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4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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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fe-film                   

From. gamdoknim

 

제목: (우선 처리 요청) 제작 노트 109                 

 

현 답보 상태를 타개할 ‘원 숏’ 프로젝트 검토 요청.

첨부한 세 개의 문서를 확인 바랍니다.

(패스워드 키워드: 가장 감명깊은 영화 대사는?)

 

문서 1) 원 숏 프로젝트 기획서

1. 제작 관련 전반적 상황: 물적인적 자원을 중심으로

2. 영화화를 위한 구체적 쟁점

3. 로그라인 초안

문서 2) 제작 취소 건의 관련 자료 폐기 승인

문서 3) 로케이션 후보 및 향후 실내 스튜디오 확보안

 

※본 메일은 확인 뒤 48시간 내 완전 삭제 요망.

 

To. gamdoknim                       

From. fe-film

 

제목: ‘태풍 경보’ 제작 노트 12

 

원 숏 프로젝트의 명칭을 ‘태풍 경보’로 확정했습니다.

더불어 첨부한 두 개의 문서를 확인 바랍니다.

(패스워드 키워드: 흥남 주물 아저씨의 커피 레시피는?)

 

문서 1) 체제 선전선동 관련 국내외 연구 자료 총정리 vol. 3         

문서 2)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충돌에 관한 국외 판례 총정리 vol. 2

 

※주말에 끝내주는 ‘커브’를 가져감. 잔뜩 기대 바람.

 

To. fe-film                                        

From. gamdoknim

 

제목: ‘태풍 경보’ 제작 노트 32(첨부 문서 없음)

 

제작 노트 30에 기재된 기획안 개선 의견

 

1. 개별 트리트먼트의 주요 감정을 명사형으로 기재

예) 분노, 무기력, 조롱, 박탈감, 비아냥 등

2. 개별 트리트먼트의 감정적 요소를 벤다이어그램으로 시각화

3. 보조 플롯 2의 ‘세대별 피해자성 선동’에 관한 최근 실례 요청

4. 기획안 5쪽 2행의 ‘집단 손짓’에 관한 경제적 파급 효과에 관한 통계 요청

5. 입법 로비와 미디어 커넥션, 대안 시민 강좌에 관한 외국 사례 요청

 

* 결론: 전제적으로 활력이 떨어짐. 장르적 특성을 고려해 더 간단명료하게. 메시지는 직관적으로.

 

※본 메일은 확인 뒤 48시간 내 완전 삭제 요망.

※이번 주말엔 오지 마.

 

*

 

지금, 이라고 말한다.

둘희는 기억 속 한기연의 목소리를 따라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지금 여기에서 제일 가까운 바다로 가주세요.”

한기연은 기사에게 말한 다음 좌석에 등을 기댄다. 피로한 듯 창가로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감는다. 택시가 심한 커브길을 돌자 한기연의 몸이 둘희 쪽으로 기운다. 썩은 나무둥치처럼. 둘희가 손을 뻗어 한기연의 이마 옆을 조심스럽게 누른다. 자신의 어깨에 한기연이 머리를 기댈 수 있게 한다. 창밖은 칠흑처럼 어둡고 택시 기사는 말없이 정면을 응시한다. 라디오에서 느리고 서글픈 음악이 흘러나온다. 차가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린다. 한기연의 몸이 천천히 둘희의 무릎으로 쓰러진다. 썩어 병든 나무처럼. 둘희는 꼼짝하지 않은 채 한기연의 무게를 감당한다. 둘희의 허벅지가 조금씩 젖는다. 한기연의 눈물로 바지가 젖고 있다. 둘희는 한기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마른잎 같은 자기의 손을 거둔다. 택시는 적신호 없이 빠르게 달리고 공항 방면 고속도로를 지나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교로 들어선다. 귓속에 울림소리가 가득찬다. 바람, 철골, 가속도, 맞은편 차선을 달리는 크고 험상궂은 덤프트럭. 둘희는 그대로 자신의 몸이 한기연의 눈물로 온통 젖어버리길 바란다. 그렇게 한기연의 눈물에 녹아 삶이란 무대에서 퇴장해도 좋다고, 아무런 후회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이 아스라이 잦아들며 한기연의 뺨과 맞닿은 허벅지에서 맥박이 뛴다. 거기에 둘희의 심장과 늑골과 희망이 있다. 또다시 덤프트럭 한 대가 돌진해온다. 오렌지빛 택시가 마른잎처럼 하찮게 흔들린다. 상관없어, 나무는 죽어 쓰러질 때 가장 큰 소리를 내니까. 둘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색하지 않은 채 한기연이 다 울 때까지 기다린다. 아무리 울어도 넘치지 않는 우물, 그게 바로 나니까. 오직 당신을 위해 파 내려간 깊이, 당신이 마음놓고 추락할 수 있는 허벅지.

둘희는 언제나 그 젖은 허벅지로 살아가겠다고 맹세한다. 당신의 순정한 눈물받이로― 내가 모조리 받아 마실게요.

그 밤, 택시 기사는 놀랍게도 그들을 눈에 익은 장소로 데려갔다. 주변에 번화한 해수욕장이 있었지만, 기사는 외지고 한적한 곳에 두 사람을 내려주었다. 그곳이 그들이 지금 갈 수 있는 제일 가까운 바다였다.

한여름의 밤바다엔 끈적하고 비린 바람이 불었다. 모래밭 가장자리에 허리가 굽은 해송이 자라 있었고 반대편 침식 바위 쪽엔 조개껍데기가 우부룩한 능선을 그리며 쌓여 있었다. 한기연의 영화 속에서 아이가 따개비를 괴롭히던 조개무덤이었다.

한기연과 둘희는 울음과 격정에 지쳐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얕은 파도가 쳤지만 조류는 세지 않았고 뿌연 달무리가 터널 속 전등처럼 희붐하게 빛났다.

“나 혼자 오려고 했는데.”

한기연은 여기까지 오게 해 미안하다고 했다. 둘희에게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자기의 잘못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남김없이 자백하고 토해낸 다음 훌훌 가벼워지고 싶다는 듯이.

“난 자격이 없어요. 틀려먹은 인간이야.”

한기연이 검은 물결이 너울치는 해안선을 쏘아봤다. 자신이 친구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했다. <배부른 구름>은 친구의 시나리오를 보고 만든 거라고. 한기연은 친구의 글을 보고 사십 년 동안 함께 살던 여고 동창생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둘희는 놀랐지만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았다. 한기연을 위로하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훗날의 둘희였다면 자괴감에 빠진 연인에게 이렇게 말했으리라. 괜찮아요. 그건 어차피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픽션이잖아요. 주인공이 아파트에서 떨어질 때 그 여자를 보고 있던 아이는 당신이 창조한 인물이잖아요.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그 삶이 부정당하는 이야기는 시공간을 바꿔서 거듭되는 뻔한 동성애 서사잖아요(대한민국의 법원은 우리의 진부한 상처를 선고문으로 인정해줄 거예요). 당신은 그 반복을 말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사람들을 무감하게 만드는 비극의 반복을. 당신이 무언가를 표절했다면 바로 그 비극을 베낀 거죠. 세상이 베끼고 따라 하도록 자기의 시나리오를 여기저기 펼쳐놓았으니까. 다른 시나리오는 모두 한곳에 몰아넣고 빗장을 걸어버렸으니까. 당신은 죽음을 표절한 거예요. 영화에서 그랬잖아요. ‘자살은 이미 구닥다리 슬픔인걸.’ 당신은 동정도 박수도 원하지 않았잖아요. 우리는 이미 거지처럼 받아먹었으니까. 그래서 게워내야 했으니까. 배부른 구름이 한순간에 폭우를 쏟아내듯이. 슈퍼맨이 지구를 돌려버리듯이. 당신은 그걸 해내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그날 택시에서부터 한기연을 따라 우느라 두 눈이 퉁퉁 부은 둘희는 밤바다를 바라볼 뿐 그럴듯한 논리로 한기연을 변호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둘희는 한기연이 숨김없이 털어놓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이 그 비밀을 구겨 삼킬 수 있을 테니까. 비밀을 파묻은 다음 무덤의 파수꾼이 되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다 알아. 결국 전부 드러나게 돼 있어.”

한기연이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과장되게 웃는 소리를 내며 자학을 이어갔다. 자신은 태생부터 오염된 인간이라고, 아버지의 일이나 유학 시절 이야기도 과장이 있을 뿐 아예 없는 사실은 아니라고 했다.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저도 나쁜 짓 많이 했어요.”

둘희가 자책하는 한기연의 말을 막으며 두서없이 떠오르는 자신의 악행을 늘어놓았다.

“어릴 때 개를 때렸어요. 새끼였는데, 배고프다고 낑낑대서 때렸어요. 사료를 줬는데도 계속 귀찮게 해서…… 책으로 머리통을……”

둘희는 멈추지 않고 다른 일에 대해서도 말했다. 초등학생 때 같은 반에 발달이 떨어지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애가 날 좋아했는데, 매몰차게 떼어냈다고. 그애의 친구는 나뿐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애가 지긋지긋해져서 이제 나한테 알은척하지 말라고 절교를 선언했다고. 그애는 그뒤로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또 중학생 때 옆집 아기를 봐준 적이 있는데, 내가 그애의 고추를 건드렸다고.

“건드렸다고요?”

한기연이 묻자 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가만히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때 자기가 한 행동을 한기연에게 보여주었다.

“궁금했어요. 아기도 그렇게 되는지.”

둘희는 뜨겁게 피가 몰리는 얼굴을 숙였다. 그때 둘희는 아기의 보드라운 살결을 떡처럼 주무르며 말했다. 너희 엄마는 스탠드바에 놀러갔단다. 지금 널 돌봐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둘희는 스탠드바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으면서도 아기를 어르며 울지 말라고 겁박했다. 얼마 뒤 아기에게서 톡 쏘는 지린내가 풍겼고 둘희는 옆집 여자가 가르쳐준 대로 기저귀를 열어봤다. 그러자 아기가 물총을 발사하듯 남은 오줌을 내뿜었다. 둘희는 다급히 기저귀로 소변 줄기를 막았지만 허리춤에 오줌이 스며들었다. 누리끼리하게 젖은 옷을 내려다보며 둘희는 문득 옆집 여자가 왜 탈출하듯 밤 외출을 감행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만약 자신이 남자였다면 그래도 여자가 아기를 맡겼을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남자이고, 이 아이가 여자아이였다면, 여자는 내게 부탁할 수 있었을까. 그뒤로도 둘희는 한 번씩 그때 자신의 추행을 떠올렸다. 특출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두세 살 때의 일도 기억하므로 만약 그 아기가 그때 일을 기억한다면, 혹은 그 방에 감시카메라가 있었다면 둘희는 아동 성추행범이 되는 것이었다. 죄라는 것, 벌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풀렸어요?”

한기연이 물었다. 둘희는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캄캄한 바다 쪽에서 소태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둘희의 이마를 밀치며 남은 죄를 추궁하는 것 같았다.

“더 심한 짓도 많이 했어요.”

둘희가 주저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 일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흙더미 가운데 꽂힌 막대를 건드리지 않으며 가장자리만 무너뜨리는 것처럼 둘희는 가장 위험한 비밀들은 털어놓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검고 독한 기름 덩어리 같았던 일, 어떤 선을 넘어버리고 싶어 함부로 자신을 나락에 빠뜨렸던 일, 스스로 장작이 되고 방화범이 되어 불길을 향해 날뛰었던 일, 타올라 재가 되어야만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순간들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 시절 둘희는 자신이 세상을 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쩔쩔매게 하는 돈이나 섹스, 사회의 규범들이 별것 아니라고 비웃고 싶었다. 겨우 열여섯 살인 주제에. 교복을 입고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면 간밤에 묻은 체액과 토악질의 냄새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거라 여겼다. 스무 살이 넘은 그 시기에도 둘희는 문득문득 비어져 나오는 냉소를 참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자신의 태도가 진지해지거나 간절한 바람이 생기면 그만큼 약해질 것 같아 부러 다른 사람의 가벼움을 흉내내며 자기 영혼에 거꾸로 박힌 진실에 대한 갈증을 업신여겼다. 한기연이 아니었더라면, 한기연의 영화와 한기연이 보여주는 환영이 아니었다면, 둘희는 여전히 핸들 없는 바퀴처럼 경계선 너머로 폭주하며 자신을 상처 입혔을 게 자명했다.

“나는 무서워요.”

한기연이 말했다. 둘희가 메아리처럼 그 말을 따라 했다. 무서워요.

“나는 지쳤어요.” 한기연이 말했고 둘희가 그 말을 되돌려주었다. 지쳤어요. 정말 완전히 지쳐버렸어. 한기연은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다. 자기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둘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아뇨, 전 감독님을 붙잡을 거예요. 못 도망가요. 책임지셔야 해요.”

둘희는 단호함이 느껴지도록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 세상 누구도, 한기연 본인조차도 한기연을 망가뜨릴 수 없었다. 둘희가 모래밭에서 일어섰다.

“울어도 돼요! 이것 봐요!”

둘희는 자기의 튼튼한 허벅지를 자랑하듯 한기연 앞에 두 다리를 벌리고 섰다. 언제라도 한기연이 쓰러져 울 수 있는 푹신하고 아늑한 쿠션이 되어주고 싶었다. 나락인 줄 알고 절벽인 줄 알고 한기연이 추락하면 내가 조밀한 풀숲이 되어 그 몸을 받아주리라. 풀잎과 풀잎의 어깨를 걸고 땅의 머리카락을 끄집어당겨 한기연이 떨어져야 할 절망의 높이를 줄여주리라.

둘희는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바다 쪽으로 흩뿌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한기연에게 소리쳤다.

“들어봐, 지금 이 모래는 모래 한 알이 되기 위해 십만 년을 깎이고 뒹굴었을 거야. 지금 저 별빛은 수백 년을 달려와 너와 내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지금’으로 왔겠지.”

한기연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 말은 <더없이 오래 사는 따개비>에 나오는 대사였다.

“그러니 가여워 마.”

둘희가 영화 속 장면을 따라 했다. 태풍이 몰려오는 바닷가에서 맨발로 발광하던 연인처럼 사지를 흔들며 날뛰었다. 만세! 만세! 하고 크게 외쳤다. 한기연 앞에 풀썩 무릎을 꿇고 말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소설이라면, 한낱 스크린에 비치는 환영일 뿐이라면……”

둘희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지만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환영 만세! 모래야 문장 되고, 별아 씬 되어라!”

둘희가 양손으로 한기연의 어깨를 붙들었다.

“나는 몇 번이고 한기연이란 환영을 다시 볼 거예요.”

 

*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을 약간 포기한다.

논리와 사랑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 거란 오만을 약간 포기하듯이.

레지스탕스였던 화가가 군사혁명을 약간 포기하고, 오래된 괴담을 모아 삽화를 그린 다음 끔찍한 호러물을 펴내는 이야기. 어디서 봤더라?

순수는 더러움을 응시할 수 있는 힘이다.(시몬 베유, 페피가 준 책)

 

0. 지금 필요한 것.

1. ‘언젠가는’ 박살.

2. 화가 날 땐 옷을 찢는 기백. 그런 상쾌한 인물.

3. 대단치 않은 불구경. 혹은 지저분한 스케치 선이 다 드러나는 묽은 수채화.

4. 통속물, 괴기물.

5. 무대에서 내려가 잡스럽게 섞이기. 난장판.

※배우 디렉팅의 본질: 서로의 환영을 공유하기. 함께 상처 입기. 감독은 가장 많이.

6. 하지만 밸런스를 소중하게.

7. 일평생 옳은 방법만 택했다면 그 사람은 아둔하거나 범죄자다.

8. 타락과 변질은 피할 수 없다면

9. 물러서지 않고 기꺼이 아류가 될 것. 약간만 포기한 채.

0. 한번 더 영화를 해보자고.

 

*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에서 둘희는 한기연과 여러 해를 보냈다. 계절이 지나는 동안 둘희는 회전문을 통과하듯 일정한 스텝을 밟으며 자신의 이십대를 통과해갔다. 공적인 삶에서 둘희는 보통의 착실한 직장인이었다. 다른 사람과 한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고 그 신뢰와 안정감으로 자신을 위장했다. 사람들은 둘희가 내면에 품은 반란의 꿈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느 테러리스트의 사생활을 추적하며 이웃을 인터뷰하는 것처럼 혹자는 둘희를 두고 이렇게 말할는지 모른다. 조용하고 성실하던 청년이 왜 그런 짓을……

어느 해 가을 태풍 개미가 도심의 패널 지붕을 잡아뜯던 날, 둘희는 회사의 회식이 길어져 밤늦게 귀가했다. 한기연은 다음날 오후까지 늦잠을 자는 둘희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불현듯 둘희의 회전문을 멈춰 세웠다.

“영화 만들고 싶지 않아? 이제 열정이 사라졌어?”

둘희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둘희가 원하는 건 한기연과 같이 사는 것이었다. 당신이 내 영화예요. 둘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한기연은 연인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은 채 자기의 계획을 말했다. 짧게 압축한 예고편처럼 앞으로 두 사람에게 펼쳐질 미래를 얘기했다. 시나리오 완성과 제작사 미팅, 스태프 구성과 배우 섭외, 로케이션 헌팅…… 그 모든 일이 코앞에 닥친 것처럼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자기랑 같이하고 싶어.”

한기연은 시간이 빠듯하다고 했고 작업에 몰입할 환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기연의 말에 동의했다. 지난한 법적 다툼이 한기연의 승소로 끝났으니 다시 시도해볼 기회가 있었다. 새롭게 출발하는 한기연에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했다. 한기연은 언제나 같이 일을 도모할 동지를 바랐으니까. 연인으로서 섹스나 동거도 중요했지만, 한기연은 서로의 비전을 공유하며 그 이상을 실천해나갈 동료를 바랐다. 마침내 그 시기가 도래한 것 같았다.

“그 바닷가 기억나? 거기로 갈 수 있어.”

한기연은 그간 자신이 준비해온 일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바닷가에 좋은 집이 나왔다고 했다. 오래 비어 있어 내부를 손봐야겠지만, 공사만 끝나면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다고.

“회사는요?”

둘희의 말에 일순 한기연의 표정이 바뀌었다. 한기연은 조금 짜증스러운 말투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진짜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했다. 둘희가 아무런 대꾸도 않자 한기연이 둘희의 팔을 쓸며 사과했다.

“미안, 그건 생각 못했어. 하지만 이번엔 정말 될 거야. 어떻게든 해낼 거야. 자기랑 같이하고 싶어.”

한기연은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진짜’를 만들자고 했다. 진실한 꿈과 압도적인 환영. 그 말은 한기연과 페피가 영화 작업을 두고 쓰는 표현이었지만, 둘희는 그 말이 권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았다. 젊은 시절 권이 정치 활동을 시작했을 때 지지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연설 문구였다. 세상을 바꿀 만한 진실하고 압도적인 꿈을 꿉시다!

그러나 바닷가집으로 가자는 한기연의 말은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다. 둘희는 한기연이 왜 서둘러 일을 진행했는지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그들에겐 변화가 필요했고 바닷가집은 돌파구가 되어줄지 몰랐다. 정작 둘희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둘희는 직장을 그만둔다는 서운함보다 그로 인해 달라질 경제 사정이 불안했다. 무슨 돈으로 집을 사서 이사하지? 앞으로 생활비는 어쩌고?

이튿날 오후 준비된 이벤트처럼 페피가 나타났다. 페피는 자신과 한기연이 마련한 깜짝 선물을 둘희가 기뻐할 거라 기대했다.

“그동안 둘희씨가 직장생활 했으니까 자금 출처는 확실하지.”

페피는 그날의 ‘커브’를 잔에 따라 둘희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전처럼 블라인드를 내려 빛을 가리거나 참나무 테이블을 옮겨놓고 세심하게 자리를 세팅하는 과정은 생략했다. 그날 페피는 흥분한 기색으로 서둘렀다. 둘희가 자기의 말에 더 놀라고 반겨주길 원했다.

“다음주에 집주인과 만나기로 했어요. 인테리어는 한선배가 할 거니까 둘희씨 마음에도 들 거고, 짐 정리나 이사도 신경쓸 거 없어요.”

페피는 연달아 소식을 전하며 둘희의 표정을 살폈다.

“왜, 나예요?”

둘희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선물이 아니라 짐 더미라는 듯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페피는 눈꺼풀을 깜박이며 둘희를 향해 숙이고 있던 등을 바로 했다. 페피는 둘희에게 바닷가집을 사주고 싶어했다. 절차상 둘희가 집주인과 매매하는 방식이었지만 돈은 페피가 댈 거라고 한기연이 이미 설명했다. 하지만 둘희는 페피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왜, 나한테 그런 걸 줘요?”

페피는 세금에 관해 말했다. 상속세와 부동산법에 관해 말했고 자기 모친의 공적인 입장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공직자 가족의 재산 공개와 절세 루트…… 둘희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속으로는 페피가 왜 그토록 자신을 신뢰하는지 의아했다. 대체 나의 어디를 믿고? 아니면 명의 도용을 종용할 만큼 내가 만만해 보이나? 페피가 원하는 건 둘희의 법적 신분이었다. 서슴없이 그런 걸 요구할 만큼 페피는 둘희를 신뢰했다. 동시에 둘희를 손쉽게 사용할 도구로 여겼다. 한마디로 둘희는 페피와 그 가족의 탈법을 알아도 될 만큼 위협적인 존재가 못 된다는 뜻이었다.

페피가 돌아가고 늦은 밤, 한기연이 욕조에 물을 받았다. 둘희는 발가벗은 몸으로 욕조에 발을 담그며 말했다.

“모아놓은 돈이 있어요.”

둘희는 그간 저축한 돈에 퇴직금을 보태 페피에게 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바닷가집을 사야 한다면 자기도 힘을 보태겠다고. 한기연은 미소를 머금으며 둘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표정이었다. 둘희는 연인의 그런 태도가 달갑지 않았지만 순순히 품에 안겼다.

“그렇게 부자예요?”

둘희가 물었다. 한기연은 즉답하지 않은 채 페피가 아트스쿨에 입학할 때의 얘기를 꺼냈다. 페피가 들어오자 건물에 학생 휴게실이 새로 생겼는데, 몇몇 사람이 페피를 ‘라운지 키드’라 불렀다고. 조롱과 부러움이 섞인 별명이었지만, 페피는 신경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난 뭘 줘요? 뭐라도 주고 싶어요.”

둘희가 묻자 한기연이 둘희의 몸을 돌려 어깨선을 따라 입을 맞췄다.

“지구를 구한 슈퍼맨에게 얼마를 줘야 할까?”

한기연이 볼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 둘희의 뺨을 문질렀다. 둘희는 그 수수께끼의 답을 몰랐다.

“아무것도.” 한기연이 말했다.

“지구도, 슈퍼맨도 다 환상이니까.”

한기연은 앞으로 둘희가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거라 했다.

 

바닷가집으로 옮긴 뒤로 한기연은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한기연은 자기가 만드는 허구의 세계에 잠겨들었고 그 이미지 속에서 펄떡펄떡 헤엄쳤다. 진실로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장면과 목소리. 그것만이 세탁기 속 빨래 더미처럼 뒤엉켜 돌아가는 현실에서 한기연을 숨쉬게 해주었다. 제작 과정을 계산하며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구차하고 너저분한 노동의 연속이었지만 한기연은 삽과 자루를 손에 들고 묵묵히 자기의 땅을 일구었다. 그즈음 한기연은 기나긴 시간을 들여 자기 길을 개척한 선구자들의 회고록이나 전기를 읽었다. 예술과 사회학을 포함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앞서 걸어간 이들의 흔적을 절박하게 찾았다. 한기연은 그들이 밟은 땅을 되짚어 걸으며 자신이 길을 잃은 게 아니라고, 멈추지 않는 한 이 길은 끝나지 않는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생활의 악습들도 고쳐갔다. 오래 피운 담배를 끊었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한밤중에 달이 뜬 언덕으로 나가 줄넘기를 했다. 둘희는 알땀을 흘리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어오르는 한기연을 보며 덤벨 스쾃을 했다. 한기연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집안을 청소했고 끼니때마다 영양가 있는 식사를 만들었다. 생활비는 한기연이 건네준 신용카드로 해결했다. 뒷면에 적힌 서명으로 카드의 주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나 둘희는 그에 관해 따져 묻지 않았다. 돈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만큼이나 붙잡을 수 없고 빠르게 흩어지는 하나의 흐름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다만 그 바람결에 잠시 땀과 체취를 묻힐 뿐. 둘희는 자신이 무슨 옷을 입는지, 어떤 직업과 얼마큼의 재산을 가졌는지 고려하지 않았다. 애초에 한기연과 사귀기 시작한 때부터 둘희는 그런 사회적인 형식들에 초연해진 상태였다.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는 바다와 이울고 차오르는 달, 겨울이면 시베리아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오는 재갈매기가 둘희를 무아지경의 흐름으로 데려갔다. 일출과 월출, 노화와 유화, 창조주와 파괴주…… 끝없이 반복되는 대칭의 리듬 속에서 둘희는 자신을 잊었고, 잊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려 꿈속에서 맛본 달콤한 케이크에 입맛을 다시듯 쑥스럽고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잡념은 밑으로 가라앉았고 가슴과 머리는 맑게 개어갔다.

한기연은 옥녀산에 살쾡이가 살았다는 편의점 사장의 얘기에 헤드 랜턴을 쓰고 야간 산행을 했다. 둘희는 바구니가 달린 하늘색 자전거를 샀다. 페달을 밟으며 근처 해수욕장 두 곳을 모두 돌아볼 만큼 둘희의 하체는 날로 야무져갔다. 한기연 역시 퇴고의 퇴고를 거듭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둘희가 곁에서 지켜본 그 과정은 자기의 스타일을 새기기보다 그 스타일을 지우려는 몸부림 같았다. 시나리오가 어떤 반응을 얻든 둘희는 한기연과 열중한 시간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영화 제작뿐 아니라 자신의 삶이 어떤 결말로 끝나든 둘희는 가슴을 펴고 엔딩을 맞이할 수 있었다. 뭐든 원점으로 돌려놓는 바다와 달의 주기가 묘하게도 둘희에게 자신감과 홀가분함을 선사했다. 찬란한 환영 뒤에 환멸이 온다 해도 둘희는 자신이 꾼 꿈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는 꿈과 현실을 나누고 계급을 매기는 속 좁고 치사한 짓이니까. 신비롭게도 둘희는 생애 처음 아량이라는 감정을 체감했고, 그런 마음가짐이 한기연과 함께 몰입하며 보낸 시간에서 비롯됐다는 걸 깨달았다.

 

한기연이 탈고한 시나리오의 제목은 ‘츠히’였다. 츠히는 영화 속 태풍의 이름이자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었다. 인간들이 다투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옳지 못한 자를 향해 외뿔을 들이받는 짐승. 그리고 츠히는 말갈기처럼 길고 덥수룩한 머리를 한 영화 속 아이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배부른 구름>과 <더없이 오래 사는 따개비>에서 이어지는 미성년 인물이었고, 츠히는 이전의 아이보다 더 오물 더미 같은 행색을 하고 세상을 향해 형형한 눈을 빛냈다.

한기연은 두툼한 시나리오를 둘희에게 건네고는 밖으로 나가 둘희가 다 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저물녘이 되자 해변을 배회하다 온 한기연이 바닷바람에 붉게 얼어붙은 뺨으로 둘희에게 말했다.

“자기야, 진실을 말해. 잘 읽었다는 말은 하지 마. 괜찮다는 말은 최악이야. 거짓말로 위로할 거면 차라리 날 찔러. 칼 가져올까?”

둘희는 말없이 한기연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뭐하는 거야?”

“벗어요.”

“이게 대답이야? 이럴 기분 아닌데.”

둘희는 한기연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진한 키스 마크를 남겼다.

“무슨 뜻이야?”

“키스에 무슨 뜻이 있어요?”

“말해줘야지.”

둘희가 상체를 뒤로 젖힌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연인을 봤다.

“어떻게 이런 걸 썼어요?”

“좋다는 뜻이야?”

“비참해요. 그런데 아름다워요.”

한기연은 기력이 다 빠진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처음이야, 이렇게 아득한 거. 장르조차 모르겠어. 멜로드라마? 범죄스릴러? 혼종 같아. 자신이 없어.”

“인생이에요. 그게 이 영화 장르예요.”

둘희는 그간 혹사당했던 한기연의 머리통을 감싼 채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한기연의 시나리오는 모순덩어리였다. 힘있고 박력 있는 서사와 달리 장면들의 배치는 간결했고 대사와 지문은 장식적인 형용사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이미지는 머릿속에 그려질 만큼 구체적이었지만 실제로 촬영하기 전까진 어떤 장면이 될지 예측할 수 없어 활자에 갇힌 시퀀스들이 안달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모든 탁월함을 제쳐두고 둘희가 찬탄한 점은 한기연이 스스로의 틀을 깨뜨렸다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관점이 옳고 스스로의 가치관이 아름다우며 그 미학과 선함이 승리한다는 믿음. 한기연은 그 믿음을 포기한 채(아니, 포기를 가장한 채) 자신의 자리를 불의 쪽으로 옮겨놨다. 정의와 아름다움으로 가려는 자기의 의지에 재를 뿌리고 선악을 판별하려는 이성에 마취제를 놓으며 스스로 부패한 몸뚱이가 되어 구더기 같은 기만과 술수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였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자기의 변질과 누추를 모두가 볼 수 있는 길바닥에 높이 내걸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둘희는 그 질문에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나, 내가 한기연 곁에 있으니까. 한기연은 나를 믿은 거야.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 한 사람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으니까. 그래서 다른 믿음들은 손에서 내려놓고 더 위험한 쪽으로 모험을 감행한 거야. 둘희는 한기연의 긴 머리카락을 입에 머금고 잘근잘근 씹었다. 치밀어오르는 감격을 억누르지 못해 한기연이 흡! 하고 소리 낼 만큼 가슴을 움켜쥐고 젖꼭지를 세게 빨았다.

츠히, 나의 츠히에게. 

 

한기연은 시나리오의 최종본을 만들며 첫 장에 둘희를 위한 헌사를 적었다. 그 옆에 신화 속 동물인 츠히도 그렸다. 그러나 한기연이 스케치한 그림은 영화 속 이미지가 되지 못했다. 제작 기획서나 영화의 홍보물로 옮겨가지 못했고 백지에 박제되었다. 한기연이 시도한 파격과 몸부림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하지만 그때 한기연을 무너뜨린 건 외부의 평가가 아니었다. 한기연이 자신의 모든 작업과 삶의 부산물을 끌어모아 악령 들린 돼지떼처럼 스스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던 건 다름 아닌 권 때문이었다. 권이라는 악령에 씌어서. 둘희는 그 상황을 되짚어 떠올리면 웃음이 났다.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나는 어떤 환영을 봤던 거지? 왜 한기연과 같은 환영을 본다고 착각했을까. 환영 뒤에 환멸이 올 거라고 왜 그렇게 속단했을까. 환멸이 차라리 깨끗한 절망인 줄도 모르고. 환영은 안팎의 구분도 없고 바닥도 없으며 철저한 패배나 종말도 없이 지루하게 되풀이된다는 걸 모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