 다시금 오복이를 보며 “소금, 소금!”이라 외친다. 개가 송곳니를 닥닥 부딪치며 난폭한 음성으로 짖는다. 차 시트에 끈적한 침방울이 주르르 떨어진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강선생이 뒤에 서 있던 시후와 충돌한다. 두 사람이 오복이를 주시한 채 서로의 팔을 붙든다. 그때 건물 안에서 둘희가 불안한 구둣굽 소리를 내며 뛰쳐나온다.
“조심하세요! 개가 아주 사나워요!”
트럭 가까이에 멈춰 서 숨을 고르는 둘희에게 강선생이 외친다. 을주와 둘희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에 기대어 상대방의 표정을 살핀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을주이고, 둘희는 침착한 얼굴로 두 손을 펼친 채 외나무다리를 걷듯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간다. 광분한 개가 아르르르 떠는 소리를 낸다.
“물러서요. 안 그러면 우리 오복이 미쳐요.”
그 말에 둘희가 동작을 멈추고 을주의 어깨 너머로 개를 본다. 어여쁜 호박색 눈에 빨간 실핏줄이 못자국처럼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을주의 무릎을 뛰어넘어 둘희를 물어뜯을 기세다. 둘희는 다시금 을주와 지긋이 시선을 맞춘 재 거리를 좁히려 시도한다. 느릿하게 팔을 뻗어 마치 졸음에 겨운 아이의 눈을 감겨주듯 을주의 이마 부근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스르륵 을주의 머리띠가 땅으로 떨어진다. 멀리 억새밭에서 마른 잎들이 탬버린처럼 몸을 흔든다. 백사장을 훑고 온 큰바람이 돌풍과 함께 고운 모래를 언덕에 흩뿌린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눈을 찌푸린 둘희와 을주.
캉.
방심한 순간 차문이 닫히고, 트럭에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리자 둘희가 창유리에 손자국을 내며 매달린다. 트럭을 따라 몇 걸음 뛰어가던 둘희가 시후를 돌아본다. 팔 위에 노트북을 얹은 시후가 짧게 고개를 내젓는다. 실시간 방송용 카메라가 꺼졌다는 뜻이다. 트럭은 쇠사슬에 끌려가듯 가파른 비탈길을 거침없이 후진해 내려간다. 착잡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어루만지던 강선생이 놀란 목소리로 둘희를 막아선다.
“쫓아가시게요?”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온 둘희가 한쪽 페달에 발을 얹은 채 앞바퀴를 비틀거리며 내리막으로 돌진한다.
“팀장님, 제가 차를 갖고 오겠습니다. 제 차를 타고……”
강선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둘희가 자전거에 올라타 비탈길을 활강한다. 가속도가 붙은 자전거는 길가의 자갈들을 사방으로 튕기며 득달같이 언덕을 내려간다. 멀거니 그 모습을 보던 시후가 뜨악한 얼굴로 제자리에서 사자춤을 추듯 펄펄 뛴다.
“물방개! 우리 물방개!”
시후가 해변을 굽이도는 도로를 가리킨다. 트럭의 화물칸 위로 밤의 검정과는 톤이 약간 다른 거뭇거뭇한 점들이 퍼져간다. 짐칸에 두었던 수조가 쓰러지면서 자유를 되찾은 물방개들이 밤하늘을 비행하고 있다. 시후가 끔찍한 흉몽에서 깨어나려는 듯 자기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트럭과 자전거의 꽁무니를 망연한 눈으로 좇던 강선생이 흙바닥에 떨어진 붉은 띠를 집어든다. 옥녀산에는 D자 모양의 상현달이 떠오르고, 자정의 만조가 어깨사리까지 차오른 밤, 강선생은 자신의 손때 묻은 일기장을 펼쳐 그날 벌어진 일을 되감으며 이렇게 적는다. ‘새해의 첫 주일,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만 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