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당원 동지들께 올리는 호소문

당원 동지들께 올리는 호소문

 

……다른 곳에 몸담았던 권의원에게 동지라는 말을 허락해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잘 아시겠으나 제 아내는 지난 십구 일간의 단식투쟁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진한 상태입니다. 그간 권의원의 행보에 많은 걱정이 쏟아졌으나 결과적으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언론은 토사구팽이라 말하지만, 저는 신의와 약속을 깨뜨리고 시대의 염원과 한 사람의 인격을 철저히 기만한 구태 세력에게 고상한 사자성어를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치 인생을 내걸고 전무후무한 도전을 감행했던 권의원을 사냥개 취급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희의 부덕함을 깨달으며 다시금 신발끈을 동여매고 힘차게 뛸 준비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저와 권의원의 실패일 뿐 결코 당원 동지들과 진보 정치의 실패가 아님을 기억해주십시오.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 부디 여러분은 저들의 적대와 역사적 반동을 용납하지 마시고, 이 모든 시련을 승리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여겨주십시오. 가슴을 저미고 영혼을 파괴하는 거듭된 좌절은 저와 권의원의 몫으로 안고 가겠습니다.

존경하는 OOO 비상대책위원장님께 큰 숙제를 남긴 듯하여 마음이 무겁습니다. 송구하고 염치없사오나 부디 위원장을 비롯한 새 당직자들에게 여러분의 변치 않는 애정과 신뢰를 보내주십시오. 앞으로 저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이 나라의 정치 개혁과 보편적 평등의 밀알이 되는 일에 앞장서 가시밭길을 가겠습니다. (이어서 좌담회, 입법화 빅캠프, 국민투표 활동, 건강보험 소송 소식 등 내용 추가. 긍정적 메시지로 끝맺을 것.)

 

*

 

비바람이 몹시 부는 밤이었다. 빗물로 몸을 불린 바다가 뭍으로 밀려오며 비탈진 모래사장을 깊숙이 적셨다. 둘희는 종이 더미가 담긴 상자를 안고 언덕으로 나갔다. 한기연은 삽으로 파놓은 흙구덩이에 그 종이들을 쏟았다. 한 손에 술병을 든 페피가 한기연의 헤드 랜턴을 이마에 쓴 채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페피는 이런 날일수록 커브가 필요하다고 했다.

“두 걸음.”

한기연이 말했다.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단 두 걸음이면 된다고, 우리는 그 두 걸음을 걸어야 한다고.

“아교풀.”

술에 흠뻑 취한 페피가 말했다. 증오는 사람들을 묶는 아교풀이 된다고, 우리의 존재는 어떤 이들에겐 강력한 아교풀이라고.

“우리도 아교풀이 필요해!”

페피가 소리치며 발광하자 한기연이 페피의 가슴을 떠밀었다.

“아교풀이 뭐야?”

“아교풀 몰라?”

페피가 성질을 부리며 되물었다. 둘희는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 아교풀이라고 검색했다. 짐승의 가죽, 힘줄, 뼈 따위를 진하게 고아서 굳힌 끈끈하고…… 휴대전화 액정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거센 바람에 절로 눈이 감겼다.

“광기!” 페피가 소리쳤다. “아인슈타인이 그랬지.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올 거라 기대하는 건 광기다!”

한기연이 그 격언에 발을 걸었다.

“정말 아인슈타인이 그 말을 했어? 너 확실히 알고 말해. 위스키 맛에 미네랄 함량은 상관없어.”

한기연은 페피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흙구덩이에 부었다. 꼴꼴꼴 쏟아지는 술 폭포에 두껍게 포개진 종이들이 맥없이 젖었다.

“근거는? 통계는? 현실적 가능성은?”

페피가 한기연을 겨누며 반박했다.

“생각 좀 그만해. 책 좀 그만 읽어. 왜 못 저질러? 쿠데타는 정적을 잡아죽일 때 성공하는 거야. 스탈린, 히틀러, 하이 한기연! 잡아죽여!”

페피가 콧수염처럼 코밑에 검지를 얹고 소리쳤다.

“지랄 똥.”

한기연이 비웃었다.

“반사.”

페피가 두 팔을 십자가처럼 엇갈리게 하여 한기연을 향해 내밀다 중심을 잃고 고꾸라졌다. 비에 젖은 페피의 모직 코트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

“약해빠졌어. 잡아죽이고 씨를 말려야 하는데.”

페피가 흙바닥에 앉아 한기연을 평했다. 너처럼 말이 되는 말만 하면 결국 아무 말도 못하는 거라고, 그게 바로 저들이 노리는 억압의 방식이라고 했다. 페피는 자기 머리통에 구멍을 내듯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쑤셨다.

“머릿속에서 파. 파서 없애버려. 이게 옳은가? 이게 맞나? 이 방법이 선한가?”

“했어. 없앴어.”

“거짓말.”

한기연이 무섭게 페피를 노려봤다. 페피도 맞섰다.

“척만 했지. 시늉이었지. 진짜로 해야 겨우 한 걸음 떼는데.”

“그래서 뭘 얻는데?”

한기연이 묻자 페피가 질기디질긴 고무를 씹듯 얼굴을 찌푸렸다.

“얻는 사람은 그런 말 안 해. 결과도 과정도 생각 안 해. 회상도 반성도 안 해. 너처럼 철저하게 계획 안 해. 그냥 가서 죽이고 자리를 차지해.”

페피가 술병을 높이 들어 입안에 커브를 부었다. 한기연은 자기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머리에 쓴 모자의 챙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둘희는 한기연에게 라이터를 갖다주기 위해 집으로 뛰어갔다. 빗줄기가 둘희의 뺨과 목덜미를 때렸다. 나무들이 폭풍우를 환영하듯 잎과 줄기를 흔들었다. 둘희가 막 집안으로 들어설 때 바람에 날아온 종이 한 장이 얼굴을 덮었다. 불시에 습격해오는 강도처럼 둘희의 입과 코를 막았다.

 

메신저로 퍼지는 조직적 가짜 뉴스 반박 자료……

 

둘희는 종이를 움켜쥐고 양손으로 구긴 뒤 힘껏 내던졌다. 집안에서 라이터를 챙겨 다시 구덩이로 돌아갔을 때 페피가 무릎을 모으고 앉아 앞뒤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페피는 딸꾹질하며 구덩이에 대고 훈계했다.

“너희의 모순은 (꾹) 서사를 포기 못한다는 거야. 다들 지 스토리에만 (꾹) 빠져서 자기 슬픔만 중요하지.”

“지금 너는 악당이 되는 장면이고.”

담배를 입에 문 한기연이 둘희에게 라이터를 건네받았다.

“나폴레옹은 (꾹) 자기 군대에 훈장을 뿌렸어. 어디서 봤냐고? 레프 톨스토이 (꾹) 『전쟁과 평화』! 난 그거 열한 살 때 다 읽었어. 우리집에서 그거 읽어야 (꾹) 사람 대접받았어. 지랄 똥. 나폴레옹은 (꾹) 병사들에게 훈장을 달아줬어. 상을 안 아꼈어. 벌도 무지막지했어.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어.”

“자기야, 안 켜진다.”

한기연이 둘희를 돌아봤다. 둘희가 점퍼의 지퍼를 열고 바람막이처럼 양팔을 벌려 한기연의 주위를 둘렀다. 한기연이 여러 번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렸으나 불꽃은 솟아나지 않았다.

“다시 갖다 올게요.”

“이리 와.”

한기연이 둘희를 끌어당겨 자기의 품에 안았다. 페피는 구덩이에 대고 계속 떠들었다.

“너희의 문제는 (꾹) 명령을 못한다는 거야. 쾌락에서 (꾹) 가치를 못 느껴. 기어이 의미를 찾아. 그게 너희의 (꾹) 약점이야.”

둘희가 안전띠를 두르듯 한기연의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한기연이 둘희의 가슴과 배를 어루만졌다.

“그래도 비 오는 날 (꾹) 태워 죽이는 건 심하지 않아?”

흐릿한 눈으로 한기연을 올려다보던 페피는 한기연과 둘희가 딱 붙어 있는 걸 보고선 성질이 치미는 듯 소리쳤다.

“왜 너희는 꼭……”

페피가 엉덩이걸음으로 둘희에게 다가가 두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손을 뻗어 둘희의 배를 만지려고 하자 한기연이 페피의 머리를 탁, 탁탁 연달아 때렸다.

“된다.”

둘희가 불꽃이 사그라들지 않도록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라이터를 감싸며 말했다. 한기연이 종이에 불을 붙여 구덩이에 던졌다. 불길은 쉽게 커지지 않았다.

“안 봐. 난 안 볼 거야.”

페피가 말했다.

“쉬고 싶어.”

한기연이 그렇게 말했던가. 둘희는 속기사처럼 그들의 대화를 받아 적고 싶었다. 불살라 없애는 대신 두루 너르게 퍼뜨려 미래의 영화를 위한 영토로 삼고 싶었다. 그들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그들을 토벌한 세상의 아교풀이 무엇인지, 반란이 민란으로 번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둘희와 한기연은 시원찮은 라이터로 여러 개의 불쏘시개를 만들며 끙끙댔다. 바람이 불자 불길의 푸른 중심이 회까닥 뒤집혔다.

겨우 불씨를 키운 뒤 둘희가 일어서자 한기연이 피우던 담배를 건넸다. 필터 중간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페피는 다시 코알라처럼 둘희의 다리에 달라붙어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고 애걸했다. 탁, 탁탁 한기연이 페피의 머리통을 때렸다. 뻐끔뻐끔 둘희가 흰 연기를 내뿜었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했을까. 단호함, 잔혹함, 방책, 전략, 여론, 기다림(아니, 그건 이미 차고 넘쳤어). 흙탕물이 구덩이로 흘러들었지만 화염은 그들이 품었던 미완의 꿈을 집어삼키며 가까스로 타올랐다.

“너 그렇게 힘들면 외국 나가. 나가서 살아. 왜 이러고 살아?”

한기연이 흐느적거리는 페피의 팔을 잡아 돌리며 말했다. 페피는 한 팔이 결박당한 채 아주 골이 난 표정으로 한기연을 쏘아봤다. 입안에 뭐가 들어갔는지 혀를 날름거리다가 푸르르 푸르르 입술을 떨었다.

“둘희씨, 한기연 말 듣지 마. 하자는 대로 하지 마. 내가 속셈을 모를 줄 알고! (꾹)

한기연이 페피의 머리통을 탁, 탁탁 때렸다. 둘희는 멀미가 난 듯 속이 울렁였다. 니코틴과 타르가 뇌간을 쪼았다. 그들은 습하고 거센 바람을 무진장 들이마셨고 구덩이에서 솟아나는 독한 연기도 흡입했다. 컴컴한 바다에서 등대 빛이 흐릿하게 빛났다. 세 사람은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 몸을 떨었다. 번갈아 재채기하며 얼굴에 달라붙은 재를 떼어냈다. 둘희는 멀고 미약한 등대 빛을 보며 구덩이 속에서 타고 있을 어느 해시태그를 떠올렸다. #사랑을_밝혀_우리의_등대로

 

*

 

귀하, 흥미로운 메시지 잘 받았다.

우리 조직의 많은 자료를 전한다. 집회와 선전 문구도 함께다.

(이미지, 영상, 공익광고, 그 외)

나는 너의 돈키호테 비유가 무척 흥미롭다.

한국의 권력 쥔 세력은 너와 너의 주장을 돈키호테 취급한다. 익숙하다.

너와 나는 안다. 돈키호테는 일관되고 끈질긴 환상을 했고 혁명을 일으켰다.

바로 그 점이다. 돈키호테처럼 투표에 부쳐야 한다. 당신의 반대편은 그걸 원할 것이다. 그다음은 모든 열의를 끌어낸다. 돈키호테는 투표에서 이겼고 자기의 투구를 지켰다!

(우리도 이겼다. 너도 해낼 것이다. 부디 지금 당한 어려움을 벗어날 것이다.)

끝으로, 너의 파트너는 산초가 틀림없다.

내가 알기로 산초는 엄청난 수다쟁이다. 그리고 훌륭한 왕이었다. 그의 작은 섬에서.

 

*

 

페피의 빵집은 길을 잃기 쉬운 비밀의 왕국 같았다. 둘희는 방문자를 주눅들게 만드는 드넓은 정원을 지나 거대한 두부 세 모를 가래떡 위에 올려놓은 듯한 건물 앞으로 갔다. 페피는 약속 장소를 말해주며 자기가 운영하는 빵집이라고 했지만, 그곳 어디에도 손님은 없었고 빵냄새도 나지 않았다. 둘희는 페피가 전화로 말해준 대로 끄트머리의 입방체로 들어갔다. 실내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층고가 높았다. 바닥에는 희고 매끄러운 석재가 깔려 있었고 둘희의 얼굴이 비칠 만큼 반드르르하니 얼룩 한 점 없었다. 둘희가 지나온 복도의 맞은편으로 Y자 모양의 또 다른 복도가 이어졌다. 두 개의 통로가 갈라지는 중앙에 엿가락을 구부린 듯한 기이한 모양의 계단이 구불텅하게 솟아 있었는데, 둘희는 그 층계를 보며 철공소 골목에 있던 페피의 영화 감상실을 떠올렸다.

이런 데를 두고 왜 오피스텔을 부러워한 거야.

둘희는 흰 올빼미의 머리처럼 등받이가 둥근 벨벳 소파에 앉았다. 남향의 통창으로 정오의 햇빛이 비쳐들었으나 둘희는 손끝이 시렸다. 주변은 생활 소음 없이 고요했고 어디에서도 오븐의 열기나 시럽향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넓고 환하고 청결한 곳이었지만, 둘희는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문득 가구에 쌓인 뽀얀 먼지나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옷가지들이 그리웠다. 둘희는 소매끝을 만지작거리며 점점 더 소파의 가장자리로 옮겨갔다.

“으아, 신나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페피가 소리쳤다. 둘희는 밋밋한 은색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사람들이 튀어나온 것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페피의 낯선 옷차림에 더욱 당황했다. 언제나 밑단이 너저분한 바지에 구김살이 많은 셔츠를 입던 페피가 멀쑥한 정장에 머리까지 단정히 빗어넘기고 있었다. 페피의 뒤로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따라 내렸다. 어디를 봐도 평범한 빵집 직원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 분만, 옷 갈아입고 올게요.”

페피가 둘희에게 다가오다 멈칫하더니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 서둘러 뛰어가면서도 둘희를 돌아보며 흥얼거렸다.

“한기연이 알면 얼마나 샘날까!”

무릎이 튀어나온 잿빛 면바지에 회색 라운드 티로 갈아입은 페피가 둘희에게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밖으로 나간 페피는 녹색 면봉처럼 일정하게 손질된 소나무들을 지나 자신의 아지트로 둘희를 데려갔다. 둘희는 페피를 뒤따르며 아래쪽에 펼쳐진 널따란 테니스코트를 내려다봤다. 지대가 높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둘희가 걸어가는 정원 아래로 경사가 완만한 비탈길과 물이 빠진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낮은 돌담을 따라 공원에 있을 법한 운동기구들도 보였다. 둘희가 의아한 얼굴로 허리 돌리기 기구를 보자 페피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 취향.”

“빵은 어딨어요?”

“빵? 배고파요?”

“아뇨, 빵집이라고 하니까……”

둘희가 말끝을 흐렸다. 페피는 끼이익 소리 나는 철문을 열며 설명했다. 빵이 있긴 하지만 맛이 없다고. 세금을 아끼려고, 빵집을 한다는 시늉만 내는 거라고. 둘희는 여전히 아리송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페피를 따라 뜰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 볕이 잘 들지 않았고 나무들의 수형이 무성했다. 페피는 붉은 벽돌이 깔린 오솔길을 지나 집채만 한 마로니에 나무 앞에 서더니 둘희에게 잘 따라오라고 했다. 둘희는 아연한 표정으로 줄사다리를 타고 나무를 오르는 페피를 올려다봤다.

이게 다 무슨 짓일까. 부자들은 다 이런 꿈동산을 만들고 사나.

둘희는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에 송이버섯처럼 튀어나온 오두막을 바라봤다. 페피가 둘희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올라와요, 어서!”

페피는 둘희가 가져온 서류들은 꺼내보지도 않았다. 카키색 파우치 안에는 둘희의 신분증과 도장, 여러 은행의 계좌 정보와 백지에 커다랗게 쓴 서명 따위가 담겨 있었다. 페피는 파우치를 구석에 밀어놓고서 먼지가 풀풀 날리는 자줏빛 침낭을 펼쳤다. 페피가 발을 딛을 때마다 판자가 삐걱거렸다. 정말이지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모여 야한 잡지를 들춰볼 법한 좁고 침침한 오두막이었다. 벽과 선반, 기우뚱한 탁자가 온통 목재로 되어 있었고 사방에서 축축한 이끼 냄새가 났다. 튀어나온 못에는 굵은 밧줄과 램프가, 입구와 벽에는 뜨개질한 판초가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그 판초를 보자 둘희는 한기연의 책장에 꽂혀 있던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왕이 된 산초 판사’. 한기연은 그 에피소드에 포스트잇을 붙여놓고서 페이지 귀퉁이에 페피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페피라는 별명이 아닌 친구의 실명을.

“그 고집불통은 뭐 좀 먹어요?”

페피가 한기연의 안부를 물었다. 잠은 좀 자는지, 아직도 자기를 빌어먹을 쓰레기라 욕하는지. 둘희는 시선을 떨구며 답을 피했다. 통나무로 된 벽 사이사이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들었다. 페피가 귀퉁이에 있는 헝겊 보따리에서 털장갑과 목도리를 꺼내 둘희에게 건넸다.

“난 도우려는 거예요, 알죠?”

페피가 핫팩 두 개를 손에 쥐고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보름 전 페피와 한기연은 날 선 목소리로 서로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적나라한 말다툼 끝에 한기연은 페피에게 꺼지라고 소리쳤고, 페피는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항변하면서도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오피스텔을 나서며 페피가 둘희에게 속삭였다. 연락해요, 꼭. 한선배 잘 돌봐주고요.

페피는 큼지막한 스테인리스 컵에 위스키를 따라 들이켰다.

“같이 마셔요.”

둘희가 말하자 페피는 반가운 기색을 띠더니 구부정한 자세로 선반을 살폈다.

“컵이 하나밖에 없네요.”

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페피가 마셨던 잔을 들었다. 싸늘한 몸에 술기운이 퍼지자 한결 긴장이 누그러졌다. 두 사람은 술맛이 어떻다는 식의 떠들썩한 묘사 없이 한동안 잔 하나를 주고받으며 번갈아 독주를 마셨다. 페피는 한기연이 자리에 없는데도 줄곧 한기연을 의식했고 꺼내는 얘기마다 한기연을 끼워넣었다.

“나랑 친해지면 애인을 배신하는 거 같아요?”

페피가 비상식량이라며 치즈가 박힌 육포를 건넸다.

“내가 몇 번 초대했잖아요.”

“아.”

“아?”

“감독님이 바쁘셔서.”

“흐, 감독님……”

“와도 되는지 몰랐어요. 장난일 거라 해서.”

“진심이었어요. 난 실없는 인간이지 허튼소리는 안 해요. 그게 그건가?”

페피는 둘희의 표정을 살피며 술을 들이켰고 진저리치듯 어깨를 떨었다. 둘희도 알았다. 페피가 진심으로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한다는 걸. 하지만 둘희는 페피와 가까워져 이 사람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될까 두려웠다. 한기연과 페피가 싸우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기연을 속인 채 몰래 페피를 만나러 와야 하지 않았다면, 둘희는 계속 페피와 거리를 둔 채 한기연을 통해서만 관계를 맺었을 터였다. 잠깐이지만 직원들을 대하는 페피를 보면서 둘희는 이 거만한 왕이 자기를 산초로 위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허구 속 기사 이야기에 미쳐버린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는 산초. 그게 페피가 선택한 환상이었다. 둘희는 한기연이 『돈키호테』에 표시해놓은 산초의 에피소드를 읽었고 객줏집에서 벌어진 투표 이야기도 찾아봤다. 소설 속 돈키호테는 이발사의 세숫대야를 자기의 투구라고 우긴다. 술집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일관되고 강력한 주장에 설득당해 그 물건이 대야인지 투구인지를 놓고 투표를 벌인다. 투표는 돈키호테의 승리로 끝난다. 한기연은 그 대목에 굵게 밑줄을 그어놓았다. 둘희는 한기연이 어떤 생각으로 그 에피소드를 읽었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한기연은 누군가의 광증이 ‘정상’으로 승인되는 과정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산초 같은 충직한 맹신자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페피가 정말 산초일까?

둘희가 보기에 소설 속 산초는 돈키호테의 망상을 이용했다. 진짜로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은 채, 자기의 모험을 위해 돈키호테의 착란에 동조했다. 둘희가 놀랐던 건 산초의 그 동조가 돈키호테의 망상을 하나둘 현실로 바꿔간다는 점이었다. 산초는 돈키호테가 우격다짐으로 강요하는 일을 툴툴대면서도 끝까지 수행한다. 싸움에 휘말려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터지고 허구 속 둘시네아 공주에게 편지를 건넨 뒤 답장까지 받아온다. 허풍인 줄 알았던 돈키호테의 약속도 실현된다. 산초에게 섬을 통치하게 해주겠다던 돈키호테의 공약. 그런데 산초는 얼마 못 가 지루한 통치자 노릇을 때려치우고 다시 돈키호테와 고생스러운 야영 생활에 나선다. 멸시당하고 갈비뼈와 어금니가 성할 날 없는 주인의 곁을 지킨다.

아무때나 말하고 아무 말이나 떠들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산초에겐 권력이나 풍족함보다 그 떠드는 자유가 중요했다. 산초가 돈키호테에게 바라는 유일한 요구 사항도 자기의 말을 막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키호테는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에 올라 산초의 청자가 되어준다. 둘희는 산초와 돈키호테의 만담 속에 페피와 한기연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뭐라도 단서가 될 만한 장면을 찾기 위해 앞뒤가 안 맞고 도무지 논리적이지 않은 그 사백 년 전의 이야기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둘희는 한기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한기연이 왜 귀퉁이에 페피의 별명이 아닌 진짜 이름을 적었는지. 한기연은 자기의 망상을 뉘우친 돈키호테처럼 자신도 끝까지 영화를 하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한기연은 자신의 후회를 예견했다. 그리고 페피에게 산초의 역할을 바랐다.

하지만 페피가 그럴 수 있을까? 페피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한기연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한기연이 돈키호테처럼 자기가 허송세월하며 보낸 시간을 자책하며 생명이 꺼져갈 때 페피는 산초가 되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일어나세요! 우리 같이 세상의 흑마술을 풀러 가요. 실패와 좌절 때문에 가슴이 아프시다면 모든 실패는 저에게 떠넘기세요. 우리 다시 모험을 떠나요!’

둘희가 뜨개질한 판초의 패턴을 보고 있을 때 페피가 불쑥 물었다.

“둘희씨는 왜 애인한테 존칭 써요?”

둘희는 대답 대신 페피를 똑바로 봤다. 매력이 넘치는 자기의 외모를 의식하지도 의심하지도 않는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렇잖아. 한선배는 반말하는데, 둘희씨는 감독님, 감독님. 둘만 있을 때도 그래요? 침대에서도?”

이번에도 둘희는 답을 주는 대신 자못 언짢은 표정으로 페피를 봤다. 그러자 페피가 곧장 사과했다. 한기연이 있었다면 한기연은 페피의 도발을 더 거칠게 받아치며 한바탕 우스운 실랑이를 벌였을 터였다. 하지만 둘희에겐 페피의 짓궂은 질문을 받아넘길 여유가 없었다. 그날 페피의 농담은 평소와 달리 특유의 겸손함이 어려 있지도 않았다. 페피는 어떤 우스갯소리를 하더라도 그 조롱에 가장 초라해지는 대상은 늘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날 두 사람의 대화는 묘하게 어긋났고 페피의 농담은 불발에 그쳤다. 안부 인사와 술, 그게 끝이었다. 페피와 둘희에겐 처참할 정도로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한기연 말고는, 영화 말고는.

“어서 자라서 내 자릴 차지해요.”

사과의 연장인 듯 페피가 말했다. 둘희는 답하지 않았다. 둘희는 이미 다 자라 있었고 페피를 대신할 준비를 끝마쳤다. 두 사람은 침묵에 휩싸여 가운데 놓인 은색 텀블러를 봤다.

“우리 띠동갑이죠?”

페피가 끊긴 대화를 이어붙였다.

“아뇨, 전 생일이 빨라서 말띠예요.”

“아, 말띠. 우리 모친이랑 같네. 참, 내가 그 말 했어요? 옛날에 그 바닷가집에 신빨 좋은 무당이 살았대요. 우리 모친이 전국구 무당을 다 만나고 다녔거든. 내가 그 집을 산다니까 놀라더라고.”

“어머님이……”

조심스러워하는 둘희에게 페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가 점에 미쳤어요. 하도 죄를 지어서. 그 양반이 장관 될 때 수십 곳을 보고 다녔는데 딱 그 무당만 맞혔대요. 청문회에서 미끄러질 거다, 삼 개월만 기다려라, 그다음 관운이 트인다. 기가 막힌 거지. 석 달 뒤에 한강 다리가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어. 근데 웃긴 게 그 무당도 몰랐던 거야. 뭔가 나라에 사달이 날 줄은 알았지만 자세한 건 안 보였지. 엄마가 고마워서 가방 하나를 사서 다시 가니까 앓아누웠더래요. 입술이 퍼렇고 눈에 초점이 없는 게 말도 못하고 끄억끄억. 진짜 귀신이 보이는 거지.”

“신기하다. 진짜 보이나?”

“둘희씬 본 적 없어요?”

페피가 텀블러에 담긴 위스키를 마셨다. 둘희는 문득 철공소 골목에서 수레 소리를 들었다던 한기연의 말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때의 한기연이 미친듯이 그리웠다.

“정성이 중요하대요.”

페피가 둘희에게 빈 잔을 건네며 말했다.

“뭘 이루려면 정성을 들여야 한대요. 우리 모친이 그때만 해도 되게 리버럴했거든. 영부인 라인으로 여성부도 만들고 가폭법, 그러니까 가정폭력방지법도 만들고. 아무튼 그런 거 하나씩 하다가 호주제 폐지가 중요하다, 그거부터 모가지를 따자, 그래서 뻔질나게 로비하고 사람 만나고 갖은 수를 썼는데 그래도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또 그 무당을 찾아가니까……”

“정성을 들이래요?”

“아니, 들여도 소용없대요. 사람이 가야 한다고. 노인네들 죽어 묻힐 때까지 기다리라고. 근데 무서운 게 죽어도 소용없더래요. 그 노인네들이 자식을 낳고 또 낳고 계속 이어지니까. 사람은 죽어도 사상은 안 죽어.”

씁, 페피가 잇새로 바람소리를 냈다. 둘희는 텀블러 손잡이에 달라붙은 잡풀을 떼어냈다.

“그 무당이 내 사진을 보고 흉노라고.”

“흉……?”

“흉노, 초원에서 말 타고 살던 애들. 내가 그 흉노족 족장이었대요. 이름도 말해줬는데, 무슨…… 츠무탄? 살생을 무진장 했나봐. 사람, 짐승 안 가리고.”

둘희는 전생과 현생을 오가는 페피의 후일담에 말문이 막혔다.

“지금 당신이 돈에 미쳐서 땅 보러 집 보러 다니는데, 그 돈 모아봤자 나중에 흉노족 자식이 다 말아먹을 거라고 했대요.”

“용하네.”

“다 맞혔지. 겉으로는 입법 어쩌고 하는데, 땅투기 하러 다닌 거지.”

페피가 자기 허벅지 사이에 양손을 찔러넣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반말과 존칭을 오갔지만 둘 다 그 말투의 변화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른하게 술기운이 올랐고 통나무 벽에선 탄닌향이 진동했다. 나무의 내장 속에 들어앉아 수액을 마신 듯 홧홧한 기분이었다.

“나랑 여기 있는 거 알면 한선배가 미쳐버릴걸?”

그렇게 말하며 페피가 양말을 벗었다. 둘희는 페피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통통한 애벌레 같은 희고 보송한 발가락. 문득 둘희는 한기연과 페피가 연인 사이였을 거란 짐작이 들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우정이 아닌 다른 관계를 한 번쯤 시도해봤으리라. 지금의 관계는 그 시도의 결과이고 두 사람의 타협점이리라.

그때 오두막의 벽면이 고오오옹 울림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나무벽을 돌아봤다.

“여기, 괜찮은 거죠?”

“몰라요. 나도 오랜만에 왔어.”

둘희가 화장실은 어떻게 가냐고 묻자 페피는 어서 술을 다 마셔서 화장실을 만들자고 했다. 둘희가 경멸하듯 페피를 봤고 페피는 “조준을 잘 하면……”이라고 말하다 자기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셋이 언덕으로 나가 종이 더미를 태웠던 날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때 새벽이 되어서야 술이 깬 페피는 자기 뒤통수에 왜 이렇게 큰 혹이 생겼냐고 물었고, 한기연은 페피의 귀를 세게 잡아당기며 따귀를 맞지 않은 걸 다행인 줄 알라고 했다. 그리고 오두막에서 밤을 새운 그날 페피는 요란하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이 깨어 둘희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따귀 맞을 짓 했어요?”

둘희는 뭐라 답해줄 말이 없었다. 둘희 역시 간밤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생각나지 않는 걸로 해두었다.

밤새 서로를 부둥켜안고 추위에 떨었던 두 사람은 차례로 줄사다리를 타고 오두막에서 내려왔다. 숙취에 비틀거리며 수풀길과 테니스코트를 지나 다시금 드넓은 잔디밭에 다다랐을 때 둘희는 구운 식빵 그림이 그려진 흰색 탑차와 마주쳤다.

“맛없어요. 나가서 라면 사줄게.”

탑차를 유심히 보는 둘희에게 페피가 말했다. 그러나 둘희는 그날 페피와 같이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을 먹지 않았다. 둘희는 페피의 산초 놀이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둘희에게 페피는 좋은 사람이었다. 잘 대해주었고 자기의 풍요를 의심 없이 나누었다. 어쩌면 페피와 다른 관계로 위장한 채 더 복잡한 일을 꾸며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둘희는 한기연의 마음을 이해했다. 언제나 어렴풋하고 수수께끼 같던 한기연과 페피의 관계가 비로소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둘희는 페피에게 인사를 건넨 뒤 택시를 잡아탔다. 어서 한기연이 있는 바닷가집으로 가고 싶었다. 느닷없는 허기처럼 미친듯이 그곳이 그리웠다.

 

*

 

속셈이 빤히 보여요. 일부러 시끄럽게 만드는 거잖아요. 대체 무슨 염치로 국민투표를 하자는 건지. 민주주의를 이렇게 남용해선 안 되죠. 무상 급식 찬반 투표는 우리 아이들 밥상 문제였어요. 지금 변태들이 결혼하는 게 나라에 시급한 일인가요? 정말 이기적이고 몰염치한 집단이에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아요. 다만 피해는 주지 말아야죠. 정 결혼하고 싶으면 자기들 돈으로 식장 잡아서 하라고 해요. 안 말려요. 세금이라도 지원해달라는 건가요? 애 있는 멀쩡한 부부도 청약 받기 어려운 시대에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지. 참고로 저는 어떤 단체든 집회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믿는 쪽이에요. 시위 때문에 차가 막혀도 저 사람들이 나 대신 싸워줘서 내 권리도 지켜지겠구나, 고마워한다고요. 멍청하면 마음이라도 곱게 써야죠. 사표가 될 줄 알면서도 찍어준 사람한테.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제발 정권 교체까지 입다물고 있어! 조용히 잘 사는 모범적인 동성애 커플도 얼마나 많은데. 아무튼 국민투표에 세금 쓰자는 인간들 보면 정말 무슨 고릿적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운동 같아요. 말이 곱게 안 나오네요. 친일파 잔재들이랑 북한 북돼지랑 싹 다 모아서 일본 앞바다에 내다버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