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10물

10물

 

을주는 서랍에서 태권도복을 꺼내며 오랜만에 백조를 떠올렸다. 자고로 도복은 털갈이를 막 끝낸 백조처럼 새하얘야 한다고 을주의 언니인 진주가 말했었다. 을주와 네 살 터울이었던 언니는 국기원 품새 대회에서 빼어난 완급 조절과 유소년답지 않은 태극의 음양 표현으로 표창장을 휩쓴 유망주였다. 중학생이 되자 언니는 도 대표 선수가 되어 소년 체전에 나갔고, 단풍 축제나 구청 설맞이 행사 때면 이마에 태극 문양의 띠를 두른 성인 남자들 틈에서 당찬 뒤돌려 차기와 돌개 차기로 관중의 박수와 탄성을 자아냈다.

눈부신 백색 자태. 을주는 언니가 단전에서 끌어올린 기합과 함께 송판을 쪼갤 때면 미운 오리 새끼 시절을 건너뛴 백조 한 마리를 보는 듯했다. 자매간의 흔한 질투나 열등감을 느끼는 대신 을주는 언니를 진심으로 우러르며 사랑했다. 을주는 언니의 1호 팬이었고 언니는 을주의 경호원이었다. 을주의 남다른 손 모양을 공책에 그려서 돌려보는 애들 앞에서 언니는 집게주먹 지르기로 음악실 소고를 박살 냈다. 그 다혈질의 태권 소녀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을주는 살갗이 벗겨져 피가 맺힌 손등을 툴툴 털고 마는 언니의 기백과 강단에 반했다. 언니가 사춘기가 되어 히스테리를 부리기 전까진 그랬다. 이마에 난 화농성 여드름만큼이나 성질이 더 울룩불룩해진 언니는 틈만 나면 손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쳐봤고, 을주의 등때기를 발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잡다한 심부름을 시켰다. 을주는 독재자의 힘에 굴복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나중에 오진주가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면 내가 인터뷰하리라. 우리 진주 언니는요, 성깔이 더러운 이중인격자고요. 자기 도복에 케첩이 튀었다고 동생 옆구리에 후려 차기를 날리는 양아치예요.

을주는 열다섯 여름에 멈춰 있는 언니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며 미지근한 물에 과탄산소다를 풀어 도복을 담갔다. 한동안 때를 불리고 목깃을 따라 칫솔질했는데도 누릿한 얼룩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딸기 하우스에 가서 도복을 입어본 을주는 또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을주의 두 허벅지가 바지 안에서 터질 듯이 부풀었다. 허리에 끈을 둘러 바짝 조이자 뱃살이 불룩하게 아래로 밀려나왔다. 몇 년 사이 을주는 딸기에 과당이 쌓이듯 몸 구석구석에 살집이 늘었다. 전신 거울 속 모습은 흡사 두둑한 전대를 허리에 찬 배추 장사처럼 보였다. 을주는 딸기 상자와 토분을 한쪽으로 밀어두고서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주춤서기 자세를 취했다. 뒷굽이 자세로 오른 다리에 무게중심을 실었다가 주특기인 반달차기를 날렸다. 엉덩근이 얼얼하게 당겨오며 무릎부터 발등까지 저릿한 전기가 통했다.

“봤어? 멋있어?”

을주는 평상 귀퉁이에 엎드린 오복이를 돌아봤다. 그다음 다시 거울을 보며 가벼운 스텝으로 리듬을 탔다. 눈앞에 선 상대의 관자놀이를 겨누듯 을주는 발등을 안쪽으로 감으며 오른다리를 사선으로 쭉 뻗었다.

빡.

고요한 하우스 안에 둔탁한 음향이 울렸다. 을주는 몸이 굳어 눈꺼풀만 깜박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랑이를 봤다. 흰 도복 사이로 연초록색 팬티가 보였다. 집에 가서 다른 도복을 가져올까. 을주는 거울 위에 걸린 전자시계를 봤다. 09:17. 사람들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 사십여 분이 남아 있었다. 집에 갔다 오면 차분히 앉아 인터뷰의 답변을 연습할 겨를이 없었다.

강준길은 을주의 이메일로 총 스무 개의 질문을 보내왔다. 필수 질문 여섯 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빼거나 추가해도 된다고 했다. 촬영 장소는 회사 사무실이었고 복장에 대한 당부는 따로 없었다. 그런데 메일을 받은 그날 오후 을주는 판타지아 펜션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김시후와 마주쳤다. 펜션 건물을 리모델링하는지 좁은 골목에 건축자재를 실은 대형 트럭이 뚜, 뚜, 뚜, 경고음을 내며 후진하고 있었다. 을주는 담벼락에 붙어서서 트럭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뒤쪽에 멈춰 선 행인을 힐끔 봤다.

 

차 세우지 마시오. 다솜 어린이집.

 

김시후가 어린이 외양을 한 형광 표지판을 품에 안고 있었다. 을주는 김시후의 엄마가 옆 동네 어린이집의 원장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을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김시후가 대뜸 말을 걸었다.

“운이 엄청 좋은 거예요. 지난번 방송 봤어요?”

김시후는 이전 <욕+받이> 방송에서 물방개 로또가 꽝이 나와 상생 지원금이 다음 출연자로 이월됐다고 했다. 직원만 아니면 자기도 욕받이로 나가고 싶은 지경이라고. 을주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서 전진과 후진을 오락가락하는 트럭을 보며 갸웃거렸다. 그러자 김시후가 다시금 대화의 물꼬를 텄다.

“나도 아는데, 학교에 그 눈썹 사진.”

을주는 등줄기를 훑고 가는 불쾌감에 김시후를 돌아봤다. 김시후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부상 투혼 오을주, 여기에 피 흘리면서, 에?”

김시후가 자기 눈썹을 검지로 가리키며 헤실거렸다. 을주는 공회전하는 트럭의 뒷바퀴를 흘겨보며 구시렁댔다.

“하, 참, 답답하시네, 핸들을 끝까지 돌렸다가 살살 풀면서 후진해야지.”

괜스레 허공에 핸들을 감아 돌리는 시늉을 하며 을주는 트럭 운전사에게 훈수를 뒀다. 하지만 이미 을주의 머릿속엔 수치스러운 사진 한 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왼쪽 눈썹이 빨갛게 피로 물든 을주의 열아홉 살 사진. 당시 을주는 소년 체전 준결승전에서 상대의 돌려차기에 맞아 눈가가 찢어졌다. 응급처치 후 동메달 결정전에 나갔으나 온 세상이 정육점 쇼케이스 조명처럼 보이는 통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런데도 학교에선 장애와 불우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오을주 학생의 악바리 정신을 기념한다며 교사용 화장실 앞에 을주의 사진을 확대해 내걸었다. 사진 속 을주는 바세린을 잔뜩 발라 번들거리는 얼굴로 울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코밑에 흐르는 콧물도 보였다. 졸업식 전날 밤, 을주는 액자 유리를 깨부수고 자기의 사진을 불사르고 싶었으나 교무부장이 이모부의 절친이자 이모네 식당 단골이란 걸 떠올리며 참았다. 그러니까 김시후는 그때 을주가 미처 처분하지 못한 망신살의 기억을 멍석처럼 바닥에 깔며 벌써부터 욕받이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교통 체증을 일으키던 트럭이 마침내 펜션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대기 줄의 맨 끝에 있던 꼬마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김시후는 을주를 뒤따르며 골목을 벗어날 때까지 말을 붙였다. 학교 선배이고 동네 주민이니까 을주씨가 지원금을 많이 받아갔으면 좋겠다고. 을주씨라는 호칭에 가소로워하며 을주는 걸음을 재촉했다. 주차 금지 표지판을 옆구리에 낀 김시후도 보폭을 빨리하며 계속 나불댔다. 자기가 을주씨의 욕받이 명칭을 정하긴 했지만 오해는 말라고, 대표님이 자기를 총애해서 어쩔 수 없다고, 요즘 물방개 정신교육도 시키고 있으니 을주씨 방송에선……

“대표가 누군데요?”

을주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김시후는 온몸이 형광 초록빛인 어린이 주차 요원을 땅에 내려놓았다.

“내가 보낸 메일 봤어요? 링크 들어가서 노래 들어봤어요?”

을주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김시후가 보낸 메일은 읽어보지도 않았고 그의 메일 계정을 아예 스팸으로 등록해버렸다. 김시후는 메일로 보낸 그 노래가 <욕+받이> 방송의 주제곡 같은 거라며 계속 떠벌렸다. 을주는 건축자재를 바닥에 내려놓는 골목 안쪽의 소음을 들으며 김시후의 수다를 들었다.

“사실은 우리 회사가 사회적 기업이에요. 스프레이로 벽화 그리고 도망치는 혁명 집단 같은 건데, 그거 있잖아요, 빌딩에 쥐 그림 그리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표어 적고, 알아요? 우리가 스타킹을 뒤집어쓰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정체가 탄로나면 곤란하니까.”

김시후는 회사의 숨겨진 대의를 설명하며 열을 올렸다. 참 길게도 중언부언한 그 말을 압축하면 자기네 회사는 돈이면 다 된다는 이 썩어빠진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일종의 혐오 노동을 하는 것이라 했다. 전염성이 강한 혐오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욕받이 백신을 맞아 면역력을 키우자는 건데, 진짜 목적은 그렇게 남의 아픈 데를 찌르며 비웃지 말자는 거라고 했다. 을주는 코웃음이 비어져나오는 걸 참느라 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보낸 노래도 <돌팔매>잖아요. 1989년도에 오은주가 부른 건데, 어, 잠깐, 오은주…… 오을주?”

김시후는 또 한 건 했다는 표정으로 콧구멍을 넓히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당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연상 화법으로 얘기를 이어갔다. 자기가 물방개한테 개구리를 먹이로 주는 것도 개구리가 돌에 맞아 죽는 속담의 주인공이기 때문이고, 지금 우리는 인터넷이란 우물에 갇힌 개구리 꼴인데, 이 속담에도 개구리가 나오고…… 을주는 정신 사납게 다리를 떨어대며 말하는 김시후의 어깨 너머로 어슴푸레한 백사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횡설수설의 중심 문장을 찾으시오. 답은 간단했다. 오은주의 <돌팔매>를 들어보라. 그 노래의 가사가 우리 회사의 사훈이다. 타인에게 무심코 돌을 던지는 집단 폭력에 맞서 우리 회사는 반어법과 충격요법으로 <욕+받이> 방송을 만든다. 그런 말을 하면서 김시후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을주는 다시금 입안에 침을 모아 목안으로 넘기며 비웃음을 억눌렀다. 그사이 트럭은 부자재를 내려놓고서 골목을 빠져나갔다.

을주는 김시후가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모른다고 짐작했다. 하긴 을주도 해변 앞에서 편의점을 하는 고모부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지난여름에 해안가로 시체가 떠밀려온 일과 경찰이 옥녀산 아래 폴리스 라인을 치고서 접근을 막았던 일. 김시후는 그 사건의 내막과 몇몇 황색 언론이 짜깁기해 보도한 음모론에 무지했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을주는 김시후의 비죽 튀어나온 코털을 보며 그의 속마음을 추측해봤다. 아니, 김시후에게 감춰둔 속내 따윈 없었다. 그는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며 몇 수 앞을 내다볼 만큼 두뇌를 풀가동하지 않았다. 김시후는 밤잠을 설쳐가며 모범답안을 달달 외우는 노력파가 아니었다. 그는 문제를 보는 순간 감으로 정답을 찍어낼 만큼 직감과 순발력이 번뜩이는 타고난 임기응변형 인간이었다. 가만 들어보니 그 직감이 을주에게도 꽤 쓸모가 있었다. 을주는 하우스 안에서 인터뷰 영상을 찍자는 김시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시후의 말처럼 오복 딸기를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을주는 팀장이라는 그 여자에게 자신의 하우스를 보여주고 싶었다. 트럭 안에서 실시간 방송을 하자는 김시후의 아이디어에도 솔깃했다. 트럭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면 을주가 중간에 내빼기에 좋았다. 을주는 김시후와 조개구잇집 앞에서 기분좋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 거래처 식자재 마트에 딸기 납품을 끝낸 뒤 <돌팔매> 노래를 들었다.

 

누구야

누가 또 생각 없이 돌을 던지느냐

무심코 당신은 던졌다지만 내 가슴은 멍이 들었네

 

귀에 익은 뽕짝 멜로디가 을주의 방안에 흘렀다. 을주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인터뷰 때 어떤 착장이 좋을지 옷장을 살폈다. 그나마 색바램이 덜하고 목둘레가 덜 늘어난 스웨터들을 살피다 자기도 모르게 트레이닝 백으로 손을 뻗었다. 을주는 옅은 군내를 풍기는 가방 안에서 도복을 꺼냈다. 어찌 보면 <욕+받이> 방송도 시합이자 겨루기였다. 상대가 여럿이고, 아무리 발차기를 날려도 유효 타점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 다를 뿐, 이 일에도 맷집과 승부욕이 필요했다. 을주는 도복을 세탁물에 담가놓은 뒤 소파에 드러누워 강준길이 보내온 질문지를 다시 봤다.

 

손을 수술하지 않은 이유는? 대형견을 키우는 이유는? 태권도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답변을 생각할수록 을주는 아버지인 오갑천씨가 떠올랐다. 자기 삶에 아버지의 영향이 이토록 크다는 것에 놀랐고, 자신이 아빠를 ‘아버지’로 회상한다는 것에 당황했다. 을주에게 엄마 정일숙씨는 언제까지나 ‘엄마’였다. 그런데 아빠는 왜 뜬금없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됐을까. 이러다 또 몇 년이 흐른 뒤 을주는 불쑥 이렇게 말할는지 몰랐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적에 징 박힌 축구화를 사주셨지. 나한테는 축구였어.

가족에 관한 기억이라면 떨어진 밥알 한 톨이라도 살뜰히 주워먹을 만큼 을주에겐 오 인 직계가족으로 살았던 그 시절이 애틋했다. 되감고 복기할 추억을 찾다가 어린 손녀들을 앉혀놓고 며느리를 험담하던 할머니의 심술궂은 회상까지 박박 끌어모아 아련한 옛이야기로 각색할 지경이었으니까. 너희 엄마가 손이 커서 집에 재떨이 하나도 안 남을 거라고 내가 그리 말렸건만 어느새 둘이 살림을 차려 애까지 뱄더라는 얘기. 을주는 그 연애담에 살을 붙여 당시 총각네 상사와 처녀네 단골 세탁소 주인이 주선했다던 을지로 사거리의 맞선 자리와 거기에 나온 부모님의 앳된 얼굴을 그려보곤 했다. 손버릇이나 말버릇처럼 생각에도 익숙한 습관의 길이 있다면 을주에겐 가족과 관련된 기억이 그랬다. 언제 먹어도 만족스러운 일요일의 짜장라면처럼 언제 떠올려도 심장이 조여들며 자살 충동에 휩싸였다. 을주의 가슴은 파쇄기를 통과한 종잇장처럼 수십 갈래로 찢어졌다. 이가 시리고 작열통을 앓는 것처럼 피부가 화끈거렸다. 언제라도 을주는 그 오열과 설움의 바다에 빠져 굳이 허우적대지 않은 채 기꺼이 고요한 시신 한 구로 수장될 수 있었다. 아차차, 이젠 안 되나? 내가 죽으면 오복이 산책은 누가 시켜. 이모부는 무릎이 결려서 빨리 못 뛰잖아. 이모도 나 죽으면 담배나 벅벅 피울 테고, 하우스 딸기들은 다 어쩔 건데.

을주는 부연 물안개를 자아내는 가족의 기억에서 물러섰다. 욕받이로 나설 때 필요한 입장곡은 감미로운 단조 멜로디가 아닌 손끝으로 거칠게 턴테이블을 비벼대는 디제잉의 스크래치 사운드였다. 금붙이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서 ‘왓썸, 룩껍, 락댘’ 같은 된소리 발음을 쏟아내는 갱스터랩. 이 욕받이 플로우에서 ‘갑천이 딸 을주’가 되는 건 곤란했다. 굳이 지금 필요한 아버지의 유산을 찾는다면 자기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들이밀던 차력사 같은 패기랄까.

아버지는 총각 시절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다. 라이터 헤비급치곤 날랜 스텝과 유연한 허리를 지닌 아버지는 국산 타이슨이란 별명을 붙여준 묵직한 원 투 펀치가 장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콧대가 약한 게 흠이었는데, 아버지 말로는 별로 아프지 않게 스쳤는데도 돌아서면 피가 줄줄 흘렀다고 했다. 쿨럭쿨럭 육혈이 낭자한 통에 당사자인 아버지도 놀라고 콧대를 박살 낸 상대도 흠칫하고 심판은 지혈을 명령하며 시합을 멈췄다. 아버지는 후두부 깊숙이 솜뭉치를 밀어넣고서 마우스피스를 우물거리며 호기롭게 링 가운데로 나갔으나 또 같은 부위를 얻어맞아 휘청였다. 아버지의 물코는 해빙을 맞은 개울처럼 기세 좋게 핏물을 내뿜었다. 공공연한 약점이 있다는 건 맨발로 깨진 형광등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겁먹고 주춤대지 말고 까짓거 죽기밖에 더 하냐는 식으로 악 소리를 내지르며 돌파해야 한다고. 처음엔 피가 나겠지만 나중에는 상처에 굳은살이 박여 결국 자기만의 질긴 맷집이 될 거라고 했다. 선수 시절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피하라는 코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외려 얼굴을 빳빳이 든 채 칠 때면 쳐보라는 식으로 피칠갑한 콧등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객기는 첫딸인 진주에게 이어졌다. 아버지는 언니가 태권도 시합을 앞둔 날이면 언니와 이마를 맞대고 엄숙하게 말했다.

“봐라, 진주야. 사람 죽이는 건 총이 젤 빠르고 쉽다. 시합은 때려눕히는 게 목적이 아니야. 핵주먹은 반칙이고 김빠지는 거야. 너는 내일 당당하고 팽팽하게 겨뤄라. 질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스릴을 느껴봐. 일대일로 깨끗하게. 축구나 농구처럼 다른 사람이 못 도와준다. 시방 너는 한 마리 짐승이고 야생이고 귀신이고…… 아빤 여자들도 군대에 가야 된다고 본다.”

딸애의 젖니가 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기의 팔뚝과 다리통을 주무르며 뼈의 굵기와 강도를 측정해봤다는 얘기는 엄마가 해줬다. 아버지는 아기가 잘 빨고 있는 젖병의 꼭지를 일부러 뽑으며 딸에게 악착이 근성이 있는지 타진했다. 두 딸의 기질과 약간 들린 콧방울이 자기를 빼다박았다는 걸 확인한 아버지는 딸들에게 글러브 대신 앙증맞은 어린이 도복을 입혀주었다. 어린 진주와 을주는 아버지의 등쌀에 밀려 태권도장과 수영장을 거쳐 동네 검도장을 떠돌았다. 지금 와 을주가 돌이켜보니 당시 아버지의 교육 방침은 나름대로 낭만적인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은 모름지기 자기의 신체를 단련하고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하며 죽고 나면 관을 들어줄 여섯 명의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 인생관이 아버지 혼자만의 것은 아닌 듯했다. 을주는 <욕+받이> 방송에 나온 ‘586’ 출연자를 본 다음 아버지의 삶을 그 또래들의 일대기와 나란히 세워봤다. 아버지는 60년대 베이비붐 시기에 태어나 부모에게 전쟁 후일담을 듣고 자라긴 했으나 오공화국 시절에 대학에 들어간 80년대 학번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쪼들리는 형편 탓에 가까스로 최종 학력 중졸로 학업을 마치고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 공돌이 전선에 뛰어든 시골 출신의 장남이었다. 그렇긴 해도 아버지는 최루탄을 던지며 전경 버스에 기어오르는 대학생들 못지않게 하모니카를 불며 뜨거운 목젖으로 민중가요를 토해낼 줄 알았다. 풍물시장에서 산 중고 통기타를 독학해 자작곡을 만들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자식들만은 남부럽지 않은 예체능 교육으로 밥벌이에 치여 사는 일개미보다 삶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베짱이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교육열은 당시 살 만해진 도시의 서민층이 티브이 드라마와 광고 속 이미지에서 착안한 전형적인 경제 부흥기의 거품이었달까.

허세라면 그리 해롭지 않은 허세였고 그 사교육을 받았던 기억은 을주의 회상에 적당한 기름기가 되어주었다. 자식 교육에 바짓바람을 날리던 오갑천씨의 허세와 기름기는 본인이 동성 사내들과 우정을 맺는 방식에도 작용했다. 돌아가신 부친의 삶에서 지울 건 지우고 가릴 건 가리는 게 자식의 도리겠으나 반골 기질이 다분한 을주는 아버지를 떠올리면 미씨촌과 과부집이란 단어가 엮여 나왔다. 을주는 어릴 때 엄마를 따라서 갔던 동네 계모임에서 민기네 아줌마가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했다.

“진주네 아빠 또 과붓집 갔어?”

그때 엄마는 뭐라고 답했을까. 왜 을주는 그때 엄마의 표정이나 대답은 잊어버리고 민기네 아줌마가 말한 아버지의 과붓집 입실과 미씨촌 나들이만 기억하는 걸까. 어째서 을주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인생사에서 맑고 깊은 우물물은 쏟아버리고 물위에 띄운 텁텁한 나뭇잎만 씹어대는 걸까.

하여간 오갑천씨와 정일숙씨는 지겹게도 으르렁댔다. 어쩌면 그 박 터지는 부부싸움 와중에 오간 아버지의 욕설이나 엄마의 비명이 어린 을주의 전두엽에 각인되었을지도 몰랐다. 일 년 내내 먹이고 가르친 은혜는 잊고 개중에 어른들이 사네 마네 하며 드잡이한 일만 차곡차곡 일기장에 써서 학교 선생 앞에서 망신을 주는 푼수 같은 계집애가 을주였으니까.

싸울 땐 서로에게 육두문자를 퍼붓던 을주의 부모는 어찌저찌 애도 셋이나 낳았고 숯불 돼지갈빗집도 차려 근방에서 손꼽히는 맛집으로 번창시켰다. 봄이면 백화점 바겐세일 매장에서 식구 수대로 새 옷을 장만했고 여름이면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계곡과 바다로 휴가를 떠났다. 온 나라가 숨가쁘게 들썩이며 아파트 평수와 자가용의 엔지 마력을 높여가던 시기였다. 아홉시 뉴스에선 근면과 성실 하나로 대성한 중공업의 창업주들과 시대착오적인 데모질로 포승줄에 묶여 잡혀가는 대학생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왜’와 ‘어떻게’라는 의문이 교묘하게 삭제되고 은폐된 채 대한민국이란 국가 공동체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와르르 취해가던 시대였다. 외환 위기가 닥쳐오기도 했으나 그조차 금 모으기 운동이라는 기상천외한 협동심을 앞세워 국민적 차력을 선보였으니까. 을주는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조국의 그 호시절이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함께 펼쳐졌다.

동네마다 초등학교가 넘쳐났고 갖가지 보습학원이 줄을 잇던 호황기에 을주는 ‘차오름 태권도장’에 다녔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호언장담했다. 너희가 크면 명문대 나와 의사나 판검사 된 사람보다 특기 하나를 제대로 키운 사람이 더 대접받을 거라고. 아버지는 을주가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에 불어닥친 공무원 시험 열풍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의대 입시 준비반이 초등학생 때부터 성행하고 예나 지금이나 판검사 출신들이 사법을 넘어 정치계에서 세를 불려가리란 걸 몰랐다. 하지만 을주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어째서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태권도나 검도 같은 무도 종목이 아닌 당구를 권했을까. 그 변화에는 또 어떤 시대적 상황과 우연이 끼어들었을까.

간절히 아들을 바랐으나 ‘딸딸이 아빠’에서 ‘딸딸따리 아빠’가 된 오갑천씨는 중절 수술을 고민하다 낳은 막둥이에게 자신의 모자란 부성을 뉘우치듯 ‘여의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버지는 막내 여의주를 끔찍이도 예뻐했다. 곤히 잠든 애를 깨워 신도시에 아파트를 분양받은 동생네 집들이에 데려갈 만큼. 그날 오뉴월 감기에 약을 먹고 곯아떨어지느라 의도치 않게 가족 외출에서 열외당한 을주는 얼핏 잠결에 들었던 아버지의 말을 기억했다.

“자게 둬. 씨감자 하나는 두고 가야지.”

그렇게 을주는 일가족 전원 사망이라는 교통사고에서 운좋게 홀로 차량에 탑승하지 않은 차녀가 되었다. 한파와 어둠이 그치고 다시금 일조량이 길어지면 황량한 벌판에 심어 가족의 기억을 이어갈 못난이 씨감자.

을주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부모는 갈빗집과 당구장을 오가며 바쁘게 손님을 응대하던 모습이었다. 막내 여의주가 아장거리며 식구들의 귀염을 독차지할 때쯤 아버지는 갈빗집 위층에 싸게 나온 당구장을 인수했다. 아버지는 디귿 자로 꺾인 당구장의 벽체 너머에 ‘학생용 다이’를 만들어 교복 입은 남학생들이 어른들의 잔소리 없이 꽁초를 피우며 게임을 즐기게 해주었다. 가슴과 골반이 딱 달라붙는 원피스 차림의 백인 여자가 당구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큐를 세워 마세를 치는 대형 사진을 정면 벽에 걸어놓고서 손님들의 안색을 밝혀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늦둥이의 말랑한 볼에 입바람을 불어넣으며 또 호언장담했다. 우리 여의주가 크면 세계적인 미녀 당구 선수가 될 거라고, 이 아빠가 철저한 조기교육으로 뒷바라지해줄 거라고. 하지만 막내는 당구 큐를 손에 들 만큼 자라지 못했다. 담배 연기 가득한 당구장에서 푸르뎅뎅한 초크를 굴리며 놀다 짜장면을 흡입하는 아저씨들에게 뺨을 꼬집히며 요구르트를 얻어먹었을 뿐, 당구대 위를 굴러가는 반짝이는 색색의 공을 내려다볼 만큼 키가 크지 못했다. 화장해 뼛가루만 남은 그애의 몸은 당구공 한 개의 무게보다 가벼웠다. 오갑천씨의 예언은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09:41. 인터뷰 이십 분 전.

을주는 가랑이가 찢어진 도복을 잡동사니 상자에 욱여넣고서 평상에 드러누웠다. 아직 인터뷰의 답변 하나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지만 을주는 딸기 잎 하나를 손에 쥐고서 뱅그르르 돌리며 이리저리 잡생각을 굴렸다. 얘기할 때 사족이 긴 것도 아버지를 닮았나? 카메라로 찍는데 화장이라도 할 걸 그랬나?

그해 여름 홀로 이모네 집으로 간 을주는 거친 간척지의 해풍을 맞으며 오래 울었다. 바닷가에 앉아 해돋이와 해넘이를 본 것 말고는 을주는 그 시절 자신이 통과한 삶의 장면이 띄엄띄엄했다. 어쩌면 생존을 위해 일부러 기억을 망각했는지도 몰랐다. 분명한 건 그때 을주는 태권도는커녕 학교 체육 시간에도 도통 발바닥을 땅에서 삼 초 이상 떼지 않는 운동 불호자였다는 것이다. 지각을 해도, 급식 반찬으로 좋아하는 피자빵이 나와도, 요의를 참고 참아 오줌보가 부풀어도 을주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렇게 걸음을 떼는 것조차 버거워 차라리 누가 자기를 공처럼 굴려줬으면 하고 바랐다. 돌이켜보면 당시 을주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을주는 몸속의 장기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피가 새어나가는 것 같았고 자신이 얼마 못 가 심장마비나 과다 출혈로 급사할 거라 여겼다. 죽는 게 두려웠지만 사는 것도 끔찍했다. 심장에 손을 얹고서 멎어라, 멎어라, 멎어버려! 하고 저주를 걸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또 라면이나 빵을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그러던 어느 봄날, 을주는 구령대에 오르면 멀리 옥녀산이 보이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을주는 운동장에서 도복을 입고 가는 무리와 마주쳤다. 깡마른 팔다리에 구운 오징어처럼 낯빛이 그을린 학생들이 머리 위로 푸른색 매트를 이고 갔다. 오진주 같았으면 엄마한테 도복을 삶아달라고 했을 텐데. 을주는 꾀죄죄한 그들의 태권도복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을 따라 체육관으로 간 을주는 담벼락에 기대어 힘찬 구령과 함께 팡, 팡 미트를 후려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가 언니의 태권도복을 찾았다. 옷 보따리를 풀어 마구 헤집던 을주는 문득 사십 구제 때 식구들의 옷더미를 태우며 이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진주, 저승 가서도 태권도 재밌게 잘해라.

그리움이 극에 달하면 얻어맞은 기억까지 그리워진다는 걸 을주는 깨달았다. 을주는 같이 햄버거를 먹다 자기 도복에 케첩이 튀었다며 동생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날리던 언니가 보고 싶었다. 언니는 발차기를 날리기 전에 을주에게 사과하라며 협상을 시도했으나 을주는 식은 감자튀김을 언니의 도복 소맷부리에 던지며 약을 올렸다. 을주는 순식간에 날아든 언니의 발등에 허리가 에스 자로 꺾였고,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서 죽도를 휘둘렀다.

“이 깡패 같은 년, 대가리를 쪼갤까보다!”

을주는 언니의 머리를 향해 연속으로 죽도를 내리쳤다. 그다음 을주의 몸이 붕 떠올랐다. 을주는 강력한 펀치나 발차기에 맞는 순간 몸이 붕 날아가는 만화 속 장면이 과장만이 아니었음을 그때 알았다. 일 초, 이 초, 이 초 반.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 착지한 을주는 반사신경처럼 티셔츠를 올려 복부를 내려다봤다. 놀랍게도 발자국 크기만한 보랏빛 멍이 뱃가죽에 올라와 있었다. 아아, 다시 한번 그 발차기에 숨을 헐떡일 수만 있다면, 다시 한번 오진주에게 맞아 갈비뼈에 금이 갈 수만 있다면, 생애 단 한 번이라도 다시 한번 엄마의 꾸지람을 들을 수 있다면. 창피해서 너희들이랑 못 살겠다고, 여자애들이 손톱자국이나 내고 머리나 쥐어뜯을 일이지 누가 동생 갈비를 작살내느냐며…… 아아, 그래서 아빠는 그때부터 막내를 위한 특기에서 격투기 종목을 빼버린 걸까.

한방을 쓰던 언니와 날마다 원수처럼 싸우던 그 시절, 을주는 태권도가 싫었다. 태권도 시합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발만 뻗대는 캥거루 싸움처럼 보였다. 을주는 가슴팍에 붙은 태극기가 구질구질해 보였고 맨발로 매트 위를 뛰는 선수들의 모습에서는 헝그리정신이 물씬 느껴졌다. 그렇다고 을주가 골프나 테니스처럼 장비발을 세우는 스포츠를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그즈음 을주가 약간 흥미를 붙였던 운동은 징 박힌 운동화를 신고 탁 트인 잔디밭을 내달리는 축구였다. 그조차 프리킥에 왼쪽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아 음식을 씹을 때마다 귀에서 민방위 훈련 사이렌소리가 들리던 순간 그만둬버렸지만.

그러나 삶의 무시무시한 공습경보를 통과한 을주에게 더는 그런 비상사태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잠든 아드레날린을 깨우며 어떻게든 씨감자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북돋웠다. 내가 마시는 이 물은 감자알 다섯 개의 양분이고, 내가 틔우는 싹은 그 다섯 알의 얽히고설킨 열망이다. 어떤 혹한과 혹서가 닥쳐와도, 가슴을 푸르게 멍 들이는 역병이 몰아쳐도 나 혼자 드레드레 영글리라.

을주는 앞으로 자신의 삶에 미끄럼을 막아줄 특수 밑창 따윈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슬라이딩할 때 피부 마찰을 줄여줄 잘 가꾼 잔디 구장도 없었다. 산다는 건 맨발로 멋없게 발을 뻗대야 하는 겨루기였다. 을주는 맹수에게 쫓기듯 맨몸으로 재빨리 다리를 움직여야 했다. 태권도의 팔각형 매트 위에서 손은 쓰는 건 반칙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보다 장갑의 새끼손가락 구멍이 더 커야 하는 을주에게 태권도는 꽤 아늑한 종목이었다. 태권도의 기본자세는 두 주먹을 가볍게 쥐어 손톱을 숨기는 거니까.

그때부터 을주는 도복과 그 안에 입은 속옷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뛰었다. 심장을 쥐어짜고 서혜부 근육이 찢기는 고통에서 쾌감을 느꼈다. 을주는 체육관에 머물며 밤늦도록 미트를 후려쳤고 이따금 학생은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 안 하시냐는 학교 경비원의 잔소리를 들었다. 겨울 전지훈련을 앞두고 무릎 인대가 늘어나 침대에 몸져누웠을 때도 을주는 악력기를 짤각거리며 머릿속으로 중력을 거슬러 다리를 찢는 발차기 동작을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했다. 죽은 오진주 귀신이 씌었나? 을주는 쓸쓸히 도복을 손빨래하며 생각했다. 혼이든 영이든, 후회든 그리움이든 상관없었다. 시합에 나갈 때면 을주는 언니가 되었다가 언니한테 개기는 동생이 되었다가 딸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아 함성을 내지르는 엄마와 아빠가 되었고, 세 자매 중 제일 키가 크게 자란 막내가 되었다. 을주는 차례로 오 인 가족의 역할을 바꿔 맡으며 끈끈한 가족드라마를 써나갔다. 어쩌면 그렇게 망상 속에서 연기하는 가족이야말로 살을 맞대며 궁상맞게 사는 현실 속 가족보다 더 아름다운 가족애를 만들어주는지 몰랐다. 환상통을 앓듯 을주는 혈육을 향한 상사병을 앓았고, 스스로에게 신체적 학대를 가하고 있음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어느 늦은 밤, 반주 삼아 마신 막걸리에 불콰하게 취한 경비원이 체육관에 들어서며 을주에게 말했다. 밤길 어두운데 어서 집에 가라고, 박세리도 담력 키우려고 혼자 밤에 무덤가에 갔다지만 여학생에게는 귀신보다 외로운 남자들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을주는 둥근 천장을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경비원이 놀라 뒷걸음쳤다. 을주는 무릎에 손을 얹고 숨결을 고르며 태연히 말했다.

“이렇게 소리지르면 돼요.”

을주는 헐떡임이 잦아들고 땀이 식으면 엄습하는 외로움과 막막함이 두려웠다. 을주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경비원 아저씨, 전 괜찮아요. 우리집에선 이모와 이모부가 저를 걱정해요. 같이 사는 사촌들도 있고, 우리 반 짝꿍이랑 같이 팬질하는 아이돌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렇게 제 몸을 괴롭히는 게 좋아요. 할 수만 있다면 바늘로 찌르고 칼로 그어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깨어났으면 좋겠어요.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죄다 꿈이었어, 그렇게 안심하며 진짜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요. 꿈과 현실을 모래시계처럼 뒤집고 싶어요. 꿈에서 오진주는 왜 늘 같은 말만 할까요. 죽을래? 죽고 싶어? 먼젓번엔 민기네 아줌마가 저한테 전화해 말했어요. 꿈에 너희 엄마가 나왔다고, 암말도 없이 자꾸 사이다병을 따서 주는데 아무래도 너희 엄마가 가슴에 얹히는 게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너는 괜찮지? 아줌마가 물었지만 저는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이십사 시간 저는 입안에 소금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아요. 이걸 어디다 뱉어야 할지……

가을비가 쏟아진 뒤 영하로 뚝 떨어지는 환절기의 기온처럼, 을주는 운동을 멈추면 덮쳐오는 원망과 설움이 두려웠다. 그렇게 외로움에 움찔거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면 온몸이 거대한 귀가 된 것 같았다. 까무러치고 낑낑대는 세상의 앓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복이에게서, 옥녀산 언덕집 여자에게서. 그 여자가 발을 절룩거리며 어둑한 해변을 헤맬 때, 그 여자가 손을 떨며 오복이의 가슴팍을 어루만질 때 을주는 알아챘다. 그 여자의 말 없는 몸짓과 표정에서 을주는 느낄 수 있었다. 냄새처럼, 전류처럼, 물결처럼 그 여자의 무언가가 을주에게 흘러들었다. 실안개처럼 차고 쓸쓸한 습기가 을주의 피부에 스며들었고, 을주는 하나의 꿈을 반복해 꾸듯 그 감정을 되새겼다.

죽을래? 죽고 싶어? 너 자꾸 그렇게 자학하면 진짜 나한테 죽는다.

오진주의 공갈을 또 듣고 싶어 어제의 자학과 오늘의 자학을 견주며 어느 쪽이 더 불쌍해 보이는지 동정심을 실험하던 을주였으니까. 을주의 촉수는 신음하는 주파수에 따라 감응했고 자석처럼 아픈 이들에게 끌렸다. 그리고 을주는 오복이를 통해 경험했다. 심장이 뛰는 따뜻한 몸을 만질 때 손끝이 얼마나 달콤해지는지. 그 접촉에 맛을 들인 을주는 다시금 내면의 술렁임을 밖으로 꺼내 애정어린 관계로 단단해지는 과정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보답이나 호응이 없더라도 을주는 언덕집 여자의 사연에 눈 딱 감고 뛰어들고 싶었다. 돌팔매가 날아오면 까짓거 좀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을주는 아직 링크가 열려 있는 지난 <욕+받이> 방송을 봤다. 캣맘으로 나온 욕받이 여자가 포실한 왕만두를 손에 쥐고서 후후 김을 불어가며 반으로 쪼갠 뒤 그 위에 열무김치를 얹어 먹었다. 별생각 없이 지켜보던 을주는 여자의 모습에 오열하고 말았다. 여자는 ‘캣맘 11년 차’라는 욕받이 명찰을 달고 열심히 씹고 삼켰다. 동동주는 정말 오랜만에 마신다며 이렇게 혀에 착착 붙으면 금방 취하는 법인데, 방송에서 주정 부리면 우리 아들이 질색할 텐데, 여자는 그렇게 아들 얘기를 꺼내며 뺨에 손등을 대고 열을 식혔다. 여자는 열 살 된 자기 아들도 같이 고양이를 챙겨주고 있다고 했다. 자기가 아프면 아들이 대신 배식 박스를 돌며 고양이들을 돌봐준다고.

“동네 여대생들이 걔를 캣소년이라 부른대요.”

여자는 자랑스레 말했으나 채팅창에선 신개념 맘충이라는 욕설이 쏟아졌다. 을주는 한 시간 넘게 만두와 열무김치를 안주 삼아 동동주 한 주전자를 말끔히 비우는 여자의 방송을 끝까지 봤다. 여자가 머리에 한 고양이귀 머리띠가 너무도 노골적이고 한심해서, 사람들의 비난에도 꿋꿋이 캣소년과 고양이들에게 영상 편지를 남기는 여자의 태도가…… 너무도 숭고해서…… 부러워서…… 을주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냉동실의 만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