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8물

허구와 현실 세계는 정확히 연동한다.

한쪽의 실재감을 옅게 하면

다른 쪽의 실재감도 같이 옅어진다.*

 

 

8

 

권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연단 위에 서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내듯 음성을 바꾸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꿈깨!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권은 자신을 비웃던 이들의 말을 따라 하며 그곳에 모인 자신의 지지자들을 자극했다. 둘희는 몰려든 군중과 함께 무대 앞쪽에 서서 권을 올려다봤다. 둘희가 아는 중년의 권보다 훨씬 더 어리고 패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냉소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똑똑하고 현실적인 체하며 우리가 품은 희망과 열정을 비웃습니다. 할 수 있다, 해보자, 죽을힘을 다해 싸워보자, 이것이 정치 아닙니까? 그들의 머릿속에는 안 되리라는 패배주의만 가득합니다.”

권은 연설문 한 번 흘깃거리지 않고서 막힘없이 내뱉었다. 둘희는 풀색 리넨 원피스 차림에 긴 생머리를 풀어헤친 권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권의 목소리가 가슴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깨뜨리고 폭발하게 했다. 권은 마치 깃발을 치켜들듯 허공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너희, 돈과 권력의 오물들아! 산업화와 민주화가 붙어먹은 구시대의 유령들아! 너희에게 정치란 한낱 ‘황제의 시계’일 뿐이다. 아홉시에 약속이 있는 황제는 열시에 일어나 밥을 처먹고 커피를 마시다 문득 시계를 올려보며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시계를 아홉시에 맞춰놓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사람들은 구호와 포효를 동시에 터뜨리며 권이 있는 가설무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둘희는 순식간에 주위를 에워싼 인파에 몸이 떠밀렸다. 옆 사람의 가슴과 뒷사람의 사타구니가 둘희의 몸에 바짝 와닿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권이 선창하자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법 앞에, 평등하다.

“정치가 현실이라고요? 아니요, 이제 정치는 판타지입니다. 우리가 왜 그따위 현실을 반복해야 합니까? 현실을 박살 내고 우리의 꿈을 만듭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역사와 반복이 아니라 창조와 가설입니다. 현실이 어떻다, 여론이 어떻다, 그런 비겁한 논리는 집어치우고 우리의 판타지를 실현합시다. 오직 꿈을 꿉시다. 우리의 비전, 우리의 사랑을 실험하고 우리의 서사를 새로 씁시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누구든지 모든 영역에 있어……”

권은 눈물을 흘렸다. 격한 감정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모든 국민은 누구든지 모든 영역에 있어……”

둘희는 몸을 옹송그린 채 신음을 뱉었다. 조금씩 팔다리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팀장니임, 팀장니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으나 둘희는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권이 입은 풀색 리넨 원피스를 본 순간 둘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계속 꿈속에 남아 권의 말을 듣고 싶었다. 군중 속에 서서 권을 지켜보고 있을 한기연을 찾고 싶었다. 찾아내 한기연과 권을 떼어놓고 한기연의 과거를 새로 쓰고 싶었다.

“팀장님, 정신이 드세요?”

강선생이 허리를 숙인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둘희를 봤다.

아.

둘희는 흠씬 두들겨맞은 것처럼 온몸에 통증이 일었다.

“괜찮으세요? 왜 여기 계세요.”

아.

둘희는 입술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둘러보며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아래에서 분비물이 나왔는지 팬티가 축축했다. 그곳은 승합차 뒷좌석이었다. 하지만 둘희는 어쩌다 자신이 거기에 와 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듯 기억의 일부가 머릿속에서 떨어져나간 것 같았다. 속이 메스껍고 팔다리가 한없이 무거웠다. ‘강선생님, 저를 못 본 척해주십시오.’ 둘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파르르 입술만 떨릴 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밤새 여기 계신 건가요?”

강선생이 난감한 얼굴로 무언가를 찾듯 승합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입을 벌려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둘희는 겨우 몸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에 강선생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려는 것 같았다. 둘희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강선생님, 소란 피우지 마십시오. 제 성격 모르십니까?’

둘희와 강선생은 말없이 서로를 봤다. 둘희는 강선생의 그 자상한 표정에 숨이 막혔다. 강선생은 욕받이로 나온 출연자를 볼 때처럼 둘희를 보고 있었다. 강선생이 입고 있던 겨울 점퍼를 벗었다.

“밖에 눈이 많이 왔습니다. 밤새 내렸어요. 저는 새벽 미사를 드리고 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와봤습니다.”

강선생이 둘희의 어깨에 점퍼를 덮어주며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업히라는 듯 둘희에게 등을 보이며 앉았다. 둘희가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제가 가서 신발을 가져오겠습니다.”

강선생이 승합차의 뒷문을 열었다. 문을 여닫는 짧은 순간에 바깥의 빛과 소음이 차 안으로 들이닥쳤다. 왯, 왯, 왯 바닷가의 갈매기가 크게 울어댔고 언덕 아래에서 트로트 메들리가 들려왔다. 둘희는 새까매진 자기의 발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둘희는 강선생에게 기대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둘희가 신은 슬리퍼는 시후의 것이었다. 강선생은 사무실에 신발이 이것밖에 없다며 슬리퍼를 코 가까이에 대고는 냄새를 맡았다. 슬리퍼 안감에 덧대어진 솜이 꼬질꼬질했다. 계단을 오르며 둘희는 복도 창유리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봤다. 검은 코듀로이 셔츠에 짧은 가발을 쓰고 있었다. 가슴과 배를 압박하는 전신 속옷과 검은 정장 바지도 그대로였다. 신발만, 신발과 양말만 어딘가에 벗어놓았는지 없었다.

이층 사무실 앞에 다다르자 강선생이 걸음을 멈췄다. ‘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묻듯 강선생이 삼층을 올려다봤다. 그는 둘희와 한기연이 삼층에 함께 산다는 걸 알았지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둘희를 부축하던 그때도 그는 말없이 위층을 올려다볼 뿐 자기의 의견을 말하지 않은 채 둘희의 결정을 기다렸다. 둘희는 강선생과 자기 사이에 있는 그 무언의 거리를 없애고 싶지 않았다. 하나하나 캐묻는 대신 미루어 짐작하며 배려하는 둘 사이의 약속된 태도를 이런 식으로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강선생이 문을 열자 사무실 안의 온기가 밀려들었다. 강선생이 슬리퍼를 가지러 왔을 때 온풍기를 켜놓았는지 실내가 따뜻했다. 둘희는 강선생이 이끄는 대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의 전면 유리창으로 환한 아침빛이 쏟아졌다. 맑고 추운 겨울날이었다. 둘희는 회색 소파에 앉아 건물 난간에 쌓인 흰 눈을 바라봤다.

“추운 데 있어서 목이 잠겼나보네요. 여기에 써주시겠어요?”

강선생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둘희에게 내밀었다. 둘희는 휴대전화를 받아들고서 메모장에 글자를 입력했다.

 

사고가 잇엇습니다

 

“무슨 사고요? 다치셨나요?”

강선생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둘희는 진심으로 놀라는 그의 표정에 힘이 빠지며 허탈감이 몰려왔다. 차라리 내가 소주병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 모습을 강선생이 직접 봤더라면 나았을 텐데. 둘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옳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강선생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진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뭐가 진실이지? 둘희는 진실을 알 수 있다면 바닷가로 나가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그렇게 쉽게 드러내지 마. 모든 건 암시야. 너의 장점을 숨기는 게 결국 너의 결점을 가려주는 거야. 인물들을 발가벗기지 마. 의심하고 주저하고 억제해. 네가 참는 만큼 인물들은 위엄을 갖는 거야.

“그래서 차에 계셨던 건가요? 사고 때문에?”

넋을 놓고 있는 둘희에게 강선생이 물었다. 둘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저 혼란스러움을 뜻하는 고갯짓이었다. 둘희는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글자를 입력했다.

 

오늘 오전 어ㅂ무 부타ㄱ

 

둘희는 글자를 마저 쓰지 못한 채 휴대전화를 든 팔을 아래로 떨구었다.

“팀장님, 오늘은 주일입니다. 저는 성당에 갔다가 승합차가 지나가는 걸 봐서 와봤어요. 이 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는데 누가……”

강선생이 문득 말을 멈추고는 수납장으로 걸어가 베이지색 담요를 꺼냈다. 그는 더이상 설명하거나 묻지 않고서 둘희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둘희는 강선생의 희끗한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힘없이 눈을 깜박였다. 강선생은 따뜻한 차를 갖다주겠다고 말하며 일어섰다. 문을 닫으며 그가 당부하듯 덧붙였다.

“다음부턴 그렇게 참지만 마시고 같이 화를 내세요. 상대가 폭력을 쓸 때 맞서는 건 정당방위입니다.”

둘희는 그의 조언을 비웃고 싶었지만, 웃음 대신 눈물이 차올랐다. 참으로 강선생 다운 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많은 걸 꿰뚫어봤다. 무슨 일이 생길지 훤히 다 짐작하면서도 둘희 혼자 위험 속에 내버려뒀다. 출연자를 사무실에 남겨두자고 한 사람이 누구였나? 586세대를 욕받이로 출연시키자고 제안한 사람이 누구였지? 출연자가 자기의 인생사를 꾹꾹 눌러 담아 쓴 글에서 위암 수술이 담긴 부분만 뺀 채 둘희에게 전달한 사람, 장년 남성의 심리적 위기에 관한 기사를 회사 단톡방에 올려 시후가 발기부전이란 단어를 꺼내도록 유도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물방개 로또에는 정말 플라스틱 수초 말고는 아무런 비밀 장치도 없었을까?

둘희는 손에 쥐고 있는 강선생의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바탕화면에 적갈색 벽돌로 된 성당의 첨탑 사진이 있었다. 둘희는 강선생이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는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성당 사람들은 강선생이 스타킹을 뒤집어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욕받이의 가슴에 노란 명찰을 달아주는 모습을, ‘욕+받이’라는 채널의 이름을 생각해낸 그의 머릿속을 꿈에라도 짐작할 수 있을까?

둘희는 강선생이 회사에 처음 출근했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바다의 윤슬이 빛나던 여름날, 승합차에서 내린 그는 둘희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런데 왜 그는 이제 와 시치미를 떼는 걸까? 화를 내라고? 정당방위라고? 강선생은 그날 둘희가 악쓰며 발악했던 걸 잊은 건가? 강선생 본인이 어떤 역할로 이 회사에 왔는지 둘희가 모를 거라 생각하나?

시후가 처음 회사에 왔을 때 강선생은 자기를 고지식한 늙은이라 소개했다. 평생 회사생활만 하다 퇴직해 지금은 혼자 사는 형님을 돌보기 위해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말했다. 나이든 자신이 잘 모르는 게 있거든 젊고 똑똑한 시후씨가 너그럽게 이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시후에게 이 회사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마치 구직 사이트를 통해 이곳을 찾아온 듯이. 둘희는 강선생이 시후에게 자기 사정을 풀어놓을 때마다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강선생과 둘희 모두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둘희는 강선생의 어떤 모습이 거짓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출연자들에게 선생님이라 존칭하며 유순한 미소를 보이는 위선이 가짜인지, 아니면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욕받이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 직접 방송 출연을 제안하는 위악이 가짜인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가면이 매캐한 가스처럼 강선생의 주위를 둘러싸 둘희를 혼란에 빠뜨렸다.

성실한 사람이야. 무던한 편이라 잘 적응할 거야.

아니, 강선생은 까다롭고 과민하며 언제나 극단적인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타인의 기분이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렸고 다른 사람과 의견이 충돌할 땐 자기의 뜻을 굽혔다. 하지만 상대의 주장을 맞춰주면서 상대가 손에 든 무기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했다. 센 척하며 자기 속마음을 다 드러내 보이는 시후와는 달랐다. 시후 같은 애송이는 몇 명이 있건 그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강선생은 시후를 주시하며 그의 행동거지를 기록했고 시후의 언행이 도를 넘을 때는 한기연의 이름으로 시후에게 경고 메일을 보냈다. 강선생은 자기의 삶에서 가장 큰 위험과 견디기 힘든 고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몸속 제일 깊숙이 박힌 탄알을 빼내기 위해 그로 인한 아픔은 기꺼이 감수했다. 언젠가 펼쳐질지 모를 미래의 희박한 가능성만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듯 거짓말과 욕설을 자기의 몫으로 받아들였다.

둘희는 강선생과 지낼수록 그가 자신과 닮은 사람이란 걸 알아챘다. 당연한 일이었다. 강선생과 둘희 모두 한 사람의 취향으로 선택된 직원이니까. 다루기 쉬워 보이지만 결코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사람, 비밀을 유지하는 힘이 돌덩이처럼 무겁고 암담한 사람, 그만큼 깊은 수치심과 불안이 삶의 순간순간에 파편처럼 박혀 있는 사람.

두려우세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렇게 말하듯 강선생이 둘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손에는 캐모마일차가 담긴 컵과 둘희의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이틀 전 방송이 있던 날, 둘희가 책상 서랍에 넣어둔 것이었다.

 

9물 간조

 

월요일 아침, 을주는 간밤에 쏟아진 눈을 쓸기 위해 긴 싸리 빗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일요일 낮에 쓸어놓은 길이 또다시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골목부터 식당 앞까지 오복이가 지나간 발자국이 눈밭에 찍혀 있었다. 불꽃처럼 위로 솟아오른 발가락 볼과 가운데 장구가 황홀할 정도로 싱그러워 보였다. 을주는 만약 자신이 만화가의 꿈을 이뤘다면 작품 맨 끝 페이지마다 엠블럼처럼 개의 발 도장을 찍었을 거라 생각했다.

“을주야, 그냥 저기 삽으로 싹 밀어!”

식당 처마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이모가 소리쳤다. 이모는 흡연용 점퍼를 입고서 맛있게 연기를 내뿜었다. 음식 만지는 사람은 늘 손이 깨끗해야 한다며 이모는 하루에 딱 두 번, 식당 오픈 전과 마감 후에만 담배를 피웠고 옷에 냄새가 배지 않게 흡연용 점퍼를 만들어 담배를 피울 때 입었다. 을주는 제설 삽으로 눈을 치우라는 이모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제설 삽을 쓰면 더 빠르게 눈을 치울 수 있었지만, 을주는 삽날이 땅바닥에 끌리는 거친 소리가 싫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빗자루로 살살 밀어 단정하게 모아두고 싶었다. 반짝거리는 눈가루를 한 방향으로 쓸 때면 을주는 누군가의 긴 머리칼을 빗겨주는 것처럼 기분이 삼삼했다.

“이모, 나한테 욕해봐.”

을주가 싸리비로 눈밭을 삭삭 훔치며 말했다.

“무슨 욕?”

“아무 욕이나. 해봐.”

“왜, 누가 너한테 욕해?”

이모가 빗질하는 을주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아니, 욕 들은 지가 오래돼서. 감이 좀 떨어졌네.”

을주는 전날 밤부터 서울에서 웹 디자이너로 일하던 때가 생각났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죄다 지긋지긋하던 시절이었다. 을주가 다니던 회사는 동영상 교육 콘텐츠를 만드는 업체였고 직원은 을주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었다. 회장인 노인은 거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회장의 아들이 사장 노릇을 하며 매일 직원 한 명을 구박했다. 사장은 둘희와 다른 사람들에겐 예의를 차리며 조심했지만, 회사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그 대리에겐 막말을 하며 외모 비하를 서슴지 않았다. 둘째 아이가 갑자기 아파 대리가 회사에 늦게 출근한다고 했을 땐 오전 내내 다른 직원들 앞에서 대리의 가정사를 늘어놓으며 험담했다. 사실, 그 사장 새끼가 비열하긴 했지만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대리는 지각이나 조퇴를 밥 먹듯 했고 사장의 말대로 늘 후줄근한 옷차림에 누가 봐도 식탐이 좀 있긴 했다. 탕비실에 있는 커피믹스나 화장지를 몰래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으며 실수하지 말아야 할 회계 업무에도 빈틈이 많았다. 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대리가 일부러 골탕을 먹일 땐 둘희는 대리가 욕을 먹어도 싼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가 결점이 없을까. 을주는 자신을 포함해 대리를 힐난하는 사장도 만만치 않게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직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하면 될 텐데, 사장은 회사 설립부터 그때까지 그 만년 대리와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을주는 회사를 나올 때 어쩌면 대리의 진짜 역할은 저렇게 사장의 욕을 감당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을주를 괴롭게 했던 건 대리를 구박하는 사장이 아니라 그 사장의 비위를 맞추며 소위 정치질하는 대리의 태도였다. 그리고 사장에게 세뇌라도 당한 듯 똑같이 그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을주 자신의 속마음. 언제나 을주를 견딜 수 없이 역겹게 하는 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졸렬함이었다.

“너희 할머니가 하도 자식들한테 욕을 해서 난 안 해.”

이모가 전자 담배에서 다 피운 스틱을 꺼내며 말했다.

“할머니가 무슨 욕 했는데?”

“이년아, 저년아, 말끝마다 그랬지.”

“그건 이모 이름이 일연이라서 그런 거 아냐?”

을주의 말에 이모가 표정으로 욕을 하듯 입술을 비틀었다. 을주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비질을 이어갔다. 역시나 욕은 그 자체보다 뉘앙스가 중요했다. 사장 ‘새끼’는 욕이지만, 오복이 내 ‘새끼’는 욕이 아닌 것처럼.

“나는 막 화가 나고 무서울 땐 애국가가 나오더라. 너도 해봐.”

이모가 벽에 기대어져 있던 또다른 빗자루를 손에 들며 말했다. 자루가 짧아 눈을 쓸려면 허리를 많이 구부려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릴 때 애국가를 다 외웠잖아. 1절부터 4절까지, 학교에서 그거 다 외우고 쓰는 사람 나밖에 없었어. 교장 선생님이 2학년 1반 정일연이가 6학년 언니 오빠들보다 낫다고 조회 시간에 마이크에 대고 칭찬했잖아.”

“애국가가 좋아?”

“마음이 편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것도 좋고, 나는 4절이 좋더라.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을주는 기다란 빗자루 꽁지에 턱을 괴고서 이모가 비질하는 모습을 봤다. 이모는 그렇게 진심을 바쳐 맹세하는 가사의 노래를 좋아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남자 로커가 천년이 지나도 자기 사랑은 안 변할 거라고 울부짖는 노래, 여자 가수가 청승맞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아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거라고 다짐하는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오르고, 손에 손잡고 벽을 뛰어넘자는 노래. 을주는 어릴 때부터 이모가 식당에 틀어놓은 그 가요들을 들으며 자랐다. 라디오에서 이모의 애창가요가 나오면 이모부가 재빨리 달려가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모는 언제 애국가 4절을 부르며 무서움을 견뎠을까. 화가 나는 것과 두려움이 이는 것은 다른 감정이지 않나? 아닌가? 비슷한가? 두려워서 화가 나는 건가, 아니면 화를 내고 난 다음 그 뒷일이 무서워 애써 분노를 삭이는 건가. 을주는 이모에게 다가가 이모의 키 작은 빗자루를 자기의 것과 바꿔주었다.

“야, 이거 살쾡이다.”

이모가 눈밭에 쪼그려앉으며 말했다. 네발짐승의 발자국이 식당 뒷길을 따라 딸기 하우스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을주가 이모 곁에 앉아 발자국을 들여다봤다.

“고양이 아냐?”

“삵이야.”

“어떻게 알아?”

“느낌이 그래. 싸해.”

싱겁다는 듯 을주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모 살쾡이 본 적 있어? 이모부는 한 번도 없다는데? 옥녀산에 너구리는 있어도 살쾡이는 이제 없대.”

“그 아저씨가 용띠라 그래. 나는 쥐띠잖아. 쥐띠라 보면 알아.”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을주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띠가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지. 용띠는 하늘 보면서 뜬구름만 잡고, 쥐띠는 바닥을 뛰면서 부지런하게 살잖아. 쥐가 살쾡이 밥이라 보면 딱 느낌이 와.”

문득 을주는 어릴 적 옥녀산에 살았던 무당 여자가 떠올랐다. 혹시 이모는 겉으로는 그 무당을 욕하면서 뒤로는 몰래 찾아갔던 거 아닐까?

“이모.”

을주가 낮은 목소리로 이모를 불렀다. 이모는 눈밭에 찍힌 천적의 발자국을 살피며 전자 담배에 또 스틱을 꽂았다.

“이모, 또 피워? 빈속에 왜 그래?”

“커피우유 마셨어.”

“그게 더 나빠.”

“옛날에 옥녀산에서 사람이 죽으면 삵이 와서 손가락이랑 코랑 다 뜯어먹었는데.”

이모는 손바닥을 크게 접었다 펼치며 발자국의 간격을 가늠했다. 어릴 때도 이모는 밭이나 덤불에 짐승의 똥 무더기가 있으면 나뭇가지로 살살 파헤치며 똥을 싼 주인공의 정체를 파악했다. 어린 을주를 불러 여기 새털 좀 보라고, 이건 잣을 까먹은 흔적이라고 자세히 알려주었다. 들쥐들이 하우스 근처의 나무를 쏠아놓으면 이모는 덫을 놓는 대신 동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며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했다.

“삵이 사람도 먹어?”

“먹지. 달지. 얼마나 달겠냐?”

“담배는 언제 끊을 건데. 하루에 두 개비 아냐?”

을주가 울컥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모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을주를 봤다.

“내년에 건강검진 받으면 끊을게. 살도 빼고. 근데 오복이 어딨어? 가서 오복이 좀 데려와.”

이모는 을주를 향해 방긋 웃더니, “오복아! 장군아! 우리 예삐 어딨니?” 하며 오복이의 미들 네임을 줄줄이 외쳤다.

 

*

 

을주는 트럭에서 내리며 옆에 세워진 승합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해변의 공용 주차장에 서 있던 검은 승합차였다. 유달리 차체가 높고 창마다 짙은 선팅지가 붙어 있어 을주는 한눈에 그 차를 알아봤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을까? 을주는 허리를 숙이며 차의 옆구리 쪽에 붙은 스티커를 살폈다. 전에는 무심코 넘겼던 스티커 속 그림이 범상치 않게 다가왔다.

  

을주는 트럭 문을 열고서 운전석에 벗어놓은 공구 벨트 주머니를 뒤졌다. 며칠 전 바닷가 조개무덤에서 오복이가 발견한 카드가 떠올랐다.

 

을주는 카드 속 그림을 승합차에 붙은 스티커와 비교했다. 확실히 닮은 데가 있었다.

“즈……히…… 지히?”

을주는 벌레처럼 생긴 괴이한 그림 아래 적힌 알파벳을 따라 읽었다. 그런데 왜 이 차가 여기 있을까? 을주는 필로티식 주차장 안을 둘러봤다. 겉보기에 언덕 위 삼층집은 적막할 정도로 고요했다. 흰색 중형차 한 대와 파란색 자전거 한 대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서 있었고 박쥐 날개처럼 시꺼먼 김시후의 바이크가 비딱한 각도로 세워져 있었다. 을주는 눈 녹은 흔적 없이 깨끗한 건물 바닥을 보며 혹시 자신에게 애국가를 부를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언덕 아래로 뛰어가 편의점에 있는 고모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비록 고모부의 눈을 피하려고 고모부가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 시간을 골라 이 언덕으로 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을주에겐 여러 가지 안전 대책이 있었다. 을주는 트럭의 조수석 문을 열고 오복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내려와. 가자, 오복아.”

을주의 말에도 오복이는 좌석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오전에 발바닥 피부염으로 동물병원에 다녀와서 그런지 오복이의 기분이 저기압이었다. 쉽게 발을 떼려 하지 않았다.

“같이 좀 가줘. 가서 인사하자, 응?”

을주는 세뱃돈을 받으려고 억지로 자식에게 절을 시키는 부모가 된 심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오복이가 곁에 있어야 을주도 마음이 놓였다. 을주에겐 오복이가 애국가 4절이었다. 게다가 오복이를 보면 그 여자가 자신을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 두 사람이 말문을 튼 것도 오복이를 보면서 오복이에 관해 말하면서였으니까.

“인사해, 안녕하세요.”

딸기 상자를 손에 들고 사무실로 들어선 을주는 다짜고짜 오복이를 부추기며 말했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오복이를 보자 멈칫하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웬 개야?”

김시후가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을주는 사무실 안을 빠르게 살폈다. 그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열한시에 면접 보러 오신 분이죠?”

나이든 남자가 을주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자신을 강준길이라고 소개한 뒤 무릎을 굽히며 오복이에게 말을 건넸다.

“이름이 뭐니?”

“오복이예요. 오오복.”

을주가 오복이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오……”

“성이 오고요, 이름이 오복.”

“아하.”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안 된다고 하시면 차디찬 주차장에 혼자 두고 올게요.”

을주가 말하자 강준길이란 남자가 소리 없이 웃으며 을주의 손에 든 리시줄을 살폈다. 혹여라도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우리 방송에 개 나와요?”

김시후가 말했다. 을주가 곧장 받아쳤다.

“우리 오복이 나와도 돼요?”

그때 안쪽의 흰색 문이 열리며 여자가 나타났다. 을주는 자기도 모르게 오복이의 리시줄을 꽉 붙들었다. 여자는 피로하고 지쳐 보였다. 언제나 저런 표정이었다. 저 눈, 슬픔을 뚝뚝 흘리고 다니는 까맣고 푹 젖은 눈빛. 여자가 다가오자 오복이가 앞발로 몇 번 제자리걸음을 걷더니 여자 쪽으로 움직였다. 오복이는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잘한다, 내 새끼!

오복이가 콧등을 위로 올리며 알은척을 하자 여자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개를 내려다봤다. 섣불리 개를 만지지 않는 태도는 여전했다.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전보다 야윈 듯했다. 을주는 가슴이 저릿한 동시에 자신을 모른 척하는 여자의 팔을 찰싹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서운함보다 크게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을주는 여자를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다.

“이거 종이 뭐예요? 이거 유명한 건데.”

“도베르만 같네요.”

김시후가 묻자 강준길이 말했다. 을주는 오복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등을 쓰다듬었다.

“우리 오복이도 나오면 좋지 않을까요? 큰 개랑 젊은 여자, 사람들이 싫어하던데.”

을주는 자기의 왼손이 잘 보이도록 일부러 오복이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예상대로 김시후와 강준길의 시선이 을주의 왼손에 꽂혔다. 을주는 옅은 수치심을 느꼈지만, 상관없었다. 수치심이 든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그 시선을 이용해 원하는 걸 얻으려는 을주 자신의 계획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을주에겐 다른 어떤 감정보다 여자를 향한 호기심이 중요했다. 우선 을주는 여자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그 정도로 결론지었다.

 


* 이 구절은 미우라 도시히코의 『허구세계의 존재론』(박철은 옮김, 그린비, 2013)의 341쪽에 나오는 문장을 변형한 것이다.