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주는 <욕+받이> 방송에 욕받이로 나오고 싶다고 출연을 신청했다. 처음 언덕 위 삼층집의 정체를 알고 그렇게 결심하기까지 꼬박 백 일이 걸렸다. 그 백 일 동안 을주는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언덕 위로 달려가 포효를 내질렀다. 을주는 그 집이 신경 쓰였고 신경 쓰이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곳이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는 회사라는 것과 그 방송에서 일반인을 출연자로 앉혀놓고 저질스러운 욕을 해댄다는 걸 알아내는 데 처음 한 달이 걸렸다. 을주는 오복이와 바닷가를 산책할 때마다 옥녀산 언덕배기를 오가는 사람을 관찰했다. 그중 한 명이 옆 동네에 사는 토박이 남자애였다. 편의점을 하는 고모부와 식당을 하는 이모를 통해 그 남자의 이름이 김시후라는 걸 알아낸 다음 김시후가 졸업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추적했다. 그 학교 졸업생들의 SNS를 헤맨 끝에(문득문득 을주는 자신의 음침함에 소스라쳤다) 드디어 김시후의 계정을 찾아냈고 게시글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다 <욕+받이> 채널의 링크를 봤다. 설마 김시후가 그 쓰레기 방송을 만드는 업체의 직원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저 젊은 애가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를 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뭔가 단서가 있을 것 같아(이때부터 을주는 자신의 집요함과 의뭉스러움을 받아들였다) 을주는 실시간 방송을 하는 날 몇 번 채널에 들어갔지만, 번번이 참고 보기 어려운 욕설에 질려 금세 방송을 껐다. 그런데 한번은 그 짧은 접속의 순간에 기겁할 정도로 놀랐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바닷가에서 마주친 어떤 여자가 그 방송에서 ‘다둥이 흙 엄마’로 욕을 먹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기어이 나라가 망하려나. 김시후 이 새끼가 동네 망신을 저기서 다 시키고 있네. 너희 엄마가 너 그러고 다니는 거 아시니?
을주는 두 번 다시 그 여자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사람이 생긴 건 꿀떡처럼 하얗고 동그래서 그런 폐기물 방송을 만들고 있었어? 을주는 딸기 잎에 계피 물을 뿌리다가도 울컥울컥 솟아나는 배신감에 불현듯 콧구멍을 크게 벌리며 분을 삭였다. 속은 것 같았고 시련을 당한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따금 언덕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그 여자를 볼 때면 친한 친구에게 이유도 없이 절교당한 아이처럼 설움이 북받쳤다.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왜 날 모른 척해요?
그렇게 다시 한 달하고 보름이 흘렀다. 을주는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꾸역꾸역 오복이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는 자신을 보며 여자를 향한 자기의 감정을 힘겹게 인정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였다. 그 여자를 향한 의문(우선은 그렇게 결론지었다)을 해소하려면 그 여자와 더 가까이에서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당신 사연이 뭔데, 당신이랑 가까워지려면 나도 사연을 만들어야 하는 거야? 을주는 조금씩 가까워지다 한순간에 불에 덴 듯 자신을 피하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을주 본인도 여자지만, 그렇게 변덕스럽고 독한 게 여자라는 존재인가 싶어 새삼 여자를 좋아하며 살아갈 자신의 앞날이 막막했다. 그 여자는 오복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자기네 집으로 놀러오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젠 오복이가 다가가기 무섭게 자전거를 타고 쌩하고 가버렸다.
처음 그 여자와 인사를 나눈 건 늦여름이었다. 추석이 오기 전, 아직 바닷바람에 눅눅한 열기가 실려 있던 이른 저녁이었다. 그리고 을주는 그해 가을 내내 짝사랑에 빠진 주인공이 나오는 온갖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했고, 겨울이 올 때쯤엔 체중이 오 킬로그램이나 빠졌다. 그렇게 애를 쓰며 다이어트를 해도 살이 빠지지 않던 허벅지가 남몰래 가슴앓이하는 동안 눈에 띄게 가늘어졌다. 을주는 혼자 수없이 되새겼던 여자와의 만남을 헤아렸다. 세 번, 딱 세 번이었다. 바닷가에서 여자와 우연히 마주친 다음 나란히 걸으며 오복이와 함께 해변을 산책한 것. 그 세 번의 만남을 지우려고 을주는 백 일을 소모했다. 그러고도 지우지 못했다. 오히려 그 만남은 을주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미친 여자처럼 삼층집을 훔쳐보고 뜯어보고 배회하게 했다. 을주는 여자와 걸었던 조개무덤을 걸을 때면 마음이 심하게 동요해 조개껍데기 사이로 발뒤축이 푹푹 빠지는 기분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을주는 <욕+받이> 출연 신청서를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여러 번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때마다 을주는 오복이의 따듯한 몸을 쓰다듬고 오복이의 쿰쿰한 입냄새를 맡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이제껏 어떤 마음이 자기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고, 어떤 선택이 기대한 것과 다른 결과를 가져왔어도 후회가 덜했는지 곰곰이 돌이켰다. 을주는 염전 공장으로 음식을 배달 가는 이모부를 따라갔다가 오복이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공장 건물 뒤쪽에서 시멘트 바닥에 엎드린 오복이가 자신을 바라보던 표정, 그 무언의 구조 요청.
그래, 이건 인지상정이야. 연민이야. 연민은 귀한 거지. 나도 이모랑 이모부의 연민 때문에 살았잖아. 연민은 용기를 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그 여자가 울었잖아. 느닷없이 눈물을 잔뜩 흘린 얼굴로 너무 기쁘다고 말했잖아. 개랑 해변을 산책하는 게 울 일이야? 그 정도가 울 일이면 평소에 어떻게 사는 거냐고.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누구한테 협박당하는 건지도 몰라. 내가 모른 척하면 그 여자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언덕 집에서 혼자 가발이나 바꿔 쓰며 살지도 모른다고.
을주는 출연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 여자를 만나려면 자기의 삶을 전부 되감아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를 중심으로 편집해야 했다. 자극적으로, 욕먹을 만한 삶으로.
열 살 때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이모네 가족과 함께 살았음. 중고등학생 때 태권도 특기자였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다 2학년 때 그만둠. 청년 새 일 찾기 센터에서 웹 디자이너 교육을 들은 다음 자격증 세 개를 따서 중소기업에 입사했는데……
을주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몸을 떼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삶을 압축하는 게 끔찍했다. 무엇보다 이건 의리의 문제였다. 스물아홉 살이 되도록 어떻게든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애써온 을주 자신에 대한 의리, 부모님을 포함해 자신이 관계 맺어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 이 요약본은 을주가 지나온 시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더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법이 나을지도 몰랐다.
현재 재산 상태: 200평 규모의 스마트팜 딸기 하우스 두 동 소유. 농진청 청년 영농 지원금 5천만원 빚 있음. 이모부가 몰던 트럭 있음. 친구 없음. 애인 없음. 사랑하는 개 있음. 자식 같은 딸기 있음. 그러나 현재까지 농장 수익은 마이너스. 키 177cm에 과체중이고, 다낭성 난소 증후군으로 생리통과 생리 불순이 심하며……
을주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자판에서 손을 뗐다. 남들한테 욕을 먹기도 전에 자기혐오로 배가 그득해진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백일장에서 ‘악몽’이란 주제로 글을 썼을 때처럼 속이 부글거렸다. 대체 그따위 주제로 글을 쓰게 하는 이유가 뭔가. 왜 아픈 상처를 꺼내 괴롭히는 거야. 그때 을주는 강제로 주어진 글쓰기 주제를 박박 찢고 싶었다. 하지만 또다른 주제인 ‘엄마의 손길’보다 차라리 악몽이 낫긴 했다. 다른 사람의 따듯하고 행복한 기억에 둘러싸여 혼자 소외감을 느끼는 것보다 모두 불행한 악몽 속에서 다 같이 울부짖는 게 더 공평할지도 몰랐다.
사실 을주에겐 남들의 뒷담화를 끌어낼 만한 도드라진 개성이 있었다. 하지만 을주는 그걸 약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오복이의 꼬리 같은 것이었다. 오복이가 기분에 따라 꼬리를 뱅뱅 돌리는 것처럼 을주는 마음이 허기질 때면 자신의 애끼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새끼손가락 옆에 있는 더 작은 애끼. 몰랑하고 보들보들한 여섯번째 손가락. 그 애끼를 만지작거리면 퉁퉁 불어터진 떡국을 후루룩 먹는 것처럼 기분좋은 포만감이 차올랐다. 이모는 국은 뜨끈해야 제맛이라고 했지만, 을주는 식어서 떡이 다 엉겨붙은 떡국이 좋았다. 일부러 떡이 퍼지고 만두피가 불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을주는 자기의 그런 방식이 더 좋다고, 당신도 이렇게 먹으라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세상은 을주에게 열등감을 강요하는 걸까.
우두둑, 우두둑, 을주는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뒤를 돌아봤다. 엎드려 있던 오복이가 고개를 들고서 눈썹 근육을 약간 씰룩였다. 은은하게 오복이의 고린내가 풍겨왔다. 을주는 다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언어로 또다른 인간에게 한 사람의 인간됨을 설명하는 일이 지루하고 불쾌했다.
오복이는 세 형제였어요. 오복이, 칠복이, 팔복이. 그중에 칠복이와 팔복이는 먼저 떠나고 오복이 혼자 남았어요. 오복이라는 이름은 다섯 개의 복이 있단 뜻이에요. 이가 튼튼하고, 심장사상충에 안 걸리고, 갈매기를 쫓고, 오복이를 위협하는 놈이 있으면 물어뜯고, 을주랑 백년해로하기.
을주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이번엔 오복이가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하더니 찹찹찹 소리 내며 입맛을 다셨다. 을주는 칠복이와 팔복이가 어떻게 인간에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쓰지 않았다. 그건 오복이의 악몽일 테니까. 대신 오복이와 바닷가에 관해 썼다. 쓴다는 생각도 없이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오복이는 짠 걸 무서워해요. 그래서 오복이는 매일 바닷가를 산책해요. 오복이는 자기가 무서워하는 걸 지켜봐요. 소금 냄새를 풍기는 무시무시한 바다를 노려봐요. 가소로운 바닷물을 발로 꾹꾹 짓밟아요. 파도가 철썩이면 이를 드러내며 덤벼요. 하지만 발바닥이 노란 갈매기들은 봐줘요. 그냥 좀 까불게 놔둬요. 오복이는 해변에 나뒹구는 슬픔을 잘 찾아요. 슬픔의 냄새를 기막히게 잘 맡아요. 한번은 을주와 해변을 산책하다 어떤 여자를 만났어요. 그 여자는 울기 직전이었죠. 그래서 오복이가 그 여자를 데리고 바닷가를 산책시켜줬어요. 을주는 오복이가 어딘가를 향해 가면 우선 따라가요. 따라가서 살펴봐요. 어디 슬픈 게 있나 하고. 하루는 조개무덤에서 안경테를 찾았어요. 다음날엔 양말 한 짝. 양말도 슬퍼할 수 있을까요? 언제 한번 우리 오복이랑 산책하실래요?
9물 만조
“버러지들, 날 준비 됐나?”
시후가 회의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시후는 물방개가 있는 수조로 걸어가 손가락으로 유리벽을 퉁퉁 튕겼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둘희는 그제야 시간이 꽤 흐른 것을 알아차렸다. 회의실 안에 면접을 보러 온 여자가 가져온 딸기향이 가득차 있었다.
“오복이가 참 양반이네요.”
강선생이 바닥에 엎드린 개를 보며 말했다.
“내숭 떠는 거예요. 사람 잘 물어요.”
여자가 말했다. 그러자 강선생이 머쓱하다는 듯 안경테를 손으로 끌어올렸다.
“아, 자길 위협하는 사람만, 진짜 물지는 않고 겁주는 거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깍지를 꺾으며 관절 소리를 냈다. 그게 여자의 습관인 것 같았다. 둘희는 면접 시간 내내 여자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생각했다. 여자가 나타나기 전에도 둘희는 직원들과 그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할지 얘기했다. 욕받이로 나오려면 닉네임이 필요했다. ‘과체중 장애인’ ‘과체중 고아’ ‘뚱보 페미 모솔녀(시후는 짧은 머리에 뚱뚱한 이 여자는 연애 경험이 없을 거라 했다)’. 하지만 막상 여자를 마주하자 둘희는 그 모든 비속어가 여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실내에 맴도는 딸기향이 머릿속의 거친 말들을 잼처럼 뭉개버리는 것 같았다. 둘희는 여자가 자기소개서에 쓴 딸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우리 ‘금실 오복 딸기’는 과실이 크고 당도가 높을 뿐 아니라 병충해에 강하고 자람새가 좋아……
자람새, 풍부한 안토시아닌, 금지옥엽처럼 귀한 딸기라는 뜻을 가진 딸기 품종 ‘금실’. 둘희는 그 글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금실과 오복. 그리고 시선을 옮겨 딸기와 호박색 눈동자를 봤다. 여자가 데려온 개는 고대의 호박 화석처럼 눈동자가 짙은 노란색이었다. 꼼짝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코에 침을 묻히며 공기에 감도는 냄새를 맡았다.
“결정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둘희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여자와 강선생이 따라 일어났다. 둘희는 만약 이 여자가 방송에 출연한다면 어떤 음식을 먹으면 좋을지 생각했다. 어쩌면 딸기 케이크를 먹으며 디저트 먹방을 할 수도 있었다. 커피도 마실까? 달콤한 밀크티? 둘희는 예쁘고 반짝이는 케이크를 앞에 놓고 맛을 음미하는 여자의 모습을 그려봤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장면을 좋아할까. 이 여자한테 어떤 감정을 끌어낼 거야?
“우리도 같이 나가죠.”
여자가 개를 데리고 사무실을 나가자 강선생이 둘희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시후가 서랍에서 컵라면을 꺼내 자기 책상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강선생이 옷걸이에 걸린 점퍼를 둘희에게 건넸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겨울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둘희는 강선생과 나란히 걸으며 언덕을 내려가는 파란 트럭을 바라봤다.
“태워다드릴까요?”
여자가 트럭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고맙지만, 우리는 걸어서 갑니다!”
강선생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때 트럭 보조석 창으로 개가 기다란 코를 빼꼼 내밀었다.
“어디로 가세요?”
여자가 다시 소리쳐 물었다. 강선생이 둘희에게 물었다.
“어디 따끈한 거 먹으러 갈까요?”
그렇게 말하며 강선생은 뛰듯이 길을 내려갔다. 트럭으로 가서 개를 한번 더 보고 싶은 눈치였다.
“팀장님, 혹시 바지락 칼국수 어떠세요? 겉절이가 아주 맛있다네요.”
간지러움을 참는 얼굴로 강선생이 말했다. 강선생은 막대사탕처럼 자기의 손등을 개에게 내어준 채 혀로 핥게 놔두었다.
“네, 그렇게 합시다.”
둘희는 바닷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다듬으며 말했다. 조금씩 물이 차오르는 해변에서 갈매기들이 크게 울어댔다. 트럭 짐칸에는 모종삽과 흙 포대가 실려 있었다. 고무장화와 연장들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그 여자한테 어떤 감정을 느꼈어? 억눌러도 비집고 나오는 게 있어?
트럭은 해변의 동쪽 길을 향해 갔다. 차 안에 앉을 자리가 부족해 강선생은 짐칸에 타야 했다. 여자가 민망해하며 개를 뒤에 태우겠다고 했으나 강선생이 먼저 타이어를 밟고 짐칸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둘희도 따라 뒤에 타려고 하자 강선생과 여자가 동시에 막아섰다. 여자는 길어야 칠팔 분이면 식당에 도착한다고 말하며 강선생에게 양해를 구했다. 개와 함께 조수석에 탄 둘희는 백미러로 짐칸에 있는 강선생을 확인했다. 강선생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연거푸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바람이 세게 불어 강선생의 회색 머리칼이 수초처럼 위로 흐느적거렸다. 옆에 앉은 개는 입을 벌리고 혓바닥을 내민 채 숨을 헐떡였다. 개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둘희는 불안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또다른 망상이 밀고 들어왔다. 트럭이 급정거해 개가 유리창 밖으로 튕겨나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둘희는 손톱의 가장자리 살을 누르며 좌석에 개를 위한 안전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희는 다시 백미러로 강선생을 살펴보았다.
“천천히 갈까요?”
여자가 양손으로 핸들을 붙잡은 채 둘희를 흘깃 봤다.
“지금도 빠르진 않은데요.” 둘희가 말했다.
“고기 드세요?” 여자가 물었다.
“네.”
“회는요?”
“먹어요.”
“우럭매운탕 좋아하세요? 이모가 그것도 잘하거든요. 해달라고 할까요? 아, 지금은 칼국수만 먹는 게 낫나. 우리 이모 회덮밥도 끝내주는데.”
둘희는 여자가 내뱉은 이모라는 단어에 흠칫했다. 사람들은 이모를 그렇게 불렀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둘희가 말이 없자 여자는 옆에 앉은 개를 잠깐 보더니 속도를 늦추며 과속 방지턱을 넘었다.
3물
둘희는 언제 처음 한기연을 자신의 이모라고 소개했을까.
대학에 다니는 동안 둘희는 학교 근처 작은 원룸에서 혼자 지냈다. 그 시절 한기연은 표절 시비로 인한 법적 소송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둘희는 주말에만 한기연의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고 졸업한 뒤에야 자취방을 정리하고 한기연의 오피스텔로 짐을 옮겼다. 둘희는 월세를 아껴 한기연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정작 한기연은 한 번도 자신의 경제 상황을 걱정하거나 둘희에게 생활비를 보태라는 말을 한 적 없었으나 둘희 자신이 그렇게 하길 원했다. 한기연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고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연인과 모든 걸 공유하고픈 마음과는 다른 차원의 책임감이었다. 둘희는 학교생활 내내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 공부나 외국어 공부를 꾸준히 했고 졸업식을 앞두고 전일제로 직장을 구했다. 지역 공공기관의 문화 사업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둘희는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한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붙었어요! 다음달부터 출근하래요!”
한기연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어디서든 둘희씨는 빛날 거라고 축하와 용기의 말을 해주었다. 전화를 끊은 다음 둘희는 또 누구에게 알려야 할지 생각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기연과 만나는 동안 둘희는 거의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이따금 연인이 아닌 친구가 필요했으나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면 번번이 둘희가 먼저 상대와 거리를 두었다. 사귀는 연인에 관해 말해야 할 때나 한기연을 설명해야 할 때. 남자친구라고 속이거나 예술 쪽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었으나 둘희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타인의 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둘희에겐 사교 관계보다 자기의 힘으로 살아남아 한기연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일 하나에 모든 에너지를 쏟기에도 모자랐다. 게다가 어떻게 소문이 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기연을 사람들에게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둘희는 사람들의 악의가 어떻게 삶을 난도질하는지 잘 알았다. 인간이란 존재는 믿음과 애정을 쏟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냉소적인 마음도 있었다. 사랑은 사랑 아닌 것들을 부정하고 멸시하게 했고 고립을 불러왔다. 둘희는 그마저도 연인을 위한 헌신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랑으로 단단히 무장한 마음은 사랑 아닌 것들을 탈색하고 납작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론 그런 분명한 경계가 둘희가 품은 절대적인 감정을 더욱 순결한 것으로 격상시켜주었다.
부모와 멀어졌을 때도 둘희는 생각보다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자기들의 품안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부모의 진부한 태도에 둘희는 단호하게 돌아섰고, 그런 자기의 결정에 속으로 놀랐다. 둘희는 부모에게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둘희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계관이란 말이 어떤 이에겐 관념적이고 거창하게 들릴 수 있으나 둘희는 실제로 그렇게 느꼈다.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둘희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핏줄로 이어진 관계보다 어떤 세상을 바라고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가 더 절실한 문제로 여겨졌다. 숨쉬는 공기만큼이나 마시는 물만큼이나 둘희는 이상향이 필요했다. 한기연과 함께 그 이상을 위해 차근차근 노력해가고 싶었다. 부모는 그런 둘희를 사이비 종교에 빠진 신자처럼 취급했다. 딸이 미쳤다고 했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믿었다. 한기연이 여자라서가 아니었다. 부모는 한기연의 성별이나 직업은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한기연의 나이뿐이었다. 둘희가 한기연과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살겠다고 선언하자 그렇게 반응한 것이었다. 만약 한기연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걸 알았다면 아빠의 분노가 덜했을까? 일부러 결혼하지 않는 게 아니라 결혼할 수 없는 관계라고 말했다면 엄마의 우울증이 생기지 않았을까?
“독립은 누구나 힘들어. 부모님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거야.”
한기연은 둘희의 결심을 헤아리며 위로해주었다. 한기연 역시 아버지와 절연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둘희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둘희는 한기연의 말을 신뢰했으나 한편으론 한기연이 좀더 부모님의 마음을 대변해주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말라고, 엄마의 전화를 그렇게 피하지만 말라고 조언해주었다면 둘희의 태도가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졌을까.
“엄마가 나 땜에 약을 먹는대요. 불면증이랑 우울증이 생겼대요.”
어느 날엔 둘희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한기연은 담담하게 반응했다.
“괜찮아지실 거야. 그 나이대에는 조금씩 그래.”
둘희는 나이 때문이라는 한기연의 말에 놀랐다. 그게 아니라고, 엄마의 병은 갱년기 호르몬 변화 때문이 아니라고, 내가 엄마를 배신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이 엄마의 잠을 찢고 내장을 비틀어서, 그래서 엄마는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넘긴 채 자기의 삶을 반추하며 한없는 절망에 빠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 다 말하지 못해서, 내가 도망치고 회피해서.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한기연을 원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부모에게 한기연에 관해 말해야 옳을까? 말했다가 아버지가 한기연을 찾아오기라도 하면, 엄마가 한기연을 만나 비난한다면,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 시절 둘희와 한기연의 유일한 친구는 페피였다. 페피는 오피스텔에 올 때마다 그 계절에 걸맞은 꽃다발을 들고 왔다. 봄에는 정신이 아찔할 만큼 향이 강한 프리지어와 새하얀 옥살리스, 여름에는 새빨간 달리아, 가을에는 거친 크래프트지에 둘둘 만 국화, 겨울에는 커다란 구상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끌고 와 두 여자의 거실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며주었다.
“아, 예쁜 토막 시체, 또 가져왔네?”
페피가 꽃을 사오면 한기연은 가슴 가득 꽃다발을 끌어안고서 춤을 췄다. 바닥에 물이 뚝뚝 흐르고 춤을 추다 꽃대가 꺾여도 한기연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과장된 어투와 몸동작으로 페피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한기연만의 환영 방식이었다. 페피와 한기연의 방식. 그러고는 다음날이면 한기연은 꽃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페피도 자기가 들고 온 꽃이 흙빛으로 말라비틀어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야 또다른 꽃으로 한기연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한기연을 이렇게 만든 거야?”
페피는 한기연이 얼마큼 변했는지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 천하의 한기연이 어떻게 앞치마를 두르고 떡볶이떡을 하나씩 떼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냐며 곁에 앉은 한기연을 골려댔다. 페피는 이 별난 외래종이 다른 사람을 위해 고추장을 물에 풀고(한기연은 고추장이나 된장처럼 나트륨이 많은 양념을 질색했다), 수제 어묵을 사기 위해 재래시장을 헤매고 다닐 줄은 몰랐다고 했다. 페피는 둘희의 지난 생일날 한기연의 부탁으로 함께 깜짝 파티를 준비했던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이미 여러 번 말한 그 에피소드는 한기연의 예민한 성격과 유별난 생활 습관을 험담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이 인간이 다른 사람이랑 한 침대에서 자는지 모르겠다고, 어떻게 이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자기 책장을 타인과 공유하는지 모르겠다고(페피가 말하길 한기연은 단상을 끄적여놓은 자기 책을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들춰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만큼 둘희를 향한 한기연의 감정이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페피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둘희는 자신을 향한 한기연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사랑은 아무리 두 사람이 열렬히 주고받는다 해도 언제나 그 사랑을 보며 감탄해줄 제3자의 눈이 필요했다. 둘희는 페피의 말에 안심했고 한기연 역시 어린 연인에게 더 살갑게 대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성향을 페피가 보완해준다고 여겼다.
보리, 구리, 위스키의 밤.
페피가 오면 오피스텔 거실에 위스키 테이블이 차려졌다. 페피는 실내조명을 모두 끄고 블라인드를 내린 다음 자신이 선물한 진한 오렌지빛 등을 켰다. 역시나 페피가 선물했지만, 한기연이 구석에 처박아둔 묵직한 참나무 테이블을 거실에 옮겨놓고서 그 위에 자신이 위스키 전문 경매 사이트에서 사들인 ‘커브’를 올려놨다.
“우리에겐 커브가 필요해. 따르고 마시고 붕 뜨고 그렇게 돌아가는 거지.”
페피는 자신이 좋아하는 싱글 몰트 위스키를 그렇게 표현했다. 투명한 갈색 액체 안에 자신이 좋아하는 보리와 구리와 스모키가 모두 들어 있다고, 그걸 마시면 어떤 장애물도 휘휘 넘을 수 있는 대범함이 생긴다고 말했다. 페피는 위스키에 관해 잘 모르는 둘희에게 싱글 몰트와 블렌디드 위스키가 어떻게 다른지 자세히 설명해줬다. 발아시킨 보리를 원료로 구리 항아리에서 증류한 이 쓰디쓴 액체가 어떻게 우리를 중력의 삶에서 해방시키는지 알려주고 싶어했다.
“봐요, 둘희씨. 이 안에 든 건 다 자연이 만든 거예요. 그냥 통째로 지구예요. 흙, 나무, 물, 돌. 이 위스키는 바닷가 석회암을 통과한 물로 만든 거예요. 느껴져요? 나처럼 입에 머금고 혀로 굴려봐요.”
페피는 둘희에게 위스키를 음미하는 시범을 보였다. 손목을 크게 돌려 유리잔 안에 갈색 소용돌이를 일으킨 다음 눈과 코로 먼저 위스키의 색과 향을 느꼈다. 술을 입 안에 머금고 한동안 코로 숨을 들이마시며 위스키의 미묘한 보디감을 감별하기도 했다. 페피는 둘희 곁에 바짝 붙어앉아 오크통과 미네랄의 함량에 따라 혀를 쏘는 맛이 어떻게 다른지 기나긴 묘사를 이어갔다.
“자기야, 맥주 줄까?”
그럴 때 한기연은 두 사람의 시음을 방해하며 어깃장을 놨다. 페피가 위스키에서 대서양의 바닷바람이 느껴진다고 말할 땐 풋 하는 소리를 크게 내며 웃었다. 뜬금없이 둘희에게 “뭔가 해초 냄새 안 나요?”라고 말하며 페피의 말투를 흉내내기도 했다.
“입다물어. 지금 둘희씨 피니시 느끼는 중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페피는 둘희에게 자기의 위스키 취향을 전해주고 싶어 안달했는데, 사실 둘희는 페피가 강조하는 위스키의 알싸한 여운보다 한기연과 함께 마시는 청량한 라거가 더 좋았다. 페피가 가져온 술들은 대체로 강한 떫은맛에 입속이 벙벙해질 뿐 페피가 말하는 너트나 꿀, 재스민 같은 향을 세세하게 느낄 순 없었다. 둘희는 어느 날엔 건초를 씹는 소가 된 기분이었고 얼핏 곰팡내가 나서 구역감이 들기도 했으며 차라리 감기약을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그런 와일드한 술을 마시면 둘희는 금세 취기가 올라 자칫 실수할지도 몰랐기에 속으로 더 긴장해야 했다.
그래도 둘희는 페피가 주최하는 ‘보리, 구리, 위스키의 밤’이 좋았다. 페피의 커브에 따라 함께 몸이 기우뚱 쏠리는 기분이 좋았다. 페피가 가져오는 고급 치즈나 처음 맛보는 초콜릿도 신기했고 페피가 신경써 배치한 위스키병과 튤립 모양의 잔에 오렌지빛 조명이 반사되는 정경도 좋았다. 하지만 한기연은 마뜩잖은 얼굴로 혼자 흑맥주를 마시거나 샷잔에 자기의 버번을 따라 단숨에 비웠다. 어느 날엔 페피가 질색하는 방법으로 싱글 몰트를 마셨다
“지옥 간다. 선배 그러다 지옥 가.”
페피는 커다란 얼음을 넣어 귀한 한정판 위스키를 희석해 마시는 한기연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한기연은 계속 페피의 취향에 찬물을 끼얹었는데, 페피가 애써 골라놓은 음악은 축축해서 싫다고 했고 위스키향을 망친다며 페피가 펄펄 뛰어도 아랑곳없이 아로마 향초를 피웠다. 그러나 평소엔 한기연이 우위에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보리, 구리, 위스키의 밤’이 되면 페피 쪽으로 힘이 기울었다. 진실한 말에는 언제나 분위기를 사로잡는 아우라가 있기 마련이었다. 페피는 수십 년 동안 참나무통에서 참고 버틴 알코올을 동력 삼아 자기의 속내를 꺼냈다. 그럴 때면 한기연의 비아냥도 페피에게 그리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너희가 진짜 내 혈육 같아.”
취기에 다소 자세가 무너진 페피가 한기연과 둘희를 보며 말했다.
“질린다, 다른 비유 없어?”
“집은 어때, 사람이 집이 될 수도 있나?”
“무덤 같은 거야? 그래서 올 때마다 꽃을 들고 오니?”
“뭔가 연결감이 들어. 그런 걸 뭐라고 하지? 동료보다는 가깝고 친구보다는 좀더 공적인데, 뭔가 영차영차 어깨를 걸고 같이 가는 거.”
“연대?”
솔트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둘희가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동지?”라고 말했고 페피는 그런 둘희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셋 다 비밀이 많지.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하지.”
한기연이 말했다. 페피는 분위기 좀 깨지 말라며 한기연을 타박했고 통에 담긴 얼음을 맨손으로 집어 자기 이마에 문질렀다. 그렇게 한동안 셋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페피와 한기연은 서재로 들어가 두 사람만의 얘기를 이어갔다. 때론 한기연이 쓰는 시나리오에 관해 말하기도 했고 페피가 몸담은 가족 사업에 관한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꽃과 술과 (민감한) 서류. 페피가 양손 가득 들고 오는 선물 꾸러미에는 언제나 두툼한 서류들이 끼어 있었다. 어쩌면 꽃과 술은 그 서류를 위장하기 위한 포장일지도 몰랐다. 한기연과 페피는 가벼운 취기에 휩싸여 서재로 들어가 그 서류를 보았다. 때로는 페피가 집에 오자마자 한기연과 서재로 들어가 한참을 둘이 그 안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면 페피는 늘 불평하듯 말했다.
“부럽다. 나도 여기서 살면 안 돼?”
페피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바닥에 담요 한 장만 깔아달라며 넉살을 부렸다.
“가, 너희 집에 방 많잖아.”
한기연은 페피의 그런 어리광을 조금도 받아주지 않고 등을 떠밀었다. 페피가 아무리 술에 취하고 늦장을 부려도 한기연은 페피를 오피스텔에서 재우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가기 싫은가봐요.”
어느 날엔 가까스로 페피를 보내고 난 둘희가 한기연에게 다가가 말했다. 한기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페피가 마셨던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끔 쟤를 도려내고 싶어.”
둘희는 한기연의 말에 놀랐지만, 한기연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기연은 페피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여겼다. 자신이 페피를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질기고 치사하게.
“둘은 동지잖아요.”
둘희가 말하면 한기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동지 관계는 끝났어. 페피는 내 적이야. 오늘은 나한테 뒤로 물러서라고 하더라. 내가 음모론을 키운다고. 이제 내 간판은 쓸모없는 거지.”
한기연이 씁쓸하게 말했다. 둘희는 한기연의 팔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당신이 어디에 있건 나는 당신 곁에 있을 거라고. 내 간판은 오직 당신뿐이라고.
“괜찮아. 적은 나를 단련시키니까.”
한기연이 둘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한기연은 페피가 떠나면 먼지를 씻어내듯 둘희를 안으며 살결에 얼굴을 문질렀다. 오래 갈증을 참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둘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페피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한기연은 둘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둘희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둘희는 씻어야 한다며 한기연을 밀쳐냈지만, 한기연은 그럴수록 더 격렬하게 둘희의 몸에 키스했다. 둘희의 거웃에 얼굴을 묻고 붉은 돌기를 혀로 감쌌다. 둘희는 한기연의 어깨를 붙잡고서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한기연의 혀가 점점 더 세게 그곳을 자극하면 둘희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온몸의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고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서 있지 못할 만큼 둘희가 흥분했을 때야 한기연은 입술을 떼고 둘희를 올려다봤다. 무엇이 한기연을 이렇게 간절하게 만들었을까? 나의 무엇이? 둘희는 한기연의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한기연은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둘희의 속옷을 끌어올려준 다음 둘희의 배를 끌어안았다. 둘희가 고개를 한껏 수그린 채 한기연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내 아기, 내 모든 것.”
진실로 둘희는 한기연이 자신의 아기 같았다. 몸 어딘가에서 자라나 심장을 찢고 나온 나의 아기. 한기연이 둘희보다 나이가 더 많았지만 둘 사이에 그런 생물학적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둘희는 한기연과 핏줄로 연결된 느낌이었다. 남들이 그 피를 뭐라 부르든, 어떤 말로 모욕하든 상관없었다. 한기연의 심장에서 나온 피가 둘희의 맥박으로 흘러 다시 한기연의 몸으로 이어진다면 둘희의 삶은 따듯해질 수 있었다.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느껴지는 그 깊고 뜨거운 연결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둘희는 혈육 같다고 말한 페피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핏줄이 끊어질 때 둘희 자신이 얼마나 피투성이가 될지는 미처 몰랐다. 한몸처럼 느끼고 하나의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었기에 둘희는 한기연이 긋는 작은 칼날에도 피범벅이 되어버렸다.
“경비원이 몇 호실로 가느냐고 물었어요.”
언젠가 둘희가 그렇게 말했을 때 한기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어느 새벽 두 사람이 함께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모습을 경비원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자 한기연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앞으로는 이모네 집에 간다고 말해.”
집으로 들어서자 한기연이 말했다. 둘희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모라는 호칭에 놀랐다. 뭐라 대꾸할 수도 없을 만큼 그 단어가 낯설고 의아했다. 그 의아함은 조금씩 반감으로 바뀌었고 둘희는 처음으로 한기연의 태도에 실망했다. 세상이 두 사람을 보는 속되고 부주의한 시선, 그 시선에 침범당한 기분이었다. 한기연이 그 침입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창밖으로 동이 터올 때까지 둘희는 권을 생각했다. 권이었다면 어땠을까. 한기연은 권이었어도 관계를 속였을까? 아니, 과거의 한기연은 권과의 관계를 인정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언론, 어떻게 튕겨 무엇으로 되돌아올지 모를 담벼락 같은 언론에 대고 동성애 관계를 시인했다. 그 여자와 내가 다른 점이 뭘까. 덜 유명하다는 것? 나이가 어리고 가진 게 없다는 것? 아니면 그저 그 여자만큼 나를 좋아하진 않는 건가? 굳이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만큼? 직접 만나지만 않을 뿐 한기연에겐 권을 향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권의 소식을 찾아보고 라디오 인터뷰를 찾아 듣는 한기연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둘희는 자신의 연인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